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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 마산불교대학 교리반 특강.
요신하이 요심휴 리요 요득심혜 신불수 하리라
약야신심 구요요 이면 신선하필 개봉후 로다
몸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과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비하면 어떨까?
몸을 어찌하면 마음이 쉴까
마음을 마음대로 하게 하면 몸은 걱정없네
만약 몸도 마음도 마음대로 하게 되면
신선에게 거듭 작위를 줄 필요가 있으리요.
문수보살이 7불의 스승이요 석가 여래의 스승이라고 한뜻을알아야 합니다.
문수는 지혜이니 자성의 지혜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체 중생의 스스로 볼 줄 아는 지혜성품이 곧 문수보살인 것입니다. 전등록 제불통 게송에 이르기를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뜻을 맑힐지니 이것이 제불의 가르침이니라”했으니 구경에 선악을 초월하여 마음이 여여해지면 곧 그대로 자성과 계합해 부처를 이루게 되며 그 깨친 바를 행하는 지혜가 문수보살행이라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형상을 나투신 것은 알기 어려운 하근기들을 위하여 방편을 보이신 것이니
이 방편문을 통하되 마음을 반조해 증득하지 못하면 겁을 다하도록 읽고 전하여도 불법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는 본질적으로는 닦음에 있지 않는 것이며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며, 부처라 중생이라는 소견을 짓지 않으며, 평상심이 곧 그것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의 계급을 밟지 말고 다른 이의 깨친 것을 따르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6조 단경에 “진여 자성(불성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6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지만, 만상에 물들지 아니하여 진성이 항상 자재하니라.” 한 말씀을 계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전한다 할지라도 자성의 성품이야 변전할 리 없으니 법도의 흥하고 쇠함은 범부의 알음알이 때문인 것입니다.
본래면목인 참마음(불성)은 말로써 이를 수 없으나 어쩔 수 없이 이름하기를 반야경에서는 보리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법계, 금강경에서는 여래, 금광명경에서는 여여, 유마경에서는 법신, 기신론에서는 진여, 열반경에서는 불성, 원각경에서는 종지, 승만경에서는 여래장이라 칭하며, 또 조사문에서는 자기, 묘심, 주인공, 몰현금(줄 없는 거문고), 무진등, 심인, 심원등으로 칭하는 것으로 그 본체는 인과를 뛰어나고 고금을 꿰뚫고 모든 대대가 없어서 태허공과 같이 일체처에 두루한 것으로, 이것이 일체 중생의 본래 있는 불성이며 일체 온우주세계의 생명의 근원인 것이니, 이로부터 태중에서는 신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촉하고(眼耳鼻舌身) 말하고 움직이고 활동하니 일체묘용의 바탕體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체와 작용은 물과 파도와 같아 물은 파도를 여의지 못하고 파도는 물을 여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참마음은 범부나 성인에 있어 똑같이 두루 구족해 있고 다르지 않아, 다만 범부는 번뇌 망상의 무명에 덮혀 있어 참마음이 현전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금강이 흙 속에 묻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체에 두루하여 처처가 보살의 길이요, 두두 물물이 공덕림이며, 백초가 부처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따라서 분별이나 사량으로 알지 못하며 사랑도 미움도 취하고 버릴 것이 없어 절대 평등심이며 평상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상무심을 증득하면 이 몸 껍데기를 버릴 때가 되어도 업에 매하지 않으며 비록 중음신이 되어도 갈 곳을 자재로이 하여 뜻대로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명선사의 제자 진상좌가 어느 선방에 방부를 드리러 갔다가 선객과 선문답을 하다가 막혀 돌아오자 자명선사에게 꾸지람을 듣고 “일대사를 해결하려는 마음뿐- 답답합니다”하자
“수도를 하는데 불법의 긴요한 요점(불법대의)을 어디에 두고 찾고 있는가?” 하니
“운무생령상 하면 월유락파심 하리라.” 즉 구름이 고개위에 생기지 않으면 달이 파도 가운데 비취리라”하자 “네가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이따위 소견을 짓느냐?” 힐난하니
“스님께서 대자비로써 저의 미혹함을 깨우쳐 주옵소서” 눈물로 간청하자 “내가 너에게 묻듯 나에게 물으라”하니 “어떤 것이 불법의 적적대의 이옵니까?”하자 “구름이 영상에 나지 않으니(없으면) 달이 파도 가운데 비취리라.” 하는 말에서 확철대오 하였다 합니다.
