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國朝人物考四十六
안처순(安處順)공 행장(行狀) - 노진(盧禛)
공의 휘(諱)는 처순(處順)이요 자(字)는 순지(順之)이며 성(姓)은 순흥(順興)에서 나왔다. 먼 조상 휘 유(裕)는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지위가 첨의 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고 풍부한 학문으로 인재를 길러 세상에 유학(儒學)의 가르침을 크게 드러내 밝혔으며, 졸(卒)함에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고 공자묘(孔子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이로부터 계속 과거에 올라 10세(世)가 되도록 끊임이 없었고 자주 이름 난 경상(卿相)과 큰 인물이 태어났다. 증조부 휘 구(玖)는 증(贈)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행 통훈 대부(行通訓大夫)ㆍ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요,
조부 휘 지귀(知歸)는 증 자헌 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ㆍ행 가선 대부(行嘉善大夫)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이며, 고(考) 휘 기(璣)는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곧바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졸하였고, 조양 임씨(兆陽林氏)인 능성 현령(綾城縣令) 임옥산(林玉山)의 따님과 혼인하였는데, 현령 역시 독실한 효성으로 일컬음을 받았다.
홍치(弘治) 모갑(某甲)에 공을 낳았는데, 전적공(典籍公)의 상(喪)을 당하자 임 부인(林夫人)이 상구(喪柩)를 받들고 남쪽으로 돌아갈 때 공은 태어난 지 겨우 여섯 살이었다. 중부(仲父) 판서(判書) 안침(安琛)이 가엾게 여겨 집에 데려다 길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났고 자라자 당시 알려진 사람을 따라 배웠으며 과문(科文, 과거보기 위한 공부)에 마음 쓰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善)을 좋아하고 옛사람을 사모하였으며 믿음이 없는 논의에 동요되지 않았으므로 일시의 연배(年輩)들이 마음을 기울이며 아꼈다. 정덕(正德) 계유년(癸酉年, 1513, 중종 8)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다음 해 갑술년(甲戌年, 1514, 중종 9)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권지 부정자(權知副正字)에 선발 임명되었다.
이듬해 을해년(乙亥年, 1515, 중종 10) 봄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추천되어 임명되었고 겨울에 다시 교체되어 사용(司勇)이 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516, 중종 11) 봄에 다시 검열에 임명되었고 이해 가을에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어 경연 전경(經筵典經)과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517, 중종 12) 가을에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뒤 박사(博士)로 옮겼는데, 모두 경연ㆍ춘추관을 겸하였다. 이때 임 부인은 고령(高齡)이었고 시골에 계셨으므로 곧 봉양을 요청하여 돌아갔으며, 무인년(戊寅年, 1518, 중종 13) 가을에 구례 현감(求禮縣監)에 제수되어 춘추 기사관은 그대로 겸하였다.
구례현에는 선성묘(宣聖廟, 공자묘)가 없어 봄가을로 향사(享祀)를 치를 때마다 여사(閭舍)를 세내어 지냈는데, 공은 도임하자 다른 일은 돌볼 겨를 없이 터를 보아 경영하되 규제(規制)를 크게 시작하여 매우 넓고 앞에 탁 트이게 하였으며, 정ㆍ무ㆍ재ㆍ주(庭廡齋廚)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사민(士民)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탄식하였다.
일찍이 ≪근사록(近思錄)≫ 읽기를 즐기며 이르기를, “이 책은 입도(入道)에 가장 요긴한 것이지만 세상에 판본(板本)이 드물어 시골 자제(子弟)들이 혹시 한번도 볼수 없음을 걱정한다.”고 하였는데, 하직 인사를 고하는 날 이의 간행(刊行)을 청하여 비부(秘府)의 책 1본(一本)을 얻어 공장(工匠)을 모아 판각(版刻)하니 매우 정밀하고 아름다웠으며, 고을에 있은 지 두어 해에 아전은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은 의지하여 차마 속이려하지 않았다.
