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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지 여행기(1)
2008년 8월24일 ~28일 (4박5일)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십개나 되는 나라들이 발전과 멸망을 거듭하는 가운데 고구려는 무려
700여년이나 북방의 맹주로 대륙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130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장구한 역사의
숨결을 다시금 느끼며 그 현장을 다녀 왔다.
1. 제1일차 - 통화시 집안으로 이동
낮12시45분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심양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버스로 6시간을 달려
집안에 도착하니 밤 늦은 시간이다. 통화현은 인구 45만 도시로 조선족이 5만명이나 되는 지역이다.
2. 제2일차 - 고구려 유적지 답사
수도방어의 요지 환도산성, 산성하 무덤군 , 고구려 벽화가 있는 오회분 5호묘, 국내성터, 우리 역사의
자존심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릉, 동방의 금자탑 장수왕릉인 장군총, 압록강 보트를 타고 북한지역 조망후
통화시로 이동
집안, 압록강변의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곳, 중국 동북공정의 현장을 실감하다. 평소 관광객이
한국인이 80~90%가 된다고 하는데 한글 안내판은 아예 하나도 안 보이고 비디오 촬영을 금지하고
사진 촬영도 실내는 금지한다고 한다. 아예 유네스코 문화자산으로 등록하여 고구려를 중국의 하나로
다지고자 하는 것 같다.
아침 8시 25분 환도산성에 도착하니 수양버들과 느릅나무의 합작품 우산나무가 반겨준다.
환도산성-고구려의 산성인데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해 두었다.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등록 문화유산은 5개에 불과한데
이번 고구려 유적지 답사중 5개의 유네스코 문화유산(환도산성, 오회분5호묘,
국내성터, 광개토왕릉, 백두산)을 지나간다.
환도산성은 3면이 산으로 쌓여 있고 산 꼭대기는 성벽이 있고 오직 남쪽면이 트여져 있어 천혜의
요새로 할 만한 곳이다. 2000여년전 산성이나 지금의 미사일을 쏘아도 끄덕없을 정도의 고구려
성벽이다. 지금은 당시의 형태만 남아 있는데 돌무지와 같이 보이는데 무덤이 아니고 전망대란다.
임좌병향의 돌무지 전망대, 청룡이 높다가 떨어져서 감아돌고 백호도 잘 감아주고 안산도 겹겹이고
외방의 물은 좌에서 우로 가로 질러 나가는 곳이다. 좌측 건너에는 황궁터를 복원중이라고 하는데
흡사 남한산성에 와 있는 기분이다.
산성을 내려와서 산성아래에 있는 귀족묘지를 둘러보다. 지금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곳이 주택가가
되고 산성안이 묘지지역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당시는 적으로부터의 방어가 제1의 목적이었으니
방어가 가장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나 보다. 산성하의 귀족묘지는 평지에 여기저기 흙과 돌무덤군이다.
兄家도 있고 弟家도 있고...국내성 집안시에 1200여기의 무덤이 그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80년대에 들어 와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산성과 고분군, 고구려시대의 무덤 형태인데 고구려 중기의 모습으로 흙으로 덮혀 있다.
규모로 보면 당시의 귀족이나 왕족의 무덤인데 무덤안은 도굴이 되어 누구의 무덤인지를 알 수가
없다.
국내성 성벽, 집안 시내에 있는데 2000여년전의 도읍지 흔적, 시내의 담벽, 국내성 성벽이다.
불툭 튀어 나온 곳을 치라고 하는데 출입문 양쪽에 나와 있다. 적이 공격하면 치에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의 성벽의 원리와도 비슷하다. 비가 많이 오면 방수를 위한 배수구
터도 남아 있고.....지금은 도시의 외곽을 보호하고 공원의 구실을 하고 있다.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파괴되었지만 최근에 들어와서 문화재를 연구하고 복원하는 활동이 활발 한 것 같다.
중국도 사냥을 금지한지가 15년이 되었고 이제는 눈이 오면 꿩도 날아 들고 노루, 멧돼지, 반달곰등도
내려 오고 호랑이도 나타난 적이 있다고 한다.
10시 10분 압록강변에 도착, 저 강건너가 우리 땅인데 갈 수 없는 금단의 구역이다. 강건너 산들이
급경사인데 농지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이 북한임을 실감한다. 압록강에서 보트를 타고 신나게 북쪽으로
달린다. 오른쪽이 북한땅인데 북쪽을 향해 물결을 가로질러 올라간다. 오른 쪽에 북한의 제련공장,
꿀둑에서 연기가 오른다. 강변에서 무언가 작업하는 앙상한 북한의 노동자들, 가파른 산에 농작물
재배중....강폭은 한강의 반도 안되는데 좌우를 가로 지르며 북한초소 바로 옆으로 지나가며 느끼는
감정이 특별하다.
