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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암동학사상연구소( http://cafe.daum.net/oamdonghak )에서 모신글
*** 이 글을 퍼온 것은 이 글 중간에 북한 천도교관련 아래 대목 때문,
#### 천도교 교단의 교인수 변동(1905-2009년의 100여 간의 변동)과 그 과정 속에서 교단의 활동과 교단 지도자들의 공과에 대한 연구는, 사회변동을 깊이 다루고 있는 사회학의 방법으로 종교라는 특수성을 감안한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새로이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연구는 시급성을 요하는 것이며 이 연구의 결과는, 지금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과 천도교의 미래를 어떻게 창조할 것이며 그 창조를 위하여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줄 것이라는, 최소한 이 두 가지의 확신을 갖고 있다
교단의 중심세력이 30년대 이후부터 북한지역으로 이동 확대되었고, 북한에서의 교단운영과 교인들의 신앙지도와 교육은, 구파에서 말하는 기준으로 한다면, 전부 신파계열의 지도자들에 의해 육성되었다. 해방 전후의 천도교 교인 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학계나 교단내외에서 언급되어온 것을 바탕으로 말한다면, 신, 구 교인의 비율은 85% 대 15%에서 80% 대 20%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교인 수에 대한 연, 월성납부라는 구체적인 자료로 한다면 비율은 달라져, 신파계열의 교인 수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950년 중엽까지 연, 월성을 납부하고 있는 북한만의 교인 수는,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 법도(法道)부장으로 재직했던 문 재경(文再慶)이 6, 25동란 중에, 휴대하여 가지고 온 자료에 의하면, 북한 6개도(평남, 북, 함남, 북. 황해. 강원.)별 통계와 총계에 의하면, 2백 86만 6천 3백 42명이다.
여기에다 3.1 재현 운동을 정리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박 연수(朴延壽)는 북한 천도교 청우당의 당원 수는 55만 여명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6,25동란시기에는 당원 수가 더 증가되었으므로, 상당한 당원수를 가진 청우당이었다. 청우당의 당원의 대다수는 천도교인이었지만 당원 자격기준으로 천도교인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인 수가 상당 수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보면, 천도교인과 청우당 당원의 총수는 300여만 명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불과 5년(1945-1950)만에 교도 300여 만 명의 교단으로 다시 복귀한 놀라운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놀라운 성장에 대해 어느 누구도 평가 절하하는 평가와 북한에서의 천도교의 종교 활동과 청우당 활동의 결과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비난하거나 묵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천도교가 대 교단으로 성장한 이 기간 동안에 남한에서의 교인 수는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남한의 교인수를 최대 비율로 계산해도 30만 명을 넘을 수가 없다. 이 기간 동안 연, 월성 수납에 따른 자료가 공개된 적도, 교호 수나 교인 수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20 만 명 이하일 것이라 추측된다. 경, 충, 전, 강(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등의 4개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구파의 교인 수는 10 만 명도 안 되었을 것이다. 1961년 천도교 총부 수습 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신파계열인 경상도를 합쳐서 10만 명이 안 되었다. 이것은 연, 월성을 납부한 교인만의 통계이지만, 구파계열 중에 총부에 연, 월성을 납부한 교인은 극소수였다. 그렇다고 수습위원회 납부한 구파 계열의 교인 수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지만, 그 때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1 만 명도 안 되었다.
필자는 이 시기에 교단의 3 부경전 간행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단 내의 사정을 교단의 종무에 관여한 교역자나 원로들로부터 들었거나 경전 간행비 조달을 통하여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하면, 북한 천도교가 융성한 발전을 한 5년이란 기간 동안에, 남한의 천도교는 쇠퇴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천도교의 전체 교인 수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지만, 구파계열에 참여하고 있는 적극적인 지도자와 교인들의 교호 수는 200호를 넘지 않을 것이라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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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천도교임시본부에서 운영하는 사이트 http://www.cheondogy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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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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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상)
목차1. 들어가는 말.
2. 정통연원(正統淵源)이란 무엇인가?
3. 관지포(觀知包)는 어떤 연원인가?
4. 관지포 도정 이용우(李龍宇)는 누구인가?
5. 종문심법 전수원(宗門心法; 또는 水雲心法 傳授院)과 천도교 임시본부.
6. 관련인물들의 프로필.
7.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천도교 임시본부’는 어떤 단체인가라는 정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많은 자료들을 읽었습니다. 필자의 독단적일 수 있는 사견을 피하고, 공정성을 확보하고, 천도교 임시본부의 핵심이 구파계열의 인물들인 만큼 구파의 성격과 현재의 상황과 주장을 알기 위하여 필자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밝히겠습니다. 필자는 이미,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하고,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이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을 몇 개의 글로 게시했었습니다, 필자가 이미 천도교 각 게시판에 게시하였던 다음의 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허황되며, 교단 역사의 흐름과 본질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며, 매우 편협한 생각에 묻혀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1.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각 종 교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봅니다.
포덕145(2004)년 10월 21일. 게시.
2. 천도교가 친일파의 소굴인가? 포덕147(2006)년) 1월 24일. 게시.
3. 친일행위는 신파만 했는가? 포덕147(2006)년 1월 24일. 게시.
필자는 다음에 열거한 구파계열에서 간행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기술하였습니다. 또한 인용된 모든 내용들은, 아래 자료들의 기록을 그대로 하거나 내용을 요약할 필요가 있을 때는, 내용이 자료간행의 의도대로 충분히 전달될 수 있도록 기술했습니다.
1. 天道敎 精神史; 포덕 122(1981)년 2월 11일. 天道敎 京忠全淵源. 198페이지로 간행.
2. 法皇 春菴上師 在世史料集 ;포덕 129(1988)년 仲夏에 37페이지로 간행.
3. 동학, 천도교 약사; 용담연원. 포덕 131(1990)년 4월 4일 간행.
4. 修道의 正法; 천도교 정통연원. 포덕 133(1992)년 3월 10일 간행.
5. 天道敎 正統淵源 略史; 천도교 정통연원회. 포덕 133(1992)년 8월 14일 간행.
6. 法宗 春菴上師; 포덕 134(1993)년 4월에 김 정철. 37페이지로 간행.
7. 극동의 태양; 이 용우. 포덕 143(2002)년 4월 25일 간행.
8. 동학 천도교약사; 김 완수. 포덕 144(2003)년 7월 30일 간행.
9. 예산 동학 혁명사; 박 성묵. 포덕 148(2007)년 10월 25일 간행.
10. 천도교 정통선언과 천도교 홈페이지 개설에 즈음하여 /천도교정통선언서 / 을묘통일운 동/ 포덕 149년 8월 23일에 간행 배포된 A4용지 크기의 16페이지 책자 유인물.
11. 종문심법 관련자료; 기우만, 박세환 등이 천도교 홈 및 동학관련 게시판에 올린 자료.
2. 정통연원(正統淵源)이란 무엇인가?
수운대신사님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받으셔서 천도를 창명하신 천도교를, 해월과 의암을 거쳐 이어 받은 춘암상사께서, 포덕 68(1927)년 8월 14일에 교인 80여명의 일반에게 심법을 전해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전체 교인은 대신사님의 연원이지만 이중 춘암으로 부터 받은 80여명만이 정통연원의 맥이라고 단정하면서, 정통연원이 아닌 교인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嫡子와 庶子의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구파는 정통이고 적자이며, 신파는 정통이 아닌 서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파는 수운의 혈통의 순수성이 결여되었다는 주장이다. 정통연원이 아닌 교인들의 교단활동 전부(대표적인 것은 의절 수정과 서천문의 맹서와 신앙방법 등.)를 심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단정하고 배척하고 있다, 그들의 끝없는 주장 중에 핵심은, 모든 교인은 춘암성사 앞에서 입교해야 올바른 스승의 명교를 받는 것이라 하면서, 정통연원으로 돌아올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날에 용담연원, 정통연원, 종문심법 전수원(또는 수운심법 전수원.), 천도교 임시본부 등의 기본정신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며,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 궁극적으로 ‘춘암상사를 천도교의 4세 종통으로 옹립하는 것과 정통연원의 재건에 있다’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계파싸움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지난 70년대 중엽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30여 년 동안, 내부적으로 지속적인 구파계열의 활동이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워 천도교의 올바른 미래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춘암상사를 몹시 숭모하는 구파의 일부 교인들의 욕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이런 파벌적인 행동은 천도교 발전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 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매우 무의미한 노력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이 일에 앞장서거나 가담하고 있는 몇몇 분의 구파 원로들이 환원하시면 더 이상의 동력(動力)은 멈추어 서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이미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정통연원이 생긴 이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천도교는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신, 구파 계열의 활동을 중심으로 돌아보기로 하자.
해방 전까지는 신, 구계열의 지도자들이 모여, 교단발전을 위한 장래를 위하여 서로의 주장들을 조율하여, 포덕 81(1940)년 4월 4일 신구 합동대회에서 기관의 명칭을 ‘천도교 총부’로 정하고 각 기관의 새로운 임원을 선출하여 단합된 교단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점령하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아래에서는 운신의 폭은 넓지 않았고, 기미독립 운동이후, 교세가 신파계열이 많은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신, 구간에 갈등은 내재되었고, 이로 인한 교단의 단합도 어려워졌다. 해방이 되자 일제에 의해 일본 군수공장으로 빼앗겼던 대 교당을 포덕 86(1945)년 8월 17일에 회수하게 되었다. 해방 후 일제시대를 살아오면서 교단 지도부의 일부 교역자들의 칠일논란으로 친일문제 해결이 시급하게 되었다.
