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2호선
이 길로 작은 형님 면회 가던 길이다. 그때가 내가 대학교 1학년 때쯤인가 보다. 백양담배 2갑을 사서 손에 들려주고 논산으로 가는 집결지에서 무리 속으로 형의 뒷모습을 보고 난 뒤다. 김해 공병대대 에 근무하고 계신다는 군사우편에 주소하나로 무작정 차비만 가지고 부산을 정착지로 하는 버스를 올라탔다. 진주에서 말이다.
그때는 길에도 번호가 있는 줄은 몰랐지만 지금의 지도에 보면 자동차가 갈수 잇는 길은 모두가 고유번호가 있다. 그 시절은 운행수단은 기차와 버스다. 기차는 석탄을 태우고 가는 증기기관차가 대부분이었다. 버스는 미군트럭을 개조하여 만든 차다. 승객만 가득 싣고 비포장도로로 간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김해시 변두리 공병대대가 있다는 편지의 겉봉만 믿고 찾기를 여러 사람에게 물어 겨우 찾았다.
아침 일찍 출발하였지만 시간은 오후를 넘기고 있었다. 위병소에서 면회신청을 하고 한참을 기렸다. 그때서야 멀리서 급히 나오는 형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군대에 가신지 얼마 되지 않는 터라 졸병의 고달픔이 묻어 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면회소도 없었다. 위병소를 빗겨 나무 밑에서 두 손을 마주잡고 한 시간 남직 만나고 왔던 길이다.
군대간지 1년 반이 넘어 을까. 휴가를 왔다. 월남에서 온 편지를 받고는 아 형님이 월남전에 참전 하셨구나 실감하게 되었다. 전송도 하지 못한 죄스러움이 가슴속을 져메 오는 것은 핏줄의 연민인지 모르지만 짠한 마음은 아직도 여전하다. 용맹하던 형님이었다.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여 잔여 병기를 마치고 제대를 하였다. 술도 잘하고, 농담도 잘하고, 바른말 잘하며, 감정이 여리어, 눈물도 많으셨던 분, 동생도 잘 챙기면 집안일도 궂은일 좋은 일 마다 않고 열심히 하신 분 그런 분이 작은 형님이었다.
작전에 떨어지면 맨 먼저 공중살포가 이루어진단다. 헬리콥터가 낮게 날아 정글 위를 흰 액체를 뿌리고 가면 2-3일 지나면 정글의 나무는 모두가 말라버린다. 그러면 작전이 시작하여 화염방사기로 수풀을 태우면서 전진하여 소탕작전을 하고 돌아오면 휴가를 받아 월남의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겼다고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건강하게 사셨다.
마흔이 되고 부터는 손발이 저려오고 잠을 자지 못하는 증세가 시작하였다. 병원에 치료를 받아보았다. 그때만 하드라도 뾰족한 고엽제에 대한 처방이 있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손발이 저려 오면 소주를 먹어 취하여 주무시는 것이 잠깐이요. 음식을 먹는 것보다 소주를 병으로 마시는 것이 아침저녁이요, 치료를 위하여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했다를 반복하다가. 마흔 다섯에 어린조카들을 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정표에 국도2호선이 보이면 언제나 작은형님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허망하게 제대로 치료도 못하고 돌아 가셨다. 가만히 헤어보니 25년이 넘어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