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몽골바람 원문보기 글쓴이: 라합
몽골과 중앙아시아 선교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
현재 몽골의 개방과 빠른 복음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단서가 될 만한 일화가 13세기 야콥파 기독교도 역사가인 바르 헤브라이오스가 기록한 “교회사”에 담겨 있다.
메르브의 대주교 압디쇼의 보고에 따르면
『케레이트라는 부족의 칸이 높은 산맥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심한 눈보라를 만나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기에 이르러서 한 성자가 환상 가운데 나타나서 그에게 말했다. “만약 네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내가 너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여 여기에서 죽지 않게 할 것이다.” 그가 기독교도 양 무리의 하나의 양이 되겠다고 약속하자 그 성자가 그를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했다. 케레이트 칸이 자신의 텐트에 무사히 도착하자, 그는 그곳에 와 있던 기독교도 상인들을 불러서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과 상의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서만 믿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들로부터 성경을 받고 날마다 그것을 경배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불러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 줄 것과 사제를 보내 세례를 줄 것을 요청했다.』
(from Ian Gillman and Hans-Joachim Klikeit, ChristiansinAsiabefore1500, p.227)
이 케레이트 부족의 10만 명(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했을 때 전체 몽골족이 60만이었음)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케레이트 부족의 칸은 토그릴 완 칸(옹칸으로 불리기도 함)이었으며 후에 칭기즈 칸이 된 테무친의 아버지와 의형제 관계를 맺었고 또 테무친이 초기에 세력을 얻도록 도와준 인물로 추정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케레이트족은 칭기즈 칸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는 부족이었기 때문에 이 부족의 네스토리안 왕녀들이 칭기즈 칸의 아들과 손자들을 낳고 길러냈다는 점이다. 케레이트 부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중앙 몽골리아 초원의 톨강 유역이니까 지금의 울란바타르 지역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네스토리안 부족이 옹구트족인데 이 부족 역시 칭기즈 칸 가문과 혼인 맹약을 맺었다. 이 부족은 내몽골의 수도인 호호트(후허호트) 지역에 퍼져 살고 있었다. 호호트에서 서북 지역으로 18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서는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의 유적이 다수 발굴된 바 있다.
이 두 부족이 살고 있던 지역이 현재 각기 외몽골과 내몽골의 수도가 위치한 곳이다. 이곳들은 현재 교회가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고 이 두 지역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또한 몽골의 유일한 철도길이 남북으로 이 두 지역을 잇고 있으며 현재 몽골 지역 선교의 간선로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네스토리안들이 예배하고 기도하던 지역들을 다시 찾고 계시며 이 지역에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몽골 제국 이전의 중앙아시아 기독교
몽골 초원에서는 몽골족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 지역에 광범위하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6세기를 거치면서 몽골 초원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장악한 부족은 우리 역사에서는 돌궐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투르크족이다. 현재 신강 지역에 살고 있는 위구르족도 투르크족 계열이다.
필자가 중국 신강 지역의 사역자들이 모인 컨퍼런스에서 강의를 하면서 위구르라는 단어가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아람어와 같은 계열인 시리아어로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위구르족 무슬림들을 위해 사역하는 신강 지역의 선교사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 지역 선교사들 대부분이 이 민족을 위한 사역은 결실도 적어 보이고 너무나 견고한 문화적 종교적 벽이 사이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았는데 위구르라는 단어가 크리스천과 동의어로 이해되었다는 말이 충격적일만큼 도전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위구르라는 단어가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 이해되기까지에는 많은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위구르족을 포함해 여러 투르크족 계열의 유목민들을 대상으로 했던 오랜 사역이 배경에 존재했다. 680년경에 기록된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역사 문헌인 <소연대기(Chronica Minora)>에 엘리야라는 주교가 투르크족 왕과 그 부족민을 전도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 따르면 투르크족을 644년 이란 문화권인 메르브 지역의 주교로 있었던 엘리야가 개종시켰다고 한다.
