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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신이 머문자리는 아름답습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승지
대한민국 성씨의 뿌리공원-4
01.경주배씨 02.여흥민씨 03.신안주씨 04.안음서문 05.청주송씨
06.광주이씨 07.청주송씨 08.창녕조씨 09.경주이씨 10.여산송씨
11.영산김씨 12.용인이씨 13.해주오씨 14.봉화금씨 15.안정나씨
16.사천목씨 17.밀양박씨 18.나주정씨 19.평산유씨 20.성산김씨
21.흥양이씨 22.하남정씨 23.대흥이씨 24.전주최씨 25.원주이씨
26.벽진이씨 27.신창표씨
[01]
배씨(裵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초의 6부촌장 중의 한 사람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祗沱)이다.
그는 다른 5부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총재태사(冢宰太師)에 오른 분이다.
유리왕9년에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을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배씨(裵氏)로
사성(賜姓)하게 되면서 그는 배씨(裵氏)의 도시조(都始祖)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화(史話)는 오래된 것이어서, 그뒤의 계대(系代)가 불확실해진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배씨(裵氏)는 태사공(太師公) 지타(祗沱)에 뿌리를 두면서도 후손들이
번창해짐에 따라 세거지 이름과 조상의 작호(爵號)를 연유삼아 여러 본으로
분관(分貫)되었다.
[02]
민씨는 중국 농서현( 西縣: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된 성씨로 성인 공자의 10제자 중
한 사람인 민 손(閔 損:자는 자건, 노나라 현인)의 후손 민칭도(閔稱道:상의봉어를 역임)
가 고려 중엽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민씨의
시원(始源)이 된다.
민씨의 본관은 여흥을 비롯하여 황려(黃驪)·영주(榮州)·여주(驪州)·대전(大田)·해남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여흥 민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
고려 말기에서부터 명문의 지위를 굳혀 온 민씨는 시조의 증손 영모(令謨)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고, 신종조(神宗朝)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오른
아들 식(湜)과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 소보(太子小保)를 지낸 공규(公珪) 형제를
낳아 가문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03]
신안 주씨는 중국 송나라 신안현 사람인 주 잠(朱 潛)이 고려 고종 때 동래하여
나주(羅州)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그를 동래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잠은 주 자(朱子 : 본명은 희, 성리학을 대성한 남송의 유학자)의 증손으로 송나라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아들 여경(餘慶)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망명해 와서 금성(錦城)에
자리잡고 살았다고「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원나라에서 송의 유민을
압송하려 했을 때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성 고정리(考亭里)에 은거하였다가
여러 곳으로 이거하여 지명에 따라 따로 본관을 사용해 온 관계로 신안(新安)·나주(羅州)·
능성(綾城) 등 45개 파로 갈리었다.
[04]
우리나라 서문씨는 원(元)나라의 하남성(河南省) 출신으로 진사(進士)를 지낸
서문 기(西門記)가 1351년(고려 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의 비(妃)인
노국대 장공주(魯國大長公主 :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안음군(安陰君) 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안음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씨의 본관은 안음 외에도 청주(淸州)·감음(感陰: 안음의 옛 지명)·동주
(東州 : 철원지방) 등 3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추정되며, 안음을 제외한 관향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05]
청주 송씨의 시조 송 춘(宋 椿)은 고려 말기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그의 아들 유충(有忠)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삼등공신(開國三等功臣)으로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으나 중간 계대가 실전되어, 조선 단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나갔다가 가족을 데리고 김해의 하계면 대종리에 청작세거한 승은(承殷)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06]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남한에 총 33,816가구, 141,8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유래(由來)는 신라17대 내물왕(재위기간 356 ~ 401년)때
내사령(內史令)인 휘 자성(自成)으로 비롯되는데 칠원백(漆原伯)이 되어
성주(城主:성의 주인)의 작위를 세습하였다고 한다. 칠원은 지금의 경남 함안을 말한다.
신라가 망하자 유독 칠원만이 성을 굳게 지켜 절의(節義)를 높이고 항복하지 않으니
고려 태조가 크게 노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성을 포위 공격하여 오랜 뒤에야 성을
함락하자 칠원성주(漆原城主)의 일족(一族)을 회안(淮安:지금의 광주<廣州>)에
이주시키고 고을의 역리(驛吏)로 복역하게 하였다.
회안에서 복역한지 몇 대(代)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대로 현재(賢才)가 있었다한다.
