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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제4권 / 비명(碑銘)
월천(月川) 조 선생(趙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도학(道學)으로 동남 지역에서 창도할 때에 당시의 괴인(魁人)과 석사(碩士) 중에 추종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선생이 그중에서 영수(領袖)였다. 선생의 휘는 목(穆), 자는 사경(士敬), 성(姓)은 조씨(趙氏)인데, 그의 선조는 횡성인(橫城人)이다.
휘 익(翌)은 고려 광종조(光宗朝)에 벼슬하여 관직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그 뒤부터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역사서(歷史書)에 끊이지 않고 등장하여 선생에 이르기까지 대개 20여 세(世)나 된다.
증조(曾祖) 휘 윤손(胤孫)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되었고, 조(祖) 휘 경(瓊)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고, 고(考) 휘 대춘(大椿)은 가선대부 이조 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는데, 3세를 추은(推恩)한 것은 선생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씨가 처음에는 문경현(聞慶縣)으로 옮겼다가 나중에는 예천군(醴泉郡)으로 옮겼다. 참판공이 동지(同知)인 권수익(權受益)의 딸에게 장가들어 다시 예안현(禮安縣)으로 옮겼는데,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19) 3월 23일에 월천리(月川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5세의 나이로 참판공의 품안에서 구술(口述)로 《대학(大學)》을 전수받았다. 12세에는 경학(經學)을 모두 배웠고 15세에 비로소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닥치는 대로 공부하여 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 몸가짐을 언제나 예를 바탕으로 하니, 퇴계 선생이 크게 될 인물로 여겼다.
병오년(1546, 명종1)에 모친의 상(喪)을 당하고 임자년(155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계축년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과거 공부를 하였지만 제대로 되지를 않자, “우리 도가 여기에 있는데 하필 과거를 보랴.” 하고서 드디어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문(師門)에 전념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여 세상에서 인정하는 큰 선비가 되었다. 병인년(1566)에 이조(吏曹)가 천거하여 공릉 참봉(恭陵參奉)으로 삼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무진년(1568)에 관천(館薦)으로 집현전 참봉을 제수하니 부임했다가 얼마 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경오년(1570, 선조3)에 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선생이 기년(朞年) 동안 소복(素服)을 입고 3년 동안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잔치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임신년(1572)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유년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여 묘소 곁에다 여막을 짓고 기년 동안 죽을 먹으면서 소금은 먹어도 장은 먹지 않으니, 뼈만 남을 정도로 야위어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뒤에 정부(政府)가 이조와 함께 의논하여 학행(學行)으로 알려진 자를 다섯 사람 천거하였는데, 선생이 가장 먼저였다.
을해년(1575)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초수(招授)하고, 병자년(1576)에 또다시 사지(司紙)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제수하니,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자, 선생이 비로소 부임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그만두고 돌아왔다.
경진년(1580)에 공조 좌랑, 전라 도사(全羅都事), 경상 도사(慶尙都事),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제수되고, 신사년(1581)에 고령 현감(高靈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4월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으나 8월에 버리고 돌아왔다.
임오년(1582)에 신녕 현감(新寧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갑신년(1584)에 영덕 현령(盈德縣令)을 제수하였으나 도중에서 상소를 올려 첫머리에 부임하기 어렵다는 뜻을 진달하고, 이어서 권세가에 대한 적체된 옥사(獄事)와 원악(元惡)을 함부로 초출한 데 대한 심경 등을 간절하게 주달하였다.