“엘리야가 옥수스강 넘어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여행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왕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떠나는 투르크 왕을 만났다. 엘리야는 긴 이야기로 그 왕이 싸우러 가는 것을 말리려 노력했으나, 그 왕이 그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나의 신들의 사제들이 보여주는 것과 비슷한 징조를 내게 보여 준다면, 나는 당신의 신을 믿겠소.’ 그러고는 그 왕은 자신과 동행한 악령의 사제들에게 명령해서 그들이 섬기는 영들을 불러내게 했고, 급기야 하늘이 구름에 뒤덮이고, 바람, 천둥, 번개가 뒤이었다. 엘리야는 그 때 신의 권능에 감동을 받아 십자가의 성호를 긋고 악령들이 쳐놓은 비현실적인 것들을 꾸짖었다. 그러자 그것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왕이 성자 엘리야가 한 일을 보고 무릎 꿇고 그에게 경배했다. 그는 그의 모든 군대를 개종시켰다. 성자는 그들을 개울로 데려가 모두에게 세례주고 사제들과 집사들을 임명한 후, 그의 나라로 되돌아갔다.”(ChristiansinAsiabefore1500, p.216)
김호동 교수도 지적하듯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폭풍을 일으키는 주술은 투르크인들에게 널리 행해지던 ‘자다’라는 것이고 당시 배경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허구로 보기는 어렵다(<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중). 물론 헌터라는 학자가 지적하듯이 아마도 그 투르크 왕은 엘리야라는 사제를 강력한 무당으로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투르크인들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주술적인 행위를 즉시 중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민족에게든지 개종을 결단하는 것과 복음의 가치에 근거해서 세계관과 삶이 다시 세워지는 것은 동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같은 중간 전이단계는 현재의 중앙아시아와 몽골 지역에 막 세워지는 교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러시아군과 싸우는 타타르 군인들1
이 이야기가 주는 시사점 중 하나는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는 사역이 유목민을 상대로 하는 선교 사역에서는 효과적인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란 지역의 사제들이 육로를 통해 초원 일대로 장거리 선교 여행을 나오곤 했던 정황을 볼 수 있다.
당시 위구르족 사이에 퍼진 동방 교회에 관해서는 필자가 조사한 바양울기, 홉드, 바양 헝거르 세 아이막(몽골의 행정구역단위, 우리나라의 ‘도’정도의 개념)에서 발견되는 십자가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서투르키스탄 일대 그리고 초원의 투르크인들에 대한 전도는 일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많은 자료들이 활발하게 전개된 투르크족 사역에 대해 전하고 있다. 특별히 네스토리안 총주교 티모시 1세(823년 사망)의 두 편지글에서 투르크 왕이 대주교구를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해 온 사실에 대해 주교 한 명을 파견하였던 것과 또 티베트에도 주교를 파견할 예정이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티모시 1세가 언급한 투르크 왕에 대해서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위구르의 왕일 것으로 본다. 마니교를 국교로 하고 국제상인인 이란계 소그드인을 중용하는 정책을 편 뵈귀 카간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를 제거한 인물이 알프 쿠틀루크 빌게였다. 그는 마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는데 780년대 초 총주교에게 서한을 보낸 인물이 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위구르 유목민들은 840년에 북쪽에서 침입한 키르기스족의 공격으로 와해된 후 각지로 퍼져 이주해 간다. 그 중 서쪽으로 이주해 간 일파가 천산 일대의 투르판과 북정 등지에 왕국을 세워 몽골 제국 시기까지 이어졌다. 현재 신강 지역에 위구르족이 다수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에 기인한 것이다. 흩어진 위구르인들 중 20만 명 정도가 중국 북부인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해 갔는데 그들의 다수가 후에 몽골 제국의 일원이 된 옹구트 부족의 기원을 이룬다. 옹구트족은 케레이트족, 나이만족과 함께 몽골 제국 성립 이전부터 네스토리우스교를 받아들이고 있던 부족이었다. 이들 옹구트족의 정치적 중요성은 이들이 케레이트 부족과 함께 몽골 제국 황가와 결혼 동맹을 맺어서 황후 집단을 배출했다는 것이다.