[07]
청주 송씨의 시조 송 춘(宋 椿)은 고려 말기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그의 아들 유충(有忠)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삼등공신(開國三等功臣)으로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으나 중간 계대가 실전되어,
조선 단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나갔다가
가족을 데리고 김해의 하계면 대종리에 청작세거한 승은(承殷)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08]
창녕 조씨의 시조는 신라 진평왕(제 26대, 재위기간 579-632년)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曺繼龍)이다.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 )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09]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유래(由來)는 신라17대 내물왕(재위기간 356 ~ 401년)때
내사령(內史令)인 휘 자성(自成)으로 비롯되는데 칠원백(漆原伯)이 되어
성주(城主:성의 주인)의 작위를 세습하였다고 한다.
칠원은 지금의 경남 함안을 말한다.
신라가 망하자 유독 칠원만이 성을 굳게 지켜 절의(節義)를 높이고 항복하지 않으니
고려 태조가 크게 노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성을 포위 공격하여 오랜 뒤에야
성을 함락하자 칠원성주(漆原城主)의 일족(一族)을 회안(淮安:지금의 광주<廣州>)에
이주시키고 고을의 역리(驛吏)로 복역하게 하였다.
[10]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 때 진사(進士)로 나라에 훈공을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문헌에 의하여 그의 선계(先系)는 중국 경조(京兆)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손
자영(自英)이다.
그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인 유익(惟翊)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천익(天翊)은
은진 송씨(恩津宋氏), 막내 문익(文翊)은 서산 송씨(瑞山宋氏)의 시조가 되어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연원(淵源)을 이룬것으로
전해진다.
[11]
시조 김영이(金令胎)는 신라 신무왕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때 전객서령(典客署令)을 지내고 죽은 후에 공신으로 검교도첨의찬성사에
추증되고 영산군에 추봉되었다. 그의 아들 김길원은 공민왕 때 판도판서에 이르렀으며
홍건적을 토평한공으로 영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영산(현 영동)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충북 영동군 남기산에 있다.
[12]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며 태사(太師)인 길권(吉卷)이며,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은 세백(世白)이다.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세백(世白)이 숙종(肅宗) 때 좌의정(左議政 : 의정부에 소속된
정1품 벼슬)에 이름으로써 그 후 영조에서 정조대에 걸쳐 가장 성세를 보였다.
숙종 때 예조판서(禮曹判書), 영조(英祖) 때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 조선 홍문관대제학과 예문관대제학을 아울러 일컫는 말) ·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의현(宜顯)은 세백의 아들로서
부자 정승(政丞)으로 유명하다.
이 밖에 주요 인물로는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평하고 뒤에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보혁(普赫),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재협(在協), 영조 때
예조판서(禮曹判書) · 대제학(大提學) 의철(宜哲), 정조 때 형조(刑曹) ·
병조판서(兵曹判書) 재학(在學), 이조판서(吏曹判書) 재간(在簡), 철종 때 예조판서
삼현(參鉉), 고종 때 이조판서 원명(源命), 선조 때 성리학자 담(湛),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로서 공을 세운 일(鎰)장군, 순조 때 화가 재관(在寬) 등이 유명하다.
[13]
해주 오씨(海州吳氏)의 시조(始祖) 오인유(吳仁裕)는 본래 중국(中國) 송(宋)나라 때
이름 높았던 대학사(大學士)로, 984년 (성종 3) 고려(高麗)에 들어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고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해주(海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조(高麗朝)의 인물(人物)로는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여 용맹을 떨쳤던 명장(名將) 연총(延寵)이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랐으며,찬성사(贊成事)에 이른 한경(漢卿),
그리고 광정(光廷)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 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4]
시조 금응은 기자와 함께 우리나라에 왔으나 벼슬을 삼한공신 태사를 지낸 금용식의
6세손 까지는 유래를 알수없으며 금용식의 7세손 금의와 금부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고려 명종과 고종사이의 명신이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금학사라는 별칭을 가졌고
관직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시조 묘소] 김포군 봉화산에 있으며 3월 9월중에 향사한다.
[15]
안정나씨(安定羅氏) 시조는 고려 공민왕때 삼중대광 문하시중을 지낸 나천서(羅天瑞)이다. 공민왕 19년(서기 1370년)
동북면 원수 이성계(李成桂)가 요동의 동녕부를 정벌하고 귀환할 때 추위와 기근으로 아사지경에 이른 만오천여 군사를
진무 나천서(羅天瑞)가 수백석의 양곡을 구하여 무사히 생환시킨 공으로 안천군(安川君)과 안정백(安定伯)에 봉해지고 안정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안정으로 삼게 되었다. 선계비고(先系備考)나천서(羅天瑞)의 부,조(父,祖) 즉 근조(近祖)는
실전(失傳)이다.