동년 9웡 2일에 권 동진, 오 세창이 최 린에게 은퇴할 것을 권고했으나 거부하자, 동년 10월 25일에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최 린을 출교하자는 선천(宣川)의 계 행노(桂行老)의 동의와 용천(龍川)의 정 용성(鄭用成)이 재청한 “최 린은 4세 종통을 부인한 사문의 난적이요 일본군문에 복종한 민족반역자이니 대회에서 출교하자“ 는 출교문제로 대회장이 소란해지자 휴회하고 다음날이 26일에 출교처분하고 교약도 수정하여 구파의 지도자가 다수 참여한 교단의 임원이 결성됐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최 린의 출교문제로 인해서 최 린 측에서는 많은 불만을 품고 있으며 또한 남북이 갈라짐으로 인해서 총부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230-233. 요약.
이후 교단 임직원 구성에 있어 신파에서 교인수의 비례로 2대1로 구성하자는 제안이 구파에 의해 수용되지 않자, 내용적으로는 분립하는 파행을 가져왔다. 포덕 87(1946)년5월 24일에, 신,구 대표로 각각 3인씩 6인이 모여 의논한 결과, 사무실(우이동으로 이전한 총부 본관 건물.)을 반분하여 동편은 구파인 ‘천도교 총부’가 사용하고, 서편은 ‘천도교 본부’라는 새로운 기관 명칭으로 신파가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리 운영방법의 시초는 포덕 66(1925)년 12월 25일에 제 1차 신,구 분립으로 각 계열의 종무를 처리하는 교역자들을 선임하여, 동쪽 절반은 정통파라고 자처하는 구파에서 쓰고, 서쪽 절반은 신파에서 사용한 전례(典例)에서 수용되었다. 또한 전위단체인 ‘천도교 청우당’ 운동도 분리하여, 신파는 ‘천도교 청우당’을 그대로 운영했고, 구파에서는 이 해에 ‘천도교 보국당’을 조직 결성하여 운영했다. 이후 신파는 남한의 청우당을 포덕 89(1948)년 5월에 해체했고, 구파는 포덕 90(1949)년 1월에 해체하고 만화회(萬化會)를 조직하여 운영을 계속했다.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233-240. 요약.
6,25사변으로 인하여 교단의 형편이 많이 변하게 되었다. 총 교인수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북한의 신파교인들이 다수 월남하여, 교단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자, 쇠락일로에 있던 구파계열의 주장이 수용되기가 어려웠다. 휴전으로 인하여 사회가 조금 안정되자, 포덕 101(1960)년 6월 1일에 신파에 의해 강행 개최된 대회에서, 대회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구파측의 지도자 이 종해, 최 창기, 이 단, 최 병제 등 4명을 출교처분하고 경상도 연원과 연합하여, 경상도 연원의 신 용구를 교령으로 선출한 신파일색의 교단이 구성되었다.
수세에 몰린 구파측은, 교단정상화를 위해 포덕 102(1961)년 4월 5일에, 이종해의 집에 구파교인 150여명이 모인 가운데, 天道敎 總部 收拾委員會를 조직하고, 위원으로 李 鐘海, 黃 生周, 宋 淳永, 崔 秉濟, 安 奇述, 鄭 雲彩, 裵 孝俊, 安 鐘澤, 具 光祖, 朱 炳俊, 羅 泰華, 崔 重烈, 高 文海 등 13인의 신구파의 대표들이 선출되어 李 鐘海를 委員長으로 선출했다. 그간 구파에서 총부에 납입하지 않았던 연, 월성을, 총부에 납입하면 잃어버릴까 걱정하여, 수습 위원회 명의로 이 종해에게 납부토록 결의를 했다. 이 결의로 인하여 총부에 연, 월성 미납자로 판정이 되어 교인자격은 물론 대의원 자격이 상실되어 이후 교단운영과 임원의 선출대상에서 배제되었다.
포덕 102(1961)년 7월 27일에 제소한 대회 무효소송에서 원고측이 3 개월 이상의 연, 월성 미납자로 판정되어, 교인의 자격을 상실하였으므로 대회 무효소송은 각하되었다. 또 포덕 102(1961)년 12월 24일에는 韓 順會의 집에, 약 80여명이 모여 구파의 진로에 대해 토의한 결과로 결정된 3 개항의 정신을 살려, 총부의 어떠한 참여권유에도 거절하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결국 구파의 독자노선 선언이나 다름이 없었다./ 위에 열거한 각종 교사에서 관련 사항을 종합 정리하여 기술함.
구파계열의 청년 수십 명이 숙청단이란 단체를 조직하여, 포덕 88(1947)년 8월 14일에 거행된 천도교 반도숙청(反徒肅淸) 교인대회에서 신파들을 ‘최 린의 추종자라’하고, 신파의 천도교 총부 간판을 철거하며 기물을 파손하고 간부들을 내쫓는 불행한 폭력행사가 일어났다. 그 후 동년 9월 1일에 천도교 반도숙청 위원회 명의로, 대 숙청의 명분을 밝힌 성명서 앞부분에,
최 린 계열이 ‘마음과 마음을 서로 전하고, 법과 법을 서로 이어온 천도교 4세 종통‘을 부인 파괴하고 난법난도적 행위 때문이다. 심법의 전통은 신앙의 생명이다. /이하생략.
이 선언은 이후 구파계열의 생존명분이 되었고, 용담연원, 정통연원, 종문심법으로 구체화시켜 발전하게 되는 신앙과 독자노선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할 수 있다. 102(1961)년 4월 5일에, 이 종해의 집에서 ‘천도교 총부 수습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13인의 신구파의 대표로 선출된 수습위원들의 활동이 아무런 결과 없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이미 지적했듯이 구파계열의 지도자들의 의해 독자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구파계열의 다수의 지도자와 교인들은, 지역 연원을 바탕으로 신앙에 몰두하게 됐다.
60년대를 지나면서 구파의 핵심적인 지도자들이 대거 환원하게 되자 그 저력의 힘을 잃게 되었다. 흩어진 구파를 재건할 인물들 중 전면에서 활동하며 인도할 중량감 있는 인물의 부재로 10여 년간의 잠복기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암(海菴) 박 상익(朴商益)이란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박 상익은 해방이 된 다음 해인 포덕 87(1946)년 4월 5일에, 천일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화암(化菴) 최 준모(崔俊模)선생을 뵙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세계 포덕에 앞장 서기 위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도를 닦아 수심정기에만 노력하여 때가 되거든 동하라’.는 화암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사심을 버리고 수도에 전념했다. 또 해암은 춘암의 장석에서 입교와 도호를 받은 진정한 정통교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 한다.
포덕 115(1974)년 8월 5일 새벽 3시에, 비몽사몽간에 춘암상사로 부터 ‘이제 때가 되었으니 동(動)하라’는 명교를 받고, 깊은 생각 끝에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에 사는 金 仁善을 찾아가 “신비공개니 오늘 새벽에 받은 강서를 내 놓으라”고 하였다. 김 인선은 “통일운동을 하라”는 강서를 받았다고 하면서, 신명을 다 바쳐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이때부터 종문심법과 통일운동이 시작되어 위의 여러 가지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오늘에 ‘천도교 임시본부 설치운영’이 되는 사태의 발단이며, 이 사태의 발단에 깔린 정신과 주장이 생기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 상익은 종교적 목표와 신앙의 중심을, 화암의 간곡한 부탁과 춘암의 명교와 김인선의 강서를 바탕으로 하여 통일운동에 두고, 구파의 재건과 독자적인 구파운동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일단의 구파의 교역자와 적극적인 교인들이 30여 년 간 해온 핵심적인 운동은, 통일운동과 천도교 정통운동이었지만 이 운동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배타적이었나는 그들이 간행 배포한 책자나 유인물 속에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다. 특히나 이 운동에 깊이 간여하여 천도교 교단의 대표를 사칭하고 활동한 인물 중에, 강 금성(姜金聲)과 최 병제(崔秉濟)는 천도교 교단에서 주요 교역자로서 여러 역할을 다년간 했던 인물이었다. 또 이들과 함께 한때 천도교 종의원이란 명의로 포덕 143(2002)년에 수암(守菴) 이 용우(李龍宇)는 “극동의 태양”이란 책을 간행하여 동학과 천도교 사상의 일부를 새롭게 해석한 인물이다. 이런 그가 이제 교단의 분란을 틈타 천도교 임시 본부의 대표로 천도교와 대적하려고 하고 있다. 연당 최 병제는 포덕 102(1961)년에 신, 구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천도교 총부 수습 위원회에서 신구의 원활한 협조를 위하여 구파를 대표해서 총부에 파견되어 여러 종무에 간여했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 구간에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 70년대 중엽부터 구파는 독자노선을 선언하고, 그들만의 대외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암(일명 연당.) 최 병제는 ‘천도교의 출현과 연혁’ ‘천도교의 종지와 이상’이란 글을 남겨, 천도교 임시 본부가 이 글을 활용하고 있다. 최 병제와 강 금성, 이 용우 등의 이중적인 태도와 해교적인 행위는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만약에 그들의 주장대로 천도교의 교권을 장악한다면, 또 다른 비극적인 천도교의 역사가 창조될 것이다. 정통성도 없는 친일교단이라고 비난 배척한 최 린파의 교단을 접수하여 구파 지향의 교단을 만든다면, 천도교 신파의 친일역사를 수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구파의 항일교단으로 역사를 재편성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 전개될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로 정리된다면, 천도교 신파에 의해 이룩된 역사는 사멸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1925년 신,구파분열이후의 역사는 암흑기거나 공백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구파가 하고 싶은 역사의 창조인가? 라고 묻고 싶다. 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그간의 신 구파의 갈등이 해결된다고 보고 있는지 그들의 진심을 알고 싶다. 지금보다 더한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 자명한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이 천도교 교단이 정통성 없는 친일교단으로 구파의 역사를 왜곡하거나 사멸시켰다고 간단없이 주장해온 것이나, 그들의 주장대로 친일의 역사를 없애고 그들의 역사를 부각시키려는 행위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이 자행하려는 교단역사의 바로잡기가 진실이고 정의일수 있겠는가를 그들에게 묻고 싶다.
