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수기 23:22-24:9
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가나안 땅을 향한 이스라엘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습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고백처럼 가나안 주변 국가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있었던 홍해가 갈라진 사건과 주변 족속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으로 진격해온다는 소식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모압왕 발락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명한 선지자(주술사) 발람을 불러 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막아보고자 했지만,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발람은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저주가 아닌 축복을 빌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자, 발람은 혹시 발락이 이스라엘 진영의 규모를 보고 두려워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는 발람을 이스라엘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바알의 산당으로 데려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22:41). 그런데 정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자, 발락왕은 두 번째로 발람을 이스라엘 진영 일부만 보이는 소빔 들로 데려갔지만(23:13-14), 역시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장소로 브올 산 꼭대기에 데려갔습니다.
(27-28) 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1)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니
그곳 브올 산에서는 광야가 내려보이는데,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모습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24:2). 즉 황량한 광야에 천막을 치고 있는 초라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발람이 이스라엘 진영의 위세에 눌리지 않고 그의 바람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발락왕은 여전히 발람을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선지자라고 믿었습니다. 브올 산에 오른 발람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제단 일곱을 만들고,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해달라고 했고, 발락은 제단마다 수송아지와 숫양을 한 마리씩 바쳤습니다(23:29-30). 여기까지는 첫 번째, 두 번째 제사와 동일합니다. 23장은 이렇게 앞서 두 번의 제사와 동일한 장면으로 막이 내리고, 24장의 막이 올라가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장면이 전개됩니다.
(24:1)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발락왕의 생각과는 달리 발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 번에 걸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제사를 지내는 동안 으레 하던 점술을 했지만, 이것이 무용한 행위임을 알게 되자 이번에는 점술을 쓰지 않고, 대신 광야 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발람의 이같은 행동은 ‘내려놓음’을 뜻합니다. 점술은 그에게 생명줄과도 같습니다. 점술은 그를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에돔왕이 거액을 들여 초청할 만큼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가 생명처럼 여겼던 점술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발람의 이런 점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손은 무엇인가를 잡으려하고, 한 번 잡으면 놓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정치권을 보십시오. 정권을 잡기위해 하는 그들의 행동이 국민들에게는 얼마나 추잡하게 보이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그들의 속내를 국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국내외 상황을 직면하고 있는데도, 정쟁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종교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손에 쥔 것을 아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며 반대하는 교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원숭이를 잡은 방법 중 하나는 입구가 가는 호롱병과 같은 항아리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견과류나 과일을 넣어 두는 것입니다. 일단 항아리 속으로 손을 넣고 먹이를 잡으면 원숭이는 먹이를 놓지 않기 때문에 항아리에서 손을 빼지 못해 잡힌다고 합니다.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한번쯤은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전히 내려놓기란 참 어렵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프랑스 유학중에 주님을 믿었고, 이후 진로를 전공인 경영정보학이 아닌 신학으로 바꾸었습니다. 단 한 번도 목회자의 길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제가 삶의 방향을 바꾸기까지는 내려놓을 것이 참 많았습니다. 믿지 않은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 외에 제일 큰 문제는 당시 박사 논문 과정에 있던 저로서는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진로를 변경할 것인가 아니면 바로 진로를 변경할 것인가’ 였습니다. 여러 분들이 먼저 학위를 취득할 것을 권면했지만, 우리나라 기업과 협력해서 연구 결과를 도출해야하는데, 당시 IMF 상황이라 빠른 시일 내에 논문을 마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더 시간을 끌다가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동안 연구해왔던 박사 논문을 내려놓고, 프랑스 신학대학교에 입학했고, 우리나라에 귀국해서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100주년기념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대학 선배님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경영정보학 전공 교수를 뽑는데 제가 그쪽을 전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지원하라고 하셨습니다. 내려놓았다고 하면서도 제 가슴 깊숙이 박사학위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화를 받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다른 길이 있다면 언제든지 목회자의 길을 내려놓고 세상길을 택할 만큼 나약한 존재이기에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내려놓게 하셨음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은 내려놓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님은 마땅히 높임 받아야 하시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누리셔야할 권리를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기에 이 땅에 생명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빌립보서 2:5-11).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얼굴을 돌린 그는 눈을 들어 지파별로 진을 친 이스라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2).