또 조정이 바야흐로 북벌(北伐)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잘못된 계획으로 간주하고 근본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관원이 말로 인하여 죄를 얻어 북쪽으로 귀양 간 자가 세 사람이나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죽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여,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을유년(1585)에 공조좌랑 겸 교정청낭청(校正廳郞廳)에 제수되니 사은숙배한 뒤에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조 정랑으로 옮긴 뒤에 정장(呈狀)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두 차례 제수되고, 교정청 낭청에 전지(傳旨)를 내려 명소(命召)한 것이 네 차례였는데,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11월에 또다시 공조정랑 겸 낭청을 그전처럼 제수하니, 그제야 비로소 소명에 나아갔다. 병술년(1586) 2월에 소장을 올려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3월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과 금산 군수(錦山郡守)를 제수하고, 정해년(1587)에 단양 군수(丹陽郡守)와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을 제수하고, 공조 정랑을 두 차례나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은숙배를 하지 않았고, 겨울에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제수하니, 비로소 부임하였다가 경인년(1590)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때의 짐보따리가 간단하여 서책(書冊)만 4, 5짐 뿐이었다.
임진년(1592)에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여름 4월에 왜구(倭寇)가 갑자기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진격하여 서울을 핍박하니, 양궁(兩宮)은 서쪽으로 가고 국사를 책임질 자가 없었다. 선생이 동료들과 함께 높은 언덕에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고 내려왔다.
당시에 조정이 일본(日本)과 강화(講和)를 하자, 선생이 선위사(宣慰使) 이덕형(李德馨)에게 보낸 답서에, “이여수(李汝受)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같은 짓을 하였는가.” 하였는데, 여수는 이산해(李山海)의 자이고, 선위사는 그의 사위이다.
선생이 화의(和議)에 대하여 끝내 옳지 않게 여겼다. 그 이듬해에 거가(車駕)가 의주(義州)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이 바야흐로 길을 나서 임금님의 모습을 직접 우러러보려 하였으나 병 때문에 가지를 못하였다.
갑오년(1594)에 흡곡현(歙谷縣)에 제수하니, 선생이 전일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억지로 길을 나섰는데 도성에 도착하자,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군자감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맨 첫머리에 자신이 영외(嶺外)에 있기 때문에 난리에 달려갈 수 없다는 것과 거가(車駕)가 서울로 돌아왔는데도 맞이하지 못하였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또 이르기를, “또 강화(講和)를 체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통분함을 가누지 못하였습니다. 왜적이 백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백성들을 도륙시키고 우리 종묘사직을 망치고 우리의 능침(陵寢)을 훼손시키면서 우리나라 안에 떠나지 않고 가득 차 있는데 어찌 강화를 한다는 말입니까.
예전 사람은 일려(一旅)를 가지고도 중흥(中興)을 이룬 자가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비록 잔파(殘破)되었다고는 하나 저 일려로 중흥을 이룬 자에 비추어 보면 어찌 백 배나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덕을 닦아 하늘을 감동시키고 인정(仁政)을 실시하여 백성을 위무하는 것으로써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상이 칭찬하는 비답을 내리고 머물면서 벼슬을 하도록 하였는데, 선생이 즉시 남쪽으로 돌아가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탄식하면서 승직시켜 주게 하였다. 10월에 특별히 봉정대부(奉正大夫) 장례원 정(掌隷院正)을 제수하였다.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지금 경연에서 《주역(周易)》을 진강(進講)하는데 의리가 정미(精微)하여 아는 자가 적다. 들으니, 그대는 임하(林下)에서 한가롭게 생활하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문(經文)을 연구하였고 역학(易學)에 종사하여 공부한 것이 가장 많다고 하니 특별히 장악원 정에 제수하여 강석(講席)에 참여토록 하라.” 하였는데, 병으로 사양하였다.
을미년(1595) 봄에 또 재촉하여 부르는 전지가 있었으나 선생이 상소하여 면직되었다. 5월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또 장악원 정과 사섬시 정을 제수하였다.
기해년(1599)에 제용감 정(濟用監正)을 제수하였고, 신축년(1601)에는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제수하였다. 또 경서교정청 낭청(經書校正廳郞廳)으로 전지를 내려 불렀다. 임인년(1602)에 상의원 정과 예빈시 정을 제수하였다. 또 특지로 당상(堂上)에 승직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 의흥위 부호군(義興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가 공조 참의로 옮겼다.
