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고해苦海입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의 많은 풍랑들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형편과 사정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순식간에 밀어닥칩니다. 그때, 우리는 절대로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의심하듯 “왜요?, 무엇 때문에요?”라고 따지지 말아야합니다. 스스로 탈출구를 찾는다든지, 빠져나갈 대책을 모색하려고 고민하지 말아야합니다. 먼저, 정신 똑바로 차려야합니다. “무엇을요?”라고 물을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풍랑에서 무엇을 배우길 원하십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사용하실 계획이십니까?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어야합니다.
“당신의 뜻이 무엇이든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라고 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어떤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어야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만의 크고 놀라운 목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고난은, 반드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희생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약한 우리는 거세게 밀려온 고난에 압도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둘러싼 백성은 육십만 대군입니다. 그런데...그들이 한 달이나 먹을 고기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양을 얼마나 잡고 소를 얼마나 잡으면 되겠습니까? 바다의 고기를 다 모아오면 되겠습니까?”(민11:21b-22)라고 따지듯 묻는 모세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못할 일이 있겠느냐? 나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지 이루어지지 않는지 곧 네가 보게 되리라.”(민11:23a)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모세는 2-300만에 이르는 백성들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동안이나 고기로 먹이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애굽에서 끌고 나온 짐승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잡는다 할지라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무지 백성들에게 선포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제압하신 당신의 능력,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신 당신의 능력,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신 당신의 능력을 벌써 잊어버렸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언제나 변함없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고난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이 있느냐? 바람을 손아귀에 움켜잡은 사람이 있느냐? 물을 옷자락에 감싸둔 사람이 있느냐? 돌아가며 땅의 경계를 정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을 알거든 이름을 알려다오. 그에게 아들이 있거든 그 아들의 이름이라도 알려다오.”(잠30:4)라고 외쳤습니다. 선지자 이사야 역시 “누가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되었느냐? 하늘을 장뼘으로 재었느냐? 땅의 모든 흙을 말로 되었느냐? 산을 저울로 달고 언덕을 천칭으로 달았느냐?”(사40:12)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결코 없다고 외쳤습니다.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광야는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이다. 패배는 승리를 준비시켜준다. 가장 어두운 밤이 지나야 동이 튼다.”라고 외쳤습니다. 의, 구원, 생명은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난을 이겨낸 결과 주어진 선물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고난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믿음으로 받고 소망 가운데 참고 견디며 이겨내야 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반응하십니까? 소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십니까? 배우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러나 이제는”(욥30:1a)이라고 시작됩니다. 이는 몰아서 길게 내쉬는 탄식입니다. 한숨입니다. 세 번씩(1, 9, 16)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전과 현재의 상황을 적절하게 비교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시 욥이 당하고 있던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통절한 마음 곧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아픈 마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도무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29장을 통해서 살펴본 대로, 그는 기름지고 풍요롭고 윤택했던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그때, 그는 공의를 베풀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습니다.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과 칭찬과 인정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공동체는 물론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부족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단 한 가지도 남기지 않고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열 명이나 되는 생떼 같은 자식들을 잃었습니다. 동방의 거부라고 불려 질 정도로 많았던 재물 역시 다 잃고 말았습니다. 아내도 떠나버렸습니다.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 그의 도움을 받았던 종들과 나그네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습니다.
몸마저 병들어 흘러내렸습니다. 하루아침에 소유 전체를 잃었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여, 저주를 받아라. 내가 임신이 되던 그 밤도 저주를 받아라. 그 날이여,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려라.”(욥3:3-4a)라는 격한 감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고난 속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친 비참한 현실 앞에서 연신 탄식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의 탄식은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기롱하는 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나의 보기에 나의 양떼 지키는 개 중에도 둘만하지 못한 자니라.”(욥30:1b)라고 이어집니다.
그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일단의 젊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비웃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를 보면 길을 비켜서고”(욥29:8a)라는 지적대로, 그들은 평소 욥이 나타나면 자리를 비켜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양을 지키는 개들의 축에도 낄 수 없을 정도로 비천했습니다. “너희는 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들에서 맹수에게 찢겨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져라.”(출22:31)라는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개는 썩은 고기나 뜯어먹는 비천한 동물에 불과했습니다.