오회분묘 가는 길에 중국서점에 들려 주역, 백호 청룡등 서적도 구입하고....오회분묘는 투구, 철갑모자와
비슷하게 생긴 무덤이다. 5호무덤을 개방하였고 4호무덤도 개방 준비중이다.
오호분묘 가는길, 오른쪽은 철길인데 북한의 만포에서 일주일에 3번정도 기차가 운행된다.
철광석, 동광등을 중국으로 수입하고 식량 및 경공품을 북한으로 수출한다고 한다.
오회분묘를 보고 광개토왕묘, 장군총을 볼 예정이다.
중국은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화장을 한다. 도시마다 화장터가 있고 화장을 한 후 공동묘지에
넣어 두거나 화장터에 3년정도 저장해 두었다가 날려 보낸다고 한다. 강물 따라 또는 바람 따라
날려 보내면 고향을 찾아 간다고 생각한다. 토장도 가끔은 있으나 단속중이다.
오호분 5호묘는 2004년에 개방한 곳이다. 중국과 북한의 학자들이 교류하며 연구한 곳이고
묘실은 어두 컴컴하고 돌과 흙으로 덮혀 있는 곳이다. 밖은 무지 더운데 무덤안은 시원하다.
물기가 어려 있고 벽화가 1600여년 이상된 석실묘로 고구려 중기의 귀족묘로 추정된다고 한다.
4면에 사신도 그림이 있고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추상적 뱀과 용의 혼합체, 뱀과 용의 화신),
남쪽의 주작, 새모양 빨간 공작새가 문 양쪽을 지키고 있다. 북쪽엔 거북이 모양의 현무,
4면이 그림이고 28마리의 용이 그려져 있다.그래서 그런지 고구려시대 주몽부터 보장왕까지
28대왕이 있어다고 한다.
해의 신도 있고 달의 신도 있고 당시에는 농사가 안되면 굶어야 했다. 그래서 농사의 신을 모셨고
그 흔적들이 벽화에 남아 있다. 소- 농사의 신, 농기구신......애초에는 많은 부장품들이 있었으나
다 도굴이 되었고 보석 하나가 남아 있다. 그림인줄 알고 못 떼어 간 것인데 다행히도 하나 남아
있는데 소의 눈깔이 보석으로 되어 벽에 박혀 있다. 벽화는 동물의 뼈, 가루를 썪어서 색을 조성
해서 그린 것인데 아직까지 그 그림이 보존 되고 있다. 개방후 습기가 많이 생겨서 개방전보다는
흐리다. 바닥을 보니 3구의 관이 들어 가도록 되어 있는데 가운데가 본인이고 양쪽이 부인과
첩이다. 도굴을 위하여는 묘 입구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고고학자들보다도 도굴꾼들이
묘를 더 잘 찾아 낸다고 한다.
12시28분 광개토왕릉으로 이동하다. 광개토왕비는 아들 장수왕이 만든 것인데 비석 무게가
37톤이고 비석 높이가 6.39미터, 4면이 장방형 기둥모양으로 1775자의 글자가 비문에
새겨져 있다. 이중 1590자가 해독이 가능하고 글자 간격이 아주 일정하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고구려 건국과 관련하여 주몽,
유리, 대무신 등 3대의 제위 계승에 대한 것과 광개토제의 즉위에 대한 내용이다.
둘째부분은 광개토왕의 치적을 적은 것으로 백제정벌, 신라구원, 부여정벌등에 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셋째부분은 광개토제가 생시에 내린 교시에 근거한 묘비와 연호의
규정을 적고 있다. 광개토왕비석의 조형물은 별도의 기념품으로 구입하다.
광개토왕비는 호태왕(=왕중 왕)비라고 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다
광개토왕비에서 400여미터 떨어진 곳에 광개토왕릉이 위치한다.
평지에 산 같이 쌓아서 만든 것 같은데 태왕릉이라고 부른다.
묘지의 규모는 장수왕릉인 장군총의 4배나 된다고 하는데
장군총이 7층에 변의 길이가 31.5미터인데
이곳 광개토왕릉은 11층에 변의 길이가 66미터이다.
산같이 견고하게 쌓아 둔 광개토왕릉, 그러나 너무 초라하게 보인다.
아마도 당시에 풍수의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풍수의 개념이 있어다면 압록강을 바라볼텐데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석실의 좌향을 재어보니 갑묘공망으로 나온다.
