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현대 포니가 등장한 이후 국내 자동차 시장의 판도는 소형차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그 이면에는 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정부의 에너지 절약운동과 국산화율을 높인 소형차 위주의 자동차 공업 육성 풍토가 있었다. 반면, 연료 소비가 많은 6기통 이상의 고급 승용차는 1974년 이후 생산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신진 크라운과 현대에서 조립 생산한 포드 20M은 1973년에 생산을 멈췄다. 하지만 제조사들은 수익성이 높은 고급 승용차 시장을 외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수출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제조사들은 가격 경쟁력이라는 무기를 위해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자동차를 수출했고, 정부 역시 이를 독려했다. 결국 제조사들은 수출 증가에 따라 늘어나는 적자 폭을 보전하기 위해 고급 대형 승용차의 시판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상공부는 1978년 기아, 새한, 현대에 수출 실적 5대당 1대꼴로 6기통 승용차의 국내 시판을 허가했다. 수출 물량 대비 20% 이내에서 6기통 대형 승용차를 판매할 수 있도록 한 것. 더불어 한 회사에 한 차종, 배기량 3,000cc 이하, 국산화율 20% 이상이라는 조건도 붙었다.

이들 중 현대는 가장 발빠르게 움직여 독일 포드의 그라나다를 들여오기로 결정하고, 1978년 10월부터 조립 생산에 들어가 그해 12월부터 시판을 시작했다. 현대는 1천350만원의 가격을 책정했지만 상공부에 의해 1천154만원으로 결정되었다. 가격의 절반이 넘는 약 700만원이 세금이었는데, 국산화율이 23%에 불과해 높은 세율의 관세와 특별소비세, 부가가치세 등 각종 세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현대가 출시한 독일 포드의 그라나다는 1977년 유럽 시장에 출시된 2세대 모델로 4기통 1.7리터 및 6기통 2.0리터, 2.8리터 등 세 가지 엔진 라인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내에는 이 중 V6 2.0L 모델이 들어왔다. 배기량 1,993cc 엔진은 4단 수동변속기와 조합되어 최고출력 102마력, 최대토크 16.9kg.m, 최고속도 165km/h의 성능을 발휘했다.

당시 서울 아파트 한 채 가격에 맞먹는 엄청난 고가였음에도 대형차의 공급 부재로 인해 대기 수요가 많았고, 1979년에는 특별소비세 인상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출시되자마자 소비자들이 몰려들었다. 현대는 우선 각 부처 장관 등 관공서와 사회 유명 인사들에게 우선적으로 차를 배정했다. 한편으로는 그라나다의 판매를 위해 한 대라도 더 많은 차를 수출하면서, 내수 시장에서는 대상 차종들의 출고 지연이 심해지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그라나다는 고급 대형차답게 당시의 최신 장비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파워 윈도우, 전동식 사이드 미러, 중앙 집중식 도어 잠금장치 등의 편의장비는 물론, 사륜 독립 서스펜션, 유압식 진공 서보 2중 브레이크, 가스식 쇽업소버 등이 적용되어 기술적으로 상당히 앞서있었다.

하지만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며 유가가 급등하고 경기가 침체에 빠지자 대형차 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그라나다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이에 현대는 1980년 코티나 마크 V에 사용하던 4기통 엔진을 탑재한 저가형 모델을 내놓으며 대응했지만 석유파동이 진정되고 나서야 판매가 회복되었다.
이후 그라나다는 1984년 독일 포드에서 보디 생산이 중단되며 수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고, 국내에서는 이미 수입된 부품의 재고가 남아있던 1985년까지 생산되었다. 총 생산대수는 4천743대. 직계 후속 모델은 없지만 그라나다의 빈자리는 1986년 출시된 그랜저가 이어 받았다.
김동균 기자 (메가오토 컨텐츠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