교정청 당상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네 차례였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진년(1604) 가을에 특별히 가선(嘉善)에 승품되고 용양위 상호군(龍驤尉上護軍)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공조 참판으로 옮겼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니, 당시에 선생이 병을 앓은 지가 이미 2개월이나 되었다.
병오년(1606, 선조39) 겨울 10월 29일 갑자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83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매우 슬퍼하면서 예관을 보내 조전(弔奠)을 올리게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반궁(泮宮)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서 곡(哭)을 할 때에 소복(素服)을 착용하였다.
영남 지역의 향교와 서원에서도 모두 전부(奠賻)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1월 아무날에 부용산(芙蓉山) 남쪽 건좌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를 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었다. 선생은 성품이 근엄하고 심후한 데다 실천력이 있고 자연스러워 꾸밈을 일삼지 않았으니, 대개 타고난 천품(天品)이 그러하였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믿고 따를 스승이 있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모두 전례(典禮)에 맞았으며, 말을 하고 일을 행하는 것이 모두 스승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선생의 사람됨에 있어서 그다지 수고하지 않고도 이루었다 하겠다.
참판공을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드리는 것을 부지런히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의 뜻에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섬겼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비록 맛있는 음식을 계속 올리지는 못하였지만 일찍이 의(義)가 아닌 것으로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사당(祠堂)에 나아가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서실로 돌아와서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보면서 침식을 잊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일찍이 글을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소학(小學)》은 모든 경서(經書)의 근본이 된다.
이 글을 확실하게 터득한다면,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바탕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대학(大學)》의 요체는 단지 지(知)와 행(行)이라는 두 글자에 있다. 격물(格物), 치지(致知)는 지에 속하고,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은 행에 속하며,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그 행을 미루어 확대해 가는 것이다.” 하였다.
만일 자구(字句)에 의문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이 선생에게 찾아가 직접 여쭙고 혹은 조목별로 질문을 하여 반드시 확실하게 터득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일찍이 이 선생이 초록(抄錄)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중에서 후학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을 또다시 뽑아 한 책을 만들어서 보고 성찰할 수 있게 하였으며, 특히 《심경(心經)》을 좋아하여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체득하였다.
《황명통기(皇明通記)》를 읽다가 황돈(篁墩)이 시제(試題)를 팔아 넘긴 사건과 도일편(道一編)의 주장을 보고 비로소 그 사람 됨됨이와 학문을 의심하여 그것을 적어서 이 선생에게 여쭈었더니, 선생이 이를 계기로 심경 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서로 도움을 준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설 문청공(薛文淸公)의 《독서록(讀書錄)》을 열람하고 중요한 어구(語句)에 권점을 찍어서 책상에다 두고 보았으며, 또 유원성(劉元城)이 언급한, “망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는 말을 지침으로 삼았다.
항상 작은 책자를 두고 전현(前賢)들이 언급한 몸에 절실하고 교훈성이 짙은 말을 기록하여 《곤지잡록(困知雜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언제나 자신을 진작시키고 성찰하여 혹시라도 혼망(昏茫)하거나 방도(放倒)한 지경에 떨어질까 염려한 것이 대부분 이러하였다.
책이라면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또 구입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밤이면 반드시 촛불을 밝히고 향불을 피운 다음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여러 성리서(性理書)들을 읽었고 간혹 《도연명집(陶淵明集)》, 《격양집(擊壤集)》, 《염락풍아(溓洛風雅)》 등의 시(詩)를 외우곤 하였는데, 음성이 온화하고 장중하면서도 또렷하였다.