욥은 그렇게 유명무실한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았습니다.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과 칭찬과 인정을 한 몸에 받는 권위 있는 지도자였던 욥으로서는, 도무지 견디기 힘든 수모였습니다. 모욕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었는지는 우리는 모를 것 같습니다. 욥의 탄식은 “그들은 장년의 기력이 쇠한 자니 그 손의 힘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랴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매 캄캄하고 거친 들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떨기나무 가운데서 짠 나물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욥30:2-4)라고 이어집니다.
욥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젊어 보였습니다.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력이 쇠한 상태였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습니다.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형편은 마른 흙덩어리를 입에 집어넣고 씹어야할 정도였습니다. 염분이 섞인 늪지에서 자란 식물의 부드러운 잎을 먹어야할 정도였습니다. 식용이라기보다는 빗자루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초목의 뿌리를 먹어야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이렇게까지 비천했습니다. 당연히 안색은 파리했습니다. 생기와 활력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몰골이라고 좋을 리 없었습니다. 흉측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욥의 탄식은 “무리는 도적을 외침 같이 그들에게 소리 지름으로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쫓겨나서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 구멍에서 살며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욥30:5-7)라고 이어집니다. 그들은 사람의 축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공동체 사람들은 그들을 도둑을 몰아내듯 자신들의 거주하고 있던 공간으로부터 완전히 쫓아버렸습니다. 철저히 소외시켰습니다. 쫓겨난 그들은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마땅한 주거 공간을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상존하는 험하고 어두운 골짜기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나귀처럼 떨기나무 덤불 가운데서 울부짖거나, 들짐승들처럼 흙을 파낸 구덩이나 바위 틈 사이의 암혈 속에서 웅크린 채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의 탄식은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니라.”(욥30:8)라고 이어집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는 “몰지각하다, 어리석다, 무분별하다, 사악하다. 불 신앙적이다.” 등의 뜻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백성들아! 이것이 여호와께 보답하는 길이냐?”(신32:6a), “여호와여, 기억하소서. 원수들이 주를 조롱하고 어리석은 백성이 주의 이름을 모독합니다.”(시74:18)라는 말씀에 따르면, 미련한 사람들은 비천합니다. 버릇없습니다. 도덕적으로 무감각합니다. 판단력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합니다. 또 “비천한 자”는 “이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름”은 가문의 명예를 상징합니다. 소유권, 보호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없는 비천한 사람은 곧 지극히 천한 부류의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을 비웃고 조롱하던 젊은이들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회초리를 맞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쫓겨난 이들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비열하고 비천했습니다. 공동체가 용납할 수 있는 인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들짐승들처럼 구차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랑, 존경, 칭찬, 인정을 받는 것은 물론 권위까지 갖춘 지도자였던 욥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에게 수모를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모욕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욥은 자신이 공의를 행했던,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던, 최선을 다해서 섬겼던 그들로부터 조롱과 모욕과 수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께서 당하신 일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날,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칠흑 같은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번개가 두려움을 드러내며 깊은 어둠을 갈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째서 나를 돕지 않으시고 내가 신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십니까?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밤낮 울부짖어도 주께서는 아무 대답도 없으십니다.”(시22:1b-2)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아주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선에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온전히 버리셨습니다. 밤새도록 부르짖어 기도하셨던 아들 예수께서는, 마침내 어떤 소리도 내놓을 수 없으셨습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신음 소리만 토하셨습니다. 상처받은 상태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동물처럼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너무나 큰 고통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극한 고난 속으로 내몰리셨습니다. 주님의 고백은 “우리 조상들이 주를 신뢰하고 의지했을 때 주께서는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었으며 주를 신뢰하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시22:4-5)라고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민으로 구별하여 세우신 이스라엘이 당신을 믿고 의지하여 부르짖어 기도할 때마다 들어 주셨습니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수치로부터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단 한 번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던 아들에게 만큼은 다르셨습니다. 믿음으로 당신을 불렀지만 철저히 외면하셨습니다. 어떤 도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러나 이제 나는 사람이 아닌 벌레에 불과하며 내 백성에게까지 멸시를 당하고 모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나를 보는 자마다 비웃고 모욕하며 머리를 흔들고 ‘너는 여호와를 신뢰하던 자가 아니냐? 그런데 어째서 그가 너를 구해 주지 않느냐? 만일 여호와가 너를 좋아하신다면 어째서 너를 돕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시22:6-8)라고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신, 버림받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벌레처럼 생각했습니다. 진홍색 옷을 입으시고,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흘리신 진홍색 피로 인해서 몸이 범벅이 되신 주님을 부패한 물질에서 생기는 “진홍색 벌레(톨라아트), 게걸스럽게 먹는 구더기, 유충” 정도로 여겼습니다. 벌레를 대하듯 했습니다. 벌레를 밟듯 짓밟았습니다. 혐오했습니다. 증오했습니다. 모욕했습니다. 학대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멸시했습니다. 고문했습니다. 비웃었습니다. 괴로워하는 주님을 보고는 너무나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환난이 가까운데 나를 도울 자가 없습니다. 바산의 무서운 황소처럼 강한 대적들이 나를 에워싸고 먹이를 찾아다니며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입을 크게 벌려 나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악당들이 개떼처럼 나를 둘러싸고 사자처럼 내 손발을 물어뜯었습니다. 내가 나의 모든 뼈를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저 악한 자들이 흐뭇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봅니다. 그들이 내 겉옷을 서로 나누고 속옷은 제비를 뽑습니다.”(시22:11-13, 16-18)라는 절규하셨습니다.
