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도록 굶주리고 못살던 시절, 우리 몸 속에는 '이' 라는 흡혈곤충이 한두 마리쯤은 다 있었다.
물론 아주 생활에 여유가 있어 자주 목욕도 하고, 옷을 갈아입는 사람들이야 예외지만 말이다. 그러
나 언제부턴가 그렇게 많던 '이'가 자취를 감추었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의복이 천연섬유에서 화학섬유로 대체되면서 없어졌다고도 하고, 세탁 할 때 독한 세제를 많
이 쓰다보니 '이' 뿐만 아니라 '서캐'까지 몰살을 하여 없어졌다고도 하니 정확히 어느 얘기가 맞는지
는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요사이도 시골 어린이가 아닌 도시 중산층 가정의 여자 애들 머리에
'이'가 있다는 사실이고 보면 말문이 막히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리라.
60년대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른부터 어린 동생들에 이르기까지 저녁이면 경쟁이라도 하듯
화롯가에서 '이' 사냥을 안 하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대충 잡는다. 그러다 차례가 오면 화롯불
에 옷을 쬐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옷깃에 숨어있던 '이'들은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기여 나와 발광을
한다. 머리를 맞대고 지켜보던 가족들은 큰놈이 설설 기여 나올 때마다 괴성을 질러대며 잽싸게 잡아
서 화롯불에 넣곤 했다. '이' 타는 냄새와 화롯불에 옷이 눌으면서 나는 냄새가 어울려져 이상야릇한
냄새가 방안 가득히 코를 찌르곤 했으니, 이웃에 사는 어른들이 마실을 오시더라도 이 시절엔 아무런
흉이 되질 않았다.
'흡이목'이라고도 하는 '이'는 흡혈 곤충으로 사람이나 가축 등 포유류에 기생하여 피해를 주며 일
부는 전염병을 매개하기도 한다. 빈민굴이나 군대, 교도소 등 사람이 많은 곳에 만연되어 발진티푸스,
회귀열 등 질병을 일으킨다. 발칸전쟁이나 크림전쟁, 일차대전 때에는 만연하여 많은 사망자를 내기도
하였다. 머리는 작고 원뿔형으로 앞 끝에 흡수하는데 적합한 입이 있다. 그 아래 면과 양쪽에 치돌기
가 있어 흡혈할 때 사람 몸에 잘 붙도록 되어있으며, 눈은 퇴화되었거나 없으며, 더듬이는 3-5 마디로
되어있다. 가슴부위는 좁고 사다리꼴이며, 기문(氣門)이 있다. 색깔은 담황색 또는 농갈색을 띠며, 서캐
는 의복의 주름이나 접힌 곳의 섬유나, 불결한 머리털에 산란한다. 일주일이면 부화하고, 3주 정도면
성충이 된단다.
성충 한 마리가 300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고 하니, 잡아도잡아도 끝이 없는 것이 '이' 사냥이었다.
그나마 옷 속에 있으면 가려울 망정 덜 창피하겠으나, 기차나, 전차를 타고 가다보면 실내가 더워서
그런지 '이'라는 놈이 옷 밖으로 나와 설설 기어 다니니, '이'로 인하여 겪었던 웃지 못할 얘기가 한두
마디씩은 다 있으리라.
시골에서 가을걷이가 끝나고 초겨울이 오면, 농사를 짓는 형들은 가끔 물고기를 잡아 천렵을 하곤
했다. 그런 날이면 어린 우리들은 형들을 따라 고기 잡으러 가곤 했다. 고기를 잡아오는 순서가 큰 개
울부터 잡기 시작해서 작은 개울을 거쳐 빨래터가 있는 샘터로 올라오는 도랑에서 미꾸리를 잡으면
끝이 난다. 인근 4개 부락 아낙들이 모여 빨래하는 샘터는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여름이면 차갑고 겨
울이면 미적지근한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추운 겨울이면 이곳에 모여 얘기꽃을 피우며 빨래를 하는
데, 그때 때물은 봇도랑을 타고 흘러 작은 개울로 들어간다. 그래서 이 도랑엔 미꾸리가 많을 뿐만 아
니라 씨알이 굵직 굵지 하다. 대충 도랑을 훑어도 잠깐이면 한 사발은 잡는다.
그날도 고기를 잡고 집에 돌아 왔을 때는 고기가 서너 사발은 족히 넘었다. 큰 대야에 쏟아놓고, 비
늘이 있는 고기는 배를 따고, 미꾸리는 몸을 훑어내어 똥을 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미꾸리 한
마리가 대야에서 튀어 나가 맨땅에서 기고있었다. 그때 한 형이 장난 삼아 삽으로 미꾸리를 내려찍었
다. 허리가 잘린 미꾸리에서는 시커먼 '이'가 꾸역꾸역 나왔고, 그 후로 동네 사람들은 봇도랑의 미꾸
리는 절대 잡아먹지 않았다.
서울까지 기차로 통근 할 때의 일이다. 기관사가 직업이니 객실의 어느 곳이 제일 따듯하고 바람이
적게 들어오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새벽 이였다. 그날도 기차에 타자마자
제일 따듯한 자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어떤 미친 여자가 앉아있었다. 조금은 꺼림직 했으
나, 나는 그 여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앉아 잠이 들었다. 금곡리를 지났을까, 차내가 통
근, 통학생으로 소란스러워 잠을 깼을 때의 일이다. 이상하게 몸의 이곳 저곳이 가려웠다. 난 옆 사람
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해서 슬쩍 슬쩍 긁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릎을 내려다보니 시커먼 '이'들이
줄을 서서 내 몸으로 기어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미친 여자의 몸에 있던 '이'들이 따듯한 의자
에 기여 나왔다가 내 몸으로 집단 이주를 하는 것 같았다. 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온몸이 근질근
질하고, 스믈 스믈하니 소름이 끼친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그러나 그 시절엔 젊음이 있었고 꿈과 희망이 있었다. 과외수업도, 치맛바
람도 없었다. 부동산 투기도 없었다. 환경 오염도 없었다. 구조조정이 무엇인지 퇴출이 무엇인지도 몰
랐다. '스트레스'가 무엇인지, 고혈압이 어떤 병인지도 몰랐다. 체중을 줄이려고 운동이나, '사우나'를
할 필요가 없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녔고 먼 거리는 기차나, 버스면 족했다. 그저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저녁이면 호롱불 밑에 가족이 모여 앉아 화롯불에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오
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웠다. 얼음이 서걱서걱 씹히는 동치미를 먹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그 시절 그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