안녕!
지 석 동
"안녕"은 인사말이다. 다음 국어사전에 안녕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를
"편한 사이에서, 서로 만나거나 헤어질 때 정답게 하는 인사말"이라고 해 놨다.
이 말은 허물없이 지내는 연인이나 친구 또는 가족·친지와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질 때 차려야 할 격식을 생략하고 스스럼없이 쓰는 인사말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자랄 때 쓰던 아침인사는 ‘잘 주무셨습니까?’‘잘 잤어.’‘잘 잤나?’를 나이와 처지에 따라 구별해서 썼고. 낮에는 ‘진지 잡수셨어요’‘밥 먹었어.’‘밥 먹었나?’ 밤 인사는 ‘잘 주무세요’‘잘 자’‘잘 자게’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렇게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 쓰던 말이, 언제부턴가 간편하고 상냥한 ‘안녕’이라는 말로 지금은 남녀노소가 다 불편 없이 쓰고 있다.
이는 끔찍했던 3년의 전쟁과 빨리빨리 소리를 입에 달고 산, 실적위주의 개발시대를 거쳐오면서 인사말도 자연스레 거추장스러운 격식을 떼어버리고 간단명료한 의미로 쓰게 된 동기가 아닐까 싶다.
말이 간편해지면서 문자표기도 간략해져 일부에서는 빨리 암호화되어갔다. 따라서 당사자들만이 아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 예가 선박국에서 흔히 쓰던 전보내용이다.
"무사조업중"이라는 전보가 띄어쓰기 무시하고 가면 받는 가족들은, 우리 남편이 또는 아들이 아무 탈 없이 돈 벌고 있다는 인사를 받았다고 좋아했다. 가족에게 보내는 전보에는 "잘 있음!"이나 "궁금하다."와 같은 전보도 많이 오갔고, 아기 날 때가 되어 아들 났다 소리를 기다리는 선원한테 이런 전보가 왔다.
"아빠 미안"
이 단 넉 자 전문을 받아들고 혼절하는 3대 독자 아빠도 있었다.
전문이 이렇게 짧았던 이유는 복잡한 전파 혼신 가운데서 전문을 보내고 받기가 수월하지 않아 의도적으로 단문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명절이나 경조사에 보내는 전문도 두 글자로 된 부호가 있어 해당하는 부호만 타전하면 무선국에서 합당한 문구로 바꾼 전보를 멋진 봉투에 넣어 배달하는 제도가 있어 편리한 인사법으로 썼고 지금도 쓰고 있는 줄로 안다.
다시 안녕이라는 말로 돌아가자. 이별할 때의 ‘안녕’은 꼬리가 길다. 부산 남항 일자 섬에서 먼 뱃길을 떠날 때.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아내가 손을 흔들던 작별인사는 살아와야 한다는 부르짖음이었고 건강해서 오라는 눈시울 빨간 안녕이었다. 가는 사람도 꼭 살아온다는 약속이었고 기다려 달라는 목맴이었다. 공항에서도 그랬다. 떨어지기 싫은 마음을 챙겨 들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면서 손을 흔드는 것도 마찬가지 의미였다. 가는 발 잡지 못하고 저만큼 떨어져 돌아서는 눈 시림에는 무사를 비는 아내의 안녕히 와, 같이 살자고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 비비며 울던 아이들의 안녕히도 있었다.
안녕은 먼바다에 가서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하루가 가면 만날 날이 가까워진 것이 좋아서 날짜에 동그라미를 쳐 지우곤 했고, 야식이 끝난 밤 1시 반이 지나 누우며
"정은 엄마 잘 자!"
외롭고 힘든 바다의 일과가 무사히 끝났다고 보고 겸 그리운 마음을 띄웠다.
"정은 정임 이도 안녕! 꿈에서 만나자"
보고 싶은 마음에 머리맡에 두고 보던 사진첩을 넘기며 잠을 청하다 눈만 아파, 껐던 기계를 다시 켜고 아내와 아이들에 전보를 보냈다.
"안 올 것 같아 아빠가 간다."
우리가 주고받는 마음 때문에 전보 배달부 아저씨가 잠 못 잔다는 말을 추신으로 써보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안녕은 내가 귀국할 때까지 밤낮없이 오갔다. 밤에 전보가 많이 왔던 것은 서아프리카, 모로코, 모리타니, 케냐, 기니, 시에라 네온 해안의 시차가 8-9시간이나 나고 현지 밤이 교신하기 좋아서였다.
부산에 입항하거나 김포공항으로 귀국할 때는 목소리를 생략한 안녕을 했다. 부산에 입항하면 아이를 안은 아내가 통통선을 타고 들어오며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었다. 살아와서 고맙고 건강해서 고맙다고. 나도 얼굴을 있는 대로 늘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살아왔다고. 기다려주어 고맙다고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귀뿌리에 뜨거운 마음을 실었다.
둘째 아이는 일 년을 훨씬 넘겨서 오는 바닷바람에 탄 얼굴을 낯가림으로 안녕!. 제 엄마 품으로 기어드는 인사는 안아보고 싶었던 팔에 힘을 빼놔 서글펐다. 큰아이도 처음에는 덥석 안겨오지를 않아 마음 열기를 기다렸다 아얏소리가 나게 안아주었다.
조업하다 만선이 되면 하역을 하러 입항을 했고 중간보급을 받거나 기관고장이나 급한 환자 발생 때에도 가까운 항구로 입항했었다. 지금이야 휴대전화로 해결되지만, 그때는 국제전화를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시대라 마음 안고 달려가는 게 제일 큰 즐거움이었다. 뉴질랜드 해역에서 조업할 때는 같은 시간대라 저녁 시간에 전화를 청하면 시내전화같이 감도가 좋아 안녕 소리를 하기 좋았다. 대개 동화시간은 돈을 생각해서 5분 정도 신청했다. 그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던지. 말 몇 마디 안 한 것 같은데 교환 아가씨가 통화를 더 하겠느냐고 물어 안녕 소리도 제대로 못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의 기분은 아쉬움을 넘어 슬펐다. 어쩌다 아내와 통화를 못한 날의 그 섭섭함이란.
아내를 만나려 오백 리 길을 달려가 강 건너는 마지막 배를 놓치고 목 터지게 사공을 부르던 안타까운 심정이랄까. 통화를 못 한 날은 그 심정을 삭히기 위해 눈 파란 노랑머리 아가씨들이 따라 주는 헤픈 웃음을 씹으며 마음 달래었다.
인사는 하는 장소와 기분에 따라 목소리의 고저장단이 틀린다. 반갑거나 즐거운 때 만나면 안녕 소리가 가볍고 경쾌해 짧게 끊어지고. 헤어질 때는 조금 긴소리가 된다. 기분이 흐리거나 슬플 때는 만날 때도 ‘안녀엉-’길게 늘어진다. 따라서 밝고 짧은 안녕을 많이 한 사람은 즐겁게 사는 사람이다. 2010.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