난리가 나서 피난 갈 즈음에도 오히려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고 이르기를, “육수부(陸秀夫)는 배 안에서도 오히려 강학(講學)하였으니, 아침에 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하면서 강독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환(仕宦)에는 본래 뜻이 없었으므로 해마다 제수하고 달마다 옮긴 것이 40여 관직이었지만, 나아가서 직무를 수행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혹 나아갔더라도 역시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매번 호 문정공(胡文定公)이 언급한, “춥고 따뜻한 것과 굶주리고 배부른 것은 자신이 짐작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나아가는 문제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오는 것은 쉽게 여긴 자취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선생이 산림에 있을 때는 당시의 세상일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시 와서 말을 하면, “산림(山林)에 묻혀 살면 마땅히 산림에 관한 말이나 해야지 시사(時事)에 무엇 하러 참여한다는 말인가.” 하였으니, 참으로 그 침묵이 충분히 몸을 용납할 수 있는 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발생하면 일찍이 깊이 걱정하고 심하게 지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서애(西崖) 유 상국(柳相國)과는 동문(同門)의 의의가 있었는데 서애가 영상(領相)으로 있으면서 강화(講和)에 관한 논의를 주장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상국이 평소에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서 기껏해야 얻은 것이 단지 ‘강화오국(講和誤國)’이란 네 글자인가?” 하여 말이 매우 준절하였으니, 선생의 지업(志業)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다.
선생은 안동 권씨 참봉 개세(盖世)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권씨는 태사(太師) 행(幸)의 후손이다. 1남 3녀를 낳았는데, 귀명(龜明)은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 장녀는 김유길(金裕吉)에게 시집가고, 2녀는 권병(權昞)에게 시집가고, 3녀는 김광찬(金光纘)에게 시집갔다.
부실(副室)에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수명(壽明)은 진사이며, 2남 석명(錫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유길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지선(之善), 취선(就善), 종선(從善), 낙선(樂善)이며, 딸은 권익창(權益昌)에게 시집갔다.
권병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상건(尙健), 상의(尙義), 상준(尙寯)이며, 딸은 권표(權𤨧)에게 시집갔다. 김광찬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확(確)과 언(䂴)으로 확은 생원이며, 딸은 참봉 정시형(鄭時亨)에게 시집갔다. 수명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균(昀), 온(㬈), 환(㬇), 성(晠)이며, 딸은 황중경(黃中敬)에게 시집갔다.
내가 약관의 나이에 선생을 찾아가서 뵈온 적이 있었다. 그 후덕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고 흠모하고 감복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지만 어찌 선생의 심오한 경지를 엿볼 수야 있었겠는가. 이번에 선생의 표손(表孫)인 김확과 김언이 나에게 찾아와서 묘소에 세울 비명(碑銘)을 부탁하였다.
나이도 많고 글솜씨도 없는데 어찌 만 분의 일이나마 유광(幽光)을 발양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김군의 청을 의리상 사양만 할 수 없는 바가 있어 삼가 장문(狀文)에 의거하여 개괄적인 것을 가려 뽑고 이어서 말하기를,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퇴계(退溪)를 만나서 이루었고, 퇴계의 도학(道學)은 선생을 만나서 빛이 났다.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퇴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겠으며, 퇴계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선생의 발명(發明)을 보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선생의 언행(言行)과 사업(事業)에 대하여 대부분 생략하고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은, 뒷날 선생을 알려고 하는 자는 먼저 퇴계를 보고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붙였다.