성령의 임재함 속에서 그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3b)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여 눈을 1)감았던 자가 말하며
(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3절에서는 ‘눈을 감았던 자’로 표현했는데, 4절에서는 ‘눈을 뜬 자’라고 표현합니다.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인지 눈을 뜨고 있다는 이야기인지 모호합니다. 그런데 3절의 ‘감았던 자’의 각주를 보면 ‘뜬 자’로 적혀있습니다. ‘감았던 자’로 해석된 히브리어 ‘쉐툼’은 ‘열다’라는 어근에서 유래된 ‘솨탐’의 현재 능동형 분사입니다. 현재 능동형 분사로 사용된 의미는 ‘과거에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은 감은 눈을 뜨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원어로 해석하면 ‘뜬 자’가 맞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은 이를 과거형으로 ‘눈을 감았던 자’로 해석하고, 각주로 ‘뜬 자’로 표기함으로 히브리어의 현재 능동형 분사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4절의 ‘눈을 뜬 자’도 히브리어 원어에서는 수동 분사형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벗겨진 자’, ‘드러내진 자’입니다. 따라서 4절의 ‘눈을 뜬 자’를 원어의 뜻에 가까이 해석하면 ‘눈이 뜨임을 받고 있는 자‘가 됩니다. 이는 도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이 시력을 잃었는데 아나니아가 안수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사건(행 9:17-18)과 일맥상통하다고 보면 됩니다. 당시 아나니아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며 안수했습니다.
‘ ...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7b)
발락이 하나님 앞에서 점술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광야를 향하여 이스라엘 진영을 바라보자, 즉 시선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자 그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은 그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부리는 나귀도 보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했던 그였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비로소 감겼던 눈이 뜨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4절의 의미를 새번역이 잘 표현했습니다.
(4, 새번역)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말이다. 환상으로 전능자를 뵙고 넘어졌으나, 오히려 두 눈을 밝히 뜬 사람의 말이다.
브올 산 꼭대기에 바라본 광야는 메마르고 황폐한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한 그의 눈에는 다음과 같은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5-7a)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
발람은 이스라엘이 거한 땅이 강가의 아름다운 동산과도 같다고 합니다. 그 동산에는 보잘 껏 없는 잡초나 평범한 침목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으신 향기를 뿜어내는 침향목과 아름다운 백향목이 솟아 있다고 합니다. 물이 넘치고 씨가 넘치는 풍요한 동산이라고 합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비옥한 땅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토의 대부분은 황량한 광야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 없는 황폐한 광야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부족할 것이 없는 아름다운 동산과도 같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발람은 이스라엘의 흥왕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7b)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아각은 아말렉 왕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후손으로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는 이스라엘을 방해했고, 행군 후미의 유약자들을 기습 공격해서 무참히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도전행위를 일삼는 아각은 이스라엘에게 패하고 이스라엘은 널리 위세를 펼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발람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8)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뭇 나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출애굽 사건을 거론합니다. 출애굽 사건의 중심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나라는 모두 패하게 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9)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또한 용맹스러운 사자를 함부로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마음대로 저주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선포합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체득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발람은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은 점술을 내려놓았습니다. 내가 생명줄이라고 생각하고 붙들고 있는 줄이 썩은 동아줄인 걸 알게 될 때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목적 삼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 됩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왕위를 생명줄로 여기며 내려놓지 못했고, 그 결과 그는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우리의 손은 무엇을 움켜쥐고 있습니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거머쥔 손을 펴지 못하게 합니까? 세상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입니까? 내려놓음이 없으면 채움도 없습니다. 발람이 자신의 점술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광야를 바라보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것처럼,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사람만이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를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을 목전에 앞둔 말기 암 교우님들을 심방하러 갔다가 오히려 제가 위로를 받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일반인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처지를 한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웃으며 이별을 고하는 그분들의 모습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 미련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저 자신을 되돌아보곤 합니다.
인생은 거친 광야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어제 주일 새벽에 눈을 뜨고 일기예보를 보려다가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 소식 앞에서 한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차디찬 도로에 넘어져 압사당한 현실 앞에서 20대를 자녀로 둔 저로서는 이 참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들의 가족을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는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다시는 이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 전반에 걸쳐 무엇을 개혁해야 할지에 대한 철저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이 시대의 악함을 탓하기보다, 이 사회에 생명의 빛을 제대로 비추지 못한 우리의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암울한 현실이지만, 현실 너머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고, 주님 앞에 나를 온전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우리의 삶 자체가 주님을 향한 찬양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생명조차도 아낌없이 내려놓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치 내 것 인양 착각하며, 하나라도 더 많이 움켜쥐려고만 했지, 정작 내려놓은 것은 없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마치 황량한 광야와 같이 보일지라도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동산이 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도와주시옵소서. 오직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주님을 향한 찬양이자, 악한 이 세대를 개혁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젊은 청년들을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어 고통 중에 있는 많은 분에게 주님의 은총과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힘들고 어려운 현실 너머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열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발람왕이 발락을 브올 산 꼭대기로 인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발락은 앞서 두 번의 제사와 동일한 제사를 지냈지만 점술을 행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점술을 행하지 않고 고개를 광야로 향한 발락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4. 온전한 내려놓음은 어떤 의미일까요? 나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았습니까?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 입니까?
5. 발락은 황량한 광야 너머 무엇을 목격했습니까?
6.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작성 이창호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