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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교회의 갈등 발생
Ⅰ 신학적인 갈등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하여 교육받은 한국인 목사들은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외국에 유학한 한국인 목사들이 귀국하자 이들은 세계신학의 조류를 소개하게 되었고, 이러한 진보적 경향들을 한국에서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하였다. 장로교 총회는 1917년에 다른 신학교 출신자들이 장로교에서 일하려면 장로회 신학교를 이수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는데. 이 결의가 오늘날까지 그 효력을 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송 창근(宋昌根), 김 재준(金在俊) 목사 등이 진보적 사상을 대표하였다. 이 때부터 신학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평양 신학교의 박형룡 박사와 숭인 상업학교 교우인 김 재준 목사 사이에 일어난 논쟁이었다. 김 재준 목사가 〈신학지남〉에 투고한 일련의 논문들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하고 고등 비평을 시도하자 박 형룡 박사는 이를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적 대결의 근원은 박 형룡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보수 신학의 거두인 메첸(G. Machen) 박사의 사상적 영향을 입고 전통적 기독교 신학을 강조한데 비하여, 김 재준 목사는 캐나다 선교사들의 자유적 영향과 일본 청산(靑山) 학원에서의 자유적 신학 체험 등이 큰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대결이 1934년과 1935년의 장로교 총회에서 신학적 분열을 노정 시켰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자유주의 성경 해석 문제
1934년 제23차 총회에서는 당시 남대문 교회 김 영주(金英珠) 목사의 창세기의 모세 저작 부인과 김 춘배(金春培) 목사의 여권(女權)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박 형룡 박사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을 부인하는 사람은 장로교의 목사 됨을 거절하는 것이 가하다>고 공박하고, 여권 문제의 자유주의적 해석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김춘배 목사와 김영주 목사는 출신과 목회 배경이 경기도․함경도였고 1933년어간에 두 사람이 모두 일본의 칸사이(關西)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돌아온 신진 학자들이었다.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및 사회 복음주의 신학 분위기가 강했던 칸사이 학원에서 수학한 이들은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정통 보수주의 교회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발언을 하였고, 그것이 정치문제화 된 것이다.
1)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우선 여권문제의 경우를 살펴보면, 장로교회 안에서 직제상 여성의 지위문제가 거론된 것은 1920년대 초부터였지만 1930년대에서 들어서면서 장로교회의 보수적 남녀차별을 비난하는 글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감리교회에서는 1930년 남․북 감리회가 합동하면서 1회 총회에서 비록 선교사들이었지만 14명의 여성 목사를 배출할 정도로 여성문제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장로교회는 여성안수를 금한 헌법 「정치 제5장 3조」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에 1934년 함남노회 22개 교회 여성들이 여성 장로직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한 바 있었다. 이 같은 여성들의 청원을 지원할 목적으로 함남노회 산하 성진중앙교회에서 시무 하던 김춘배 목사는 1934년 8월, 23차 총회가 열리기 직전 〈기독신보〉에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글을 기고하였는데 그는 이 글에서 정치 제5장 3조를 차별적 헌법으로 규정하였고, 특히 다음과 같은 부분은 보수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여자는 조용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2천년 전의 일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고 그러는 것도 아닐 터인데요.라는 내용이었다.성경무오설을 신봉하던 그들로서는 여자는 조용하여라는 성경 말씀을 2천년 전의 일개․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정도로 해석하며 그것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인식하고 있는 자신들의 태도를 비꼬는 듯한 김춘배 목사의 언사가 불경스럽기만 했다.
2)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저작자 문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남대문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김영주 목사가 연루된 이 사건은 1934년 총회에서 그 해에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펴낸 《만국주일공과(장년부)》 내용 중 일부가 장로교회 신조 제1조,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삼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야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라는 내용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전북 노회장(고성모 목사)의 질의로부터 야기되기 시작했다. 즉 공과내용 중 (창세기가) 히브리 오랜 신화를 근본 삼엇다는 문구와 창세기 저자가 확실치 못하다는 문구는 전선(全鮮) 교회에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삼으로 신앙하는 데 막대한 의아를 일으킴이오니 총회로서 지시하여 달라는 헌의를 한 것이다. 이와 함께 창세기 저자가 모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목사가 목사의 시무를 할 수 있는가하는 문의도 정치부에 정식으로 접수되었다.《만국주일공과》가 장․감 연합선교단체인 주일학교연합회에서 발행한 것이고 그 내용을 쓴 필자가 명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총회 석상에서 김영주 목사의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보수주의 교회 지도자들은 그 필자가 김영주 목사임을 알고 있었고 이 문제를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와 결부시켜 보수주의 신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여겨 정치문제 화한 것이다.