얼마 아니 되어 시사(時事)는 크게 변하여 조정에 있는 인사로서 공과 일찍이 종유(從遊)하던 이가 연이어 쫓겨났는데, 이때 재상 이행(李荇)이 사명(使命)을 띠고 완산(完山)에 도착하자 공이 통첩에 따라 서로 모였었다. 이행과는 선세(先世) 때부터 친히 지내왔으므로 술기운이 돌자 공은 옛친구로 인연해서 감상(感傷)되어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때 조정의 논의는 공도 아울러 연좌시키려 하였으나 공이 외직(外職)에 오래도록 일 없이 지내어 용서할 만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 말이 한번 전파하기에 미쳐 뭇 논의가 더욱 떠들썩하므로 공이 즉시 병을 핑계하여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또 관직을 버리고 떠났음을 이유로 들어 얽어 무함하여 장차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으려 하였었는데, 마침 좌막(佐幕)으로 있는 이가 공과 옛친구 사이여서 당로자(當路者)에게 말하여 하등(下等)의 고과(考課)로 조치하였다. 이로부터 공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순수(鶉水) 위에 집을 지어 일생을 마치려는 뜻이 있었다.
계사년(癸巳年, 1533, 중종 28)에 당금(黨禁)이 좀 풀리면서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에 보임하고 다음 해 갑오년(甲午年, 1534, 중종 29) 봄에 전적(典籍)을 임명하자 공은 은혜로운 명이 오래 고폐(錮廢)된 뒤에 나왔다 하여 애써 조정에 나아가 공직(供職)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양현고 주부(養賢庫主簿)로 옮겼고 마침내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으로 옮기니, 품계는 승훈랑(承訓郞)이다.
이해 겨울 11월 모갑(某甲, 甲午年, 1534, 중종 29)에 서울의 우사(寓舍)에서 병을 얻으니, 나이는 43세였다. 그리고 다음 해 모갑에 남원(南原) 고을 남쪽 흑성산(黑城山)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묘원에 장사지내니,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공의 사람됨은 외모가 단정하고 자품이 깨끗했으며 일의 처리는 과단성 있고 민첩하였다. 사람을 접함에 있어 정성이 얼굴과 말에 드러났으며, 평소 말하고 웃는 모습이 따스하여 친근히 할 만하였으나 재제(裁制)하는 바가 있었고 한결같이 의(義)에 따라 굴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효성과 우애하는 정성은 타고난 것이 매우 지극하여 항상 아버지의 얼굴을 미쳐 살피지 못하는 것으로 비통스레 여겨 슬피 사모하느라 마음 편안치 않아서 슬픈 눈물이 흐름을 견디지 못하였다. 대부인(大夫人)을 섬김에 있어 효성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그 뜻을 어길까 두려워하였는데, 파직되어 돌아간 이후 애일 1)(愛日)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봉양에 더욱 힘써 어버이가 식사한 뒤에야 먹었으며, 일상과 같지 않은 경우에는 공도 배불리 먹지 않았고 때로는 곁에서 어린이 놀이를 하여 기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어버이가 수족(手足)이 불인한 병이 있어 시중들 때는 밤에 눈을 붙이지 않았으며, 일찍이 똥을 맛보아 그 길흉을 징험하였는데, 상(喪)을 당해서는 3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이어 죽을 마시다가 1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잡곡밥을 들었으나 소금을 먹고 간장을 먹지 않았으며, 또한 채소나 과일도 먹지 않았다.
따로 흙구덩이를 얽어 홀로 그 속에서 거처하며 슬프게 사모함을 나타내면서 밤에는 반드시 벽에 의지함을 일상으로 삼이 모발이 모두 부서졌으나 후회하지 않았으며, 혹 노끈을 드리워 머리칼에 묶어 혼몽하게 잠듦을 깨우다가 매양 첫닭이 울면 무덤에 올라가 슬피 곡을 하고 이어 백씨와 중씨의 여사(廬舍)로 갔고 동틀 녘에는 또 궤연(几筵)에 슬피 곡한 다음 부엌으로 나아가 몸소 음식을 장만하였는데, 춥고 덥다 해서 폐하는 일이 없었으며, 눈이 내리면 몸소 비를 들고 영역(塋域)을 쓸었다.
3년 동안 늘 초상(初喪) 때와 같이 하였고 슬프면 곧 곡을 하여 곡성이 끊이지 않았으며, 사람과 더불어 마주앉지 않았고 대하여도 말을 하지 않으며 일찍이 이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비록 고시(高柴, 공자 제자, 효자)의 3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운 일과 옛날 소련(少連)ㆍ대련(大連) 형제가 거상(居喪)을 잘한 일일지라도 양보할 것이 없었다.
