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종로 삼일빌딩의 주인 세계 제패 꿈꾸던 철강왕 그룹 잃은 뒤엔 직장암으로 사경 헤맸던 그. 선교사로 아이티에 나타나다
그는 한때 서울 종로 삼일빌딩 주인이자 ‘슈퍼스타 감사용’이 소속됐던 야구단 구단주였다. 특수강으로 세계를 제패하리라 꿈꿨던 야심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5년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좌절했다. 그러곤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옛 삼미그룹 2대 회장 김현철(59)이다.
선교사로 변신한 그를 지난 14일(현지시간) 지진 참상의 현장 아이티 포르토프랭스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났다. 다섯 차례 포르토프랭스를 다녀왔지만 이번 여행은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2002년 두 차례 직장암 수술 후 대변 주머니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14~18일 그와 함께 포르토프랭스를 다녀온 뒤 19~20일 산토도밍고에서 다시 만났다. 95년을 마지막으로 국내 언론과 접촉을 끊었던 그가 그동안 삶의 여정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포르토프랭스에는 왜 가셨나요.
“지진 다음 날인 13일 한국기독교연합 봉사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포르토프랭스에 긴급 구호물자를 가져가는데 길 안내를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튿날 만났죠. 그런데 현지 사정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포르토프랭스에 세우려는 선교회 터도 볼 겸 같이 가기로 한 거죠.”
-신앙인이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2002년 우연히 대장 검사를 했다가 직장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담담했죠. 친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했더니 “지금 누구 얘기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한데 막상 수술하러 가면서 ‘암센터’라는 표시를 보니까 눈물이 핑 돌더군요. 수술은 잘 됐는데 일주일 뒤 수술 부위가 터져버렸어요. 응급실에 실려갔죠. 몽롱한 와중에서도 ‘이젠 끝이구나’ 싶더군요. 그때 신에게 매달렸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인생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했죠.”
-선교사로 첫 부임지가 도미니카인데.
“95년에 모든 걸 던지고 캐나다로 떠났습니다(김 회장은 95년 12월 19일 둘째 현배씨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캐나다 법인 대표로 갔다). 처음엔 영주권 신청도 안 했어요. 캐나다 법인 대표였으니까요. 그런데 96년 동생이 캐나다 법인을 포항제철에 넘겼습니다. 캐나다 법인을 팔아버리니 내 신분이 공중에 떴어요. 부랴부랴 영주권 신청을 했습니다. 설상가상 97년 그룹이 부도가 났어요. 동생은 물론이고 나까지 기소당하고 출국정지자 리스트에 올랐죠. 이 때문에 캐나다 영주권 신청도 물거품이 됐습니다. 여권 만료 기간은 다가오고 해서 급하게 알아봤더니 도미니카 이민이 비교적 쉽더군요. 그래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하나님이 아이티로 가게 하려고 예정한 것 같아요.”
-삼미그룹 회장 때와 지금, 어느 쪽이 행복하신가요.
“15년 회장 하면서 행복했던 건 우리가 세계 1위를 할 수 있다는 꿈을 꾼 잠깐뿐이었어요. 나머진 스트레스와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되고 나니 반대예요. 모든 걸 내려놓자 늘 행복해졌어요. 비록 아버님이 이룬 삼미그룹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마저 이젠 내려놨어요. 회사는 사라진 게 아니니까요.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욕심만 빼면 말이에요.”
-95년 갑자기 회장직에서 물러나자 세간에선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만 29세에 회장이 돼 오래 하기도 했고 동생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죠. 그런 차에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불거졌습니다. 검찰에 불려 다니며 온갖 망신을 당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며 기업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군요. 그래서 떠난 겁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97년 그룹부도 뒤 연대보증이 풀리지 않아 부도 후 전 재산을 은행에 차압당했습니다. 아이가 셋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나 막연했죠.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더군요. 캐나다 법인에서 퇴직금 40여만 달러를 줬어요. 그 돈으로 뭐할까 궁리하다 우연히 주식 투자 안내서를 봤죠. 이거다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 주식을 사기 시작했는데 주가가 막 날아가는 거예요. 사기만 하면 몇 배씩 올랐죠. 그 덕에 살았습니다. 계속 투자를 했다면 다 날렸을 텐데 결정적 순간에 아내가 제동을 걸어줬습니다. 도미니카에 선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