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권세를 행사하고 있던 헤롯당들, 군인들은 마치 살찐 야생 황소들 같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쳤습니다. 울부짖는 사나운 짐승처럼, 배가 잔뜩 고픈 식인종들처럼 분노를 토해 놓았습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을 뿔로 찔러 잔인하게 죽이고 말겠다고 작당했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급한 마음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사정없이 발을 굴렀습니다. 어떤 무장도 하지 않은 주님을 발가벗겼습니다. 피에 굶주린 잔혹하고 야비한 사냥개들처럼 기진하신 주님의 주변을 뺑 둘러쌓았습니다. 단단히 결박했습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서 그 수가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 내장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모질게 채찍질했습니다. 수족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긍휼이라는 정서 자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납고 맹렬한 사냥개들처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죽어 가는 주님의 비극적인 모습을 조롱하듯 바라보았습니다. 야만인처럼 즐거워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의 옷을 부수입으로 챙기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시는 주님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가장 거룩하다고 자처하고 있던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 그들의 충동질에 놀아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지몽매했던 백성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하고 잔인했던 로마 군병들, 심지어 이방인들까지, 당시 존재하고 있던 모든 세력들이, 통곡해도 모자란 슬픈 그날만큼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광의 주님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죽이는 일에 공범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마음에 품고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까지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 그대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평소라면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내 영혼을 찢는 수치, 육체는 상처투성이, 살을 꿰뚫는 날카로운 못, 이보다 더 괴로운 것은 묶인 내게 던지는 조롱들, 이보다 더한 슬픔이 있는가?”(허버트Herbert)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습관적으로 당신을 떠나 범죄 하던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구원해 주셨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만큼은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히,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상처를 입히셨습니다. 죽이셨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시22:1a)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아버지라고 고백하셨습니다. 표현할 단어조차 찾기 어려운 고통을 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붙잡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극한 상황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지켜주실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아버지!, 배신자 유다가 저를 버리고 겁쟁이 베드로가 저를 떠나간 것까지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 신실하신 당신께서 저를 떠나시다니요? 그것은 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프고 슬픈 일입니다. 지옥의 형벌 가운데서도 가장 잔혹한 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신실한 분이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무장한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또 “거룩하신 주여, 주는 이스라엘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시22:3)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이스라엘로부터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데에는,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선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응답하시는 데에도, 뒤로 연기하시는 데에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판단, 결정, 행위의 바탕에 바로 그 사랑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주는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가 어머니 품속에 있을 때에도 내가 주를 의지하게 하였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주께 맡겨져 주가 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시22:9-10)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배경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에 의한 작정이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를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정하신 나라와 민족에게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 속에 태어나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탄생할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과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행의 위험, 가난, 헤롯의 분노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건강한 아이를 순산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해 주시는 손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힘겨운 싸움은 공생애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당신의 출생 과정에서 부어진 아버지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를 기억하셨습니다. 수시로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때로는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식사를 거르는 경우는 있어도, 기도만큼은 쉬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셨습니다. 십자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나는 물같이 쏟아졌고 나의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양초같이 되어 내 속에서 녹아 버렸습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었으니 주께서 나를 죽음의 먼지 속에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시22:14-15)라는 고백에 따르면, 스스로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께서는 모진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기진맥진해 지셨습니다.