우뚝한 저 문순공이 / 卓彼文純
우리 동방의 주자임을 / 我東考亭
보고서 알았던 분은 / 見而知之
오직 우리 선생이셨네 / 惟我先生
선생의 도를 / 先生之道
스승에게 질정을 받았으니 / 繩墨於師
선생의 학문은 / 先生之學
그 연원이 여기에 있도다 / 淵源在玆
정자 문인에 양귀산이요 / 程庭之楊
주자 문하에 장요부라 / 朱門之張
전함도 있고 받음도 있는데 / 有傳有受
그 빛이 드러나지 않으랴 / 不顯其光
도산의 아래에 / 陶山之下
월천이 굽이쳐 흐르니 / 月川濊濊
산이 만일 썩지 않는다면 / 山如不朽
냇물도 마르지 않으리라 / 川亦不渴
<끝>
[註解]
[주01] 황명통기(皇明通記) : 이 책은 본래 명(明)나라 진건(陳建)이 찬술한 편년체(編年體)로 된 명나라 사서(史書)인데, 우리나라에서
는 태조(太祖)의 종계(宗系)와 휘(諱)가 잘못 기록되었다 하여 1771년(영조47)에 왕명(王命)으로 이 책에 첨삭을 가하여 《황명통
기집요(皇明通紀輯要)》를 간행한 바 있다. 《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史部》
[주02] 설 문청공(薛文淸公)의 독서록(讀書錄) : 문청은 명나라 이학가(理學家)인 설선(薛瑄)의 시호이다. 그의 저서인 《독서록》은 독서
록 11권, 속록 12권의 전체 2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수시로 얻은 것을 기록하여 자주 볼 수 있게 한 것으로, 대부분 이기
(理氣)와 성리(性理) 문제를 다루었다. 《明史 卷282 儒林列傳》
[주03] 유원성(劉元城)이 …… 한다 : 유원성의 이름은 안세(安世)이고, 자는 기지(器之)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그가 원성(元城)
으로 좌천되어 원성 주부를 역임한 바 있으므로 사후에 학자들이 그를 원성선생(元城先生)으로 불렀다. 위에서 인용한 말은 《소학
(小學)》 〈선행(善行)〉에, 유 충정공이 질문하고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답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주04] 육수부(陸秀夫)는 …… 강학(講學)하였으니 : 육수부의 자는 군실(君實)이며, 초주(楚州) 염성인(鹽城人)이다. 적군에게 쫓겨 배
를 타고 도망가면서도 《대학(大學)》을 써서 강학(講學)하기를 권장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강경(講經)
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이 도가 없어지면 나라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고 강을 끝낸 다음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451 忠義列傳》
[주05] 호 문정공(胡文定公)이 …… 한다 : 문정공의 이름은 안국(安國)이며, 자는 강후(康侯)이다. 주진(朱震)이 소명(召命)을 받고 출
처(出處)에 대하여 묻자, 그가, “사람의 거취와 말을 할 것인지 잠자코 있을 것인지에 대한 것은, 마치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굶주
리고 배부른 것과 차고 따뜻한 것을 반드시 자신만이 짐작할 수 있어서 남에게 결정받을 수도 없으며, 또 남이 결정해 줄 수도 없는