본래 청정한 명심묘정이 이 달처럼 하늘에 구름이 본래 없어 밝은 마음달이 항상 밝게 드러나 비취나, 구름이 가리면 비취지 못하는 것 처럼 중생의 밝은 불성인 마음도 집착과ㅣ 탐욕심으로 삼독과 오욕의 번뇌구름이 가려 제대로 비취지 못하다가 구름이 걷혀야 밝게 비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명선사의 말씀은 구름이 영상에 본래 생기지 않은지라, 달이 항상 물에 밝게 비취고 있다는 것으로 번뇌가 본래 공함을 요달하면 가릴 것이 본래 없어, 일체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그것이 허환한 것이며 공한 것임을 깨달으면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인 것을 요달한 것입니다.
진상좌가 처음 진과 망을 가려 자기는 중생이므로 번뇌구름이 있어 미를 거두어야 깨달음을 구한다고 생각하는 소견을 지었으니 깨달음과는 멀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병통이므로 이런 소견으로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상좌는 번뇌구름을 없애야 마음 달이 드러난다는 소견이며,
자명스님은 본래 번뇌가 공적해 없음으로 항상 마음 달이 비추고 있다는 지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80세에 득남을 하니 내 아들이 아니라는 소견과
80세에 득남을 했어도 내 아들이 아닌가? 는 다른 것입니다.
지혜와 삿된 소견의 차이는 이와 같아 번뇌구름이 없어야 마음달이 밝게 비춘다는 소견과 번뇌구름이 허환하여 본래 없이 공적한 것이므로 마음 달은 항상 밝게 비춘다는 것을 깨달은 지견이라는 것입니다.
미를 가지고 오(깨달음)를 구하지 말며, 망을 가지고 진을 구하지 말며, 깨달음을 구하거나 기다리지 말고 마음 그대로가 진공묘유한 불성임를 믿고 꾸준히 불퇴정진하노라면 시절인연이 닿으면 법문을 듣거나 어떤 기연이 되면 {졸탁)으로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식은 후래납자(학인)를 가르침에 자애롭지만 악랄하다할 무서운 수단을 써서 통방겸추 (통방--방망이로 아프게 무섭게 때림. 겸추-사나운 말, 소를 자갈을 물려 통제)하게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선지식의 당굼질을 당해야 깨달음(자애, 통방겸추)을 성취 할 수 있는 것임을 반드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석가세존이 도리천을 떠나기 전에 모든 중생을 제도해 마쳤다” 함은 곧 모든 중생이 부처이기 때문이건만 미혹하고 어리석음에 쌓여 범부를 면치 못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중생이 어리석어서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고 어두움(무명)만 더하니, 이를 깨치지 위해서 방편을 짓되, 타력을 빌려 기도하거나 염불을 하고, 자력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염불이 타력이라 하나 알고 보면 바르게만 닦느다면 이 또한 자력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경에는 자기 부처에 귀의하기 때문인 것입니다.본래 묶인것이 없으니 풀어야 할것도 없으나 무명에 쌓인 중생의 삶은 또한 이 현상이기에 용맹스런 정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정진이 없는 곳에 해탈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대 자유를 얻고 생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정진하고 또 정진함으로써만이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고, 삼계를 뛰어넘어 대자재 대해탈 대열반을 얻는 것이라 옛부처와 옛조사들이 모두 이러한 수행과정을 거쳐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난 것이 확실한 이상, 우리도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직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으로 부단한 용맹정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혼미에 헤매이지 말고 밝고 빠르고 바른 길을 찾아 천길 벼랑 끝에까지 이르러 한발 더 내디뎌 더 갈곳없는 곳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게송 하나를 지었으니 들어보도록-
흰 구름은 동으로 떠가고 계곡물은 서해로 흐르는데
청봉이 맑은 봉우리에 솟아 무문인을 부촉하고자 하노라.
그래서 그 길을 여기 혜암정사에서 청봉이란 산승이 세속에 출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고 지시하고 열어 보이고 있으니 의지하고 지도함을 따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불자 여러분은 오늘도 욕망과 쾌락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고, 은혜와 가피를 구하고 있으나 유류의 복은 한계가 있는 것이건만, 여러분은 이생도 이렇게 살고 내생도 이렇게 살겠음니까? 또한 내생이 이생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약도 보장도 없는데, 자칫 잘못하면 악업만 더하여 지옥, 아귀, 축생으로 태어나게 될 수도 있건만 이렇게 미련하게 꾸물거리고 있겠습니까?
