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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감상법(RSG 연구노트 No.5)
Ⅰ. 예수님의 가르침의 다양성과 비유의 의미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가르침을 주실 때 매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장소적으로는 어떤 때는 회당에서, 어떤 때는 산 위에서 또 어떤 때는 바닷가에서 그리고 배 위에서 가르치셨고, 대상도 제자들만을 상대로, 또 어떤 비밀한 것을 말씀하실 때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시기도 하고, 많은 군중들 앞에서 또는 한 사람의 죄인이나 병자를 향해서 말씀하실 때도 있으셨다. 또한 화법으로는 자신이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답하게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기묘하고 상황에 적합한지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는 주님께서 직설화법으로 말씀하실 때도 있고, 명령법으로 말씀하실 때도 있으시고 치료나 이적을 통해서 가르치시기도 하였으며 또 많은 경우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침을 주시기도 하셨다.
이 중에서 저는 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체로 세 가지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 첫 번째는 ; 하늘에 속한 영적 리얼리티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자신은 하늘에 속한 영적 리얼리티를 가지셨지만, 가르침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을 만한 그릇이 아니고, 또한 그들에게 전해야 하는 언어가 세상에 속한 개념들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부득이 하게 비유를 들어 표현하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두 번째는 ; 시대적 경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계시는 그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 안에서 모든 의미를 아시고 행하셨지만 주님의 비밀이 계시되는 것에는 세상에서 시대와 때가 찬 경륜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그 때를 위해 비유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세 번째는 ; 악한 자들이 진리를 오용하는 것을 막고 보호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악한 자들은 하늘에 속한 진리마저도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Ⅱ. 누가복음을 관통하는 “禧年”
누가복음을 전체로 관통하는 것을 한 가지 들라하면 저는 “희년(禧年)”을 들겠습니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갈망 가운데 계신 인간에 대한 염원 곧 죄로 인해 왜곡된 인간을 회복하시기 위해 참 사람의 原形이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분을 통해서 참사람이 무엇임을 최고의 도덕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바로 “희년”이라는 말 한마디에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 12지파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땅에서의 소유를 골고루 차별 없이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착하여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왜곡과 환경으로 인해 소유에 많은 변화가 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실수 때문에 또는 죄나 욕심 때문에 사업에 망해서 땅을 팔아야 했고, 어떤 사람은 자식 뒷바라지와 집안의 우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분배 받은 땅을 팔아야 했습니다.
땅을 팔고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매인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소작농이 되던지, 품팔이를 하던지 늘 매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의 죄와 육신과 무능으로 인한 왜곡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해결하려고 각종 정책을 사용하지만 언제나 왜곡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런 왜곡이 쌓이면 결국 사회혁명이나 전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왜곡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기 위해 엄청난 역사적 실험을 감행했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런 ‘主義’(ism)를 실행하는 주체인 인간 그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롭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년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50년에 한 번씩 자신의 재산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의 속박과 매임에서 놓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아마 희년이 되는 해에 이스라엘에는 기쁨의 소리가 넘쳐났을 것입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희년이 지나서 얼마 안 가면 또 매인 자가 생기게 될 것이고 소유를 잃는 자가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이 희년이라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참 희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림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희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고 그 희년의 사역을 기록한 것이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장에서 먼저 희년을 선포하시고 그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후의 모든 가르침들과 이적들과 주님의 행함은 이 희년에 대한 선포의 구체적 실행들입니다.
Ⅲ. 구원과 섬김 ; 10,14-16장의 세 가지 가르침에 있는 비밀한 의미
누가복음 10장과 그리고 14장에서 16장을 보면 라이프스타디에서 말하는 것처럼 매우 재미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희년인 구원의 가르침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들이 함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희년의 선포 이후에 구체적인 가르침이나 고침으로서의 주님의 사역이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구원 곧 놓임을 받은 후에 그 희년에 합당한 구체적 섬김의 삶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길가다 강도당한 사람의 구원 사건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접의 상관성과 그 의미 >>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반쯤 죽게 된 것을 그냥 버려두고 갔습니다. 한 제사장과 한 레위인이 그의 곁을 지나갔지만 그를 피하여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길을 가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여관에 데려다 준 후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부탁하였습니다.
여기서 강도만난 사람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율법사를 말하지만, 결국 우리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와 율법으로 인해 거반 죽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참 이웃인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사건 후에 예수님과 일행은 마르다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주님을 영접하는 준비로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바쁘게 준비하고 있는데 동생이 돕지 않는 것을 본 마르다는 주님께 동생이 자신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애쓰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이다. 마리아는 그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대답하십니다.
