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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니까 인생이다!
딤후 4장 9~18절
MBC의 ‘나혼자 산다’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만 켜져 있으면 다른 것으로 돌려 버렸는데
지난 해에 이 프로그램이 연말 시상을 다 쓸어 버렸습니다.
신인상, 작가상, 프로그램상, 각개인 우수상, 최우수상 뿐만 아니라
전현무가 MBC 연예 대상까지 받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매우 의아하고 놀랐는데 지난 연말
트렌드코리아2018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나 혼자 산다’고 하는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를 반영해 주었고 많은 분들의 공감을 샀던 프로그램이다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도 혼자 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혼자 산다고 해서 청승 맞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자기의 삶을 즐기고, 때로는 고급지고 럭셔리 하게 살아갑니다.
자기만의 삶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나혼자 산다 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그 이상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서로가 가족과 같은 끈끈한 정을 보여 준 것이
이 프로그램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설날이 다가오면 저는 항상 마음이 무겁습니다.
나는 기쁘고 좋은 데 다른 사람이 슬프고 기쁘지 않다면
이것은 대단히 잘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설날 가족이 없이 혼자 지낼 수 밖에 없는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가장 무거웠습니다.
가족은 있지만 외국에 나가 있다 보니까
불가피하게 외로운 명절을 보내셔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랑은 항상 같이 있고 싶은 것인데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을 보면 이것 또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연말 트렌드코리아 2018을 읽으면서
혼자 산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느냐 하면
혼자 산다고 해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혼’자로 시작된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혼자 밥을 먹는다고 해서 혼밥, 혼자 영화를 본다고 해서 혼영
혼자 술을 먹는다고 해서 혼술, 혼자 여행을 한다고 해서 혼행
혼자 취미를 즐긴다고 해서 혼놀, 혼자 호텔에서 보낸다고 혼텔 등
혼으로 시작되는 말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인을 대상으로 한 상품과 서비스가 엄청나게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은행, 시장 등 모든 곳에서 1인 상품을 계발하고 있고
심지어 광화문은 일인이 놀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 선전하고 있고
또한 식당에도 혼자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여행사도 명절에 혼자 여행할 수 있는 상품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일인 시대가 일상화 되어 가고 있고
점차 일인 사회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인 시대가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취향은 계속해서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의 1인은 결코 고독한 것만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으며
혼자 밥을 먹어도 아주 럭셔리하게 먹는 것이 1인 시대입니다.
일본의 모리 히로시가 5년간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2년 반 동안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대부분이 시간을 이렇게 홀로 보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창조적이고 활기가 넘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책을 내 놓았는데, 그 책이 「고독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독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자발적인 고립을 통해 충분한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즐거움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곳은 먼 곳에 있다」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도시 생활의 번거로움을 벗어나
혼자 지내고 싶어서 사막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배낭을 메고 사막을 무작정 걷습니다.
그리고 사막에서 사람들을 만나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무작정 사막에서 혼자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막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사막 어딘가에 가장 아름다운 오아시스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오아시스를 찾아갑니다.
서로에게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는 두 남녀가 만나서
그냥 그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중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그 오아시스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인생은 고독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고
고독을 통해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고독해 지라고 하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외로움이라는 고독을 다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가득 차 있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우리 인생의 갈망도 있습니다.
오트랑스 블루의 <사막>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정말로 짧은 시이지만 인생의 외로움을
이렇게 잘 표현해 준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외로워서 자신의 찍힌 발자국이라도 보려고
뒷걸음 치고 있는 인생의 고독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같이 사진을 찍을 사람이 없어서
자신의 그림자를 찍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 심정이 <사막>이라는 시를 쓴 시인의 심정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고독해 지고 싶습니까? 아니면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우리는 이 고독을 다윗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왕이었고,
절대적인 왕권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앙적으로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찬양대를 체계적으로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시편을 지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일개 목동이었을 때나 일국의 왕이 되어서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시편 23편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왕이 되고, 모든 영화와 부귀를 누리며 살았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여호와를 자신의 목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실했던 다윗도 사실상 외로웠습니다.
아마 그는 몸서리치는 고독을 경험하면서 산 것 같습니다.
시편 25편 16절에 보면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핍박과 자신의 죄 때문에
이 시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죄 때문에 이 시를 썼다면 그 외로움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멀어지다 보니까 너무 힘든 것만이 있습니다.
마음의 근심도 많고, 곤고와 환란이 많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받는 환란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다윗은 외로움에 괴로움 까지 더해지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신의 외로움과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진저리나도록 외롭고 괴로움에 빠진 자신을 구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바울도 외로운 자였습니다.
바울은 사울이었을 때,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믿는 성도들을 잔혹하게 핍박하고 잡아다 옥에 가두고
모질게 고문까지 했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사울은 바울이 되었고,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바울의 진정성을 믿어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목소리를 높여도,
이제 더 이상 박해자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핏대를 세워 이야기를 해보아도
사람들은 그의 진정성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그의 박해가 잔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 논쟁은 초대교회의 최대 이슈였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의 절반가량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의 남은 인생을 주께 헌신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외로웠습니다. 특히 그의 말년에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의 말년의 외로움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9절부터 11절까지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갔다고 말을 합니다.
모두가 자기 자기를 떠나갔고 누가만 남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가이사의 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왔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이태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이때 그를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감옥생활을 하는 중에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독했습니다.
처음에도 고독했지만 인생 말년에 와서도 고독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디모데를 불러들이고
심지어 마가까지 데리고 오라 했는지 싶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매우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모든 허물을 그들에게 돌리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을 떠나간 사람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바울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 바울을 버리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으로 섭섭하고 서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다 나를 버렸을지라도
자신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바울을 두고 떠났을까요?
아마 바울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지식하고 엄격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있으면 좀 힘듭니다.
때론 바울이 강경해서 바나바와 결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성격상
누구와도 함께 같이 지낼 만큼 편안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변의 사람들이 자꾸 떠나가고
외롭게 고독하게 자기 자신만 남은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간 외롭고 쓸쓸한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사람이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힘과 위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롭고 고독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은혜의 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말씀을 결론 맺겠습니다.
나무에 나이테가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인생의 나이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나이테는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나이테에 아주 진하고 짙은 아름다운 줄무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독입니다.
그래서 외로운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외로움을 통해서 자신의 독특한 인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길 원합니다.
아무도 없이 떠나간 그 빈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바울처럼 깨닫기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자신이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고
모든 악한 것에서 건져 주셨으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도 받았습니다.
다윗도 외로울 때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는 외로우니까 인생인 것 같습니다.
고독의 터널에서 믿음의 더욱 진한 향기가 묻어나오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