옹구트의 왕성이 현재 내몽골의 수도 호호트에서 멀지 않은 올론 솜이라는 지역에서 20세기 초에 라티모아라는 미국의 중앙아시아 전문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왕성에서 다수의 네스토리안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네스토리우스교와 옹구트족의 관계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몽골제국 시대까지 거의 천년에 가까운 시기 동안 활발했던 중앙아시아와 초원 지대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그 후 티베트 불교와 이슬람의 발흥과 함께 이 지역에서 힘을 잃고 만다.(단 이것이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끝은 아니다. 중동 지역의 네스토리우스 교회들은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16세기 몽골의 알탄 한이 정치적인 필요 때문에 티베트와 연합하기 위해서 티베트 불교를 국교화하고 옹구트 부족의 근거지였던 호호트에 몽골 최초의 불사를 지음으로 해서 한 때 네스토리우스 교파의 근거지는 티베트 불교의 중심지가 된다. 아울러 네스토리안들이 활동하던 하라호름과 현재의 몽골의 수도가 된 울란바타르 지역에도 불사가 들어서게 된다. 티베트 불승들은 티베트 불교 전파와 확장에 있어서 어느 지역이 영적, 종교적 중심인지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위구르족의 또 다른 일파가 거주하고 있던 동투르키스탄 지역에는 15~16세기를 거치면서 이슬람 수피들에 의한 개종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현재의 이슬람화된 모습의 위구르족의 영적 지도가 그려지게 된다. 시베리아의 야쿠트 사하 부족, 부리야트족, 몽골족, 내몽골족에 있어서의 기독교 역사는 위구르 시대의 개종과 관련을 가진다. 케레이트 부족과 옹구트 부족 모두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위구르 국가의 후예들이다.
한국의 선교계에 있어서 ‘성령의 서진론’에 대한 재(再)이해 필요
사도행전에서는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향하려고 했을 때 성령이 막으시고 그의 걸음을 서쪽으로 돌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행 16: 6-10). 이 구절을 많은 사람들이 잘못 받아들여서 하나님께서 아시아 선교를 막으시고 유럽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아메리카를 거쳐 아시아로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계획하셨다고 이해한다. 몇몇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그 사건은 유럽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중요한 순간이라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장장 1,500여 년간의 역사 동안을 하나님은 아시아 사람들을 버려두셨다는 말일까? 이러한 오해는 서구인들의 인종적인 우위와 아시아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될 여지도 많았다.
필자가 중국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마다 문제되는 대목이 있었다. 예수를 모르고 죽어간 자기의 조상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왜 그들을 버려두셨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의 뒤에는 그들의 조상들을 의도적으로 버려두셨다면, 하나님이 신뢰해도 될 정도로 공평하신 분이며 전 인류의 구원자냐는 의문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아 사람들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이미 6세기에서부터 14세기까지 기독교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퍼져있었다. 특히 몽골 제국 시기에 기독교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교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 기독교 일파는 역사적으로 네스토리안 또는 경교라고 불렸다. 현재의 교회사가들은 보다 중립적인 용어인 동방 교회라는 표현을 쓴다.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의 유물 가운데에는 동방교회에서 사용했던 십자가가 있다. 동방교회는 이미 한반도 끝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까지도 건너갔다는 고고학적 흔적도 발견된다. 당시 알려진 모든 세계까지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시고 다가가셨다. 어느 누구도 버려지지 않았다. 바울이 가려다가 막힌 지역은 아시아 전역이 아니다. 당시 그리스어의 용례로 보건대 아시아는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와 그 주변 지역을 의미한다. 현대어의 아시아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이 잠시 버려두었던 그 지역은 결국 얼마의 시간이 흘러서 초대 교회의 후예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음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군과 싸우는 타타르 군인들2
네스토리안들은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어서 소아시아, 이라크, 페르시아 등 로마의 동방권으로 밀려나게 되었기 때문에 서구 중심의 기독교사에서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아 왔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믿었던 교리는 가톨릭의 그것보다 훨씬 개신교의 교리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주의 계열에서도 다수의 학자들이 네스토리안을 더 이상 이단으로 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성자이신 예수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격상시키는 것을 우상 숭배로 보았다. 이러한 신조는 당시 몇몇 대주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치적인 논리에 막혀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다.
이들 네스토리안들에 의해 동방 선교가 활발하게 벌어진다. 당시 동방 교회의 선교 중심지인 바그다드는 아시아 선교의 중핵으로 부상된다. 이슬람이 그 지역을 장악하고 난 이후에도 그들은 남아있는 그루터기로서 신앙을 지키면서 타지역으로의 선교사 파송을 지속시켜 갔다.