이 사건을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으로 보면 마리아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라도 손님 맞을 준비로 바쁜데 돕지는 않고 다른 행동을 하는 마리아가 얄밉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건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 사마리아인의 구원 사건과 마리아의 섬김의 연관성과 의미는 죽게 된 자가 목숨을 구명받았을 때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는 길 가다가 거반 죽게 된 상태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내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그 분이 바로 이 천지의 주관자이신 주님이심을 알았다면, 우리가 취할 태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바로 마리아가 취했던 자세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신 그 분에게만 관심하고 그 분을 집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거반 죽게 된 상태에서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마르다처럼 모든 것의 주관자이신 그 분을 관심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일들을 더 관심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바로 목숨을 구원받은 우리가 무엇에 관심해야 하는 것인가를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인가? 일인가?
<< 하나님의 잔치 초대 사건과 망대 세움 그리고 왕의 전쟁 준비의 상관성과 그 의미 >>
☐ 14장 15절 ~ 24절 ;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새로 밭을 샀기 때문에 가 보아야 합니다! 나는 황소 다섯 마리를 샀는데 그것을 한 번 부려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장가들었기 때문에 아내에게 가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핑계를 대었습니다.
노한 주인은 노예들에게 거리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 팔다리 못 쓰는 사람들, 눈먼 이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자리를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초대받은 사람은 오지 못하고 이런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우리가 이방인들로 가난하고 병신이었지만 가장 귀하고 최고로 기쁜 자리인 하나님의 잔치에 불청객이었지만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자격도 없었지만 그 귀한 기쁜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이것보다 더 큰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 14장 25절 ~ 35절 ;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이런 교훈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뿐만 아니라 자기의 혼 생명을 미워해야 하고 또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고는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망대를 짓는 사람이 비용을 계산해 보지 않고 짓는 사람이 있으며 또한 다른 왕과 싸우려는 왕이 그 병사를 세어보고 전쟁에 이길 수 있을지 판단해 보지 않고 전쟁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비유와 앞의 교훈 그리고 잔치 초대와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 어떤 사람 곧 하나님의 잔치 초대는 우리의 구원의 한 방면을 말합니다. 잔치란 가장 기쁜 자리이며 잔치를 베푸는 사람이 주는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원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잔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혹시 담 너머로 보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귀하고 기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잔치를 즐거워하고 누리며 그 잔치를 베푼 분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귀한 최고의 자리에 초대받았음에도 여전히 잔치 자리에서 그것을 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식에 더 신경 쓰고 세상일에 더 신경을 쓴다면 그 사람은 그 잔치 곧 구원의 희년을 전혀 누릴 수 없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망대를 짓는다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건축업자라면 부지를 마련하고 설계를 그리고 비용을 추산하고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조달할지 계산하고 공사를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고 뭐! 하다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시행한다면 중간에 부도가 날 것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는 사람이 승산을 따져보지 않고 한다면 반드시 질 것이고 나아가서 목숨도 잃을지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최고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오직 그 잔치의 누림을 관심해야지 좋은 것을 두고 다른 것에 여전히 관심을 둔다면 부도나고 싸움에 지게 되는 것처럼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 분과 그 분을 누리는 일에만 관심해야 한다는 것을 이 두 가지 사건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세 가지 찾은 비유와 불의한 청지기에 관한 비유의 상관성과 그 의미 >>
☐ 15장 1절~32절 ; 여기에는 세 가지 잃어버렸던 것을 찾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 첫 번째 잃어버린 비유는 광야에서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다가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은 사람이 그 양을 찾을 때까지 다니다가 찾아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입니다.
- 두 번째 잃어버린 비유는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다가 그 중 한 개를 잃어버린 후 그것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세심하게 찾은 후 친구들과 이웃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 세 번째 잃어버린 비유는 재산을 분배받은 작은 아들이 그것을 방탕한 생활로 탕진한 후 갈 곳 없이 고생하다가 죄를 회개하려고 돌아올 때 아버지가 먼저 달려 나가 그를 반갑게 맞으며 그를 위해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먹입니다. 그러나 그의 형은 이런 아버지의 행동에 불만을 표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잃어버렸다가 찾은 것들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삼일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너무나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이야기에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죄인을 찾으려는 심정이 너무나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으로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보다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당연히 더 중요시 하겠지만 아들의 마음은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가 있으며 그것을 찾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합니다.