공은 본래 파리하고 병이 많았으므로 상(喪)에 임해서 이와 같이 애씀은 사람들이 견디지 못할 바였으나 끝내 병이 없어 하루도 예(禮)를 폐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효성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상을 치름에도 성의를 다하여 장사와 제사에 드는 갖가지를 매우 풍성하게 하였으나 예에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또 제사에는 정성을 기울여 반드시 3일 전부터 재계 목욕하였고 일찍이 옷을 벗고 자는 일이 없었으며, 어버이의 생일 아침을 맞을 때마다 유의(遺衣)를 내어놓고 집에서 제를 지내며 슬피 울기를 오래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씨와 중씨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여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咨問)하였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고하였으며, 한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제공하는 동시에 때아닌 관복(冠服)을 입었을 때에는 지어 드렸고 경리(經理)에 넉넉지 않음이 있을 때에는 힘을 다해 마련하여 도왔다.
내외 생질(內外甥姪)이 무려 수십 인이었으나 늘 모여 식사하며 가르쳤고 먼 곳에서 온 자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비록 소원한 자라 하더라도 역시 그렇게 하였으며 집안사람이 지출에 어려움을 표시하였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견식과 도량은 물건에 초탈하여 인색함이 없이 가난한 사람을 돌보았고 사상(死喪)에 달려가 힘을 다해 도왔으며, 벗들이 음식을 보내 준 것이 있으면 즉일 나누어 주었고 위급한 일이 있는 일가와 이웃에게는 역시 성심껏 도왔는데, 비록 노고가 있고 수치스러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았으므로 모르는 자는 이를 병통으로 여겼으나 아는 자는 그 정성에 감복하였다. 졸(卒)하는 날 사우(士友)들은 모두 탄식하며 애석히 여겼고 장사 날에는 두어 고을이 모두 모였다.
본부(本府)에서 공의 실적(實蹟)을 여러 차례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의 논의 역시 ‘공의 지위가 그 덕행에 차지 않는다’고 하여 관직과 상사(賞賜)를 더할 것을 추천하였으나 오래가면서 시행이 되지 않으니, 식자가 한스럽게 여겼다. 공은 또 의리에 독실하여 벗과의 사귐에 있어 오래 될수록 더욱 신임이 두터워 이해(利害)관계로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처음에 기묘년(己卯年, 1519, 중종 14) 사화(士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공이 능성(綾城)에 유배된 지 1개월이었는데, 이때 용사자(用事者)가 그 동류를 미워하여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으나 공은 즉시 고을에서 달려가 만났고, 또 사귄 지 오래인 친구로서 남쪽으로 쫓겨난 자가 줄을 잇자 역시 모두 끊임없이 도왔으므로 사람들은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은 부안 한씨(扶安韓氏)와 혼인하니 고 한홍(韓弘)은 벼슬하지 않았고 조 한영(韓盈)은 아무 품계에 아무 시(寺)의 주부(主簿)이다. 정중(靜重)하여 지키는 바가 있어 공을 도와 덕을 어기는 일이 없었는데, 공이 졸하자 역시 예법에 따라 이행하며 가정을 이끌다가 27년 뒤에 졸하니, 춘추는 67세였으며 공과 같은 영역(塋域) 안에 봉분을 달리하였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안전(安瑑)은 가법(家法)을 잘 지켰고 딸은 나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안전의 전취(前娶)는 훈도(訓導) 김성벽(金成璧)의 딸로서 2남 1녀를 낳으매 아들 맏이로 안창국(安昌國)은 장개(張价)의 딸과 혼인하였고 다음은 안선국(安善國)이요 딸은 출가 전이며, 후취(後娶)는 첨사(僉使) 이염(李濂)의 딸로서 5남 2녀를 낳으매 아들 맏이 안사훈(安士訓)은 참봉(參奉) 조언(趙堰)의 딸과 혼인하였고, 다음 안사회(安士誨)는 유응(柳凝)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공의 순수한 덕과 아름다운 행동으로 가정에 전파되어 있는 것이 이처럼 환히 빛나고 사업(事業)이 적잖게 대략 세상에 드러났으나 지위는 겨우 종5품 반열이었고 졸(卒) 또한 많지 않은 나이에 마치었으니, 하늘이 선인(善人)을 돕지 않음이 이와 같음이 있단 말인가?