또 꾀 많은 일단의 무리들이 신구의 갈등이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갈등을 잠재우기 위하여, 이 분란이 발생하기 이전인 동학시대에로의 복귀라는 해괴한 대안을 내놓고 있다. 동학과 천도교의 근원인 용담으로 돌아가 우리 모두가 수운의 제자로 용담연원이므로 모든 연원을 버리고 단일화를 하자는 주장이다. 외형상으로는 명분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 주장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보면, 수운이후의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를 백지화 하자는 천인공노할 만행인 것이다. 자신들의 주장만을 진실과 정의라고 강변하는 과욕의 산물이며, 무모하고 극단적인 해교행위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용담연원으로 돌아가되 구파의 의절대로 새로운 입교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처사는 용담연원으로의 순수한 복귀가 아니라 구파로의 완벽한 흡수이기 때문이다. 또한 용담연원으로의 복귀를 위하여, 수운이래의 각각의 연원들에 의해 이룩해 놓은 빛나는 역사를 부정한 그들이, 구파의 의절대로 새로운 입교를 해야 한다는 것은, 춘암을 4세 교조로 추앙하려는 간교한 책략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3. 관지포(觀知包)는 어떤 연원인가?
천도교 개관에서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동학의 초기 교단의 조직은, 포덕 3(1862)년에 만든 수운의 ‘接主制’에서 부터 출발한 해월의 包와 接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운영한 것이, 동학 조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接은, 교인의 증가에 따른 교리 연구와 집단 수련을 위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가진 지역적인 결속을 바탕으로 한 최소단위의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월신사는 이 조직을 통하여 전국에 包 中心으로 散在되어 있는 동학교도들을 일사분란하게 조직적으로 관장하고 운영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고, 이러한 接과 包라는 제도를 체계적으로 운영하여 동학혁명이란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해월신사는 접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포덕 25(1884)년 10월 24일에 강화를 통하여 포의 우두머리를 대접주, 수접주 등, 접주로 호칭하던 명칭을 六任으로 바꾸었다. 六任制의 骨幹은 다음과 같다. 교화를 담당했던 1級인 敎長, 敎授와 업무와 규율을 관장했던 2級인 都執, 執綱과 건의와 직언을 담당했던 3級인 大正 中正등으로 구분되었다.
포덕 34(1993)년 3월 11일 제 2세 교조 최 시형 선생은 각 포의 명칭과 각 접주를 명하였는데, 그 중 유력한 19개의 대 접주 중 박인호 선생에게 德義大接主로 명하고, 덕의 대접주를 禮包와 德包로 구분하여 연락을 원할하게 하였다. 덕포는 덕산을 중심으로 박인호가 영도하는 예산, 아산, 홍성, 당진, 해미지역의 광범위한 지역이고, 예포는 예산(대술, 신양, 대흥), 태안, 서산지역인데 예포는 예산의 교도 朴 德七, 일명 桑菴 朴 熙寅선생이 목에 염주를 걸고 스님행세를 하면서 호호방문하며 문전에서 꽹과리를 치면서 서산과 태안을 두루 다니며 포덕하면서 예포의 명칭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일제 강점기 때 예포와 덕포를 합한 관지포(觀知包) 연원주 成菴 文秉錫선생의 증언내용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예포는 상암 박 희인의 적극적인 서산, 태안지역의 포덕활동과 10월 혁명 당시 지휘 혁명본부인 禮包 大都所를 삽교 목소리(삽교 성 1리 안목시)에 설치한 것과 10월 28일 홍주성 전투에서 예포 대접주 박 희인의 주도로 즉석에서 결성된 결사대에 치열한 전투를 펼친 점 등은, 내포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적 위치에서 주도했다고 볼 수 있으며 포의 대표성이 덕포에서 예포로 옮겨졌고 명칭사용도 덕의포보다 서산 태안지역 교인들이 예포라고 많이 불러 쓴 것 같다. / 예산 동학 혁명사 P.85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현재의 관지포가 대표성을 갖고, 천도교의 정통성 운운하는 것은, 황당무계한 일이 된다. 그들 스스로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의 대접주는 해월시대의 충청과 영남, 호남, 강원지역의 19개 大接 중에 하나의 접에 불과 한 것이며, 더욱이나 덕의 대접주가 19개 大接들의 대표성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월시대의 모든 접은 동학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포의 대표성이 덕포에서 예포로 옮겨졌고 명칭사용도 덕의포보다 서산 태안지역 교인들이 예포라고 많이 불러 쓴 것 같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박 인호의 덕포보다는 박 희인의 예포가 동학운동에 더 많은 참여와 공헌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사항을 문병석이 덕포를 수용하여 그 시대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관지포라는 새로운 포를 만들었을 뿐이다.
동학의 정통성에서 19개 大接 중의 후신(後身) 중에 하나에 불과한 관지포가 천도교 중앙 총부를 향해 정통성 시비를 걸어오고 총부를 접수하겠다는 듯한 그들의 의도와 행위는, 신실한 동학도도 아니며 천도교인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장과 행동은 백주대낮에 벌어지는 해괴한 일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나 지금은 그들이 독자적으로 예산교당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관지포에 소속된 교인이나 그들의 주장을 찬동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천도교 교단에 연, 월성을 납부하지 않고 있는 비교인들인 것이다. 이 일에 관여하고 있는 일부의 교역자들을 생각하면 창피스러워서 낯을 들 수가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도교 중앙 총부의 교역자의 자격을 갖고 천도교 사업에 깊이 관여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참여할 당시는 천도교 중앙 총부는 그들이 주장했던 최 린 계열의 친일 종단이 아니었다는 것이 된다는 말인가?
스스로 자기당착의 말과 행동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총부의 교역자로 참여하면, 친일교단이, 어느 날 갑자기 항일교단이 되고, 그러다 어느 날 교권 싸움에서 밀려났거나, 비위가 상해서 교단과 대척하게 될 때에는 항일교단이 친일교단이 되는 편리한 논리를 가진 함량미달의 교역자들이고 지도자들인 것이다. 이것이 천도교 교단의 현실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도자와 원로들의 단면이고, 추한 모습인 것이다. 모든 것이 교권에 참여여부에 따라 진실과 정의가 변화무쌍하게 변전(變轉)하는 것이 우리 현실의 참담함이고, 상당수의 교역자나 교인들이, 수운심법을 크게 벗어난 신념과 줏대없이 행하는 매우 부끄러운 처신인 것이다.
4. 관지포 도정(都正) 이용우(李龍宇)는 누구인가?
천도교 임시 본부의 관지포 대표로 되어 있는 이 용우(李龍宇)는, 예산 동학 혁명사 P.147에 기록된 천도교 예산교구 연원록에 의하면, 충남 예산군 예산면 간양리에서 교호주 이 동선(李同仙)의 장자로, 포덕 76(1935)년 3월 12일에 태어 낳고, 두 살 아래의 이 완우(李完宇)란 동생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25직후 예산 농업 고등학교(42회)를 졸업하였다. 포덕 101(1960)년 4월 5일에 예산 교당(교구 대신 교당이라고 함.)의 교구장 마 종익을 보좌하여 경리부 부원으로 보임된 것으로 교직을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도호는 수암(守菴)이다. 이 용우는 관지포의 창설자인 成菴 文 秉錫의 영향아래 예산교구를 지켜온 사람으로 文 秉錫이 포덕 111(1970)년에 환원한 이후 관지포의 대표로 관지포의 도정(都正)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예산 교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인들의 대표로 관지포의 도정(都正; 해월신사께서 만드신 六任制의 骨幹 중에 2級인 都의 都執, 執綱을 본떠서 명칭을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현재의 연원 제도에서는 道正이라고 한다.)이라는 연원주로서 책임을 다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산교당에는 이 용우가 포덕 85(1944;甲申)년 元旦에 춘암상사의 인도를 받은 제암(堤菴) 한 순회의 도를 받들어, 이 교당에서 강서로 받았다는 입도문 내용 전문이 게시되어 있다. 70년대 중반부터 박 상익과 김 인선이 주축이 되어 벌린, 천도교 정통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여 각 종 성명서에 발기인으로 김 건영과 함께 기명되어 있어 깊이 간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30여 년간 구파의 일부 계열에서 한 사업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지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상당기간동안은 총부에 연, 월성을 납부하여 천도교 종의원으로서 활동했고, 포덕 143(2002)년에는 천도교 종의원 수암 이 용우란 기명으로 “극동의 태양”이란 책을 온양신문에서 간행하여 배포했다. 포덕 147(2006)년 9월에는, 신례원에서 예산 동학혁명 기념 사업회 결성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47(2006)년 11월 23일에는 갑오 동학혁명 예산군 유족회 결성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지금은 예산 동학혁명 기념사업회의 고문으로 3인 중에 한사람이며, 천도교 임시 본부의 대표로 천도교 임시 본부의 홈 페이지에, 지금의 예산 교구장인 리 인철의 ‘한울님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란 글과 함께 ‘진짜천도교와 가짜천도교를 가리는 입도문과 서천문’ ‘조국통일과 시천주’ ‘천도본체의 기본원리’를 기술 게재하여 임시본부의 주장과 의도를 밝히고 있다.