네스토리안들이 활동하던 지역은 대부분 초대 기독교인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방인(gentile)은 이들의 조상들이었다. 오순절 사건 때 예루살렘에서 성령부음을 목도했던 주된 민족들도 그들이다. 실은 현대의 왕성한 기독교 국가들(유럽, 미국, 혹은 한국)은 이방인 축에도 들지 못하는 이방인 중의 이방인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과 섭리로 인해 구원의 반열에 서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다. 현재 이 지역에서의 이슬람의 강성함을 보고 이들 초대 이방인 교회의 후예들인 그들은 이제 버려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시아 선교는 이들의 민족 신앙과 동떨어진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이다. 우리의 모토는 전도가 아니고 ‘회복’이다. 자기 것이었던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이 그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다시 찾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된 것을 스스로가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다시 찾으시는 분이다.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 있던 동방 교회의 쇠퇴 이유
그렇다면 왜 그토록 활발했던 네스토리우스 교파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많은 신학교에서 가르쳐 왔던 내용들은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이 가졌던 자세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즉 쉽게 현실과 타협하고 정치 지도자에게 붙어서 선교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네스토리우스교를 이단시하는 틀 속에서 그들의 자세에서 문제점을 찾으려 했던 것인 만큼 연구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다. 어느 정도가 현실과의 타협인지 기준이 불분명하다. 또한 각 지역마다 다른 전통과 다른 전략을 가지고 광범위한 지역에 확산되어 있었던 네스토리안 교구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네스토리안들이 급격히 쇠퇴하게 된 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요소들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돌발적인 흑사병의 확산이다. 이 흑사병의 확산은 몽골의 세계 정복과 관련이 깊다는 설명이 역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원래 흑사병의 균은 중국의 운남성과 동남아 북부 일부 지역에 서식하고 있었는데 몽골군이 이 지역을 공격한 후 초원으로 돌아가는 행렬에 이 균을 묻힌 채 몽골 초원지대로 이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몽골의 쥐나 모르모트 등 지하에 서식하는 설치류들 사이에 퍼져있던 균들이 몽골 군대나 상인들과 접촉하면서 주기적으로 중앙아시아,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네스토리안의 묘비를 분석해 보면 많은 네스토리안들이 흑사병으로 죽어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흑사병은 네스토리안만이 아닌 모든 중앙아시아인들을 몰살시켰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몽골과 중앙아시아에서의 동방 교회의 쇠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는 급작스러운 급진적 이슬람의 확산이다. 몽골 제국의 후예 중 러시아, 킵차크 지역에 있던 조치의 가문과 이란, 중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훌레구 가문은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인다. 이 무렵에 확산되기 시작한 이슬람은 급진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기존의 이슬람과는 달랐다. 그 이전에는 이슬람권 내에서도 유대교나 기독교를 자기들의 종교와 같은 뿌리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고 정치권에서 이교도들에게도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지나고 몽골 침입을 겪고 난 무렵의 이슬람은 기독교에 대해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중동에서 몽골을 계승한 티무르는 제국을 건설할 당시 자신의 정권의 이슬람권에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수의 네스토리안들을 포함한 중동 지역의 기독교도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바그다드에 선교 본부를 두고 있던 네스토리우스교 총주교는 현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산악지대인 모술 일대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선교 본부와 동방 지역의 여타 네스토리우스 주교구와의 통신이 단절되게 되고 더 이상의 선교사나 사제들의 파견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이 두 가지 이유가 네스토리안의 쇠퇴를 초래한 이유는 세 번째 이유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시리아어에 기초해서 예배를 집례하고 신앙을 전수해 왔다. 마치 라틴어에 의해 천주교 미사가 드려지고 아랍어로 이슬람의 신학과 의례가 유지되어 왔던 것과 같다. 중세 시기에는 ‘성스러운’ 언어로만 종교 교육과 의례가 진행되어 왔다. 천주교회가 마틴 루터의 가장 큰 죄목으로 지적한 것은 루터의 종교 개혁 그 자체보다는 그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이었다. 중세에는 말씀 자체가 대다수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영적 생활은 말씀 그 자체보다는 전통과 의례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교회의 존속과 성장은 해당의 ‘성스러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사제 집단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특히 동방에서의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경우 시리아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제 그룹이 이란, 이라크, 또는 시리아 지역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파견되지 않으면 교회의 유지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흑사병에 의해 사제들이 몰살되고 또 이슬람의 성장으로 인해 선교 본국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자 자연히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급격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군과 싸우는 타타르 군인들3