그러나 알려진 문헌에 의하면 신라말(新羅末)에 원조(遠祖)가 나오는데, 문헌1 교남지(嶠南誌) 40편\비안편(比安編)\
인물편(人物編)에서 신라때 나인(羅認)은 안정인(安貞人)으로 관(官)은 정승(政丞)이고 아들 나천업(羅千業)도 정승으로
문창후(文昌後) 최치원(崔致遠)의 장인(丈人)이다.
총묘편(塚墓編)에서는 나인(羅認)의 묘가 해망산에 있는데, 후손(後孫) 나만갑(羅萬甲)이 안동부사로 있을 때 이묘를 증축
가봉(加封)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정나씨의 원조(遠祖)임을 알 수 있다.
문헌2 비안읍지(比安邑誌) 역시 나인(羅認)은 신라때 정승이고 아들인 나천서(羅天瑞)도 정승으로 문창후(文昌後)
최치원(崔致遠)의 장인(丈人)이다. 라고 되어있어 있다
[16]
목씨(睦氏)는 본래 중국(中國) 조군(趙郡: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고대 조나라)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사천(泗川)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계양(桂陽:부천 별호), 옥천(沃川), 전주(全州), 남평(南平), 태인(泰仁),
경주 (慶州), 다인(多仁:경북 예천지방) 등 9본이 있으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사천(泗川)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일찌기 고려조에서 낭장(郎將), 동정(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는 고려 말기 에서부터
가문(家門)을 융성하여 많지 않은 인구수로서도 대성(大姓)의 지위를 확보했다.
[17]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 제 54대 왕, 재위기간: 917 ∼ 924)의 8대군 중 세자(世子)인
박언침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져, 단일본관(單一本貫)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伐族)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朴氏)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 박씨는
중시조(中始祖) 언침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진 연유로 해서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彦孚: 문하시중을 지내고 밀성부 원군에 봉해짐)를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8세손 언상)·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8세손 언인)·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8세손양언)·
판도공파(版圖公派: 8세손 천익)·좌윤공파(左尹公派: 8세손 을재)·
진사공파(進士公派: 10세손 원)·밀성군파(密城郡派: 13세손 척)·
동정공파(同正公派 : 13세손 원광)·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15세손 중미)·
정국공파(靖國公派: 15세손 위)·규정공파(糾正公派: 16세손 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 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각 계통별로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종파(宗派)인 8세손 언부가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신(權臣)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銀山君) 영균(永均)을 비롯한 13개 파가 형성되었다.
[18]
정윤종(丁允宗). 고려조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냈다. '庚午譜' 서문에 보면
나주정씨(羅州鄭氏)는 고려조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면서 상계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萬姓大同譜', '朝鮮氏族統譜', '靑丘氏譜' 등 옛 문헌을 종합하면,
丁씨의 대조(大祖)는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 그는 唐나라 사람으로 대상(大相)의
자리에 있다가 당 선종7년(신라 문성왕15년) 우리나라 압해도(押海島)로 귀양 온 후
사면되었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그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어 우리나라 丁씨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주정씨(羅州丁氏)는 조선 숙종과 경종 연간까지 관향을 압해(押海)로 써오다
영조때에 압해(押海)가 폐현(廢縣), 나주(羅州)에 부속하게 되자 관향이름도 나주(羅州)로
고치게 되었다고 하였다.
숙종 '辛巳譜'(順天譜)와 고종 때의 '庚午譜'에 '羅州押海丁氏族譜'라 이름을 붙인 연유가
여기에 있다.
[19]
유씨(庾氏)는 본래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姓氏)로 한(漢)나라 말기와 진(晉)나라 초기에 유순유(庾荀悠)가 우리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건너와 정착하여 살면서 부터 유씨(庾氏)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後孫) 유금필이 정서 대장군(征西大 將軍)·도통 대장군(都統大將軍)을 역임하면서
고려 개국(高麗開國)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 통합삼 한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公臣)으로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 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조상의 세거지(世居地)인 평산(平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금필의 5세손 녹숭(祿崇)이 고려 숙종(肅宗) 때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 빈객(太子賓客)·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무송(茂松)에
세거(世居)하게 되자 무송(茂松)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20]
시조 김수(金需)는 경순왕의 후손이나 어느 계통인지는 알수가 없다.