5. 종문심법 전수원(宗門心法 傳授院)과 천도교 임시본부.
60년대 초부터 천도교의 신,구 계열의 교역자 중심으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수습위원회를 통한 각 계파의 모임이 표면화 되었지만, 구파의 도가수와 교역자 수를 구체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어 교도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京, 忠, 全의 지역을 중심으로 1,000여 정도의 교호가 수습위원회로 연, 월성을 납부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는 정확하게 연, 월성을 어디에다 수납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어 교인수는 물론 교역자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이번 임시 본부 사건으로 인하여 구파계열의 여러 계파 중의 하나가 예산교당으로 연, 월성을 내고 있다는 정황이 짐작되고 있을 뿐이다.
행방 전후부터 6,25사변 때까지의 교인 수에 대한 통계는, 종교문화와 신앙. 그리고 종교와 종교인구의 변동에 관한 연구를 한 학자들에 의해 공개되었다. 이들이 공개한 자료들에 의하면, 행방 전후시기의 천도교의 교인 수는 150-170 여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동학혁명이란 처절한 싸움에서 살아남아, 매우 열악한 가운데에서 어렵게 출발한 천도교가, 20여년(1905-1925)간에 이룩해 놓은 300 여만 명의 교단을, 자파의 이익을 위한 교파간의 갈등으로 15년(1925-1940) 사이에 반 토막이 났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단의 퇴행에 대하여 신, 구 또는 직간접으로 패거리를 만들어 교단의 단합과 발전을 저해한 원로와 지도자들 중에, 그 누구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공개 참회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지도자들의 사고와 처신이 천도교 교단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요인이라고 단정해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일제식민지 시대라는, 특수한 역사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시대의 교단과 교단지도자들의 공과의 책임을 묵과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이나 자파의 단결과 상대에 대한 처절한 싸움에 모든 지혜와 힘을 쏟았을 뿐이다. 교단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 천도교 교단의 교인수 변동(1905-2009년의 100여 간의 변동)과 그 과정 속에서 교단의 활동과 교단 지도자들의 공과에 대한 연구는, 사회변동을 깊이 다루고 있는 사회학의 방법으로 종교라는 특수성을 감안한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새로이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연구는 시급성을 요하는 것이며 이 연구의 결과는, 지금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과 천도교의 미래를 어떻게 창조할 것이며 그 창조를 위하여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줄 것이라는, 최소한 이 두 가지의 확신을 갖고 있다
교단의 중심세력이 30년대 이후부터 북한지역으로 이동 확대되었고, 북한에서의 교단운영과 교인들의 신앙지도와 교육은, 구파에서 말하는 기준으로 한다면, 전부 신파계열의 지도자들에 의해 육성되었다. 해방 전후의 천도교 교인 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학계나 교단내외에서 언급되어온 것을 바탕으로 말한다면, 신, 구 교인의 비율은 85% 대 15%에서 80% 대 20%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교인 수에 대한 연, 월성납부라는 구체적인 자료로 한다면 비율은 달라져, 신파계열의 교인 수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950년 중엽까지 연, 월성을 납부하고 있는 북한만의 교인 수는,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 법도(法道)부장으로 재직했던 문 재경(文再慶)이 6, 25동란 중에, 휴대하여 가지고 온 자료에 의하면, 북한 6개도(평남, 북, 함남, 북. 황해. 강원.)별 통계와 총계에 의하면, 2백 86만 6천 3백 42명이다.
여기에다 3.1 재현 운동을 정리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박 연수(朴延壽)는 북한 천도교 청우당의 당원 수는 55만 여명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6,25동란시기에는 당원 수가 더 증가되었으므로, 상당한 당원수를 가진 청우당이었다. 청우당의 당원의 대다수는 천도교인이었지만 당원 자격기준으로 천도교인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인 수가 상당 수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보면, 천도교인과 청우당 당원의 총수는 300여만 명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불과 5년(1945-1950)만에 교도 300여 만 명의 교단으로 다시 복귀한 놀라운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놀라운 성장에 대해 어느 누구도 평가 절하하는 평가와 북한에서의 천도교의 종교 활동과 청우당 활동의 결과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비난하거나 묵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천도교가 대 교단으로 성장한 이 기간 동안에 남한에서의 교인 수는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남한의 교인수를 최대 비율로 계산해도 30만 명을 넘을 수가 없다. 이 기간 동안 연, 월성 수납에 따른 자료가 공개된 적도, 교호 수나 교인 수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20 만 명 이하일 것이라 추측된다. 경, 충, 전, 강(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등의 4개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구파의 교인 수는 10 만 명도 안 되었을 것이다. 1961년 천도교 총부 수습 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신파계열인 경상도를 합쳐서 10만 명이 안 되었다. 이것은 연, 월성을 납부한 교인만의 통계이지만, 구파계열 중에 총부에 연, 월성을 납부한 교인은 극소수였다. 그렇다고 수습위원회 납부한 구파 계열의 교인 수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지만, 그 때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1 만 명도 안 되었다.
필자는 이 시기에 교단의 3 부경전 간행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단 내의 사정을 교단의 종무에 관여한 교역자나 원로들로부터 들었거나 경전 간행비 조달을 통하여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하면, 북한 천도교가 융성한 발전을 한 5년이란 기간 동안에, 남한의 천도교는 쇠퇴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천도교의 전체 교인 수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지만, 구파계열에 참여하고 있는 적극적인 지도자와 교인들의 교호 수는 200호를 넘지 않을 것이라 추측된다. 왜냐하면 해방 전에 구파에 속하였던 교인들 중에는 해방후, 천도교 중앙 총부에 연, 월성을 납부하고 교인의 자격을 가진 교인수가 늘어나고 있는 와중에 60 년대 초에 구성된 ‘천도교 총부 수습위원회’로 인하여 총부에 연, 월성을 납부하는 교인이 가속화되었고 이들 중의 유능한 지도자들이 교단내의 교역자로 종무에 다수가 참여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일부의 교역자가 변절하여 구파계열에 복귀하여 격렬한 활동을 한 교역자가 있었다.
현재 구파계열의 교인들의 정황은, 구파계열에 연, 월성을 납부하는 교인, 총부에 연, 월성을 납부하는 교인, 어느 곳에도 연, 월성을 납부하지 않고 신실한 신앙만을 하는 재가 교인, 개종한 교인과 냉담자로 남은 교인들로 나뉘어졌다고 본다. 지금 구파계열에 남아있는 교인들 중에, ‘춘암을 숭앙하여 춘암을 교조로 옹립하려는 원로들’ 중에서, 앞으로 10년 후에는 극소수가 남을 것이므로, 그들의 영향력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들 중에 교인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인을 제외하고, 구파계열이 조직한 어떤 기구나, 어느 교구에 연, 월성을 납부하여 정정당당한 교인자격을 갖추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다음 세대는, 춘암상사를 뵌 적도 없고, 그들의 열망처럼 절실하게 느낄 수 없는 교인들이 태반이므로 극렬한 논리로 대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사료된다.
필자가 포덕145(2004)년 10월 21일. 천도교 각 게시판에 게시한 ‘종문심법(宗門心法)/
각 종 교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봅니다.(전 문장을 정독하여주시기를 바람.).‘ 중에서 살펴보면
결국 宗門心法의 核心은, <春菴上師가 天道敎의 4世 敎祖라는 法統守護>였다. 그리고 이 法統에 準據하여 만들어진 天道敎 儀節(P.24.의 반 국판형. 천도교 중앙 총부 수습위원회를 발행소로 하고 편집 겸 발행인은 이종해로 포덕 106(1965)년 8월 14일 간행)의 입교식과 入敎文을 따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현 천도교 중앙 총부가 제정 간행한 천도교 의절에는 없는 입교문 중 天宗, 道宗, 敎宗, 法宗의 法統을 밝히고 遵守해야만 진정한 천도교인이 되고 올바른 心法傳授가 된다는 주장을 수운심법 전수원이 하고 있으나 東學道儒會는 입교식은 의식절차에 따라 하지만 <진정한 천도교인이 되고 올바른 심법전수가 된다.>고는 강조하지 않으며, 현 천도교 중앙 총부 집행부와의 갈등을 원치 않고 있다. (中略)
구파의 정통 교사인 “동학, 천도교 약사” 간행(포덕 131(1990)년 4월 4일에 발행.)에 참여했던 必菴 金正哲, 碩菴 金玩洙, 優菴 李威卿 등 원로들이 天道敎 京,忠,全淵源(수도권, 충청도, 전라도에 산재한 교인들의 연합 연원.)의 내부적인 갈등으로 분리되어, 따로 동학도유회란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서 또 다른 구파의 교회사로 포덕 134(1993)년 9월 5일에 東學道儒會 碩菴 金玩洙 元老의 명의로 총 582페이지로 된 <동학, 천도교사>와 포덕 144(2003)년 7월 30일에 간행된 390페이지의 <동학, 천도교약사>가
출간이 됐다. 이 교서의 편제는 창건사의 편제와 유사하다. 지금까지 교사 따로, 법설 따로 분리 수록하였던 법설을, 각 스승님 교사속에 포함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 1편 천통, 제 2편 지통, 제 3편 인통, 제 4편, 법통(용담연원이 간행한 1990년까지는 도통이 춘암상사였고 법통은 공화제 또는 무제(無題)였는데, 동학도유회 간행된 교사에서는 도통이 없어지고 춘암상사편을 법통으로 호칭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으로 나누어 편찬됐다. 포덕 129(1988)년 仲夏 석암 김완수는 37페이지의 <法皇 春菴上師 在世史料集>을 간행하였고, 포덕 134(1993)년 4월에는 37페이지의 <法宗 春菴上師>란 책을 必菴 金正哲이 집필하여 간행했다. 이 책 P.6에서 <法皇氏는 모든 법을 잘 지키어 일분일초라도 間斷이 없이 均衡을 잡아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석암 김완수는 <동학, 천도교사> 책의 序言에서 ‘그간 간행된 <천도교 총서>, <동학, 천도교약사>, <천도교 백년사> 등의 교사가 그 내용과 체계가 미흡한 현실을 자타가 공인한 바이므로 올바른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하여금 참고가 되어 正史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서를 간행한다’ 는 취지를 밝히고 있지만 자료의 출처와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구파 측의 정통교사에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외 天道敎 京全忠淵源 이름으로 포덕 122(1981)년 2월 11일에 간행된 198페이지의 <天道敎 精神史>가 있습니다. 이 책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던 朴商益, 金建泳 등이 따로 분리되어 종문심법에 관련된 주장을 했고, 이 주장이 수운심법 전수원의 설립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동학도유회와 수운심법 전수원간에는 암암리에 구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지금은 서로간의 대화마져 끊긴 상태로 敬而遠之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게 하고 있다. /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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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하)
필자는 종문심법과 수운심법 전수원에 관련하여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한 모든 자료는 다음에 열거 설명한 것들을 인용, 요약, 설명하였음을 밝힌다. 철암 기 우만은 검악풍인, 내자불거 등 3,4개를 인터넷의 넷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검악풍인, 내자불거 등으로 기술하여 천도교 홈 게시판과 천도교 관련 여러 게시판에 게재된 ‘수운심법 전수원’(水雲心法 傳授院)이 걸어온 발자취-기초자료’ ‘수운심법 전수원의 실체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1)(2)’ ‘천도교수습위원회의 통일운동과 정통연원 운동’ ‘宗門心法의 당위성에 대하여!’ ‘인내천정신 선양회와 수운심법 전수원의 공방’ 등 다수의 글과 박 세환의 ‘수운심법 전수원의 정통성 주장’외 몇 개의 글과 전 대전교구장. 유 영수의 ‘개인적 종교의 성립선언서’와 천도교 수원 권선교구 입도인(入道人) 일동이 발표한 ‘水雲心法 傳授院 設立 大告文’ 등등의 종문심법 관련 글들을 바탕으로 정리하여 기술하였다.