이 몸 인간으로 받아 태어나기도 그토록 어렵건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바쁜 이때 어찌 허송세월 방일할 수 있겠습니까? 서둘러 화두를 간택받아 닦고 닦아서 생사의 무서운 삼계화택의 윤회를 벗어나도록 초발심의 의지로 다시 다구쳐 발심하고 굳은 신심과 비장한 각오로 시급히 자신을 구제하여 영원히 사는 대자유를 얻어야 할 것을 당부합니다.
진정한 결제는 화두 들고 공부하는 순간이며, 참 해제는 활짤 깨닫는 때인 것입니다.
조금도 해태하지 말고 확철대오할 때까지 늦추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 하도록 합시다.
공안 하나를 내겠음-
어느 객승이 주지실에 들려 인사를 한 뒤 벽을 쳐다보니 액자에 ‘語에 할!하고 黙에 할!하고 動에 할!하고 靜에 할!이라고 씌여있는 것을 보고 “저 할!은 어떻게 하는가?”하니
주지가 대답을 못했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그 할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말에 쫒으면 밖으로 찾고, 어리석은 개가 돌을 던지면 흙덩이를 쫒아가 물고, 달 아닌 손가락이나 보게 되는 것을 한로축괴 즉 어리석은 개꼴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한소식을 깨달으면 불조의 안목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화두 하나를 선지식으로부터 간택받아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을하나 끊임없이 의심하노라면, 몰록 깨달을 때가 오는 것임-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게 되는 것임-
깨달음이란 기한이 없고 지극한 마음에 따라서 화두 의정이 순일하다 보면 별을 보고도 깨달을 수도, 달을, 소우는 소리에도, 닭우는 소리, 종소리, 꽃피는 것을보고, 기와장 깨지는 소리에도 기연이 닿으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도를 잘못알고 가르치면 지옥가기를 화살같이 가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를 깨달아 근원에 사무쳐 진리를 체득하면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당부합니다.
70여년전 지리산에 있는 천운사 삼일암 선원에서 겪은 은사 혜암선사님의 경험담 하나를 소개 하겠습니다.
삼일암에서 박성월 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전국에서 공부 잘하는 선객 수십명이 결제를 시작하려는 때에 천은사 큰절 주지인 70세 호은스님이 중노릇 수십년에 강원, 염불당, 기도처는 다녔으나 참선하는 곳은 다니지 않았는데
결재날 삼일암에 와 “소승도 큰 절에서 오르내리며 다른 스님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하자 입승스님이 “한철 양식을 미리 내어도 방부를 받을 수 없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 마시오. 그따위 소리는 하지도 마시오” 하고 호통을 쳤으나 굽히지 않고 사정을 한 그 사실을 안 조실스님께서“대중에게 방해가 되겠지만 받아주어야 한다. 그 노장의 뜻을 아무도 막을 수 없느니라.” 하시고 그 노장에게 “이왕이면 아주 삼일암에 올라와서 공부하면 좋지 않겠소?”하시니, 그답이 가관이라“돈 빌려주고 쌀 빌려준 문서들 지켜야 하고 더구나 마누라 궁둥이를 떠날 수 없습니다.” 하였다니 이 말에 모두들 신심이 뚝 떨어졌으나 그러나 조실의 명령이니 불평을 할 수도 없는 처지라 받아줬는데 그후 그 노장은 한낮에 오기도, 추운 새벽에 수염에 고드름을 달고 오기도 하고, 공부는 깜깜하고 졸기는 일수이니,
대중들은 “원숭이도 참선 흉내를 내고 천상에 태어났다더니 저런 자도 인연이 있을까?”하고 비웃었답니다.
