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박국
이 향 숙
묵은 지를 송송 썰어 콩나물 한 웅쿰, 두부를 길게 채 썰어 넣고 김칫국을 끓였다. 반찬으로 생선구이를 올리느라 베란다의 창문을 열어 놓았다.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이 거세져 버티칼이 창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남편이 좋아하는 청양고추를 몇 개 꺼내려 냉장고의 채소 칸을 열었다. 된장찌개를 하다 남은 애호박 반 토막의 잘린 부분이 꼬들꼬들 마르고 있었다. 새꼽빠지게 애호박 국이 먹고 싶다. 하지만 밥상은 이미 차려졌고 내일 아침엔 솜씨발휘 한번 해보자.
굵은 멸치 몇 개 넣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멸치는 건져내고 애호박, 양파 , 대파 , 두부, 다진 마늘 그리고 새우젓으로 간을 하여 끓이면 담백한 맛의 맑은 애호박 국이 된다. 거기다 청양고추 한 개를 다져 넣으면 매콤하며 시원함까지 더 해져 내 입에 딱 맞는다. 나는 이 서민적인 맛을 좋아 하지만 소고기를 잘게 썰어 넣고 들기름을 반 수저 넣으면 고소하여 한 여름엔 보양식이나 진배없다.
중학교 3학년 여름, 그날 사촌들이 넷째 작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우리 집에 왔다. 넷째와 막내 작은집의 아들들이다. 동생까지 다섯 명의 사내아이들과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 집 일을 도와주시던 윤진아저씨는 들로 나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한해가 지났었고 자식을 먼저 보낸 할머니는 풍으로 쓰러져 자리보존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들로 나가시기 전 신신당부를 하셨다. 6시쯤에는 전기밥솥의 버튼을 누르고 7시 30분쯤에는 장독대 옆 화덕 위에 있는 솥의 불을 지피라고 하셨다. 애호박 국인데 한 소큼 끓이다가 꼭 뚜껑을 열어 넘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 정도쯤이야 밖에서 우리 집 일하느라 고생하는 사촌 동생들과 한참 사춘기인데도 동생들을 진두지휘하는 오빠도 있는데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라 했다.
할머니를 돌본다는 명목 아래 나는 시원한 마루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물을 먹여 드리고 미숫가루를 타서 한 숟가락씩 입에 넣어 드리기도 했다. 황도를 좋아 하셔서 잘게 잘라 드리면 꿀맛이라고 하셨다. 대변을 보실 땐 얼굴을 찡그리며 내 손을 잡고 고통스러워 하셨다. 더럽다는 생각도 없이 물수건으로 엉덩이를 닦고 애기 분을 발라 뽀송뽀송한 기저귀를 갈아 드렸다. 기저귀도 하얗게 빨아 널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잠들면 나도 옆에서 졸기도 하고 할머니 젖가슴을 조물거리며 ‘내꺼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밥솥의 버튼을 누르고 방이며 마루도 청소하고 마당에 자리를 깔았다. 손님이 많을 때 쓰는 긴 상도 펴고 마루에 있는 냉장고에서 반찬을 접시에 담아냈다. 평소 어머니는 웬만해서는 나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그래선지 일이 재미있고 보람되기까지 했다. 내가 밥상을 차린걸 보면 어머니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제 애호박 국만 끓이면 된다. 한 소큼 끓이고 뚜껑을 열었다 닫으라고 했다. 좋아 지금이다. 전등이 멀리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간을 보자 ‘캬~’ 소리가 절로 난다. 웅성우성 변성기의 오빠부터 동생들이 우루루 앞 다투어 들어오고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뒤따르신다. “얼래~ 우리 애기 밥상을 다 차렸네~ 아이구 이뻐라~” 어머니가 말씀 하셨다. 푸카푸카 요란하게 씻고 사촌들과 작은 아버지는 할머니부터 들여다보았다. 맛있다고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거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나도 애호박국을 몇 번 떠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집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무당 굿하듯이 펄펄 뛰었다. 식구들은 내 모습에 놀라서 다 일어서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오빠는 바람같이 달려와 왜 그러느냐며 내 팔을 잡았다. “개구리야. 개구리야” 애호박국은 개구리 탕이 되어 있었다. 솥뚜껑을 한번 열었다 닫는 그 짧은 순간 어두워서 내가 보지 못했지만 개구리가 뛰어들어 갔나보다. 제 한 몸을 희생하여 가마솥에 몸을 던진 개구리들이 작은 아버지와 사촌들의 국그릇에서도 나왔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개구리만 숟가락으로 건져 마당에 휙 던지고는 맛있다며 다 먹었다. 배가 고팠던 것인지 내가 맛있게 잘 끓였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는 한 그릇씩 더 떠다 먹는다.
나는 그날 이후 애호박 국에는 손이 가지 않았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어선지 어릴 적 먹던 음식을 그리워하고 있다. 호박잎, 머위 쌈, 진잎 국, 애호박국... 그 음식엔 어린 시절 가족과의 추억이 있어서 좋다. 하지만 변성기의 사촌 오빠는 이 세상에 없다. 오빠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처음으로 간 야유회는 그해 6월6일 현충일에 있었다. 그리고 놀이 중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내게 애호박국은 한없이 다정했던 오빠와도 같다. 이제는 오빠를 보내줄 때가 되었지 싶다. 숟가락 위의 개구리를 잊고 애호박국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새꼽빠지게: 엉뚱하게(충남홍성 사투리)
첫댓글 새꼽빠지게 ㅋㅋㅋㅋㅋㅋㅋ 보양식 드셨구먼요~~
한그릇 떠드려볼걸~~ 담에 보양식으로다가 드릴께요~
개구리탕!!!!끔찍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