천도교 수원 권선교구가 설립한 “종문심법 전수원”의 발기인 또는 핵심인물은, 전 천도교 대전교구 교무부장 또는 교구장 유 영수, 교화부장 박 세환, 교무차장 김 형철과 권선교구의 이 계선, 이 계훈, 김 건영과 김 명주, 김 복순, 김 해승, 임 승자, 최 순임, 한 택수 등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 초기에는 기 우만과 김 성원이 주요인물로 관여했으나 노선의 차이로 지금은, 기 우만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고, 김 성원은 환원하였다.
기 우만은 ‘水雲心法傳授院이 걸어온 발자취-기초자료’의 서두에서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잘못된 기술은, 필자가 수정하였음.)
‘천도교의 법통사는 대선생의 가계와 탄생의 비밀로부터 해월, 의암, 춘암스승님과 그 후의 춘암스승님의 정통연원을 계승한 제자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도통연맥의 용담연원의 정통을 기록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천도교의 법통은 도통전수로 이어지는 종통을 이어가는 것으로 스승이 종문심법의 종법을 정하신 심법으로 천의에 의하여 제자에게 전해주는 오심 즉 여심의 심법인 것이다. 이는 수운 대선생님 정신이 해월 ~의암~춘암~我로 이어지는 대선생 심법의 중요한 기초인 것이며 성령출세법의 종문심법이 이어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종문심법만이 천도교의 정통성을 가진 것이라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정통연원은 다음과 같은 사업을 통하여 동학, 천도교 사상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고 했다.
우리는 포덕 116년(1975년)1월7일 동아일보에<만천하에 고한다>의 제하로 "신과 인은 하나이고 교와 정은 둘이 아니다"라는 시천주적 가치관을 선언하였고, 포덕 116년 3월10일 동아일보에 "인내천주의와 사인여천 윤리의 새질서 개념으로 남북과 세계는 분열된 둘이 아니고 합해진 하나임을 선언한다"는 요지를 용담연원명의로 <통일선언서>를 발표하였고, 포덕 116년(1975)7월16일 한국종교 협의회명의로 종교통일에 관한, 선언서을 발표한바 있다 특히 포덕 118년(1977)12월26일자 동아일보에 게제하기로 하고 봉항각에 모여 모든 책임을 다지기로 자필 서명하고 "시천주 사상이 전 세계의 국교임"을 선언하였다 포덕 127년 12월24일 <천도교 및 동학계 모든 동덕에게 고한다>는 제하의 동귀일체의 핵심을 밝히는 내용으로 주간종교지면에 발표하였다 포덕128년 1월18일 그동안 통일선언과 종교통일선언을 회고하면서 <동귀일체선언서>을 발표하다. 포덕 128년 12월9일 <연원정통선언서>를 주간종교지면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포덕 129년 4월25일 <민족생존을 위한 선언서>를 천안에서 요양 중인 재야 사학자 임 종국선생에게 초안을 초고케 하였으며 이 내용을 수정심의하여 천도교 정통연원 대표 박 상익 명의로 주간종교 지면에 발표하였다 포덕 129년 천도교 정통 박 상익 명의로 춘암상사님의 참사상을 밝혀야 한다는 <거짓말하지마라. 거짓에 죽고 참에 산다>의 법문을 제목으로 주간종교지면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포덕 129년 12월7일 천도교 정통 박 상익 명의로 <후천개벽설>을 주간종교에 발표하였다. 포덕 132년(1991)12월18,25일자에 천도교 정통연원 대표 박 상익 명의로<후천개벽 선언서>를 발표하다 포덕 136년(1995)12월1일 종교신문 지면을 통하여 <천도교 수원 권선교구 입도인 일동>명의로 네 분 스승님 앞에 입도하므로서 종문심법을 일반적으로 전수하여 종통을 계승여야 한다는 <수운심법 전수원 설립 대고문>을 발표하였다
포덕 137년(1996) 8월14일 종교신문 지면을 통하여 기우만은 일개인의 자격으로 의암성사 경자설법에 의한 입도문에 입각하여 입도식을 시행하여야 한다는<천도교 종문심법 계승 대고천하>을 발표하였다 포덕 140년 4월20일 시사종교 지면을 통하여 기우만은 천도교인에게 종문심법과 무극대도을 계승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안타까움을 <천도교 후천 천황씨 종문대도의 문을 열자>라는 내용으로 발표하고 독자투고란에 "종문심법을 밝힌다"는 내용으로 종문십법의 실체을 발표하였다 포덕 144년 4월10일에 봉암 이두영으로 하여금 동년 3월1일 입도인들의 모임에서 제안한 현 시국에 대한 견해를 초안케하여 발표하기로 하였다.
수운심법 전수원 입도인 대표 이 계선, 이 계홍, 김 건영 명의로 인터넷상에서 각 기관과 사회단체, 정부(통일부, 외교통상부.)등에 <세계와 한반도의 평화, 민족의 주권회복을 위해 제안한다>는 현 시국에 대한 견해를, 동학농민 11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하였다
포덕 144년 6월2일 기우만과 수운심법 전수원 대표 이계선, 이계홍, 김건영 명의로 천도교 전국교구와 교역자에게 중앙총부 인터넷상에서 종문심법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하여 부득이 천도교인 교역자 전반에 발송하였다 그 내용은 동년 3월23일 천도교 대전교구 박세환, 유영수, 김형철 명의로 발표한 <종문심법의 당위성에 대하여>를 인용하여 천도교과 일부 종문심법을 부인하는 분들에게 오해가 없도록 하였다 ‘라고 하여 해암 박 상익이 구파의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70년대 중엽부터 해암이 김 인선과 뜻을 같이 하여 생존시까지 약 20년간의 활동을 요약하고 있다.
이 글을 바탕으로 보면, 해암의 정통성은 수운심법 전수원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기 우만은 김 성원과 함께 해암 사후 그의 정통성의 계승을 당부받은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공개된 자료는 없다. 그러나 기 우만은 전수원의 김 건영과 결별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해암의 정통은 ’수운심법 전수원‘과 기 우만이 계승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도교 임시 본부의 대표 관지포 이 용우는 구파의 적통(嫡統)이 아니다.