연구위원들은 1년 후 1935년 총회에서 창세기 모세 저작론을 옹호한 후 다음과 같은 단호한 판결을 내렸다.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교역자는…크게 말하면 5경 전부 내지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사람이오 적게 말하더라도 5경의 증거와 구약 다른 여러 책의 증거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신약 여러 책의 증거를 거짓말로 인정하야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며 능욕하는 사람이니…우리 장로교회에는 용납할 수가 없나이다” 로 보고되어. 결국 1935년 9월, 평양에서 열린 24차 총회에서 김 영주와 김 춘배는 총회 결의에 추종한다는 자신의 견해 취소와 사과 성명을 발표함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2. 아빙돈 성경 주석 문제
이 주석은 감리교 선교 5O주년을 기념하여 1934년에 출판된 《단권 성경주석》(單卷聖經註釋)인데 내용과 번역자로 인해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책은 미국 아빙돈 출판사(Abingdon Press)에서 발행한 성경주해서(He Abingdon. Bible Commentary, 1930년)를 번역한 것이었다.
이 책은 감리교의 유형기(柳瀅基)가 번역․편집 책임을 지고 신생사(新生社)에서 출판한 것인데, 번역자로 감리교의 양주삼․정경옥․김창준(金昌俊)․전영택(田榮澤)․변홍규(下鴻圭), 장로교의 송창근(宋昌根)․채필근(蔡弼近)․한경직․김관식․김재준․조희렴․윤인구 등을 비롯한 53명이 참여했다. 이 아빙돈 성경주석은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성서신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것으로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던 성서 비평학을 즉 문서비평학, 고등비평학, 역사비평학 등 당시로는 현대적 학문 방법론을 총동원한 새로운 주석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오자성서무오설을 신조 제1조로 삼고 있던 장로교회 안에서 부정적 반응이 나오게 된 것은 당연했다. 장로교회에서는 보수주의 전통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총회에까지 파급된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1935년 장로회 24차 총회에서는 우리 장로회의 도리에 불합한 고로 우리 장로회에서는 구독치 안코 그 주석에 집필한 장로회 사역자에게는 소관 된 각 교회에서 살핀 후에 그들로서 집필한 정신태도를 기관지를 통하야 표명케 함이 가한 줄로 보고하여, 단죄하면서도 관련자에 대한 정치적 처리는 지방 노회에 맡겼다. 송창근․한경직․채필근․김재준이 소속되어있던 평양노회는 각서 제출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송창근․한경직․김재준 등 3인은 성명서를 〈신학지남〉에 발표함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Ⅱ 정치적인 갈등
1. 정인과 목사의 찬송가 문제
장․감 두 교파 교회의 갈등과 장로교회 내의 서북․비서북계 갈등을 표출시킨 사건이 1935년의신편 찬송가사건이다.《신편찬송가》란 당시 장로회 총회 교육부 총무로 있으면서서북계 실세의 주도권자로 부각되던 정인과(鄭仁果) 목사의 주도로 편집․출판된 찬송가이다. 이를 《정찬송가》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을정찬송가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건의 내용은 1931년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한 《신정찬송가》를 장로교에서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별도로 장로교용《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여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신정 찬송가》는 1908년 이후 장․감 두 교회에서 사용해 오던 《찬송가》를 개편한 것인데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희와 조선예수교서회가 편집 ․발행 및 판매 권한을 갖고 있었다.
1934년 총회에서 찬송가 편찬 문제는 감리교회에 교섭하야 연합 편찬하게 하되 만일 감리회에서 불응하면 장로회가 따로 편찬함이 가하다는 종교교육부의 헌의를 받아들여 찬송가 편찬에 대하야는 종교교육부에 맛겨서 더욱 잘 편찬하도록 가결함으로 장로교 단독 찬송가 발행으로 방향이 잡혀갔다. 그 해(1934년) 종교교육부 총무로 취임한 정인과 목사의 결단이 크게 작용하여 이듬해 구 찬송가 중 늘 부르지 안는 것 4O장을 삭제하고 신정 찬송가 중 조흔 것 7O장을 선택하여서 너헛고 새로히 100장 가량을 너허서 400장 짜리 《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였고. 장로교 전체 분위기는 《신편 찬송가》발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로써 장로교는 《신편 찬송가》, 감리교는 《신정 찬송가》를 사용케 되어 두 교회 연합운동 분위기에 큰 손상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2. 전필순 목사의 기독신보 문제
이러한 교회 연합운동 손상은 기독신보사건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기독신보〉는 1915년부터 간행되던 장․감 연합 초교파 신문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이 신문의 주필이던 박동완(朴東完)이 민족 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하고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1920-21 사이에 독립운동에 관련된 기사들을 수록하여 교계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각광을 받았던 신문으로 1921년도에 총 25만 2천 여부를 발행한 영향력있는 언론지였다.