심장은 마지막 남은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습니다. 뼈들은 사지를 잡아서 비튼 것처럼 어그러졌습니다. 손과 발을 못 박은 십자가를 세우고, 땅에 묻어 고정시키는 과정에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지극히 쇠약해진 근육들이 풀어지고, 뼈와 장기들이 따로 놀게 된 상태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주님의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밀랍처럼 녹았습니다. 땅에 떨어져 산산 조각난 질그릇처럼 쇠약해 지셨습니다. 입은 바싹 말랐습니다. 입술에는 찐득찐득한 하얀 액체가 들러붙었습니다. 혀는 잇몸에 붙어버렸습니다.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육체는 철저하게 고통을 당했습니다. 마치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듯했습니다. 세포 하나하나에는 슬픔과 비극이 가득 스며들었습니다. 그렇게 무덤 속 진토에 떨어지셨습니다. 예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치르신 대가는 그야말로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한 주교는 “내 육체는 물같이 쏟아졌네. 내 뼈는 어그러지기 시작하네. 불 앞의 양초처럼 내 마음은 내 안에서 녹아내리네. 말라 버린 힘줄이 뒤틀리고, 질그릇 조각처럼 말라 죽어 버렸네. 내 불타는 혀는 턱에 들러붙고, 사망의 진토가 내 침대가 되었네.”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힘겨운 고난을 당하시는 순간까지도 아버지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셨습니다. 당신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시여, 속히 와서 나를 도우소서. 나를 칼날에서 건져 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이 소중한 생명을 개와 같은 저 원수들의 세력에서 구해 주소서. 나를 사자들의 입에서 건지시고 들소들의 뿔에서 구하소서.”(시22:19-2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잃어버리고, 아니 당신과 관련된 전부를 잃어버리고, 철저히 낮아지신 주님은 다른 무엇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 한 분만 구하셨습니다. 때에 맞는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날카롭고 치명적인 칼과도 같은 원수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셨습니다.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생명을 사나운 개, 사자의 입, 들소의 뿔로부터, 사탄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숨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까지 당신 뜻에 순종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저주와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의 유일한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셨습니다. 주님의 모형인 욥 역시 그랬습니다.
때로는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했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큼은 단 한순간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인자仁慈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막힌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인자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고난 속에 있던 욥을 비웃고 조롱한 젊은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와 여러분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를 “여러분은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여러분이 세상의 악한 길을 따르고 하늘 아래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이 마귀는 현재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그들과 같이 우리 육체의 욕심대로 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래부터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엡2:11-3)라고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기쁨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시고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당신의 놀라운 뜻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서적 및 자료
1. 귀로만 듣다가 눈으로 뵈오니 - 김흥규(kmc)
2. 고난이 가져온 축복 - 김서택(생명의 말씀사)
3. 반전의 희망, 욥 - 최형묵(동연)
4. 신앙의 마스터 클래스 - 정병선(대장간)
5. 성선호 목사 욥기 강해
6. 욥기 강해 - C. 베일 / 신득일(고신대학교 출판부)
7. 욥기 이해 - 윌리엄 헨리 그린 / 윤영탁(엠마오)
8. 시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 글리슨 L. 아쳐 / 정명화(새순)
9. 욥기 강해 - 데이비드 앗킨슨 / 김진우(IVP)
10. 호크마 주석 - 강병도(기독 지혜사)
11. 생명의 삶 플러스(욥기 강해)
12. 생명의 삶
(http://qt.swim.org/user_dir/life/user_print_web.php?edit_all=2003-11-04)
13. 백주년 기념 교회 욥기 설교(http://100church.org)
14. 내리교회 욥기 강해(http://www.naeri.org)
15. 인터넷 신구약 핵심공부(http://www.biblenara.org)
16. 스펄전의 시편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