몽골제국시기의 가톨릭미션
몽골 제국은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신 도구였다. 로마 제국이 건설한 도로를 따라서 초대 교회의 전도자들이 복음을 뿌렸듯이 몽골 제국 이라는 하나의 광역 정치 체제하에서 선교사들은 이전보다 더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더욱이 각 지역을 연결하는 길이 정비되고 도로의 표지가 세워졌다. 제국 각지에 건설된 역전제도를 통해서 원거리 상인들과 신분을 인정받은 외국 선교사들은 여행의 편익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은 종교 지도자들을 인정해 주고 또 신분을 보장하며, 세제상의 혜택을 주었다. 특히 몽골 제국의 관료들 중 다수가 동방 교회 교도였고 또 칭기즈 칸 황가의 여인들 중 다수가 기독교도들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도들은 비교적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 그리고 중동에 일한국을 건설한 훌레구의 어머니 소르각타니 베키도 케레이트 부족 출신의 동방 교회 교도였다. 그 어머니의 영향 탓인지 이들 칸은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당시 이슬람의 확산과 십자군 운동의 쇠퇴 등으로 위기를 느낀 교황과 유럽의 국왕들은 동쪽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몽골 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의 연합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동유럽까지 진출한 몽골족의 가공할 파괴력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카르피니 또는 루브룩과 같이 몽골 지역을 여행하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해서 유명해진 신부들은 결국 몽골 제국에 대한 이해와 협력의 필요를 느낀 교황과 유럽 국왕들이 파견한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에 파견된 신부들의 임무는 정탐과 수교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인 의미가 강한 것이었다.
후기에 들어온 몬테코르비노와 같은 주교들은 선교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사역을 했고 주로 몽골 지배하의 중국에서 사역한 그는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고 많은 결신자를 얻은 것으로 보고된다.
이들 신부들은 초기에 동방 교회의 의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루브룩 같은 신부는 동방 교회를 같은 뿌리로 인정해서 몽골 칸 앞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 논쟁을 벌일 때는 동방 교회를 돕기도 했다. 당시 가톨릭 신부들은 동방 교회가 교리상의 차이가 있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같은 신앙을 가졌어도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집단이라는 식으로 이해했다. 후에 가톨릭 주교가 교회 공동체를 확산시킬 때 동방 교회 지도자 중에 그들을 시기하여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가톨릭 신부들이 전언한다.
쿠빌라이의 궁정에서 머물렀던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에서 자신이 베네치아로 돌아갈 당시 쿠빌라이 칸이 교황에게 잘 훈련된 가톨릭 수사 100여명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함께 보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티베트 불교에도 우호적이었던 점과 마르코 폴로의 주장을 뒷받침할 방증이 부족한 점을 들어 그의 주장을 자신의 임무를 과장하려 부풀린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당시 몽골 궁정에서는 종교 논쟁이 인기 있는 유희였고 또 다양한 재능과 능력을 가진 종교인이 자신의 궁정에 모이는 것은 자신의 권위 상승에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쿠빌라이의 선교사 요청 자체를 쿠빌라이가 가톨릭에 경도된 증거라고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18세기 이후의 개신교 선교
부리야트 미션
몽골 제국의 분열과 쇠퇴 이후 동방 교회는 15세기를 기점으로 급속도로 쇠퇴한다. 종교 개혁 이후 유럽인에 모라비안들에 의해서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모라비안들은 최초로 러시아 제국령내의 토르구트 부족, 칼묵 부족, 그리고 부리야트 부족민을 상대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모라비안들은 그후 러시아 정교회의 간섭 등으로 전도의 문이 막히자 티베트를 경유해서 전도의 길을 뚫을 것을 모색하기도 했다. 최초로 신약 성경이 부리야트 몽골어로 번역된 것도 이들의 공로이다.
LMS 미션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LMS)는 동아시아 선교에 중요한 획을 그은 선교 단체이다.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 조선과 중국으로 왔던 다수의 선교사들이 이 단체 출신이었다. 런던 선교회는 부리야트 몽골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이르쿠츠크 주변에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노력을 기울인다. 아울러 모라비안 미션에 의해서 시작된 브리야트 성경 번역을 마무리 한다. 하지만 이 성경은 문어체 번역이었기 때문에 문자를 모르는 유목민들이 성경에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현실적 제약이 여전히 존재했다.