고자(孤子) 안전이 공의 행적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고 타고난 수명도 길지 않았음을 번민하면서 또 무덤에 묘표(墓表)가 없어 끝내 파묻혀 알려짐이 없을 것을 크게 두려워하여 나에게 행장(行狀)을 부탁해 장차 작자(作者)에게 한 마디 말을 구하려하므로, 감히 글을 할 줄 모른다고 사양치 못하였다.
대체로 공이 사국(史局)이나 경악(經幄)에 있은 지 비록 오래되지 않았으나 그 사이에 반드시 직필(直筆)의 글이나 풍간(諷諫)의 논의를 올린 것이 없지 않았겠지만, 아들 안전은 늦게 태어나 들어 아는 바 없고 공의 당시 요우(僚友)들도 모두 세상을 떠나서 고증해 물을 곳이 없으므로 이에 빼어놓고 기록치 못한다.
[각주]
1) 애일(愛日) :
날짜가 가는 것을 아낀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스런 봉양의 일컬음.
---------------------------------------------------------------------------------------------------------------------------------------------------------
[原文]
承訓郞。守奉常寺判官安公行狀。
公諱處順, 字順之, 姓出順興。 遠祖諱裕, 仕麗朝, 位至僉議中贊。 贍學育材, 大闡儒敎於世, 卒諡文成, 從享孔子廟。 自是以來, 繼踐科第, 十世不替, 累有名卿鉅人。 曾大父諱玖,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訓大夫・判軍資監事。 大父知歸, 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行嘉善大夫・全州府尹。 考諱璣, 晩登第, 卽授成均館典籍以卒。 娶兆陽林氏, 綾城縣令玉山之女。 縣令亦以篤孝稱。 弘治某甲生公。
典籍公之喪, 林夫人奉柩南歸, 時公生纔六歲。 仲父判書琛憐而育于家。 幼聰警不群。 旣長, 遂從時之聞人遊, 不屑爲擧子業, 厲志問學, 樂善慕古, 不爲浮議所搖奪, 一時輩流莫不傾心嚮愛之。
正德癸酉, 擧進士。 翌年甲戌, 登丙科, 選補權知承文院副正字。 乙亥春, 薦拜藝文館檢閱。 冬, 復遞爲司勇。 丙子春, 復拜檢閱。 是年秋, 選入弘文館爲正字、兼經筵典經・春秋館記事官。 丁丑秋, 陞著作, 俄轉博士, 皆兼帶經筵、春秋館。 時林夫人年高在鄕, 卽丐養以歸。 戊寅秋, 除求禮縣監, 仍兼春秋記事官。 縣無宣聖廟, 每祀春秋, 僦行於閭舍。 公至則不遑他務, 乃相其地而營之, 大恢規制, 極其寬敞, 庭廡齋廚, 靡不修具, 士民皆聚首歎息。 嘗好讀《近思錄》, 謂此書於入道最要, 而病板本罕於世, 鄕邑子弟或不得一窺, 陛辭之日, 陳請刊行, 得秘府一本, 鳩工鋟板, 極其精美。 在官數年, 吏畏民懷, 不忍欺。 未幾, 時事大變, 在廷之士與公所嘗從遊者相繼擯黜。 時李宰荇以使事至完山。 公沿牒與之會, 李自先世故有好, 酒半, 公因感傷世故, 泣下不能禁。 是時, 朝議幷欲坐公, 而以公久於外, 無事可假以爲辭者。 及是言一播, 群議益譁然, 公卽移疾歸于家。 於是又欲搆以棄官, 將不但已。 適佐幕者與公有舊, 告于當路者, 置之殿考。 自是公絶意營官, 築室鶉水之上, 有終焉之志。 癸巳, 黨禁稍解, 補成均館學官。 甲午春, 拜典籍。 公以恩命出於久廢, 黽勉赴朝供職。 俄移養賢庫主簿, 遂轉奉常寺判官, 階承訓。 是年冬十一月某甲, 得疾, 卒于京師之寓舍, 年四十三矣。 越明年某甲, 葬于南原府治之南黑城山卯坐酉向之原, 從先兆也。