그러나 1933년 7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필순(全弼淳) 목사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기독신보〉 발행권을 둘러싸고 계파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필순 목사는 장로교 소속이었으나 일본의 코오베(神戶)신학교에서 수학하며 그곳 출신 가가와도요히코(賀川豊彦)의 기독교 사회주의에 사상적 영향을 받은 진보적 인물이었으며, 출신 및 목회 배경도 비서북계(非西北系)인 경기도․서울이었다. 그는 〈기독신보〉 사장이 되자마자 기독신보 찬조회를 조직, 한국교회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얻어 경영 자립을 꾀했고, 한국인 직원을 대거 채용하여 편집 진을 보강했다. 이 같은 혁신적조처는 선교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예수교서회로부터독립’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발행권을 갖고 있던 조선예수교서회와 관계가 나빠지게 될 것은 자명했다.
여기에다 전필순의 사장 부임 이후로 〈기독신보〉에는 경기․중부의 진보적 인사들의 글이 자주 실렸으며 특히 장로교총회에서 이단으로 인증한 신홍우(申興雨) 중심의 적극신앙단에 대해 호의적 기사를 씀으로 서북계의 견제도 받게 되었다.
이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 1935년 9월 조선예수교서회 이사회에서는 유억겸(兪憶兼)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전필순에게〈기독신보〉사장직을 인계하도록 했으나 전필순은 이를 거절하고 사무실을 종로 2가 서회 건물에서 수송동으로 옮기고재 혁신을 선언하며 독자적인 발행을 시작했다. 이로써 장․감 연합 교계 신문이던 〈기독신보〉는 전필순의 개인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35년에 〈기독신보〉가 전필순 개인 발행지로 변하기 전에 이미 그 교회 연합지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있었다. 전필순이 사장으로 취임하던 해인 1933년에 감리교는 양주삼을 발행인으로 한 〈감리회보〉(監理會報)를, 장로교는 정인과를 발행인으로 하는 〈종교시보〉(宗敎時報)를 각각 창간하여 교회 기관지로 출범시켰던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된 교회’를 추구하던 초기 한국교회 정신을 크게 훼손시키는 것이었다.
Ⅲ 교회의 새로운 모습
1. 감리교의 합일(合一)
장로교는 1912년에 총회를 조직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고 미국 교회의 신학과 정치가 여기에 직결되는 경향을 보였다.
감리교회는 남북 감리교 선교부의 지원 아래 각각 다른 기관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연합 운동이 여러 갈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양주삼 목사는 "감리교의 합동운동"을 위해 추진했으나 미국선교본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한국에서 먼저 합동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에 감리교회가 들어 올 때에는 각기 때와 배경은 달리했으나 선교 초기부터 서로 우호적이었고, 사업에도 협동적이었다. 1915. 2. 15.에는 합동으로 "그리스도 회보"를 창간했으며, 1905. 4. 에는 합동으로 신학교 세웠고, (협성 신학교) 이화 여자 전문학교도 합동으로 세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1924년 "남북 감리교회 통합방침"을 합의하였으나 1925년에 미국 본부에서 부결하였다.
1926년 한국에서 단독으로라도 통합하겠다는 결의와 각오로 6월에 "미 감리교회 한국연회"가 모이고, 9월에 "남 감리교회 한국 매 연회" 모임에서 통합방침을 연구할 위원 5명씩 택하게 된 것이 남북 감리교회의 적극적인 통합운동이 되었다. 위임받은 위원이 1927년 6차례 모여 협의한 결과를 미양 연회에서 수정하여 통과를 보고, 1928년에 미 감리교회 본부의 승인과1930년에 남 감리교회 본부의 승인이 남으로서 합일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1930 12월 2일 서울 협성 신학교에서 남북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조선 감리교회>로 출범하게 되었다. 양 주삼 목사가 제 1 대 총리사로 피택 되어 감리교 정신의 앙양을 강조하였으며. 거기에 따른 어려움도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선교부에서 독립하는 자치 교회의 형태를 이루었다.
