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비싼 학원비

1999년 1월 4일, 그야 말로 절박한 심정으로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학원에 등록을 했다. 전년도 말에 I.M.F의 여파로 인해 부도 난 회사를 퇴직하고 낙향을 결심한 바라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그야 말로 생계가 달린 문제였다. 그런 관계로 자격시험에 떨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책을 봤다. 아마 그 이전의 내 생애를 통틀어 얘기하더라도 그 만큼 공부를 한 적은 없었을 게다. 오죽하면 내가 집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했을까!!! "고등학교 때 이 정도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는 몰라도 연고대는 갔을텐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 쓰라린 입시에 대한 실패로 인해 내 졸업식은 그야 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엄마와 아버지에게는 아예 학교에 얼씬도 마시라고 했고, 친구들에게조차도 아예 연락을 않고 조용한 졸업식을 보냈다. 그래도 안됐던지 파장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무렵 헌이가 찾아 왔었는데 그 조차도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으니 그 때의 상실감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을 게다. 오죽하면 단 한 장의 졸업식 사진도 없을까!!! 참고로 앨범에 꽂혀 있는 졸업식 사진은 대구고 졸업식 때 꽃이며 앨범 등등을 친구에게 빌려 찍은 사진이니 오해 마시길... 이 쯤 되면 누구라도 정신을 차릴만도 한대 노는 것엔 일가견이 있어도 공부엔 영 취미가 없었으니 그 분위기는 재수할 때 까지도 계속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학원에 등록을 한 첫 달은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유신학원에 등록을 했는데 친구가 대신 시험을 쳐 준 관계로 특설반에 배정이 됐었다. 첫 시험에서 2등을 했으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한 것은 맞았다. 그 해 식목일 무렵에 세란이 누나가 결혼을 했다. 식장이 대구였던 관계로 결혼 준비를 우리 집에서 했는데 그 분위기에 휩싸이면서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티푸스까지 앓으면서 학원을 빼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학원에 가는 날이 학원을 빼먹은 날보다 훨씬 많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보통 월말이면 학원비를 지불한다. 그런데 그 달 말 학원비를 받던 날에 술을 마신 게 탈이었다. 술이 술을 마실 정도까지 취한 관계로 받은 학원비를 몽땅 써버리고 말았다.   진노한 아버지의 모습이 무서워 말도 못하고, 5월부터는 도서관에 쳐박혀 공부하리라고 굳게 마음 먹었다. 그리고는 학원 대신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학원에 다닐 때조차 제대로 되지 않던 공부가 도서관에 박혀 혼자 한다니 어디 말이라도 되겠는가? 그 때부터 그야 말로 오리지날 농땡이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이면 학원에 나간다고 집을 나서지만 최종 기착지는 학원도, 도서관도 아닌 친구의 집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때 재수를 해서 경북공고에 입학한 친구였는데, 야간에 적을 두고 있었던 관계로 내가 학원에 가고 파하는 시간이 그 친구가 학교에 가는 시간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하여간 5월 한 달은 온통 그 친구 집에서 보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공부는 잠시 접어 두고 종일을 쏘다니며 재수생은 물론, 대학생보다도 더 한가한 생활을 즐겼으니 지금 생각하면 허망함 그 자체밖에 없다.   6월에 다시 학원에 등록을 했다. 하지만 이미 생활이 되어버린 탈선의 행위는 내 스스로 제어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학원을 가는 날보다 친구 집을 찾는 날이 훨씬 더 많아졌고, 때때로는 서울로, 부산으로 친구들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7,8월은 아예 맘 먹고 학원비를 삥땅을 쳤다. 삥땅 친 돈은 물론 술을 마시는 데 다 탕진했고... 어쩌면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할 바엔 차라리 학원비를 다른 데 쓰는 게 더 나을 것이란 사실을 스스로 터득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다 용돈이 궁해지면 책상 위에 앉아 공부하는 척만 하면 '원이 저 놈이 공부를 다 한다'는 말을 할 만큼 아버지를 즐겁게 해 준 덕분에 평소보다 더 많은 용돈을 타 낼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굴려 온 잔머리가 이제는 도를 논할 경지에 도달했다고나 할까!!!   사실 그렇게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8월 말이 되니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별 뾰족한 수도 없고, 답답한 맘을 숨기고 하루하루를 초조하게 보내고 있을 수밖에... 마침내 구세주가 나타났다. 몸이 아파 학교를 늦게 입학한 관계로 나이가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친구였는데, 같이 독서실에 박혀 공부를 하자는 제의를 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답답한 시기였는데 그 친구가 나를 살려 준 것이다. 그 때부터 대현동 그 친구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독서실에 나가 공부를 했다. 간혹 다른 친구를 만나 한 잔 하기도 하고 더러는 시내를 쏘다니며, 제 버릇 개 못주는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나름 대로는 열심히 했다. 적어도 특별 전형으로 본고사 없이 계명대 경영학과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로는... 마지막에는 그 친구의 사촌동생(역시 우리 동기다)으로 인해 더 이상 누를 끼칠 수 없어 우리 집으로 옮겼지만...   그리곤 시험, 예비고사를 치룬 다음 날 종합반에 등록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예 학원을 빼 먹는 생활의 부활이었다. 딱 한 번 학원에 갔었다. 영어시간이었는데 반은 자고, 반만 들었다. 그리고는 또 다른 깨다름으로 인해 가방을 싸들고 학원을 나왔다. 그것으로 학원 생활은 끝이었다. 50일 동안의 학원비를 반 시간에 날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수업이 끝난 것이다. 예비고사 성적이 나오고, 속 모르는 아버지는 여기도 쳐 봐라, 저기도 쳐 봐라 다그쳤지만, 내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정확히 반 시간 본고사 준비를 해 놓고 언감생심 무슨 본고사를 치른다는 말인가!!! 아무 생각없이 특차를 지원해 놓고 맘 편하게 노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리고 나니 그 혹독했던, 하지만 후회도 많았던 1970년대도 끝이 나고 있었다.   지금도 그 친구에겐 늘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1979년 여름 그 친구가 내게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를 하자는 제의를 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지금의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내 성격상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