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白頭山)기행문"(125)
2011.6.30. 예당 류재호.
산사랑 수요산악회 김갑순 회장님을 중심으로 산악회 회원님과 청주향교 서예교실회원님. 가까운 선후배 친우분들과 함께 25명이 모여 가족같은 분위기의 편안 마음으로 민족의영산 백두산천지와 옛 조상들의 독립운동 근원지를 살펴보는 문화기행을 떠난다. 장마철의 우중이라 걱정이 앞선다.
6월30일 오후 9시30분 청주 국제공항을 이륙. 깜깜한 밤하늘을 날으는 비행기를 지상의 찬란한 야경이 잠시 배웅한다.
2시간후 국제공항 연길(延吉)에도착. 현지 가이드와 잠시 미팅후 세기호텔23층에 투숙. 7월1일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보니 구름이 끼여있다.
다행이도 비는오지않는다. 천지(天池)을 볼수 있을지 걱정이다.
백번올라야 두 번보기 힘들다하여 백두산이라는 웃으개 소리가 있을정도로 천지보기가 힘든것이다. 연길시 새벽 풍경은 한산하다. 건물이며 도로가 우리나라80년대쯤으로 보인다. 시가지 중심으로 흐르는 블루하트강(만주어)은 유유하며주변에는 낚시하는 모습도 보이며 어린이들은 제기차기 놀이를 하고있다.
조식후 짐을꾸려 8시출발 용정을 지나 3시간후 이도백하에 도착. 진달래 식당에서 중식을 마친후 이도백하시를 벗어나니 빽빽한 원시림이펼쳐진다.
이길은 백두산의 관문으로 가는 길이며 미인송으로 유명하다.
40여분간 달려도착하니 장백산(長白山)이라고 쓴 대문이 보인다. 장백산은 중국에서 백두산을부르는 이름으로 일년내내 힌눈이 쌓여있다는 뜻이다. 안내소를 지나 10분쯤더 오르니 해발 1천2백M 고산. 빙장 초대소 주차장이다. 이곳에서 지프차로정상을 오른다.
우리가 오르는길은 북파코스로 흑풍구를 경유 천문봉을 지나 20여분만에 정상에 오르는데 협소한 길은 지프 운전 기사들이 난폭하므로 매우조심스럽다. 초입의 길옆으로는 자작나무. 백양나무. 전나무. 등 수백종의 나무들이 총총 들어서있고. 조선시대 궁궐을 짓는 재목으로 썼다는 홍송. 미인송.등의 원시림 거목들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있다. 높이 올라갈수록 울창한 숲은줄어들고 2천M를 넘어서니 광활한 초원이며 정상 봉우리마다 하얀 만년설이덮여있어 고산임을 더욱 실감케한다. 백두란. 초롱꽃. 등 진귀한 고산초들이형형 색색으로 별무리들이 무리지어내려앉아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는듯하다.
17년만에 다시 천지를 친견(親見)하니 감개무량하다. 우리 일행은 복받은 분들이다. 백년을 산다한들 이런 풍광을 보기 힘들다. 과연 천하의 비경이다.날씨가 맑고 화창하다. 실로 이곳은 우리배달겨래 근원의 발상지로. 왜 한국인은평생에 한번쯤은 백두산에 오르기를 간절히 원하는가. 천신만고의 자기 극복과 정화끝에 천지를 대하면 온몸이 후들후들 떨린다. 더 갈때없는 영원의 품에안겨 자신의 진정성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득한 높이 백두산 정상에 고여있는물은너무도 맑고. 깊고. 차서 하늘의 권속만이 근접할수있다.
바람.비.안개.구름. 그리고 해와달과 별들만이 그 모습을 천지(天池) 거울에비춰 볼수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오래 머무를수 없는곳이다.수백명의 관광객들과 어울려 천지에 발자국을 남기며 천지에 얼굴을 비추고 성지(聖池)을 마음에 담기엔 1시간이 너무짧다. 사진촬영이 분주하다. 사진은 형상을담는것이다. 80 이 가까운 두 노부부는 나란이 앉아 마음속에 영혼을 담는듯 천지를 바라보며 눈을감고 합장을 하고있다. 백두산(2.750M)은 함경남.북도와 중국에위치한 개국 신화를 간직한 한민족의 정기와 기상이 서린 민족의 영산으로 정상에서면 한반도와 만주를 한눈에 볼수있는 우리나라의 최고봉 ‘민족의영산’ 이다.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최고봉으로 장장 1천8백KM에 걸쳐 한반도의 남북을 가지르는 백두대간의 첫 줄기를 이룬다. 백두산의 서.북쪽은 중국 길림성으로.동.남쪽은 양강도로 갈라지며 2천5백M를 넘는 봉우리가 16개나되는 한민족의영산이다. 백두산은 약 4백년전인 1597년부터1702년까지 3차례의 화산 폭발이
있었으며 지금도 화산 활동의 후기 현상이 나타나고있는 휴화산이다.
중국의 ‘산해경’에 백두산은 불함산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에서는 단단대령.개마대산.도태산.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고려 성종때부터 산정 일때에 새하얗게 부석이 떨어져있어 힌 머리처럼 보인다하여 백두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필자가 보고 느낀 백두산은 응비웅사(鷹飛雄獅:매가날고웅장한사자모습) 이며청천성지(淸天聖池:거울같이맑은 하늘아래성스러운 큰연못)라 하겠다.
이런 민족의 영산을 북한이 1963년 중국과 비밀 국경협정을 맺고 한국전쟁 참전의 대가로 천지의 절반과 2천5백M 봉우리 8개를 몽땅 잘라 주었으며다행이도 우리의 정기가 서려있는 정상의 봉우리만은 넘겨주지 않았다.