두 번째,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내용에서는 성령의 사역이 너무나 잘 묘사됩니다. 등불을 켜서 세심하게 그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내용을 보면 성령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으로는 그 잃어버린 동전 때문에 이웃까지 불러 기뻐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령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며 매우 주의스럽고 세심하며 부드러운 마음으로 우리를 주의하고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가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삶을 산 후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이렇게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이 잃어버렸다 찾은 이야기와 불의한 청지기 비유 사이에는 어떤 상관성이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잃어버렸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자의든 아니든 우리는 우리의 죄와 육신의 정욕과 자신의 이기심과 무능함과 여러 가지 환경 등으로 인해 탕자처럼 행하다가 영원히 버려질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하심과 누군가의 중보의 도움으로 이제 구원 받았으며 교회로 오게 된 것입니다.
마치 赤身으로 태어난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새롭게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후 살게 된 인생이 제2의 삶이 되는 것이고 그 출발을 우리가 육신의 부모에게서 출발할 때처럼 빈손으로 시작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은혜로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이제 전적인 은혜가 되는 것이며 그 모든 소유는 나를 잃어버린 곳에서 찾으신 그 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청지기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게 건강이 있습니까? 내게 능력이 있습니까? 내게 재물이 있습니까? 내게 가족이 있습니까? 내게 직장이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이 적신으로 새롭게 태어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란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이 땅에서 살 동안 임시로 그리고 은혜로 주어진 그것들을 청지기로서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16장 1절~13절)에 들어있는 비밀과 가르침 ; 청지기직의 핵심은 그가 주인이 아니고 단지 관리자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맡겨진 소유물에 대한 소유권의 권리는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관리할 권한만 부여받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주인의 재산을 선의로 관리하지 않고 낭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해고의 통보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청지기는 한 술 더 떠서 사문서 위조라는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곧 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러서 그들의 채무를 줄여주는 방법으로 채무증서를 고치는 행위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첫째, 이런 의롭지 못한 청지기를 그의 주인이 왜 현명하게 행했다고 칭찬했는가? 하는 점과 둘째, 주님께서는 왜 이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그 청지기처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였는가? 하는 점과 셋째, 왜 재물을 불의한 것이라 하였는가? 에 있습니다.
사실 이 비유는 신학자들에게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난제 중의 하나로 남겨져 있으며, 이를 해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이론만 제시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박사학위가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이 이 문제를 풀지 못할까요? 그것은 이 비유를 인간의 가치관에 합당하게 해석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관한 비밀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인간적인 상대적 관념이나 기준에 매여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코 풀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생명과 영적인 관점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의미 중 이글에 필요한 내용만 간략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이 비유에 대한 자세한 분석 내용을 보시기 원하는 분은 저의 블로그(성경연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현명하다고 칭찬한 것은 그의 행위 자체를 정당한 것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그 청지기가 자신의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려고 한 행동이 매우 영리한 것을 단순히 평가한 내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청지기의 행동은 법적인 처벌도 가능하고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지만 그래도 살려고(구원받으려고) 행한 그의 행동이 영리한 행동임을 약간은 반어법적인 뉘앙스로 말한 것입니다. “너 참 영리한 놈이구나!”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8절의 “현명하게”란 단어에 사용된 헬라어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원래 하나님의 참 지혜에 속하는 우리의 내적 지혜를 표현할 때는 σοφια(쏘피아)가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영리하다”는 뜻을 가진 φρονιμος(프흐로니모스)가 사용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나. 주님께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 불의의 재물이란? ; 먼저 왜 재물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표현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합니다. 사실 돈은 그 자체로는 선이나 악에나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교환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재물이 누구의 수중에 있으며, 누구에게 이용되고 있느냐? 하는 생명의 관점,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16장 9절에서 "재물이 필요 없는 때"(없어질 때)라고 말하고 있듯이 원래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공급되었던 에덴동산에서나 광야생활 때의 만나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지금도 참으로 믿음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물질에서 해방되어 이것을 누립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 물질에 매여 있고 속박되어 살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현재 재물의 위치나 존재가 사단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회복역 각주 9-1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친구를 사귀라는 의미 ; 이 구절은 4절과 대비되는 구절로서, 주님께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9절 하반절에 나오듯이 장차 재물이 필요 없는 때가 올 때 그 친구들이 너의 영원한 장막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앞에서 말했듯이 모두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자들입니다. 즉 우리는 아무 것도 내 것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재물과 소유를 일시적으로 관리하도록 위임하였습니다. 이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가지고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친구를 만든 것처럼 하늘에 친구를 만들어 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다름 아닌 무엇을 하던 그 나라 곧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하라는 것이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장차 참된 소유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 참고로 9절의 “빛의 아들들”이란 의미는 원어상으로 “빛 가운데 드러난 아들들”이 보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드러난 아들들이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아들들입니다.
