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목사님 5주기 추모예배를 9월 9일 우리교회에서 드렸습니다.
사진은 사진자료실에 올렸구요. 이곳엔 김병태목사님의 추모예배 설교말씀을 기록으로 남겨둡니다.
남은 자의 사명(사 6:1-13 김동완 목사 추모예배)
웃시야는 8세기에 남쪽의 유다 왕국을 통치한 왕이다. 역대기나 이사야서에는 웃시야라고 나와 있지만, 열왕기서에는 아자리야로 나와 있다. 이 분은 약 50년 정도 집권하였다. 사실 다윗과 솔로몬이 죽고 남북이 분단된 이후에 이스라엘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웃시야가 왕으로 있는 동안 남왕조 유다는 태평성대를 향유하였고 새로운 활기로 넘쳐나게 되었다.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파, 육축이 기름지게 자라고 농토는 살쪘으며 농민은 풍요를 노래하였다. 그밖에도 건축 사업을 벌였으며 외부적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요단 건너편 남쪽의 에돔을 격파하였고, 사해로 이어지는 아카바만의 에시온 게벨 항구를 점령하면서 해상 교역의 통로를 확보하였다. 블레셋과 암몬, 그리고 멀리 아라비아까지도 그의 영향권을 확대하였다. 그 모든 공은 웃시야에게 있었다.
오늘 사랑하는 김동완 목사님 추모예배 설교를 하는데, 왜 갑자기 별로 관계도 없어 보이는 웃시야 얘기를 할까? 사실 지난 주간에 설교 부탁을 받으면서 사양을 하였다. 제 주제가 김 목사님의 생애와 사역을 정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인들끼리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시고, 또 목사가 계속 설교 사양하는 것도 그래서 수락을 하고 말았는데, 마침 며칠 전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자주 읽은 말씀이지만 김동완 목사님을 염두에 두고 다시 읽어보니 새로운 은혜가 되었기에 오늘 잠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김동완 목사님은 부지런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었다. 웃시야 왕의 성장주의가 김 목사님의 철학과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땅 파고 망대 쌓고 항구를 개척하면서 일했던 웃시야는 분명히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부지런한 사람은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나는 고 김동완 목사님을 부지런한 분으로, 또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 즐거움이 컸던 분으로 기억한다. 새로운 것이라면 유행가마저도 맨 먼저 배워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다.
오늘 이사야 본문을 보면, 열정적으로 살면서 유다를 이끌었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셨다. 높이 들린 보좌에 충만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얼굴과 발을 가리고 날개로 날면서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는 스랍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나타나시는데, 문지방이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였다. 한 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등장이다.
모든 사람의 죽음은 남은 자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하늘의 뜻을 생각하게 한다. 웃시아의 경우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성경본문이 웃시야의 죽음과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문자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웃시야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의 충만한 모습이 성전에 나타났고, 그 가운데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뵈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웃시야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다. 성경은 굳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이라는 말을 적어 놓고 있다. 이사야는 그렇게 웃시야 왕의 죽음과 함께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것을 발견하고,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깊은 깨달음도 생겨났다.
김동완 목사님 가신 지 5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종종 김동완 목사님과 함께 했던 짧은 세월을 떠올린다. 물론 가족들과는 좀 다를 수 있는, 신앙 안에서의 추억이다.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겨 주셨고 하나님을 믿는 자의 인생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말씀하셨다. 신앙을 고백하는 내 입술이 부정한 것을 종종 발견한다. 자신에게 좀 더 정직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일 수 있었다. 그런 일을 김 목사님과 좀 더 나눌 수 있었는데, 때로 목사님을 외롭게 해드린 것이 죄송하다.
그러나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등장한 것은, 이제 웃시야 왕의 능력을 그리워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능력을 경험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용서의 힘이다. 하나님은 숯불을 이사야의 입에 대시어 그의 악과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다. 돌아가신 김동완 목사님 그리고 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허물을 발견하지만, 다시 오늘의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댈 수 있다. 숯불로 우리 입술과 성품과 모든 행위를 가려 주시기를 빈다.
주님의 용서의 은총을 체험하고 다시 살아난 이사야는, 이제 일꾼을 찾는 주님의 음성에 자신이 가겠다고 대답한다. 웃시야보다 더 큰 일꾼을 세우시는 장면이다. 김 목사님 가신 지 벌써 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유족들에게는 크나큰 아픔이요 우리 모두에게도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사명자를 일으키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천하의 김동완 목사님도 불러 가시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추모예배는,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9절을 보면 이사야가 그렇게 새로운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 이사야가 받은 사명은 좀 황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이 황폐해지고 사람이 남지 않을 때까지 죄인이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것,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것,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사야가 받은 사명인 것이다.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절망하게 하는 것이 이사야의 사명인 것이다.
이사야가 받은 사명은 분명 핍박을 받고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다. 오늘날 말로 하면, 아직도 여전한 이 나라의 정치경제적 불평등이나 분단의 죄악을 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일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은 주요하게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말로 하면 교회의 허물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말 1:10을 보면,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형편을 그렇게 잘 지적해 주는 촌철살인의 말씀이 없다.
이사야의 선포를 오늘 말로 하면, 교회가 철저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야만 다시 새로운 교회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교회 죽으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목사는 사람들이 듣기 불편해 하는 그런 메시지도 기분 나쁘지 않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다. 말이 쉽지 그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러면서 고 김동완 목사님을 다시 그리워한다. 아마 김 목사님이라면 웃으면서 ‘함께 죽자’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세상에 불편한 존재가 되면서도 즐겁게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에서 오는 것일 게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한다면, 오늘 고난 속에서도 진리를 지켜낼 수 있고, 그러면서도 느긋하게 낙관하며 즐길 수 있다. 이사야 말씀은, 하나님이 마침내 거룩한 씨를 남겨서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심판 중에도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와 정결해질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그 소수가 일어나서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것이라고 하는 믿음의 역사를 믿는다.
오늘 김동완 목사님 추모예배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고인을 그리워한다.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던 분, 늘 신나게 살던 분, 의를 위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던 분, 평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던 분, 어떤 장애물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를 구가하던 분, 오직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여 살았던 분으로 고인을 추모한다. 오늘 말씀에 비춰보자면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다. “야! 그루터기밖에 못 남겨줘서 미안해. 다시 일어나 가보자구!”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