公爲人儀容端正, 資稟明潔。 處事能果而敏, 接人一以誠款。 見于色辭, 平居言笑, 溫溫可親, 而有所裁制, 一聽於義, 無屈撓。 孝友之誠, 得之於天者甚至, 常以不及省嚴顔爲痛, 哀慕不寧, 悲涕不自勝, 事大夫人, 兢兢致孝, 惟恐少咈其志。 自罷去以來, 愛日愈切, 奉養益力, 親食然後乃食, 有不如常, 則公亦不飽, 居側或有嬰戲以悅之。 其侍末疾, 夜不交睫, 嘗糞驗其吉凶。 及至大故, 則三日不納勺飮, 因啜粥, 期而後始進糲飯。 然鹽而不醬, 亦不食蔬果, 別搆土炕, 獨處其中, 以致哀慕。 夜必倚壁以爲常, 毛髮盡礫, 不自悔, 或垂繩結髮, 以警昏睡。 每鷄鳴, 上塚哀哭, 仍就伯仲廬。 遲明, 又哭几筵盡哀, 遂抵廚間, 親手饌具, 寒暑不廢, 遇雪躬帚, 以掃塋域。 三年之內, 常如始喪, 哀至輒哭, 哭聲不絶。 不與人坐, 對而不言, 未嘗見齒, 雖高柴之泣血, 二連之善居, 無讓焉。
公素羸多病, 臨喪劬苦如此, 人所不堪而卒無患, 未嘗一日廢禮, 人以爲孝誠所致。 治喪亦勤劇, 葬祭之具, 極其豐厚, 而無所逾於禮焉。 又怵惕祀事, 必三日豫戒沐浴, 未嘗解衣以寢。 每遇親生朝, 必陳遺衣, 祭于家哀泣, 久不怠。 事伯仲如事父, 有事必咨, 有出必告, 得一物必供, 冠服有不時, 則或爲之製, 經理有未贍, 則或撤己力而趨之。 內外甥姪, 無慮數十人, 常聚食以敎, 自遠而至者, 如歸其家, 雖疎屬亦然。 家人雖艱於支給, 不以爲意, 識度超脫於物, 無所顧吝, 周濟貧乏, 匍匐死喪, 不遺餘力, 有朋友之饋, 卽日分之。 族隣人有急難, 則亦必委曲救解, 雖勞且恥不辭, 不知者以爲病, 而知者服其誠。
卒之日, 士友莫不齎咨歎惜, 其葬也, 數郡畢至。 本府以公實迹屢申于朝, 朝議亦以公位不滿德, 擬加職賞, 而事久不行, 識者恨之。 公又篤於爲義, 與朋友交, 久而信, 不以利害移易其心。 始己卯禍作, 趙公光祖謫在綾城者纔一月。 時用事者方仇疾同類, 事多叵測。 公卽自縣馳與往之會, 又交舊之擯于南者相繼, 亦皆極力資遺, 不少沮, 人以爲不可及。
公娶扶安韓氏, 考諱弘, 不仕。 祖盈, 某階某寺主簿, 靜重有守, 佐公無違德。 及公之歿, 亦能率履持家, 後二十七年而終, 得春秋六十有七。 葬與公同塋異室。 生一男一女: 男曰瑑, 克遵家法。 女歸于我男。 瑑前娶訓導金成璧之女, 生二男一女: 男長昌國, 娶張价之女: 次善國。 女未行也。 後娶僉使李濂之女。 生五男二女: 男長士訓, 娶參奉趙堰之女; 次士誨, 娶柳凝之女, 餘皆幼。
嗚呼! 公之純德懿行, 播在家庭者, 灼灼如此, 而事業不少槪見於世, 位纔班五品之末, 卒又無年以終, 天之不佑善人, 有如是耶? 孤瑑悶公之行不著于時, 降命不長。 又無墓道之表, 大懼終泯而無聞, 屬余具狀, 將以求一言於作者, 故不敢以不文辭。 第公之在史局、經幄, 爲日雖不久, 其間未必無直筆之書、諷議之獻, 而孤瑑生晩, 未有聞知。 公之一時僚友, 又皆淪謝, 無所於徵問, 玆闕而不得錄云。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