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50년대의 한국 가요계에서 국민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았던 톱스타로는 남인수, 백년설, 현인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광복과 6.25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걸쳐서 주옥같은 히트곡을 쏟아내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고, 대한민국(남한 단독정부) 건국 이후인 1950년대에 들어서도 변함없는 인기를 과시했습니다.
특히 남인수는 1940~50년대 한국 대중가요계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훗날 조용필이 80년대 초반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될 때 바로 이 시기의 남인수와 비교대상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예전에 인터넷 “한겨레”의 토론장에 어느 분이 가요계 역사를 올려주셨는데 그 내용중에 나왔던 대목입니다.)
남인수는 1930년대 후반부터 가요계 최고의 톱스타로 등극했고 1940년대에는 남인수와 백년설이 가요계의 양대 톱스타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톱스타였던 남인수와 백년설은 대표적인 친일가요 “혈서지원”을 취입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불행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야후 위키백과 참조)
1945년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는 현인이 최초로 가수로 등록하면서 “대한민국 1호 가수”라는 영예로운 별칭을 얻었습니다. 현인은 광복과 6.25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배출해내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남인수는 1940년대에 이어서 1950년대에 들어서도 “가요황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가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습니다.
1940년대까지는 남인수와 백년설이 양대 톱스타로 군림했고 광복 이후부터 1950년대에 걸쳐서는 남인수와 현인이 양대 톱스타로 군림했습니다. 특히 남인수는 1936년에 가요계에 데뷔해서 1938년에 처음으로 “가요황제”의 지위를 얻은 뒤, 194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1950년대까지도 가요황제의 지위를 유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 “황성옛터”, “미소의 지평선”, “장전바닷가”, “감격시대”, “추억은 상록수”, “낙화유수”, “남아일생”, “가거라 삼팔선”, “청춘고백”, “추억의 소야곡”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쏟아냈습니다.
현인은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전우야 잘자라”, “럭키서울”, “애정산맥”, “서울야곡”, “꿈이여 다시 한번”, “인도의 향불”, “명동애래지”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쏟아냈습니다.
그 외에도 가수 겸 작곡가 한복남은 “빈대떡신사”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명국환, 권혜경, 박재랑, 이해연 등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실 광복 이전에는 오늘날처럼 통계나 차트가 정밀하게 나와 있지를 않아서 오늘날의 “신세대”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매니아층이나 평론가 집단에게는 옛날 가수들이 다소 무시를 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구자들, 한국 가요계의 뿌리가 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 대중음악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남인수와 현인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6.25 전쟁을 전후한 시기인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20년 이상을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광복 이후에는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용필이라는 “국민가수”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은 “동백아가씨”(이미자),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신라의 달밤”(현인), “눈물젖은 두만강”(김정구), “사의 찬미”(윤심덕), “목포의 눈물”(이난영) 등과 함께 한국 대중가요 역사의 불멸의 히트곡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1948년의 남한 단독정부 건국 이후부터로 거론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1919년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 역시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그 뿌리를 두고 발전을 시작해서 광복과 정부수립 이후로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
남인수는 광복 이전(1940~50년대) 대중가요의 중심인물로서 광복 이후에 최고의 톱스타로 군림했던 이미자(1960년대), 조용필(1980년대)과 함께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남인수를 비롯해서 그와 함께 한시대를 풍미했던 백년설 등을 비롯한 상당수의 인기가수들이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불행한 역사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야후 위키백과에서 해당되는 가수들의 프로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가수들은 친일 행적이 발견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라는 아픈 역사의 상처로 인해서 한국 대중가요의 뿌리가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대중가요의 발자취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도 조사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불행한 역사의 상처를 딛고 발전을 거듭한 한국 대중가요는 오늘날에는 “한류”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각광받으며 위상을 떨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출처: 과거 신문기사와 TV 방송 등을 기본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네이버, 다음, 가수 홈페이지)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옛날 가요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더욱 많은 부분을 의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