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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국 권영호
[문단일화] 60,70 대구문단의 로망스 | |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가. ‘추억이야 말로 세월이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60,70년대의 대구문단도 그랬다. 젊은 문인묵객들의 사랑과 고독 그리고 낭만과 이별이 아로새겨진 추억의 보고(寶庫)이기도 했다.
향촌동 시대 후반부터 문인들의 단골 술집이었던 고바우집 마담과 5·16후 사회대중당 사건으로 투옥된 박지수 시인의 사랑과 죽음은 이제 전설로만 남았다.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술집 귀퉁이에 앉아 ‘명동엘레지’(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인 노래)를 애잔하게 부르던 서정희 시인의 사랑과 이별도 문단의 추억으로 남았다.
여성문인이 귀하던 시절, 세련된 헤어스타일에 개방적인 성격을 지녔던 서정희는 ‘향촌동의 색깔’로 통했다. 그녀는 한때 정석모 시인의 기타 연주에 실은 일본노래 ‘인생은 갈대’에 흠뻑 취했다.
‘나는 강가의 외로운 갈대... 당신 역시 외로운 갈대...’ 40대 초반의 우수에 찬 정석모의 풍모와 엔카의 구슬픈 음색이 서정희의 가슴을 저려왔다. 정석모와의 만남 이외에도 무용가 ㅇ씨, 언론인 ㄴ씨 등 많은 남성들과 로망스가 있었지만, 서정희는 “결국 나는 아무도 사랑할 수가 없었다”고 절규했다. 핏빛 꽃으로 사위어 간 여류시인의 피울음이었다.
해방후 대구문단 스캔들의 원조는 이호우 시조시인이다. 이호우는 남로당계의 여인을 가까이 했다가 ‘거물 빨갱이’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1970년 겨울 동성로의 동문다방 앞 빙판길에 쓰러져 비명에 떠난 그날도 문학소녀들과 함께 있었다.
이호우의 여성편력은 더러는 동료문인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윤수 시인이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는데, 이호우는 한번만 만나면 일이 된다”며 여성을 끌어들이는 타고난 분위기와 능력을 인정했을 정도이다.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땐가 다시 한 번/ 낙화(落花)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 번 죽어야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 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 이고 받든/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떫디떫던 눈웃음을 누가 가지리오'
김춘수 시인이 시 ‘수련별곡’을 남긴 곳이 바로 동성로의 2층 찻집 ‘세르팡’이다. ‘세르팡’이란 찻집 이름도 시인이 지었는데 ‘뱀’이란 뜻의 프랑스어로 일본의 유명잡지 이름이기도 했다. 이 찻집 주인이 바로 수련별곡의 주인공인 배화여고 출신의 권수연(?)이다.
세르팡에서 시인은 ‘꽃’을 이야기 하고 ‘처용단장’을 나누며 “내가 죽어도 이름이 100년은 갈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70년대 초, 20대 초반의 팔등신 미인 수련과 마흔 중반 시인의 사랑은 대구백화점 지하 생맥주집에서 싹텄다.
그곳 0번 테이블의 여급이었던 수련을 남다르게 아꼈던 김춘수는 그녀에게 찻집을 차릴 것을 권했고, 계명대 미술과에 편입까지 주선했다. 김춘수가 ‘나의 나타샤’로 부르던 수련에게 시인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김춘수 시인의 삶과 문학사에서 대구문단은 극단적인 실험을 추구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랑의 추억도 안겨줬다. “대구는 내 생애에 가장 오래 머문 곳이다. 내 개인사에 있어서 참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고장이다”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경북대 캠퍼스 시절 전재수 시인은 같은 과의 한 미모의 여학생에게 빠져버렸다. 전재수의 끈질긴 구애에도 그 여학생이 마음을 열지 않자 그는 면도칼로 삭발까지 단행했다. 기어이 두 사람은 경북대의 캠퍼스 커플로 등장해 뭇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모으게 되었다.
그것은 60년대의 대학가에서는 하나의 쇼킹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들의 로망스는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전재수가 공군 장교로 복무할 시절에 그 여인이 마음을 바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버린 것이었다.
피 끓는 청년장교 시인 전재수는 사랑하던 여인의 신혼집이 있던 경북 의성까지 짚차를 몰고 찾아갔다. 여기서 대구문단 희대미문의 권총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시인은 배신자에 대한 원망을 총알 한 발에 담아 허공을 향해 발사를 했다. 그리고 발길을 돌렸다.
그 후 시인은 하숙집에 잉꼬를 키웠다. 새가 울면 함께 울면서 그렇게 저미는 외로움을 달랬다. 그의 시세계 또한 이같이 삶에 대한 진한 몸부림이 배어있었다.
현재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허만하 시인은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북성로의 고급 중국집 기린원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열었다. 청마 유치환이 대구에 있던 시절 향촌동에 자주 나타났던 허만하는 남다른 결혼비화를 지니고 있다.
60년대 초 그는 미남형 외모에다 더러는 멋진 장교 군복을 입고, 더러는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장교이자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허만하의 인기가 여성들에게 최고였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문인들의 단골 다방에서도 그는 단연 여종업원들의 눈길을 끌었다.
영어실력이 뛰어나고 두뇌가 명색했던 군의관 허만하는 당시 간호장교와 연애 중이었다. 그런데 뭇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허만하가 결혼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자, 그 간호장교 집안의 한 특수부대 요원이 허만하에게 권총을 겨누며 ‘불명예 제대냐, 결혼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했다는 후일담도 전한다.
대건고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문학평론가 원형갑이 ‘언어의 마술사’라 칭하기도 했던 허만하 시인은 후일 이 대목과 관련한 질문에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결혼을 참 잘했다”는 너털 웃음으로 대신했다.
작가 송일호는 60년대 초 경북대 캠퍼스 시절, 사범대에 다니던 한 아름다운 여대생을 보기만해도 울렁거리는 가슴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때 송일호는 농촌출신학우회를 이끌며 서점을 운영해 농촌 학생 기숙사를 건립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혀 당시 매일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서공급 카르텔의 횡포로 그 꿈은 좌절되었고, 부친의 사망 때문에 방황하던 그녀마저 멀어져 갔다. 송일호는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첫사랑 여인에 대한 여운을 지울 길이 없어 어스름 달밤이면 그녀와 닮은 술집 여급의 손을 잡고 아픔을 달래야 했다.
지금에사 생각해보면 그 실연의 아픔이 그를 문학의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 40년 전 첫사랑의 추억이 지난해 초 한 장의 연하장으로 날아들었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그리움으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