그는 고려시대에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상주(상산)에 살았으며
5세인 김비궁이 상산부원군, 9세 김일이 상락(상주)군, 10세 김록이 상성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상산으로 하였으며 상주김씨로도 불리운다. 김수의 후손 김효련을 1세조로 하는
파가있다.
경북 상주읍 신봉리 구월산에 시조의 단을 설치하여 음력 3월 15일에 향사한다.
[21]
시조는 국자생원(國子生員) 언림(彦林)이다.
그는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공부상서(工部尙書)를 거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상서도성에 속한 정2품벼슬)를 지낸 후, 흥양(興陽)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흥양(興陽)으로 삼았다.
대표적 인물로는 언림(彦林)의 증손 원방(元邦)이 동정(同正)을 역임했고, 7세손 길(吉)이
문과에 올라 봉상대부(奉常大夫:정4품의 문관의 품계)를 거쳐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에
이르러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다.
[22]
정씨(程氏)의 선계(先系)는 원래 중국(中國) 황제(皇帝)의 후손(後孫) 백부(伯符)에서
시작되며, 그의 45세손 원담(元潭)이 신안 정씨(新安程氏)로 분적(分籍)하였고,
원담의 31세손 우(羽)는 하남 정씨(河南程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23]
시조 이연계(李連桂)는 조선 초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그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후손으로 이성계(李成桂)가 함흥(咸興)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만류한 것이 화가 되어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가 태종3년에 풀려나 대흥군(大興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면서 대흥(大興)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系代)하고 있다.
[24]
전주 최씨는 시조를 각각 다르게 하는 4계통이 있다.
최순작 계통
시조 최순작(崔純爵, 시호는 문열)은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으로
완주(현 전주) 개국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최순작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최균 계통
시조 최균(崔均)은 최치원의 지손으로 고려 때 동북로도지휘사가 되어 조이총의 난 때
순절하고 완산군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최균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최군옥 계통
시조 최군옥(崔群玉. 시호는 문충)은 동주 최씨의 시조 최준옹의 후손으로 고려 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완산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최아 계통
시조 최아(崔阿)는 최순작의 7세손이다
[25]
시조 신우(申佑)는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경주이씨의 시조)의 12세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이 있어 원주백(原州伯)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후손들은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을 원주(原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원주이씨(原州李氏)의 중흥조(中興祖) 반계(攀桂)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하자, 강원도 치악산(雉岳山)에 은거하여
단식 7일만에 죽으니 왕이 그 절의(節義)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慶原君)에 봉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였다.
[26]
시조(始祖)는 고려 태조(太祖)때의 벽진장군(碧珍將軍) 총언(悤言)이다.
고려 시대의 인물로는 시조의 11세손으로 충숙왕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시명(詩名)이 높았던 견간(堅幹)이 있으며 조선(朝鮮)에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맹전(孟專)과 조선 말기의 거유(巨儒) 항로(恒老) 가 유명하다.
이밖에 성조(成宗) 때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으뜸 벼술로 정 3품)에 이른 철균(鐵均),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섬에서 자결한 공조판서(工曹判書) 상길(尙吉), 중종(中宗) 때
대사헌(大司憲)ㆍ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장곤(長坤)등이 뛰어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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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씨(表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성씨로 「조선씨족통보」와 「증보문헌비고」등에
신창新昌) · 양주(楊洲) · 죽산(竹山) · 충주(忠州) · 공주(公州)등 37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신창(新昌) 단본으로 알려져 있다.
신창 표씨(新昌 表氏)는 고대 오계시대(오대의 문란해진 시대를 일컬음)에 후주의
이부상서 표대박이 서기 960년(고려 광중 11) 장(張) · 방(方) · 위(韋) · 변(邊) ·
윤(尹) · 진(秦) · 감(甘) · 황보(황보(皇甫)등 8성과 함께 고려에 들어와 귀화함으로써
연원이 이루게 되었다. 그후 세계가 실전되고 소목을 밝힐 수 없어, 후손들은
고려 충숙왕때 합문지후 · 평장사 등을 지내고 좌리공신에 올라
온창(溫昌 : 신창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인 표인려를 중시조(中始祖 : 일세조)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으로 감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감찰을 지낸 계(繼)의 아들 연말(沿沫)이 일찍이 당대의 석학
김종직에게 글을 배우고 성종때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으며,
당대의 명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