것과 같다. 나는 평생 동안 출처에 대한 것을 모두 내 마음으로 결단할 수 있었다.” 하였다. 《宋史 卷435 儒林列傳》
[주06] 그 …… 분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에,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의 말이 충분히 흥기시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는 그 침묵이 충분히 몸을 용납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 조동영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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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月川趙先生神道碑銘 幷序
退溪李先生以道學唱東南。一時魁人碩士之來摳衣者甚衆。而先生其領袖矣。先生諱穆。字士敬。姓趙氏。其先橫城人。有諱翌 。仕高麗光宗朝。官至翰林學士。自是名公巨卿。史不絶書。至先生蓋二十餘世。曾祖諱胤孫。司醞署直長。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祖諱瓊。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考諱大椿。贈嘉善大夫吏曹參判同知義禁府事。三世推恩。以先生貴也。趙氏初移于聞慶縣。中移于醴泉郡。參判公娶同知權受益女。又移于禮安縣。以嘉靖甲申三月二十三日。生先生于月川里第 。先生生有異質。年五歲。在參判公懷中。口受大學。十二。盡學經學。十五。始就退溪門下受學。自是縱學無不觀。律身動以禮。退溪先生深器重之。丙午。丁內艱。壬子。中生員試。癸丑。遊泮宮。以家貧親老。黽勉爲擧業。不得則曰。吾道在此。何必科爲。遂廢擧。專意師門。不懈益勤。爲世大儒。丙寅。吏曹薦爲恭陵參奉。不赴。戊辰。以館薦除集賢殿參奉。赴任。未幾辭還。庚午。李先生易簀。先生期行素。三年不入內。不與宴。壬申。除童蒙敎官。不起。癸酉。丁參判公憂。廬于墓。期而啜粥。鹽而不醬。骨立幾不能支。其後政府與吏曹同議。以學行著聞者五人薦聞。先生其首也。乙亥。超授宗簿寺主簿造紙署司紙工曹佐郞。丙子。又除司紙。皆不就。十月。除奉化縣監。陳辭疏。不允。先生始就任。未久罷歸。庚辰。除工曹佐郞,全羅慶尙都事宜寧縣監。辛巳。除高靈縣監。皆不應。四月。除忠淸都事。八月。棄歸。壬午。除新寧縣監。皆不出。甲申。拜盈德縣令。在道陳疏。首陳難任之意。繼以豪強積滯之獄。元惡濫抄之冤。愷切陳奏。又以朝廷方議北征。爲非計。深以固本爲得。又曰。三司從官。以言獲罪。投諸有北者三人。此與殺之無異云。言甚讜直。乙酉。除工曹佐郞兼校正廳郞廳。肅恩後。陳疏乞免 。不允。遷工曹正郞。呈狀南歸。除典牲主簿者再。以校正廳郞廳。有旨趣召者四。皆病辭。十一月。又除工曹正郞。兼郞廳如前。始就召。丙戌二月。拜章乞退。未蒙允。三月。辭還。除尙瑞判官,錦山郡守。丁亥。除丹陽郡守掌苑署掌苑。兩除工曹正郞。皆不謝。冬。除陜川郡守。始赴任。庚寅。辭歸。行李蕭然。書冊四五擔而已。壬辰。除濟用僉正。不赴。夏四月。倭寇卒至。所向無前。逼迫京都。兩宮西幸。國事無可爲者。先生與同執。登高望北。痛哭而下。時朝廷與日本講和。先生答李宣慰德馨書曰。李汝受居相位。亦作此等事耶。汝受。山海之字。而宣慰。其壻也。先生於和議終始爲非。越明年。聞車駕還自龍灣。先生方圖起程。仰望輦轂之光。而以病未果行。甲午除歙谷縣。先生欲遂前日之計。強起作行。旣入城以過限遞。除軍資監主簿 。陳章辭遞。首陳身伏嶺外。未得赴難。車駕還都。未克迎候之意。又曰。且聞講和之說。尤不勝痛憤。豈有率百萬之師。屠戮我生靈。蕩覆我宗社。