☐ 왜 주님은 약간은 극단적인 이런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으며 그 교훈은 무엇일까요? ; 물론 앞의 두 가지 구원과 섬김에 관한 말씀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청지기로서의 삶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천연적인 관점에서는 좀 극단적이기도 한 이런 비유를 들어서 우리의 청지기의 삶을 강조하고 한편으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만큼 이런 청지기로서의 삶에 우리가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조용히 돌아본다면 우리의 모든 실패의 근원은 바로 "내 것" 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청지기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시간, 건강, 재능, 가족, 물질들을 낭비한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주인의 것을 내 것으로 알고 내 멋대로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돌이켜서 우리가 본래 잃어버렸던 자로서 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내게 맡겨진 모든 것을 하늘의 친구를 만드는 일에 사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10절부터 13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 첫 번째는 ; 가장 적은 것에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적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내게 합당하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진 것이 적고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걸 가지고 뭘 해요! 좀 더 벌어서 여건이 되면 하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애 때문에” “남편 때문에”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재 있는 상태에서 그것에 최선을 다하고 신실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것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또한 내일이 우리에게 없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 두 번째는 ;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지 않으면서 거룩한 것만 찾으면 그것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 받거나 누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거룩한 어떤 것이나, 종교적인 어떤 행위를 떠 올립니다. 물론 그런 것이 나쁘거나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영적인 것은 불의의 재물 곧 삶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그 상황에서 우리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하고,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녹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가장 자연적이고 평범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형제 사랑을 행하지 않으면서 어떤 다른 것을 행한다면 그것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전에 돈을 고르반하면서, 정작 부모를 돌보지 않는 자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 세 번째는 ; 13절에 나오는 교훈으로서 사실 이것이 결정적인 교훈입니다. 바로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바 되었다가 찾은 자로서, 그리고 청지기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섬김의 태도의 핵심은 바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이 주님의 한 마디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또 오직 한 번에 한 사물만 보는 비둘기의 눈을 닮아야 합니다. 이 교훈 안에 사실 이 세 가지 비유의 결론이 다 들어 있습니다.
Ⅳ.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세 가지 구원에 관한 말씀과 그와 병행하는 세 가지 섬김에 관한 교훈들과 비유가 가진 의미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첫 번째 구원은, 죽게 된 목숨을 구원 받은 자로서 오직 마리아처럼 생명의 은인인 그 분만을 관심해야 된다는 것이며,
두 번째 구원은, 원래 잔치에 들어갈 수 없는 자로서 우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즐거우며 가장 귀한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들어간 자가 된 우리가 그 잔치를 누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혼적인 즐거움이나 애착을 끊지 못하고 다른 것을 관심한다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부도가 나고 전쟁에서 패해 죽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경고입니다.
세 번째 구원은, 우리는 전부 잃어버렸던 자들이었는데 그런 우리를 삼일하나님은 온 들판을 헤매시고, 또 방(나의 마음) 구석구석을 찾으시고 날마다 나보다 먼저 문 앞에서 기다리시다가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또 가질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귀한 것임을 모르고 낭비하고 하늘에 쌓을 줄 모른다면, 그 모든 것이 필요 없게 될 날 우리가 갈 곳이 없어질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유가 그것을 위해 자신을 드리고 구속하신 주님의 것입니다. 내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 환상에서 눈을 떠야 합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직장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 곧 나의 시간, 내 능력, 내 재산. 이 모든 것의 참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이런 눈으로 주변을 볼 때 모든 것은 새롭게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솔직히 이 모든 것에서 자신을 주장하고 드러내고 그리고 그런 것으로부터 안정과 행복을 취하는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모든 불화와 고통은 나를 이 모든 것으로부터 확인하려고 했던 것에 그 영적 원인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나를 확인하고 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대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불의한 청지기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한 청지기로서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손을 놓아야 합니다. 그럴때 비로소 내 안에 안식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귀하게 섬김으로서 청지기의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구원과 그리고 섬김에 관한 주 예수님의 말씀은 오직 "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그 분의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