하지만 한민족을 대표할수없는 집단의 이해 관계로 빚어진 손실이므로 앞으로생각해 보아야할 우리민족의 과제다. 아쉬움속에 발길이 무겁다.
빙장 초대소로 하산하여 우측으로 장백폭포를 오르는길에 천지에서 끌어들여만든 인공폭포 록연담(綠淵潭26M) 폭포에 잠시 들른후 30 여군대의 군을 형성하고있는 노천의 온천을 거쳐 1시간만에 장백폭포(68M)에 올랐다 천지물이흘러 달문을 나와 떨어지는것이 장백폭포이며 이물은 송하강으로 흘러 만주벌판을 적시며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이 되기도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앞의 절묘한 폭포 물줄기. 시간속 영원. 순백(純白)의 무한 지속에 경악과찬탄과 경외섞인 표정으로 매료되어 넋을 잃는다.
이도백하로 이동하여 일정을 마치고 석식후 장백산 호텔에 여장을 푼다.
7월2일 조식후 용정(龍井:용이승천했다는우물의전설)으로 이동중 가이드의설명으로 멀리 차창밖을 보니 비암산(飛岩山) 자락의 일송정(一松亭)을 바라보며 우리모두 숙연한 마음으로 ‘선구자’ 를 불러본다. 지금 일송정 자리에옛날 멋진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밑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이 자주모여밀담을 나누었다고. 일본인들이 이 소나무를 베었다고한다.
용정시 외곽지역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 를 둘러본다. 윤동주 생가는 복원했다고하나 너무 초라하다. 주위에는 미류나무 10여그루가 서있고 앞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할뿐. 마침 애환을 달래는듯 빗방울도 후드득 흩날린다.
대성중학교에 들어서니 저항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의 시비(詩碑)에 대표적 서시(序詩)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라고 쓰여있다.
교정을 둘러보고연길시립 박물관을 관람한후 오늘 일정을 마치고 세기호텔에 여장을 풀고석식후 노래방에 들러 2시간동안 여흥시간을 가졌다.
7월3일 오늘은 두만강 접경지대 관광으로 분단의 아픔을 체험하는 일정이다.
조식후 8시 도문(圖們)시로 향한다. 1시간 거리인 고속도로길은 5년전에건설 하였다고 하는데 2차 도로로 협소하며 차량도별로없다.
주위의 풍경은 넓은 평야로 이곳이 바로 만주 벌판이며. 논과밭. 모든땅은정부에속한 것으로 중국주민은 누구도 땅은 소유하지 못하며 모두 대여하여농사를 짖는다. 도문시에들러 북한과 중국 접경지대인 이곳에서 뗏목체험을한다.
이곳은 두만강 7백리길의 중류지역으로 도문북강 다리가있다. 다리를 건너면함경북도 남양시다. 다리 중간지점까지 중국쪽은 가로등이 설치 되어있으며 다리색갈도 선명하다. 북한쪽의 다리는 회색빛 뿐이다.
통대나무로 엮어만든 뗏목에 올라 30분간 한바퀴 도는데 유난히도 푸른 능수버들 나무사이속. 바로 강변옆에 북한군 초소에 어린 초병들이 사슴같은 눈망울로 목을 길게 내밀고 두리번 거리며 관광객들과 눈을 마주치며 손을 흔든다.
이런 분단의 비극이.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뗏목 노젖는 사공은 조선족 3세의 하동호(46)씨는 10살짜리 아들과 함께 할아버지 고향 전주에 한번 가보는것이 꿈이라고하는 말을 들으니 말을 걸어본 내가밉다. 우리들은 지폐 몇장을 건네 주면서 손을 꼭 잡아주며 꿈을 이루기를 바란다고했다. 두만강 푸른물에.....가 아니고 황토물이다. 발원지인 천지에서 7백리길이 끝나면서 동해로 합류되는 두만강은 (콩두豆 찰만滿)을 쓴다.
조그만 우물에 콩한톨을 떨구었는데 물이넘쳐 흘르면서 발원지가 되었다는 유래의 이야기다. 이넓은 중국에는 65개의 소수민족이 살고있으며 그중 우리민족을조선족 이라고 한다. 갈길이 바쁘다. 1시간달려 훈춘시에 도착. 훈춘시는 바로옆이러시아 이므로 러시아인들의 활보가많다 러시아 여인들의 옷차림이 해수욕장을걸어다니는듯하다. 이곳에서 한식으로 중식을 마치고 러시아.북한.중국. 삼각지대인 방천(防川)으로 옮긴다. 이곳은 중국땅 끝자락으로 러시아와 북한과 중국의경계 지역이다. 전망대에 올라 관망하니 마음이 복잡하다.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철교도 보인다. 되돌아 오는길에 안중근 의사가 기거 했었다는 유적지에 잠시들렸는데 정말 이럴수가없다. 다쓸어가는 토담집에 잡초가 무성하고. 안을 들여다보니 굴속같고 악취가난다. 벽에 걸려있는 활동했던 사진 몇장과 글귀 몇점이걸려있는데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말라 청춘은 다시오지않는다.’
‘가난하되 아첨하지말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다.’ 라는 글이 적혀있다.
어디서 어떻게 관리하는지 모르지만 모두 깨끗이 정리하고 그 자리에 비문이나한점 세워두는것이 좋을듯싶다. 우리모두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숙연하게 발길을돌린다.
연길시로 돌아와 마지막 석식으로 불고기 파티로 건배를 든후 연길 공항으로 이동중 진달래 시민 공원에 들러 시민들의 여름밤 음악 공연을 관람후 대하드라마같은 여정을 끝내고 7월4일 새벽 7시에 무사히 귀국 했습니다.
동행했던 모든분들 너무행복했고.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현지 가이드 조선족3세 김계월(金桂月)님도 수고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