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1905~1938)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평북 용천 출생. 일본, 만주, 상하이, 베이징, 광둥, 옌안 등을 누비며 중국 공산혁명을 통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신흥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한 뒤 상하이로 가 이동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1925년 중국대혁명에 참가하였다. 1930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37년 중국의 옌안에서 님 웨일즈와 만나게 되었고 님 웨일즈는 이 만남의 성과를 담아 1941년 미국 뉴욕에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를 출간했다. 1938년 중국공산당 사회부장 캉성에 의해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으나 1983년 중국 공산당은 김산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고 명예와 당원 자격을 회복시키는 복권을 결의하였다.
이동휘(李東輝. ?~1928)
함경도 단천 출신. 구한국군 무관학교 졸업.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 서북학우회, 등을 통하여 계몽운동에 종사. 1907년 조선군대 해산에 즈음하여 강화 진위대의 의병투쟁에 참가.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문창범 등과 함께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고였고,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 사회당을 조직. 1922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나 후일 이승만과 대립. 1921년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 1922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견 대립과 이른바 60만 원 활동자금 사용문제로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사임. 임정을 떠나 시베리아로 가서 항일운동을 계속. 이르크추크파 고려공산당과의 당파 분열에 맞서 화해를 시도했으나 실패. 1924년부터 그의 명성이 떨어지기 시작.
박진 - 시베리아에서 온 선구자 광둥에서 온 가장 우수한 조선인 혁명가의 전형적인 인물은 박진(朴鎭) 부부와 그의 두 동생이었다. 이 삼형제는 모두 새까만 눈과 길고 짙은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박진은 이야기 할 때면 눈을 깜박였는데, 그것이 상대방에게 진실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북방인답게 모두 풍채가 좋고 몸이 떡 벌어졌다. 그들은 동토지대에서 불어오는 시베리아 바람처럼 위력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를 실내에 가득 뿌렸다.
나는 그를 친형처럼 좋아했고, 그도 나에게 전투와 실제활동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1921년에 조선소비에트위원회 밑에 시베리아 소비에트의 일부로서 조선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박진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의 한 소비에트 지구 위원으로 뽑혔다. 어느 날, 그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있을 때 한 아가씨가 얼음 위에 넘어졌다. 박진은 이 처녀를 일으켜주었다. 그 순간까지 박진은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날 회의에서는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정말 고마워요." 하고 인사한 그 아가씨에게 계속 눈길이 갔다. 얼음판을 지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일부러 그 아가씨와 나란히 걸으면서 자기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무뚝뚝하게 물어보았다. 그 아가씨는 약간 놀랐지만, 이내 대답하였다. "네,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조그마한 눈 속에서의 로맨스는 이틀 후에 결혼이란 열매를 맺었다. 이 부부는 서로 지극히 헌신적이었으며, 박진은 죽을 때까지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박진의 부인은 1921년에서 1925년까지 적군(赤軍)의 유격대운동에 참가하기도 하고, 시베리아 지방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녀의 부친은 조선 북부지방에서 활동을 했다. 그는 '복면산적'이라 불렸는데,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자기가 세운 학교를 유지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30번이나 부잣집을 털었다. 1927년, 그의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그는 첫아들을 얻게 되리라 생각하고 매우 기뻐하였다. 코뮌 당시 박진은 링난에서 용감했던 '비운의 대대'를 지휘하다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임신중임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의 자기 농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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