런던 선교회 파송 선교사들은 주로 학교 교육과 문서 선교를 통해 전도의 문을 두드리는 전략을 사용했다. 서구적인 모델의 아카데미를 열어서 현지인들을 서구적인 교육으로 양육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 교육보다는 세속 교육에 초점을 두게 되었고 결신자를 얻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교는 선교사들이 장거리를 여행해서 장시간을 머물며 노력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열매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목 지역이었고 접근이 어려웠던 몽골 지역 선교를 위해 주로 중국이나 러시아에 거점을 세우고 그곳을 통해 선교하는 정책이 사용되었다.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 중에서는 중국 내에 들어와 있는 몽골 라마교도들을 전도하는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몽골 선교사 중 가장 잘 알려진 영국 선교사 제임스 길모어에 의해 본격적으로 몽골 초원 지대에 순회 의료선교가 시작된다. 그 자신은 의사가 아니었지만 그는 중국에 거주하며 의료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시간을 많이 들였다. 그의 의학 지식은 선교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현재의 내몽골 지역에 거점을 두면서 매년 여름 우르가(현재의 울란바타르) 지역까지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전도용지를 나누어주고 유목민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의 전도 열정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었고 그로 인해 그를 따라 몽골 선교에 헌신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길모어에 의해 몽골인에 대한 의료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의 후계자 토마스 카크레인은 중국에서 의료 선교를 했는데 그곳에 거주하는 몽골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역한다. 특별히 선교사들 사이의 교단적 편향을 비판하고 하나의 연합 선교를 주창했는데 그의 연합 사역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북경 연합 의과 대학(Peking Union Medical College)이다.
의료 시술은 유목민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가 되어 왔다.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서 16세기 이후에 확산된 배경에는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티베트 의술이 있었다. 그들이 무당들이 고치지 못하는 병들을 고치면서 그들의 능력과 그들의 신앙이 가진 힘을 증거 할 수 있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였다. 위험요소가 많이 있는 초원 지역에 살고 있던 유목민들은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특별한 의술을 가지지 못했으며 병 고침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무당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의술을 통해 병 고침이 일어날 때 유목민들은 병 고치는 사람의 말을 신뢰하고 특별하게 대했다. 따라서 의료 기술은 유목민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몽골제국 이후의 가톨릭미션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이 단체의 활동 무대는 오르도스 지역과 내몽골 지역이며 그 중심지가 현 내몽골 수도인 호호트(Hohot)이다. 이 지역은 몽골 제국 시기 기독교 부족인 옹구트 부족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몽골 제국 시기 가톨릭 미션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내몽골 지역의 부흥에 대해 많은 보고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면 한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의 역사에 대해 상기하게 된다. 또한 이들이 1870년대와 80년대에 들어 중국 감숙성과 신강성 지역에서도 활동을 시작했는데 5세기 전인 몽골 제국 시대에 프란시스코 파 수도사들이 이미 전도활동을 한 바 있던 지역이었다.
1920년대 초 CICM은 울란바타르에도 주교구 설립을 공포했으나 곧 러시아 군대의 진출과 공산 정권 수립으로 인해 명목상 주교구로 전락한다. 그 후 1992년이 되어 CICM에서 주교를 다시 파견하고 바티칸과 몽골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된다. CICM 신부들은 외교적인 지위로 인해 어느 개신교단의 선교사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활동하면서 사회 개발 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복음을 보다 문화적으로 수용 가능한 방향으로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부까지의 개신교 선교 활동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이 지역 선교사들 가운데 북유럽 출신의 선교사가 두드러지는 것이 이 시기의 개신교 몽골 선교의 한 특징이다. 스웨덴,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북유럽의 개신교 국가 출신의 선교사들이 상대적으로 몽골 선교에 관심과 열정을 보이고 몽골을 찾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위도가 높은 지역의 추운 지역 출신의 선교사들이 상대적으로 몽골 고원의 추위에 잘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선교사들은 1890년대에 들어 이미 현재의 울란바타르 지역에서 병원을 세우며 선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1924년 이후 러시아인의 유입과 공산 혁명으로 인해 선교사들은 외몽골 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내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게 된다.