2. 오순절 운동
한국에서 오순절교회 계통의 선교사로 처음 내한한 이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인으로 1928년 내한한 간호원 럼제이(M.C.Rumsey)를 들 수 있다. 당시 럼제이는 교단이나 교회 지원 없이 단독으로 내한했다. 그녀는 기도하던 중 한국에 가서 선교하라는 지시를 받고서 사재를 털어 그냥 혼자서 한국을 찾아서 왔던 것이다. 그녀는 구세군 조선본영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허 홍을 만나게 되었다. 허 홍은 방언을 하는 것과 기도로 병을 고치는 신유를 오순절신앙의 요체로 인식하고 럼제이를 도와 전도 활동을 벌였다. 그후 일본 성서신학원에서 수학한 박성산이 합류하여 1933년 봄 서빙고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오순절교회가 설립되었다.
1932년에는 미국 오순절교회 소속인 파슨스(T.M.Parsons)가 역시 개인자격으로 내한했고, 이듬해에도 영국 오순절교회 소속인 메르디스(E.H.Meredith)와 베씨(L.Vessey)가 역시 개인자격으로 내한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파슨스는 배부근과 함께 수창동에 제2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했다. 이로써 서빙고에서는 럼제이, 허홍, 박성산이, 수창동에서는 파슨스와 배부근이, 죽첨정에서는 메르디스와 베씨가 오순절교회운동을 전개했다.
1938년 10월 5일에는 한국 오순절교회 최초의 목사 안수식이 베풀어졌는데, 허홍, 박성산, 배부근 3인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때의 교세가 6교회, 11목회자, 192성도로 일제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후 오순절 교회는 1950년 4월 9일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 대회를 순천 오순절교회에서 개최하였는데 약 200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그후 2,3차 대회를 모이면서 1953년 4월 8일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결성된다. 이는 1952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채스넛 선교사가 파송 된 다음해이다. 이 때부터 비로소 조직화된 오순절운동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오순절 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시점에 조용기 목사가 나타난 것이다. 1959년에 순복음신학교를 제4회로 졸업한 그는 1961년 샘 토드 목사의 서대문 로타리 부흥집회 시 통역을 맡았는데 부흥회 기간동안 많은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오늘날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발전하게 되는데, 오순절신앙의 국내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용기 목사가 이렇게 시작한 그 교회는 1년만에 성도가 1천명으로 늘어났고, 1970년에 여의도로 교회를 옮기기 직전 만 여명의 성도가 모였다.
◉ 과 제 ◉
1. 김춘배 목사의 성경해석 과 아빙돈주석 번역 문제에 대하여 진술하라
2. 정인과 목사의 찬송가 문제, 전필순 목사의 기독신보 문제에 대하여 설명하라
3. 감리교의 합일에 대하여 약술하라
4. 오순절 운동에 대하여 쓰라
제8장 교회의 훼절(毁節)과 수진(守眞)
Ⅰ 일제의 식민지 정책
1. 일제의 황민화와 전시 동원 정책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1932년 상해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하였다. 또한 이러한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식민지 한국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물자와 인력의 수탈․동원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도 통제하였다. 일제는 식민통치 초기부터 우리 민족의 특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즉 경찰과 군사력에 의한 폭력적 억압만으로는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에 식민지 민족의 정신 내부에까지 파고들어 민족의 독자성을 말살하고 일본화 시킴으로써 식민통치의 영구적 안정을 도모하며 수탈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말살의 동화정책(同化政策)은 일제 식민통치의 기본방침이었으며, 1930년대에 들어 그들이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한층 강화시킨 것이 소위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이었다.
황민화 정책의 특징은 천황 신앙의 강제를 축으로 하여 민족의 정체성(identity)을 빼앗아 민족성의 말살을 단기적으로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의 제창,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常用) 등을 강요하였다.
일제가 한국인의 민족 말살적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운 논리가 소위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이었다. 이 논리에 의하면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 민족 속의 일부이며, 소위 흥아적(興亞的) 민족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 민족을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이며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니 구미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 해방이니 홍아적 민족 해방전쟁이니 성전(聖戰) 등으로 미화하여 아시아 지역의 민족 해방문제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 사이의 모순성을 은폐 시켰다.
조선인에 대한황민화는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보다 더 적극화되었다.
