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요약]
■ 이강(李岡)
1333년(충숙왕 後2) - 1368년(공민왕 17) / 향년 36세
[고려문과] 충목왕(忠穆王) 3년(1347) 정해(丁亥) 정해방(丁亥榜) 병과(丙科) 1위(4/33)
○초명 : 이강(李綱)
○자(字) : 사비(思卑)
○호(號) : 평재(平齋)
○시호(諡號) : 문경(文敬)
○본관 : 고성(固城)
○과거합격연령 : 15세
○관직 : 대제학(大提學)
[가족사항]
○부(父) : 이암(李嵒) [麗文]
○조부(祖父) : 이우(李瑀)
○ 증조부(曾祖父) : 이존비(李尊庇)[麗文]
○외조부(外祖父) : 홍승서(洪承緖)[麗文]
본관 : 남양(南陽[唐])
○처부(妻父) : 곽연준(郭延俊)
고려 후기에, 지신사, 이부낭중, 밀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공민왕 때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지낸 이암(李碞)의 아들이다.
원송수(元松壽)의 추천으로 지신사(知申事)가 된 뒤, 1356년에는 이부낭중(吏部郎中)의 직에 있으면서 왕으로부터, “네가 전선(銓選: 인사행정)에 참가하였으니 대간으로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는 내치고, 현재(賢才)로 유일(遺逸: 유능한 자가 등용되지않아 세상에 나타나지 않음)된 자는 이를 올리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친 자는 또한 반드시 이를 탁용(擢用)하라.”라는 말을 들었다.
밀직제학으로 죽으니 왕이 심히 애도하고 후하게 부의를 하사하였으며, 관례상 추밀(樞密)은 시호를 내리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문경(文敬)이라고 특별히 시호를 내렸다. 죽을 때의 관직이 『고려사(高麗史)』세가에는 밀직제학으로 되어 있고, 예지(禮志)에는 밀직부사로 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전자는 추증된 것으로 추정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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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이공 묘지명 병서 (文敬李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선군(先君)이 가정공(稼亭公)이 일찍이 정해년의 공거(貢擧)를 주관하여 선발한 선비에 알려진 인물이 많았으니, 문경(文敬) 이공(李公)이 당년 15세로 신채(神采)가 뛰어나 당시에 이미 그 아버지의 풍모가 있다고 알려졌고, 그 뒤에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지식이 높아짐에 따라 명성이 날로 더욱 중해지니 당당한 재상이 될 인재였다.
공이 병에 걸리게 되자,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사람이 어찌 여기에서 그칠 리가 있겠는가.” 하였고, 사망하자 또한 말하기를,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났던가. 약물을 잘못 쓴 것이었던가. 어찌하여 이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하고, 사대부는 조정에서 서로 조상하고, 친척과 친구들은 신위(神位)에 가서 서로 곡하였으며, 길가는 사람들도 탄식하며 애석해하였다.
임금도 이 부고를 듣고 몹시 애도하여 후히 부의(賻儀)하도록 명하고, 태상(太常)에 시호를 논의하도록 명하여 이르기를, “추밀직(樞密職)은 시호를 내리지 않으나, 내가 특별히 이강(李岡)을 포상하는 것은 문신으로 오랫동안 노력해 온 사람은 정당문학 송수(松壽)였으므로 내가 이 때문에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그와 몸은 달라도 공이 같은 사람으로는 이제 강이 있을 뿐이다.” 하였고, 시호를 논의하여 올리자 또 이르기를, “문경(文敬)은 오직 이강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였으니, 아, 공은 유감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공의 벗 상당(上黨) 맹운(孟雲) 한수(韓脩)는 곡성(曲城)의 염흥방중창(廉興邦仲昌)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계획을 말하기를, “우리의 벗이 죽었으니 이 세상 사람이 어느 누가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의 벗이 전할 만한 것을 전하고 죽었다면, 이는 우리 셋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그 슬픔을 자위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묘비명은 나에게 부탁하고 한수의 글씨와 염흥방의 전서(篆書)로 쓰며, 돌에 새기는 공역은 중창(仲昌 염흥방)과 맹운(孟雲 한수)이 주관하기로 하니, 아, 슬프다. 내 어찌 차마 내 벗의 묘에 명하겠는가. 공의 이름은 강(岡)이요, 자는 사비(思卑)이니, 처음의 이름이 강(綱)이었던 것을 같은 항렬의 이름을 피하여 드디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던 것이요, 성은 이씨이니 고성(固城)은 본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존비(尊庇)이니 판밀직사사 겸 감찰대부로 경릉(慶陵) 왕조에 이름이 있었고, 조부의 휘는 우(瑀)이니 철성군(鐵城君)이며, 아버지의 휘는 암(嵒)이니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서법이 일세에 절묘하였으니 호는 행촌(杏村)이다.
어머니 홍씨(洪氏)는 시중(侍中) 충정공(忠正公) 자번(子藩)의 손녀요, 우대언(右代言) 승서(承緖)의 딸이다. 처음에 가문의 공으로 복두점 녹사(幞頭店錄事)에 임명되었고, 급제한 후에는 경순부(慶順府) 승(丞)이 되어 전의(典儀)에 있어서는 직장(直長)ㆍ주부(主簿)와 또 영(令)을 역임한 바 있고, 병부(兵部)의 원외(員外)와 문하성의 사간(司諫)과 이부(吏部)의 낭중과 호부(戶部)의 시랑을 지내고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는 대언(代言)ㆍ지신사(知申事)ㆍ제학(提學)ㆍ부사(副使)를 역임하였으며, 내외제(內外制)의 관직(館職)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러서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총릉(聰陵)이 서연(書筵)의 강의를 열고 있을 때에 시독(侍讀)에 선발 보충되어 손위(遜位)하게 되자 공이 따라가서 거하니 그 뜻을 세운 것이 구차하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금상이 즉위한 지 5년째인 을미년에 공을 불러보고 기특하게 여겨 즉시 주부(主簿)를 제수하여 부새(符璽 절부(節符)와 옥새)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로부터 항상 임금의 좌우에 있으면서 오래될수록 더욱 근신하고 공경하였다. 이부에 있을 때에 관직을 옮기게 되자, 공이 아뢰기를, “신이 붓을 잡고 신의 이름을 주의(注擬)한다는 것은 진실로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중히 여겼다.
