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학 (수학 mathematics)을 공부하고 싶어서 이 학문을 다룬 책을 얻 고자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입국했고 거기서 유럽 선교사들을 만나 말을 걸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이 기회를 틈타 그에게 종교 서적을 주었다. 천주교 교리의 숭고함에 감동된 그는 이 책을 열 심히 연구하여 마음속으로 천주교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라자 리스트포교 수도회의 기스령 사제에게 1784년 2월에 영세를 받은 그는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복음의 진리를 부모와 친구들에게 설교했으며 그들 또한 믿음을 갖고 줄줄이 포교자가 되었다. 특히 부인들은 새로운 신앙을 봉행하고 이를 퍼 뜨리는 데 많은 정열을 쏟았다. 천주는 이러한 노력을 축복했다. Y 베드로가 귀국한 지 5년도 채 안 되어 왕국의 수도 한양과 그 부근의 시골에서 천주교인의 수가 4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러나 만법(法)의 제정자 자신이 예고한 것처럼, 교회의 탄생을 주재하는 신호인 박해와 시련이 이 새로운 천주교도들에게 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1788년이 되자마자 정열적이며 응변을 좋아하던 Y의 첫 제자 중 한 사람인 김 도마 가 체포되어 재판 을 받고 귀양에 보내져 같은 해에 숨졌다.
이 때부터 많은 신앙증거자들을 보유하게 되는 조선땅은 특별 한 순교지가 되어 나날이 더욱 깊은 복음의 밭고랑을 일구어 나 갔다. 그런데 이 경이로운 교도들에게는 단 한 명의 사제도 없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의문이 생기자 사람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상의하기로 하고 인 바오로를 특사로 보냈다. 북경 주교는 이 특사 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으며, 견진성사 (영세자를 신자로서 확인 하는 의식)와 성체성사를 그에게 시행해 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복음의 후예들이 구세주 앞에서 평화롭고 자신 있게 나아갈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