마침내 반 살림이 끝난 어느날 조실이 법문을 마치고 법상에서 내려와 차를 마시고 있을 때,
혜암 스님이 여쭙기를 “어떤 젊은 수좌가 혜월스님께 묻기를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데 그것은 무근 도리입니까?’ 하니 혜월 스님께서 ‘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느냐?’했는데 혜월 스님이 잘한 답입니까?”하자 성월 조실께서 “그 늙은이가 그래 가지고 어떻게 학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단 말인가”하므로 혜암스은, 본의 아니게 혜월 스님께 방망이만 한 짐을 안겨드린 셈이 되어 “그럼 조실 스님이라면 그때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하니 조실이 “그 젊은 수좌가 혜월 스님에게 묻듯이 똑같이 그대가 내게 물으라.”하여 가사 장삼을 수하고 삼배를 한후“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데 그것은 무슨 도리입니까?”하니
조실스님께서“그대가 소를 찾는다는데 그 찾는 소는 그만두고 탄소나 이리 데리고 오너라.” 하므로 이에 말이 막혀 어리둥절하고 앉아 있었고 여러 학인들도 멍하니 있었다 합니다.
그럼 여러분들 중에 “찾는 소는 그만 두고 탄 소나 이리 데리고 오시오.” 한다면 어찌하시겠소? 이 도리를 알면 한번 일러 보시오.
이때 참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늦게 공부 시작한 호은스님이 일어나 춤을 둥실둥실 추며, “대중 스님들은 다 몰라도 나 혼자만은 알았읍니다” 하고 큰 소리를 치자 대중 모두가 비웃으며“어지럼병이 지랄병 된다더니 저 노장이 미치기까지 하였구나”하였는데 조실스님이 “그러지들 마라.”하시고 조실방으로 불러 불조의 공안을 들어 물으니 하나도 막힘없이 답하므로. 인가를 해 주셨다 합니다.
이때 혜암 스님 눈앞이 캄캄하여 사흘동안 밥을 먹어도 모래알 씹는 듯하였다 하셨으며, 대중 가운데 박추월 스님은 꼬박16일 단식정진 하다가 상하 이빨이 솟고 내려앉아 다 죽게 되어 백리길을 가 약을 구해다 먹여 살렸으며, 당시 공부 잘한다하던 수십명 선객들이 비웃고 업신여겼던 그 노장이 그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때 그 노장 스님이 큰 소리로 “조실스님이 저를 붙들어 주지 않았으면 나는 영겁으로 무명속에서 헤매일뻔 하였을 것입니다”하고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그 뒤 그는 강원에서 공부하던 제자들을 선원으로 보내고, 앙탈하는 마누라는 한 살림 차려 돌려보내고, 해제도 되기 전에 금강산 석왕사 조실로 초청되어 가셨다 합니다.
그러므로 참선은 선후배가 따로 없고 남녀노소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조사의 한마디를 듣고 깨달아 일생 공부한 이들의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뛰어넘는 즉 초월한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상법을 내어 내가 공부 잘한다, 좀 안다, 내가 제일이다 하면 아상 아만이 생기게 되니 계율이 청정하고 도를 안다 자처하더라도, 아만을 가져, 속으로 도적을 기르게 되어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모든 상을 여의면 존중하기를 부처님과 같이한다”한 것이기 때문에 참선공부로 수행해 닦는 길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본래 잃어버린 것이 없으니 다시 얻을 것이 없어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완연한 소식이니, 소소령령한 주인공은 터럭끝마치도 밝지도 않고, 터럭끝마치도 어둡지 않아. 밝지도 어둡지도 않는 것조차 있고 없지 않으니 배고프면 밥을먹고 곤하면 잠을 자는 것이 이 일마친 한가한 진인의 살림인 것입니다.
* 신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요.
* 신심은 일체의심을 끊게 될 것이요.
* 신심은 경계에 집착함이 없게 될 것이요.
* 신심은 잘못된 애착을 끊게 될 것이요.
* 신심은 영겁으로 무너지지 않게 될 것이요.
* 신심은 능히 깨달음의 보리를 얻을 것이요.
* 신심은 밝은 지혜가 발현될 것이요.
* 신심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과 호법성중을 감동케 할 것이요.
또한 시방세계 자신을 감동시켜 대오견성케 하여 부처를 이루게 하느니라.
* 위 호은선사가 지은 오도송을 읊도록 하겠습니다.
직문장래 기우성 이라 동각삼천 시오가 로다
부증불멸 반야봉 이요 자거자래 태평가 로다
탄 소를 데려오라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으니 삼천대천 세계가 내집이로다
더함도 덜함도 없는 반야봉에서
가고 오며 태평가를 부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