隳毀我陵寢。彌滿境上不去。而謂之講和哉。古人有以一旅一成中興者。今我國家雖已殘破。視彼一旅一成。豈不百倍乎。伏願殿下修德以格天。施仁以撫民。以爲攘夷狄之本。上優答。使留仕。先生卽南歸。上嘉歎之。令陞職。十月。特除奉正大夫掌隷院正。有旨曰。目今筵中。進講周易。而義理精微。知者蓋寡。聞爾閑居林下。白首窮經。從事易學。用功最多云。特除掌樂正。俾參講席云。以病辭。乙未春。又趣召有旨。先生陳疏免。五月。除襄陽府使。不赴。令本道賜食物。又除掌樂司贍正。己亥。除濟用正。辛丑。除司宰正。又以經書校正廳郞廳。有旨趣召。壬寅。除尙衣禮賓正。又以特旨。陞堂上。拜折衝將軍,義興衛副護軍。遷工曹參議。以校正廳堂上被召者四。皆以病不行。甲辰秋。特陞嘉善。拜龍驤尉上護軍。俄遷工曹參判。皆不克赴謝。時先生遘疾已二朔。丙午冬十月二十九日甲子。考終于寢。享年八十有三。訃聞。上震悼。遣禮官。致弔奠。蓋殊典也。泮中多士會哭用素。嶺南校院。皆行奠賻。明年正月某日。葬于芙蓉山南乾坐巽向之原。從先兆也。先生性謹嚴深厚。踐履端實。任眞天然。不事矯飾。蓋其得於天者如是。而早歲又得依歸。耳濡目染。皆在典禮之內。發言行事。莫不惟師之視。則先生之於爲人。可謂不勞而成矣。奉養參判公。定省惟勤。色養無方。家甚貧。雖甘旨不繼。而未嘗以非義干人。平居。未明而起。整冠襟。詣祠堂。行再拜禮。退坐書室。對案看書。至忘寢食。嘗謂學者曰。小學。乃諸經之機括。苟能通透是書。作聖根基在此矣。又曰。大學。只是知行二字爾。以格致屬之知。誠正修屬之行。齊治平爲推行之理。如有字句有疑處。必就李先生面稟。或條列以問。必通貫後已。嘗就李先生所抄錄朱子書節要中。又抄其尤切於後學者爲一冊。以備觀省焉。尤愛心經。口誦而心體之。及讀皇明通記。見墩篁賣題之事。道一編之說。而始疑其爲人爲學。乃錄稟於李先生。先生於是。作心經後論。師生之間。互相補益如此。嘗覽薛文靖讀書錄。手圈其要語。置諸几案。又取劉元城自不妄語始之語。嘗自檃括。常置小冊子。書前賢切己訓誡之語。名曰困知雜錄。其於心身上。未嘗不提撕省察。恐其或墮於昏茫放倒之域者多此類。於書無不讀。無不購。夜必明燭炷香。讀近思錄,朱子大全,性理諸書。或誦淵明擊壤集,濂洛風雅等詩。聲音和壯。了了可聽。至於亂離犇避之際。猶不忘敎誨曰。陸秀夫在舟中猶講學。朝聞道夕死可矣。講讀不撤。其於仕宦。本無意。年除月遷。至於四十餘官。而就職者無幾。或就之而又不久留。每擧胡文定寒溫飢飽。自知斟酌之語。以自戒故。其難進易退之迹。光明正大 。無可疑者。其在山林。未嘗談當世之事。人或來言則曰。在山林則當作山林之語。時事何與焉。眞所謂其默足以容者也。然國有大事。則亦未嘗不深憂而痛斥之。與西崖柳相國有同門之義。聞西崖在領台。主講和之議。乃抵書曰。相國平生讀聖賢書。畢竟所得。只此講和誤國四字耶。辭甚峻截。先生之志業。於此可見矣。先生娶安東權氏。參奉蓋世之女。太師幸之後也。生一子三女。曰龜明。未成而夭。女長適金裕吉。次適權昞。次適金光纘。副室有二子一女。長曰壽明。進士。次曰錫明。登文科。爲主簿。裕吉有四子一女。之善,就善,從善,樂善。女歸權益昌。昞三子。尙健,尙義,尙寯。女曰權𤨧。光纘二子一女。確,硏。確。生員。女適參奉鄭時亨。壽明四子一女。昀,㬈,㬇,晟。女適黃中敬。蘊年在弱冠。嘗一拜先生於床下矣。觀其厚德端儀。已不勝其歆服。而何能窺闖其閫奧哉。今也。先生之表孫金確,金硏。誤以墓隧之銘。託於蘊。年老且無文。何能發幽光之萬一。然金君之請。義有所不可辭者。謹依狀文。撮其梗槪。而仍爲之說曰。先生之美質。得退溪而有成。退溪之道學。得先生而有光。非先生。何以受退溪之磨琢。非退溪。何以保先生之發明也。是以余於先生之言行事業。多略而不詳者。欲使後之觀先生者。先觀退溪而得之也。系之以銘曰。
卓彼文純。我東考亭。見而知之。惟我先生。先生之道。繩墨於師。先生之學。淵源在玆。程庭之楊 。朱門之張。有傳有受。
不顯其光。陶山之下。月川濊濊。山如不朽。川亦不渴。<끝>
桐溪先先文集卷之四 /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