정통연원과 종문심법을 주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종합된 의견은, 종문심법의 의미는 종문의 법통으로 규정하고 이 심법의 전수는 교조간의 계승으로 아래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종문심법>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법통>과 같다는 것이다. <법통>이란 교권(교단 전체에 대한 권한)이 정당하게 계승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교권 계승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권은 <정신적 지도권>과 <제도적 행정권> 전체를 가리킨다. 종문심법은 바로 이 법통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흔히 <수운심법>, <천도심법> 등과 같이 동학 천도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준칙으로 삼는 <신앙적 의미의 심법>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종문심법의 전수>는 곧 <교권의 전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교조와 교주 외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체로 종교는 교권이 처음 교조에게 있다가 다음의 계승자인 교주에게로 계승된다. 이 계승의 정당성이 곧 법통인데, 천도교에서는 이 법통을 종문심법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또 현재 천도교 교단의 운영의 정신과 기본체계인 ‘공동심법전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요약한 내용임,)
‘공동심법 전수론에 대한 기록은 1932년 4월 3일 최린 계열이 2차로 분열해 나가면서 다음 달인 5월에 발행된 <당성>에 <일기자(一記者)>라는 필명으로 쓰여 진 글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관련이 되는 부분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포덕 55년 4월 2일에 행한 공동심법전수이니 의암성사는 공동심법을 전수함에 당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시었다. 오교의 단전밀부(單傳密符)는 삼세(三世)에 지(止)하였으니 오늘의 내가 삼백만 교도에게 심법을 전하노라. 삼백만을 한자리에 모히고 이 심법을 전하여 주는 것이 원칙이로되 그는 사실 불가능임으로써 삼백만을 대표한 제군에게 전하노니 제군은 내가 제군에게 전함과 같은 뜻으로 나를 대신하야 이 심법을 교인에게 전하라 이러한 성훈을 누가 부정할 것이냐 이것을 부정하려는 자가 난도자가 아니고 무엇이냐.>
이 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단전밀부>이다. <밀부>는 조선시대 임금이 국가 비상사태를 당하여 관찰사나 절도사 등에게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증명패이다. 거기에는 임금이 자신의 이름을 직접 쓰거나 수결을 하였는데 임금을 대신하는 권한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동심법 전수론자들이 말하는 공동심법 전수일인 포덕 55년은 1914년이다. 그런데 이 공동심법 설법은 그로부터 6년 전인 1908년에 의암선생이 춘암선생에게 선수한 선수문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4년 후인 도일 기념일 후의 설법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다.
공동심법 전수론의 내용은, 의암선생이 1908년 춘암선생에게 대도주를 선수하면서 춘암선생 한 사람에게 교권 전체를 주었다는 말을 6년 후에 전면적으로 부정했다는 내용이다. 또한 다시 4년 후에는 또 그 말을 뒤집어서 또 다시 공동심법 전수론을 부정하고 처음의 말로 되돌아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게 하는 내용이다.‘
해암의 환원으로 구파계열의 활동이 침체해지자, 그의 정신과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하여, 수원의 권선교구에 ‘水雲心法 傳授院’을 설립한다는 대고문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들이 주장하는 천도교의 정통성과 종문심법에 대한 해석을 살펴볼 수가 있다. 天道敎 水原 勸善敎區 入道人 一同의 명의로 공개된 대고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水雲心法傳授院」 說立 大告文
水雲先生님으로부터 宗統을 이어받은 海月先生님은 後天地皇으로서 事人如天倫理을 樹立하여 새로운 人倫之道로서 億兆蒼生이 天命에 따르고 順理順受하는 道德과 秩序整然하게 造化發展을 위하여 스스로 修道의 節次을 實行하시고 後學들에게 道의 理致을 가르치셨다. 大低 道는 用時用活에 있다하시면서 大道의 彰明을 爲해 키워오신 大道를 義菴先生에게 心法傳授하여 宗統을 繼承하게하셨다. 海月先生님으로부터 宗統을 이어받은 義菴先生님은 後天人皇으로서 人乃天眞理을 自天自覺하게 하셨다.
또한 諸門徒에게 謂하사 曰일찍 海月先生닌 말씀에 人是天人이요 道是大先生主 無極大道하신 命敎에 의하여 吾제 마땅히 兩位先生主 前에 更이 入道式을 奉行함이 可하다'하시면서 祝文을 作하사 通하시고 次에 入道文을 作하사 春菴先生님에게 入道式을 行하게 하셨으며 法席을 設하고 제제히 入道式을 行하라는 通諭文을 發布하셨다. 그리고 性靈出世說을 說法하시고 修道의 結實을 맺어 春菴先生님에게 心法을 傳授하여 大道의 宗統을 繼承하게 하셨다. 그리고 守心正氣하여 正心修道로 道를 굳게 지키고 참되게 갈고 다듬어서 大道進展에 따라 師師相授로 이어진 宗門心法을 一個人에게 傳授하시지 못하시고 天道敎人에게 一般的으로 傳授한다는 輪告文을 發布하셨다. 즉 네 분先生님 前에 入道式을 行하고 春菴先生님으로부터 心法을 傳授받아 道統淵源으로 同歸一體되는 天道敎人에게 秘密單傳으로 이어진 宗門心法을 一般的으로 傳授하여 宗統을 繼承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들은 道通을 繼承하는 入道人으로서 네 분先生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天命에 따르고 順理順受하는 德治社會에서 長生하리라는 마음으로 天命을 받들어 輔國安民,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뜻을 이루고자 天道敎 水原 勸善敎區에 「水雲心法 傳授院」設立을 大告天下하는 바이다.‘ 라 하여 구파의 적통의 흐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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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임시본부가 포덕148(2007)년 4월 6일에 天道敎 (觀知包)명의로 공개된 천도교 정통선언서의 세심하게 살펴보면, 그들의 주장에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주간종교지에 포덕 118(1977)년 12월 16일에 주간종교지에 게재한 ‘연원정통 선언서’와 포덕 128(1987)년 1월 28일에 동지에 게재한 ‘동귀일체 선언서’에서, 기본정신의 역사적 배경과 정통연원에 대한 주장을 밝히고 실천요강을 덧붙인 것뿐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선언서들을 주간종교지에 게재한 인물은, 구파를 대표한 박 상익과 그의 휘하에 있었던 김 건영, 김 정철 등이었다. 이 들은 앞에서 설명한 박 상익과 김 인선이 주동이 되어 포덕 116(1975)년 부터 시작한 구파의 독자적인 운동을 주동적으로 같이한 인물들이다. ‘천도교 정통선언과 천도교 홈페이지 개설에 즈음하여 /천도교정통선언서 / 을묘통일운동’ 이란 유인물을 살펴보면, 포덕 116(1975)년에 일간지에 공개 선언한 ‘통일선언서’와 ‘종교통일선언서’ 그리고 포덕 118(1977)년에 ‘국교선언서’를 공개 선언했던 것을 게재하고 있다.
이것은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읽지 못하고 과거에 매달려 집요하게 그들의 한 맺힌 주장인, ‘춘암상사를 천도교의 4세 종통으로 옹립하는 것과 정통연원의 재건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증거이상의 의미는 없다. 천도교임시본부는 그들이 작성하고 배포한 유인물 부제에서, ‘천도교 중앙 총부는 친일 잔존세력이 지배하는 유사천도교 집단입니다.’라고 강변하고 있다. 만약에 신파계열과 최 린을 추종하는 친일교단의 교도들이라 비판받고 있는 교인들이 ‘그대들이야말로 아집과 독선에 빠져, 오직 춘암상사를 천도교의 4세 교조로 옹립하려 하고, 구파의 역사만이 정통의 역사라 하며 신파의의 역사를 친일의 굴욕적인 역사라고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춘암을 욕되게 하는, 신실하지 못하고 말로만 신앙을 떠벌이는 무지한 추종자들일 뿐이다.“라고 한 다면 흔쾌히 수용할 수 있겠는가? 를 묻고 싶다. 역사란 걸어온 발자취를 편견(偏見)과 사견(私見)없이 그대로를 기록해야 하고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다음 세대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후대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천도교 관지포 도정 이 용우의 명의로 천도교란 교명을 사용하여 천임본발 제1호(포덕 149년 8월 25일.) 천도교 중앙 총부로 보낸 ‘천도교정통선언서 및 을묘통일운동에 관한 자료 송부와 천도교임시본부 설치운영에 대하여 알림’이란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중 ‘천도교 정통선언과 천도교 홈페이지 개설에 즈음하여’란 글(이 용우 명의로 포덕 148년(2007년) 8월 23일에 발표됨.)을 먼저 요약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위하여 최린을 내세워 신파라고 하는 유사 천도교도들로 하여금 천도교를 지배한지 80여년이 지난 오늘날도 천도교중앙총부는 유사 천도교 집단인 최린의 후예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습니다. 지금 대다수 천도교인들은 천도교중앙총부를 점령한 최 린교도들이 행하는 계획적인 사행 때문에 판단력을 잃고, 천도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천도교인으로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스승님께서 일러주신 수도방법도 모릅니다. 이에 천도교 관지포는 천도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정통성을 수호함으로써 오만년 무극대도의 앞길이 막히지 않도록 포덕148년(2007년) 4월 6일「천도교 정통선언」을 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천도교 인터넷홈페이지를 개설하였습니다.
포덕116년(1975년)에 천도교 정통성을 유지한 용담연원회가 시작한「을묘통일운동」은 천도교운동(동학운동)의 새로운 지표가 될 것이며, 포덕148년(2007년)에 선언한「천도교정통선언」은 천도교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잔존세력을 쫓아내어 천도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참에 밝혀둡니다. 천도교 관지포는 천도교인의 의무인 오관실행은 하되 성미는 가짜 천도교집단인 천도교중앙총부에 납부하지 않고 종통을 바로 세울 때까지 별도로 수납할 것입니다. 조걸위학이란 말처럼 잘못된 자들에게 협조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천도교의 본질을 수호하면서 사사상수이념에 따르는 춘암상사의 유훈대로 천도교 본연의 노선을 갈 것입니다.
다음은 ‘천도교임시본부 설치운영에 대하여 알림’이란 공문 내용.
1. 모시고 안녕 하십니까?
