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大物)
음경(陰莖:자지)은 남자의 씸볼인데 나는 일명 대물(大物)이라 명명한다.
거대한 거시기를 호방하게 이름붙인 깊은 뜻을 알아주면 좋겠다.^^
오늘 하는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으로 거짓말같은 우리의 역사이기에 소개하는바이다.
나라마다 전설과 설화가 있지마는 이렇듯 성을 소재로한 내용이 젊잔을 부려야할 역사책에 실려있다이 ㅎㅎㅎ 함 보자.
1.지증왕과 왕비
신라 제22대 지증왕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 : 서기 500년)에 즉위 하였다.
왕의 음경의 길이가 1자5치나 되어 배우(配偶者)를 얻기 어려워 사자(使者)를 삼도에 보내어 구하였다.
사자가 모량부 동로수 아래에 이르러 개 두마리가 큰 북만한 똥덩어리 두 끝을 물고 다투는것을 보고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하기를
< 이곳 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수풀속에 들어가 눈 것입니다 > 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 보니 그 여자의 신장이 7자 5치였다.
사실대로 아뢰니 왕이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궁중에 맞아들여 황후를 삼으니 여러신하가 모두 하례하였다.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瑀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冬老樹下 見二狗교一屎塊如鼓大 爭교其兩端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此部相公之女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尋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見事奏聞 王遺車邀入宮中 封爲皇后)
남근이 엄청나니까 .... 거기에 걸맞는 여근을 구했다는 이야기인데 어찌 거대한 똥을 견주어 표현했단 말이냐 ..으이구 ~
2.경덕왕편을 보면 찬기파랑가가 나오고 곧바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왕(경덕)의 옥경(玉莖:자지)의 길이가 여덟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으므로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을 봉하였다.
그 후에 만월왕후(滿月王后)에게서 태자를 낳아 어린나이에 왕이 되니 그가 곧 혜공왕(惠恭王)이며 선덕(宣德)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경덕왕의 경우를 보니 사내의 물건만 좋았지 그 후사는 옳바르지 못하였슴을 알겠다 ^^
3.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왕(金水露王)의 남근이 또한 거대하였다고 한다.
백성들이 낙동강 왕래에 불편을 격는것을 보고 왕은 자신의 남근을 다리처럼 양쪽 강언덕에 걸쳐놓았다.
백성들은 왕의 거시기를 다리로만 알고 건너다녔고 어느날 한 백성이 지게에 짐을 지고가다가 다리위에서 쉬다가 곰방대에
담배불을 붙여 피우고는 다리에다 탁탁털었다한다.
왕은 뜨거웠지만 최선을 다해 참았고 ...^^ 그 부위는 까맣게 타서 검은점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김해김씨 남자들 남근에는 검은점이 있다하는데 ... 이런것도 유전이 되는가 ㅎㅎㅎ
이렇듯 성을 대상으로한 이야기가 버젓이 사서에 올라있다는 자체가 한편 재미도 있고 흥미롭다는 이야기다.
딱딱하기만 하고 경직된 역사물에 이런 첨가물이 들어있으니 말이다.
물론 삼국유사는 고려때 승려 일연(一然)에 의해 지어졌지만, 그래서 그 내용이 정사인 삼국사기에 비해 전설적,설화적
불교적 색체가 강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현상인것이다.
왜냐하면 신라천년,고려 오백년 모두 나라의 종교가 불교였으니 그 시대에 또다른 다른 종교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여지가없었고 당시로서 고작 다른시각이라면 유교적 관점에서나 고찰이 가능했을것이다.
그 유학도 불교의 나라 고려에 들어온 역사가 짧던시절이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그 유교적 사상에 바탕을 둔것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니 가장 중립적인 춘추의필법적 사실기록이 된다.
유교(儒敎)는 종교가 아니요 학문이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