호태왕릉에서 북동쪽을 바라보니 피라미드 모양의 장군총이 보인다.
다음 행선지가 바로 장군총, 장수왕릉이다.
오후2시 04분, 장군총 도착, 장군총은 1600여년전의 묘이고 7층의 돌로 쌓여 있다.
뒤에 돌이 밀려나지 못하도록 축조방법을 썼고 계단식 축조방법으로
퇴물림공법으로 홀을 파서 축조하였다고 한다.
묘실은 매우 작고 천정엔 구멍이 나 있는데 도굴의 흔적이다.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위치도 가장 좋은 곳이고
동방의 피라미드라 할 정도로 웅장함이 느껴진다.
피라미드는 대개 위가 뾰족하나 이곳은 반듯하다.
석실의 덥게 돌이 50톤이나 되고 다듬어 진 돌을 1100개나 사용하고
안에는 자갈과 돌로 채워졌다. 5층이 묘실이고 위에 받침돌의 사이즈가 크다.
석실안에는 두개의 자리가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큰 게 장수왕, 작은 게 부인의 자리다.
장군총 바로 옆 고인돌같이 생긴 무덤이 두번째 부인의 묘라고 한다.
장군총은 좌우 전망도 좋고 무덤의 위용도 느껴진다.
장군총 뒤에 있는 고인돌(실제는 고인돌이 아니라 무덤의 일부가 무너져 지금은 고인돌 같이 보임)은
빈의 무덤인데 배동무덤이라고 한다. 왕후만이 왕과 함게 묻힐 수 있는데 배동무덤은 5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1개만 남아 있다. 장군총과 같은 퇴물림 공법으로 홈을 파서 걸려서 밀려나지 않게 무덤을 만들었다.
장군총 꼭대기에는 50톤이나 되는 돌이 있는데 2층부터는 어렵다.
흙으로 쌓고 돌을 쌓아 다 만든 다음에 흙을 치워 버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고인돌 덮개에 홈을 파둔 것은 빗물이 떨어지지 않게 둘레를 홈으로 파 둔 것이다.
이곳은 일정시대에 폐허가 된 곳인데 청나라 이후 1850년대까지는 주민이 살지 않았다.
19세기 중반부터 만주땅을 개발하면서 조선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장군총은 장수왕묘라고 추정이 되고 있다. 412년에 광개토왕릉을 만들고
장수왕이 자기묘를 바로 만들었다.
15시18분 장군총을 마치고 통화시로 이동하는 길, 5선녀가 살았다는 오녀봉에 들리다.
이곳엔 채석강이 있고 여기에서 비석이나 돌들이 조달되었다고 한다.
15시55분 오녀봉 출발, 가는 곳곳마다 톨게이트가 나온다.
지방을 지날 때 마다 톨게이트를 만들어 두고 통행세를 받는 것 같다.
17시19분 통화시 도착, 학생들이 학교 끝나고 하교하는 시간들이다.
통화시에서 역전으로 이동, 이곳은 일제시대 반일인사들이 활동하던 무대들이다.
양정모 장군등 마적단, 혁명인사들이 많았던 곳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통화 출발, 백두산까지는 5시간정도 이동해야 한다.
3. 제3일차 - 백두산 관광
통화에서 서파로 이동후 백두산 천지관광후 통화로 다시 돌아 옴
26일 07시04분, 통화를 출발하여 백두산으로 가는길, 중국에 대한 소개를 들어본다.
백두산은 중국의 10대명산으로 소개되고 있다. 동북공정차원에서 6위명산이 장백산이고
8위가 대만의 옥산이라고 한다. 만주족의 발상지, 우리민족의 발상지 백두산과
대만을 중국의 한부분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담겨져 있다.
국내성 일대는 만주족의 발상지였고 봉금령이 내려져 자연보호가 되었고 수렵장의
역할을 하였고 사람이 산지가 15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주변지역 산림보호가 잘 되어
있는 곳이고 90%가 한국 관광객이고 10%가 주변도시 관광객이라고 하는데
이번 여행기간에는 50대 50정도의 수준으로 보인다.
주택에 빨간색이 많은데, 기와,벽돌-성스럽게 생각하는 색깔이 빨간색이다.
고온에서 구워내면 빨간색이 된다. 겨울 평균기온이 영하20도 내지 영하25도
년중기온차가 60도 정도나 된다.
중국의 토장문화는 58개의 다민족 국가로 토장,수장,천장,...화장등 티벳풍습의
영향이 많다. 티벳불교사상에서 토장,천장,화장등이 유래하였다.