2. 금일의 천도교중앙총부는 스승님께서 정해주신 입교문을 배척하고 제멋대로 지어낸 서천문을 입교의절에 적용하는가 하면 사사상수 이념을 부정하는 등 종통을 파괴하는 난법난도를 자행함이 극에 달하였으므로 천도교정신이 소멸되어 더 이상 천도교의 종통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천도교 관지포는 천도교정신을 부활시키고 천도교의 종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천도교중앙총부를 점령한 최린 추종자들을 최린교도로 규정하고, 이들과 정통천도교인을 구별하는 [천도교 정통선언]을 포덕 148년 4월 6일 하였으며, 인터넷 천도교홈페이지 [www.cheondogyo.kr 또는 www.동학.kr]를 개설 운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첨부의 자료를 송부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또한 천도교 관지포는 천도교중앙총부를 최린교도 집단으로 규정한 만큼 최린교도들을 쫓아내고 천도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 충남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438-5에 [천도교임시본부]를 설치 운영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첨부 1. 천도교정통선언과 천도교홈페이지 개설에 즈음하여
2. 천도교 정통선언서
3. 을묘통일운동
이 공문에 대한 천도교 중앙 총부의 입장을, 종무원장 서리 하 경구의 명의로 천도교 중앙 총부란 교명을 사용하여 천총발 제 150호(포덕 149년 8월 29일.)로 이 용우란 개인에게 ‘천도교 임시 본부 설치운영에 대한 즉각 중단요청의 건.’을 즉각 발송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임본발 제 1호(149, 8, 25.) 공문 및 천도교 교인들을 현혹하는 행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천도교 중앙 총부의 입장을 전달하오니 즉각 수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래
1. (가칭) 천도교 관지포 도정 이용우께서는 천도교 중앙 총부에 연월성 납부 및 오관실행을 하지 않으면서 천도교 관지포 도정의 명칭을 사칭한 행위는 불법행위임.
2. 인터넷 홈 페이지(www.cheondogyo.kr 또는 www.동학.kr) 공문 서신등에 천도교를 사칭하여 천도교 교인들을 현혹하는 행위 또한 범법행위이므로 즉각 홈 페이지와 천도교 임시 본부 설치를 중단하지 않을 시에는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겠음을 알려드리오니 이 점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끝)
위의 공문을 접수한 천도교 임시본부는 사무국장 리 인철의 명의로 천도교중앙총부의 입장에 대한 답변서를 천임본발 제2호(포덕 149년 9월 5일.)로 ‘천도교임시본부 개설에 대한 천도교중앙총부의 입장에 대한 답변’ 이란 공문 제목으로 천도교 중앙 총부 종무원장 서리 하 경구 도하 앞으로 발송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시고 안녕 하십니까?
2. 귀 단체에서 천총발 제150호(포덕149년 8월 29일) 공문으로 전달하신 천도교중앙총부의 입장에 대하여 천도교 관지포 도정 이용우를 대위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가. 천도교중앙총부의 입장 1에 대하여
오관실행은 천도교인의 의무로써 오관실행의 일부인 연월성 납부는 당연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천도교정통선언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금일의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단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연, 월성을 천도교 관지포에 납부하는 것이므로 오관실행을 아니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천도교 관지포 도정 이 용우가 천도교 관지포 도정 이 용우라고 한 것을 사칭하였다 함은 하 경구가 하 경구라고 한 것을 사칭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 천도교중앙총부의 입장 2에 대하여
천도교는 천도교중앙총부의 전유물이 아니라 천도교를 신앙하는 전 세계 인류의 것입니다. 따라서 천도교인이 천도교 포덕을 위하여 인터넷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천도교라고 하는 것은 천도교를 사칭한 것이 아니며 천도교중앙총부 명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천도교중앙총부의 허가를 득할 사항도 아닙니다. 의암성사께서 “사람은 하늘사람이오 도는 대선생님의 도이니 하느님 앞에만 입도하지 말고 선생님 앞에 입도해야 사문도통(師門道通)의 뜻이 있고 먼저 깨달음이 뒤에 깨닫게 함은 천리의 자연이다.”라고 하시며 포덕41년(경자년)에 ‘경자법설’로써 스승님 앞에 입도하는 ‘입도문’을 가르쳐 주셨는데 천도교중앙총부는 이 ‘입도문’을 폐하고 하느님께만 맹세하는 ‘서천문’을 멋대로 지어내어 스승님 앞에 입도케 하지 않으니 천도교중앙총부야말로 천도교단을 사칭한 집단입니다. 따라서 천도교중앙총부 때문에 침몰하여 가는 종문을 구출하고 종통을 지키면서 천도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 천도교임시본부를 설치 운영하는 것은 천도교인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3. 차제에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최린의 가르침을 따르는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단이 아니라 최린교단이라 할 것이므로 천도교인들로부터 연월성 수납을 중지하시기를 촉구합니다. 나아가 천도교의 부흥을 위하여 천도교중앙총부를 해산하기를 촉구합니다.
아울러 대신사, 해월신사, 의암성사, 춘암상사 네 분 스승님 앞에 다시 입교해서 속히 상, 중, 하재 500인의 도통군자가 나와 선생님의 대도와 대의를 창명하라고 가르쳐 주신 의암성사님의 사사상수(師師相授) 심법이 발휘되길 심고합니다.
이상의 자료에서 살펴보면 그들의 주장은 오직 춘암상사의 4세 교조로 추존을 위한 노력을 정통연원의 수립 종문심법의 전수라는 명분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오직 그들의 속심은 ‘춘암상사를 천도교의 4세 종통으로 옹립하는 것과 정통연원의 재건’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천도교 임시본부의 실상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천도교 임시본부의 설치운영을 선포한 이후 반 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지만, 더 이상의 천도교 중앙 총부에 대한 요구도 없고, 임시본부의 사업과 운동도 하나도 없다. 개점휴업의 상태이다. 더욱이나 사업이나 주체가 되어야 할 임시본부의 기구 조직표와 각 부서의 책임자인 교역자의 명단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또 홈 페이지도 새로운 글이나 공지사항이 게재된 것이 없다. 철저하게 깊은 수면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천도교 임시본부의 실체는, 관지포의 창설자인 문 병석과 한때 구파를 대표해서 총부에 파견되어 여러 종무를 담당했던 경력을 가진 최 병제의 도문제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구파의 여러 계열 중의 소수의 교도를 가진 비주류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라고 볼 수 있다. 오직 관지포 도정 이 용우와 예산 교당의 교구장이며 임시본부의 사무국장인 리 인철. 이 두 사람만이 임시본부의 관련자로 공개된 유명무실한 단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신, 성사님에 대한 교조 추존에 대하여 몇 마디를 덧붙이려 합니다. 필자가 교단과 관련을 맺었던 5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의 기간 동안 교단사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들 중 스승님의 존칭에 관한 것으로 교조 추존에 관한 것도 있었습니다. 이미 필자는 우리 스스로가 스승님의 존칭을 정확하게 사용하지 않아 폐단을 자초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스승님의 존칭을 바로 쓰자.“ (포덕 145(2004)년 8월 5일에 천도교 홈에 게재.)라는 글을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스승님에 대한 공식 명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1 세 교조 수운 대신사 최 제 우.(第 1 世 敎祖 水雲 大神師 崔 濟 愚)
제 2 세 교조 해월신사 최 시 형.(第 2 世 敎祖 海月神師 崔 時 亨)
제 3 세 교조 의암성사 손 병 희.(第 3 世 敎祖 義菴聖師 孫 秉 熙)
제 4 세 대도주 춘암상사 박 인 호.(第 4 世 大道主 春菴上師 朴 寅 浩)
이 명칭에 대하여, 교단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논의되어 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단이 아직도 갈등에 휩싸여 있어 공개적으로 논의하려 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창도 150주년을 맞는 교단으로서는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됩니다.
필자가 교단에 관여했던 시기에, 스승님의 존칭에 대하여 교단의 공론으로 논의된 적도 없고, 교단의 어떠한 입장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교조와 대도주에 대한 구분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단사로 미루어 보아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말하면, 수운과 해월, 의암은 교조로 추존될 수 있지만, 춘암은 대도주일 뿐 그 이상의 격으로 추존할 수 없다는 견해가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포덕 49(1908)년 1월에, 대도주였던 김 연국(金演局)이 천도교를 배반하고 시천교(侍天敎)로 가자 1월 18일에 의암성사께서 차도주(次道主)였던 박 인호를 대도주로 선수하였다. 동년 4월에는 부구총회의 결의로 스승님을 대신사(大神師). 신사(神師), 성사(聖師)로 추존(推尊)하였다. 또 포덕 50(1909)년 10월 23일에는 춘암상사께서 천, 지, 인 삼통대계(天地人 三統大系; 三才思想에 근거한 것임. 三才思想은 동학에 있어 기본사상의 바탕인 천리, 천명에 해당되는 것임)로 종문 3대 기념일, 4월 5일을 천일(天日), 8월 14일을 지일(地日), 12월 24일을 인일(人日)로 정하였다.
위의 두 개의 추존의 정신은, 수운과 해월, 의암은 교조로 추존될 수 있는 충분한 사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제가 교단에 관여했던 약 20년간(5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의 그 시기에 위에 예시된 교단사의 정신과 교단 종무에 참여했던 원로들과 교역자들이 주고 받은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논리로 전개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운대신사께서는 고고한 혜안으로, 지혜롭고 위대한 우리민족이 5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룩해온 민족의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사상이란 동학을 창도하였고 다시 개벽의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주신 선지자로 순교(殉敎)를 하셨고, 해월신사께서는 스승님의 사상을 확연하게 밝혀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국금의 시대에 놀라운 지도력과 솔선수범하는 신앙태도로 교세를 키워 동학혁명을 이끌어 동학의 저력을 보여준 훌륭한 지도자로 순교하셨고, 의암성사께서는 은도시대의 힘든 신앙생활과 동학혁명으로 인하여 비도(匪徒)로 몰린 교도들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하여 현도시대로 전환시켜 20세기의 대 교단으로 발전시키고, 기미 독립은동의 최고 지도자로 교단의 규모와 저력을 세계만방에 떨치게 한, 천도교의 창도주이시고 기미 독립은동으로 인한 옥고의 후유증으로 환원하셨기 때문에, 위의 세 분을 교조로 추존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중론이었다. 또 타 종단과는 다르게 세 분의 교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타 종교와 달리 근, 현대의 민족사와 같이한 형극의 길을 걸어 온 결과라는 것으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 매우 자랑스러운 것이라 했다. 이렇게 재해석을 하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하여, 교단의 공개적인 입장을 천명하기 위하여 150년의 찬란한 역사를 걸어온 교단으로서 공론을 모아 결정할 때가 왔다고 생각됩니다.