정착 지역에서와는 달리 지속적으로 유목하며 계절 단위로 이동하는 유목민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몽골과 같이 바다를 끼고 있지 않은 내륙 지역, 거의 개발되지 않은 채 고립된 초원, 사막, 산악지대를 끼고 선교 활동을 한다는 것이 선교사에게 주는 부담은 매우 컸다. 공산화 이전까지의 몽골 지역에서의 유목민 선교는 주로 세 가지 양태로 대별(大別)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유목민과 함께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선교사 스스로가 게르를 치거나 유목 귀족의 캠프를 따라 함께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하거나 의료 시혜를 베풀며 전도하는 것이다. 제임스 길모어는 이 영역의 전도에 있어서 가장 잘 알려진 예이다. 한 가지 문제는 이 방법을 통해서는 교회가 개척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물론 유목민 가운데 결신자들이 생겨난 것으로 보고되지만 실제로 이 결신자들이 뿌리내리며 지속적으로 신앙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토대를 이루기는 어려웠다.
두 번째 유형은 초원 지대에 거점을 두고 전도하는 것이다. 지역을 정해서 거주용 건물, 학교, 병원, 부속 시설 등을 세우고 이곳을 찾는 몽골인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점 선교는 공산 혁명 이전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세 번째 유형은 몽골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에 선교 센터를 세우고 종교적인 순례, 무역, 교류 등을 위해 방문하는 몽골인들 또는 이주해 와서 살고 있는 몽골인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이다. 주로 섬서, 감숙, 신강 등의 중국 서북 지역, 북경, 내몽골의 도시들, 이르쿠츠크나 브리야트 지역의 선교사들은 몽골인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선교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몽골 지역 내에 거점을 가지지 않았지만 이들 주변국 선교사들은 몽골인 선교와 직간접으로 연결되게 되었다. 첫 번째 유형의 이주 선교사들도 주기적으로 주변국 선교 기지를 자신의 베이스캠프로 활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네 번째 유형은 내몽골 지역 중심으로 개간된 식민지를 건설하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를 세우고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보다 효과적인 양육을 하려는 시도이다. 주로 가톨릭에서 시도한 방법이었고 개신교 선교사 중에서도 이러한 모델을 시도한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정착촌 건설을 통한 선교 방법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당시 유목 문화가 가진 정착촌 확산에 대한 불안과 거부감은 서구 선교사들의 예상보다 컸다. 실제로 주로 정착촌에 진출한 사람들은 중국인이었다. 비록 몽골 내지에 세워진 정착촌이지만 이곳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이곳에 진출한 중국인이었다. 중국 북부의 가톨릭 신자들이 만주 정권의 박해를 피해 내몽골의 가톨릭 정착촌으로 이주해 오기도 했다. 이들은 건설된 정착촌을 기반으로 몽골 지역에 진출하려 했고 중국인과 몽골인 사이의 갈등은 골이 깊은 것이었다. 이것이 기독교 정착촌이 공격을 받고 주변 몽골인의 배척을 받는 한 요인이 되었다. 정착촌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은 보수적인 유목 귀족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기도 했다.
보통 몽골 지역에서는 순교자가 거의 없었다는 통념과는 달리 실제로 많은 순교가 발생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청대 말기의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지금의 내몽골에 속해 있는 오르도스 지역의 천주교도들이 대규모로 학살당한 사건이다. 당시 천주교가 주로 초원 지역을 개척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며 천주교 중심 지역을 확장시키는 방법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던 경향에 대해 외국인의 진출과 정착촌 건설, 그로 인한 목초지 잠식에 불만을 가진 보수 세력들의 공격으로 인해 다수의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했고 정착촌은 약탈, 파괴되기도 했다.
몽골에서의 공산 혁명 그리고 1948년 중국 공산화가 몽골 선교의 끝은 아니었다. 다수의 몽골 기독교인들은 홍콩과 대만으로 피난하여 그곳에 몽골인 교회를 세운다. 여전히 몽골인 디아스포라들을 중심으로 몽골인 교회가 존속했다. 내몽골과 외몽골에서 활동하던 천주교 신부들의 기록에 따르면 공산 혁명 이후에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있어왔다고 한다. 즉 신앙의 그루터기들이 몽골 내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렇게 면면히 흘러왔던 기독교 역사 토대 위에 1990년대의 몽골 민주화가 더해져 현재의 급성장하는 몽골 교회가 생겨난다. 몽골 선교는 1992년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6세기 이래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은 이 민족을 불러오셨고 또 세계 선교를 위해 사용해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와 2000년대의 교회 부흥은 이러한 1,400여 년간의 몽골의 기독교 역사라는 도도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첫댓글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몽골바람에 가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