신축년 가을에 경상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북방 변경의 침략을 당하여 온 나라가 남으로 옮기게 되어 그 경계에 들어가니 공급하는 일이 끝이 없었으나, 이르는 곳마다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하여 사기를 다시 떨쳐 마침내 흉당을 섬멸하였으니, 이는 공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서울로 돌아와서 원문정(元文定)의 후임으로 전선(銓選)을 맡으니 때는 바야흐로 변경의 경보(警報)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하를 유지해 가면서 각기 소망을 채워 높은 공을 이룬 것은 공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시중이 죽으니 임금이 친히 명하여 그 모습을 그리게 하였으니, 이는 비록 임금이 큰 공신을 특별히 포상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흠모시키게 하였던 것이다.
그 덕도 매우 성대하나 또한 공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던 것이요, 일에 임해서는 극히 조심하였고,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착한 일을 좋아하기를 간절히 하고 마음을 공평히 가지니 내가 바로 벗으로 하는 이유이다. 하늘이 혹시 나이를 더 주어 묘당에 앉아서 큰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하고 큰 정사를 행하기를 그의 뜻과 같지 않음이 없었던들 나는 장차 그를 스승으로 섬겼을 것인데, 이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 슬픔을 어찌 다하리요.
부인은 곽씨(郭氏)이니,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휘 연준(延俊)이 아버지이다. 딸 몇 명이 있는데 모두 어리고 아들 하나는 금년에 낳았다. 모월 모일에 서거하여 모월 모일에 성남쪽 남촌(藍村)에 장사하니 향년 36세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어찌하여 온전한 재주를 주고도 / 胡界其全
목숨을 주지 않았던고 / 而不予年
참으로 알 수 없다. 저 하늘의 정함이 없음이여 / 夢夢乎其天之未定也
내가 이 명을 새겨 / 我鐫斯銘
천년에 이름을 울릴 것을 / 千載而鳴
오히려 우리 문경공에게서 상고하리로다 / 尙有攷乎吾文敬也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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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文敬李公墓誌銘 幷序
先稼亭公甞知丁亥貢擧。所取士多聞人。文敬李公年十五。神采曄然。當時已謂有父風云。其後學邃識高。名日益重。堂堂乎宰相之材矣。及其病也。衆以爲必無患也。斯人豈止斯哉。及其亡也。又以爲生之不辰乎。藥物之有誤乎。何斯人而至於斯乎。士大夫相與弔於朝。親戚故舊相與哭於其位。行路爲之嗟惜。上聞之悼甚。命重賻。下太常議謚。若曰。樞密不應謚。吾特褒岡者。文臣服勞久。政堂文學松壽耳。吾是以不能忘。異體同功。今岡而已。議旣上。上曰文敬。唯岡足以當之。嗚呼。公可以無憾矣。其友人上黨韓脩孟雲,曲城廉興邦仲昌父謀於韓山李穡曰。自吾友亡。人孰不悲之。然猶未免死。吾友使可傳者傳而死。則吾三人者之責。而亦所以自慰其悲也。於是以銘屬穡。脩書興邦篆。而其刻石則仲昌父,孟雲實幹之。嗚呼悲夫。吾尙忍銘吾友也哉。公諱岡字思卑。初名綱。避同列名遂改之。姓李氏。固城人。曾祖諱尊庇判密直可事兼監察大夫。有名慶陵朝。祖諱瑀鐵城君。父諱嵒都僉議侍中謚文貞。書法妙一時。號杏村。母洪氏侍中謚忠正諱子藩之孫。右代言諱承緖之女。初以門功錄事幞頭店。旣第丞慶順府。於典儀爲直長,主簿又爲令。兵部爲員外。門下省爲司諫。吏部爲郞中。戶部爲侍郞。密直司爲代言,知申事,提學,副使。歷內外制館。職至大提學。官至奉翊大夫。聦陵在書筵。選充侍讀。及遜位公從之居。其立志可謂不苟矣。上卽位之五年乙未。召見奇之。卽授主簿。令掌符璽。自是常在左右。愈久愈謹。其在吏部當遷。公奏曰。臣執筆注臣名。臣實不敢。上益重之。辛丑秋爲慶尙道按廉使。會北邊失守。擧國南徙。入其境。供偫充斥。所至如歸。士氣復振。卒殲兇黨。蓋有助焉。旣還京。代元文定掌銓選。方邊報絡繹。上下維持。各飽所望而成駿功。公之力居多。侍中之歿。上親圖其形。雖上所以褒異大功臣。歆動衆心。其德甚盛。亦由孝誠能有以動天也。至於臨事懼交友信。好善之篤。存心以平。吾所以友也。天或假年。坐廟堂决大疑行大政。無不如志。則吾將師之而未果也。悲之庸有旣乎。夫人郭氏。考判開城府事諱延俊。女若干皆幼。男一人今年生。某月某日卒。某月某日葬城南藍村。享年三十六。其銘曰。
胡畀其全。而不予年。夢夢乎其天之未定也。我鐫斯銘。千載而鳴。尙有攷乎吾文敬也。<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