천장은 산위의 바윗돌위에 시신을 올려 놓으면 가마귀나 독수리가 와서 쪼아서 먹고
그리고 나면 새들의 날개를 빌려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토장을 하는데 이것은 지옥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수장은 어린아이들이 요절하면 큰 호수나 강가에 뛰워버리는데 물속에 흘러가면서
다시 태어 날 때는 더 좋은 곳에 태어나라는 염원이 담긴 것이란다.
장가계에 가면 토가족이 있는데 토가족은 60세가 되면 장수한 것이고
미리 관을 준비하는데 이것이 최대의 효도라고 생각한다.
09시51분, 조선족이 운영하는 휴게소에 도착, 백두산 옥수수가 맛이 있다.
백두산은 길림성에 있는데 한폭의 그림과 같다. 200만년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백운봉(주봉), 성조봉,참운봉,청사루, 옥설봉-눈인지 돌인지 구분이 안간다.
천지에는 바람결에 파문이 일고 ..........압록강, 두만강의 발원지다.
귀암괴석이 저마다 잘 났다고 뽐낸다.
1236계단을 올라 천지에 오르는데는 30여분간 소요, 登山長白山 一生平安,
It will be safety all your life to mount the mountain Changbai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 온다.
천지 오르는 길,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안개가 많아 천지를 제대로 못 보았다고 한다.
다른 곳은 맑은데 천지위로는 구름이 가득하다. 년중 천지를 제대로 보는 날이 많지않다고 하며
시간마다 상황이 달라진다고 한다. 구름에 가려 있더라도 조금 인내를 갖고 기다리면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천지에 도착하니 구름이 다 걷히고 천지가 말끔하게 한 눈에 들어 온다.
한국의 모든 산맥들이 여기에서 발원하는데 남쪽의 산은 금단의 구역이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고
장군봉은 저만치 보이는데 그곳으론 갈 수가 없다.
천지 오르는 길, 가마군 편도300원(한화5만원정도)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모습이 불쌍하다.
300원 받으면 환경보호국과 지방의 대장에게 주고 남는 것은 1/4밖에 안되는
제일 어려운 사람들인데 여행자들에게 한국사탕을 달라고 한다.
백두산 내려오는 길, 첫번째로 들린 곳이 제자하-압록강의 발원지다.
해발 1600미터, 10~15미터의 좁은 협곡에 20여미터의 깊이로 계곡물이 줄기차게 흘러간다.
제자하 우측에 또 하나의 1~2미터 정도의 좁은 협곡, 천지에서 내려오는 쌍지라고 하는데
두개의 물길이 지나 간다.
두번째 들린 곳이 海拔 1464미터-금강협곡, 화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지나가면서 형성된 계곡이다.
제자하계곡보다는 20~30배는 되는 규모다. 3키로미터의 마루 트렉킹코스,
아이디어가 참으로 좋은 것 같다. 10키로 미터로 확장하여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게
준비중인데 돌아보기에도 돟고 자연보호에도 아주 좋은 것 같다.
돌들이 군데군데 기이한 모양들이다. 또끼모양도 있고 다람쥐모양도 있고......
나무들이 절벽에 매달려 있기도 하다.
백두산 16시 30분 백두산 출발, 그리고 저녁, 17시 32분에 식당을 출발하여
늦게 통화시호텔로 돌아오다.
천지에서 햇빛 나고, 내려오니 구름 덮이고, 비 내리고,
비온뒤에 축축한 협곡의 마루 트렉킹코스 3키로미터 운동하고 ......
오늘은 좋은 날, Great Day!!!!
백두산 천지, 원 없이 보았다. 오늘!!!!
4. 제4일차 - 청나라 유적지 답사
통화에서 심양으로 이동 (4시간 30분 소요) 청나라 심양고궁 및 청복릉, 청소릉 답사,
이 곳에 대하여는 답산록에 별도 정리 예정이다.
5. 제5일차 - 귀국
4박5일간 고구려 유적지 여행을 끝내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다. 짧은 기간의 여행이었지만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를 발로 디뎠고 2000여년전의 고구려 유적지를 직접 확인하고
느껴 본 것이 다시금 대한민국의 근원을 생각해 보는 좋은 시간이 된 것 같다.
700여년간 29대왕들의 치적들, 고구려 본기를 여행중 다시한번 읽어 보면서
위대한 고구려 역사의 현장을 다녀왔다. 전세계 230여개의 국가중 비록 국토의 면적은
110위, 인구는 25위로 작지만 경제력은 10위권이요, 체력은 7위까지 오른 민족인데
이번에 그 발상지를 돌아 보고 오게되어 좋은 여행이 된 것 같다.
여행을 준비하고 안내에 수고하신 초계선생님 그리고 함께 동행한 일행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