6. 관련인물들의 프로필.
종문심법의 주장자 중에서 이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인물들은, 海菴 朴商益, 成菴 文秉錫과 이들의 道門弟子들이라 할 수 있는 建菴 金建泳, 哲菴 奇宇萬, 誠菴 金誠源과 나중에 합세한 朴世煥 등으로 이들은 매우 적극적이고 열성으로 종문심법의 정신을 선양하는데 앞장 선 인물들로 알려졌다. 모든 기록은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1. 海菴 朴 商益; 본관이 밀양인 박 인원과 순흥 안씨 사이에서 포덕 49(1908)년 10월 13일에, 경기도 수원군 남양면 수화리에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이석이었다. 포덕 59(1918)년 4월 10일에 입도(11세)하여 수련에 정성을 다했다. 포덕 64(1923)년 10월 12일에 이 익화와 결혼(16세)하였고, 포덕 68(1927)년 8월 14일에 춘암상사께서 80여명이 넘는 교인 일반들에게 심법을 전수받는 자리에서 최연소(19세)였다. 72(1931)년 12월 24일에는 춘암상사의 명의로 해암(海菴)이라는 도호를 받(賜)았다. 또 77(1936)년 5월 7일에는 천훈(은)장을 받았고 ,수원교구 경리원, 전교사, 감사원, 교구장, 도사, 종법사 등의 교직을 받았다.
포덕 102(1961)년 4월 5일 신, 구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이 종해가 천도교 충앙 총부 수습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10여 년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내부적으로 수습운동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총부와의 갈등을 조장하는 데 앞장을 서, 현 총부를 최 린계의 친일교단이라고 비난하면서 종문심법을 정립하기 위하여 독자노선을 만들었다 이 정점에 해암 박 상익이 있었다. 오늘날에 신,구 갈등의 근원에는, 의암성사께서 그렇게 갈구했던 천도교의 종교적 4대 목표를 내던지고, 화암의 부탁과 춘암의 강서를 수행하려 했던 잘못된 신앙과 대외활동을 한, 다시 말하면 박 상익이란 인물이, 천도교란 대동단결체인 교단을 저버리고, 춘암만을 생각하고, 4세 교조로 옹립하려는 꿈과 정통연원의 정립을 통한 구파를 재건하려는 개인적인 망상이 빚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2. 成菴 文 秉錫; 포덕 34(1893) 2월에 입도하여, 동학혁명 당시 생장지(生長地)인 방갈리 기포의 주역으로, 해월신사로 부터 포덕 38(1897) 3월에 태안의 차접주(次接主)의 첩지를, 포덕 41(1900)년 7월에는 태안의 수접주(首接主)의 첩지를 받은 낙암(樂菴) 문장로(文章魯;1846-1919.)아들로, 포덕 32(1891)년 8월 5일에,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서 태어나 3.1운동 당시 마 기상과 함께, 신례원 서두물 시장만세운동의 지도자로 경찰서에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적도 있다. 그 후 예산 교구 주임 종리사(1925.), 농민사와 신간회 예산지부 창립과 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예산 종리원 원장(1931)을 거쳐, 예산교회 교장(1934.)을, 무인 멸왜기도 당시에는 정 환석, 마 기상과 함께 3인방으로 애국독립운동에 앞장을 섰던 인물이다. 도호는 춘암상사로 부터 포덕 69(1928)년 12월 24일에 성암(成菴)이란 인장(帖紙)을 받았고 포덕 111(1970)년에 환원하셨다.
장남인 문원덕(文源悳)은 포덕 46(1905)년 10월 10일에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서 태어나 포덕 65(1924)년에 입교하였다. 생존기간 동안, 동학 관련 자료들을 많이 수집하여 이 지역의 동학운동 내역을 확실히 했고, 동학의 지도자의 후손답게 예산, 태안지방의 동학관련 단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다가, 포덕 127(1986)에 환원했다. 도호는 원암(源菴)이고, 포덕 133(1992)년에 천도교 선도사로 추서됐다. 그러나 포덕 78(1937)부터 포덕 94(1953) 12월 20일까지 작성하여 기록한 예산지역 연원록 명부에는, 587명이나 수록되어 있지만, 문 병석과 문 원덕의 가족은 등재되어 있지 않고, 문 원덕, 한 사람만 수록되어 있다.
3. 建菴 金 建泳; 구파 계열의 해암 박 상익이 거느린 도문제자의 한 사람으로, 한때는 천도교 京,忠,全 淵源의 일원으로 편집위원이 되어 “천도교 정신사” 간행에 참여했고, 그 후 천도교 정통연원에 참여하여 천도교 정통연원회의 교사편찬 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포덕 133(1992)년 3월 10일에는 “수도의 정법”을, 동년 8월 14일에는 “천도교 정통 연원 약사”의 출간에 앞장을 섰다. 그러나 구파의 정통 교사인 “동학, 천도교 약사” 간행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박 상익의 밑에서 전개된 각종 사업과 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 했고, 구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각종 기도식과 연성과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지금은 천도교 권선교구 소속으로 수운심법 전수원의 대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4. 哲菴 奇 宇萬; 춘암상사로부터 직접 동학을 전수받았다고 하는 해암 박 상익의 도문제자로 자처하고 있으나 추종인물로 알려져 있고, 구파의 적통이라고 자처하는 해암의 생존 시부터 해암도문에 있으면서, 한때는 구파의 종무를 담당한 적도 있다. 그리고 해암의 소원이었던 종문심법의 전수와 정통연원의 확립을 필생의 사업으로 알고, 해암의 환원이후 선두에 나서 위의 사업의 성공을 위해, 교단사의 정리와 종문심법의 전수와 정통연원의 이론정립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수원 권선교구의 김 건영을 필두로 하는 수운심법 전수원의 중심인물들과의 갈등으로 분립하여 독자 활동하다가, 포덕 148년부터 금년(포덕 149년)초 까지는 카페 ‘동학 사랑방’의 운영자인 옥계산인 안 대영과 동천수(동학 천도 수련원)를 공동 운영하면서, 연, 월성을 동천수 참여자들과 함께 동천수에 납입키로 합의까지 하고는, 분명한 이유없이 금년 6,7월경에 헤어져 카페 ‘동학문제 연구소’를 독자운영하고 있다.
5. 誠菴 金 誠源; 포덕 121(1980)년 11월 20일에 福祉文化社에서 간행된 “하날님 말씀”의 편저자의 한 사람이었던 橿菴 金 京昌의 조카로 종문심법의 추종자였고, 천도교 홈과 지방교구 게시판에 상주 동학교의 경전의 하나인 敎主 金 周熙의 많은 양의 가사를 모아, 게시하다가 포덕 145(2004)년에 환원했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영인한 “하날님 말씀”의 공동 편저자인 橿菴 金 京昌과 機菴 韓 佶鎬는 책명에 한울님을 하날님으로 표기한 것과 ‘한울님’이 아니고 ‘하날님’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출교처분을 당하였다. 그 후 橿菴 金 京昌은 南美로 이주하여 살다가 그 곳에서 환원하였다.
7. 맺음말.
구파계열의 핵심인물이거나 활동적인 인물들 중에는, 이 종린(李鍾隣), 최 준모(崔俊模) 이 종해(李鍾海), 한 순회(韓順會), 황 생주(黃生周), 박 래홍(朴來弘), 이 단(李 團), 손 재기(孫,在基), 정 환석(鄭煥奭), 이 종식(李宗植), 안 상덕(安商悳), 이 연숙(李演淑), 박 상익(朴商益), 김 인선(金仁善), 최 병제(崔秉濟) 강 금성(姜金聲)등이 있었다. 이들의 직계 또는 방계거나 직, 간접으로 친분이 있었거나 이 분들을 측근에서 모셨던 10 여명이, 전, 현직의 교역자로 천도교 중앙 총부에 봉직했거나 지금도 봉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지의 사실이므로, 이 분들이 먼저, 천도교 중앙 총부와 천도교 임시본부의 갈등문제의 해결에 앞장 서야 할 것이며, 또 해결에 앞장을 섬으로써 천도교인으로서의 도리에 합당한 것이 될 것이며,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미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매진하는 교단의 교역자로서의 책무(責務)인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끝내면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처참한 현실 앞에서, 마지막으로 특별히 당부를 드리고 싶은 말은, 만약에 아직도 그들의 주장이나 그들만의 독자적인 운동이나 사업에 동조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조용히 물러나 그들과 합세하여 천도교에 대적하여주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천도교 교단에서 급여를 받거나 원로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유사한 주장과 논리를 펴는 교역자가 천도교 교단에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천도교 중앙 총부는 정통교단이 아니며, 친일교단이기 때문에 유사종단이라 단언하고 있고, 지난 30여 년 동안, 그들의 독자적인 사업이나 운동을 대외적인 단체와 협력을 할 때에는, 자신들이 ‘천도교’란 교단 명칭과 ‘천도교 대표’라고 교단명과 직위를 사칭하고 있었던 무례한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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