조선교육령의 개정, 육군지원병제도 창설, 창씨개명의 실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결성, 경찰서 주재소를 중심으로 한 각종 시국좌담회의 개최 등을 강제하였다.
1938년 7월 중일전쟁 1주년을 기념하여 결성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은 황민화의 중심적 기구로서, 하부조직으로 행정단위인 도(道), 부군도(府那島), 읍면(邑面), 정동리(町洞里)연맹 등의 지방 연맹과 관공서, 학교, 회사, 종교단체 등 각종 하부 연맹을 조직하고 그 아래 1O호 단위로애국반을 조직케 하여 민중 생활의 전반을 통제하였다.
그 실천 요목으로 1) 매조 황거 요배(每朝皇居遙拜) 2) 신사참배 여행(神社參拜勵行) 3) 조선 제사 여행(祖先祭祀勵行) 4) 기회 있을 때마다 황국신민서사 낭송 5) 국기(일장기)의 존중․게양 여행 6) 국어(일본어)생활의 여행 둥 21개 항목을 정하여 실행케 하였다.
일제는 전선의 확대와 전세의 악화에 따라 전쟁물자의 조달을 위하여 식민지 수탈정책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국방헌금의 강제 징수, 저축의 강요, 애국채권의 강매, 유기(鍮器)․철기 등 금속 생활 집기의 강제 공출 등은 이러한 수탈정책의 일환이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 수행과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의 경제적 자원 수탈과 함께 최대의 희생을 강요하였던 것이 인력 수탈이었다.
그들은 전선의 확대에 따라 부족한 병력과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조선 육군특별지원병제도(1937년), 국민 징용령(1939년), 창씨개명(創氏改名)명령(1939년),학도 동원령(1943년), 징병령(1944년)을 공포하고 수많은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였으며, 급기야는 여자정신대 근무령(1944년)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여성 인력까지 동원, 전선의 위안부로 전락시킴으로써 막대한 비인도적 희생을 강요하였다.
2. 일제의 교회에 대한 정책
1930년대에 들어서 일본 정부의 종교단체법안 제정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특히 전시체제하에서 일본 정부의 종교 통제의도가 강화되어 종교단체 법안요강, 종교단체법초안 등을 마련하여 종교제도 조사회에 형식적인 자문을 구하는 등 점차 그 포위망을 좁혀가다가 드디어 1939년 제74회 일본제국 의회에서 이를 통과시킴으로써 종교에 대한 통제를 본격화하였다. 이 법은 종교단체와 그 교화활동에 대하여 정부의 감독을 엄중히 하고 황도정신(皇道精神), 신국사상(神國思想) 등 신도적 이데올로기를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에 위배되는 기독교를 비롯한 제 종교는 가혹한 탄압을 받고, 그 존립을 위하여는 변질을 강요당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일찍이 1915년 포교규칙(布敎規則)을 발표하여 한국교회를 통제해 왔다. 그러다가 3․1운동 이후 기독교인의 저항에 놀란 총독부와 선교사들 사이에 어느 정도 타협이 이루어져 기독교만은 교회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계출제, 즉신고제로 완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 종교단체법이 시행됨으로써 다시 인가제로 환원되고, 교회의 설립은 물론 교역자의 자격까지도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으며 교규(敎規), 종제(宗制) 등도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종교에 대한 형식적 외적 통제일 뿐 아니라 교리(敎理)와 교규에 대한 실제적인 통제로서 한국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강제적 획일화와 종교의 변질을 강요하고 종교활동도 종교보국(宗敎報國)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전시체제를 이유로 전쟁 협력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1938년 2월 조선 총독부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 이라는 것을 마련하여 그들의 시책에 순응하게 하고,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를 만들므로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이용코자 하였다.
3. 신도(神道)와 신사 참배
신도의 기원은 고대 일본인의 가미(神)에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가미라는 말은 신격(神格) 혹은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일본의 고유어로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 자연현상, 경이적인 자연물, 신화적 인물, 역사적 위인, 조상들의 영,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들을 일본인은가미로 숭배하였고 이것들을 총칭하여 8십만 신, 혹은 8백만 신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가미라는 말은 고대인들의 공통 신앙 형태였던 자연숭배와 조상숭배에서 나온 다신교적인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가미에 대한 신앙이 고대 일본의 천황 권의 강화와 함께 천황의 조상신으로 여겨졌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들을 신사(神社)에 봉제하여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도는 고래(古來)로 일본의 정치권력 내지는 황실(皇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그러나 신도는 교리나 경전보다는 고대로부터의 관습적 의례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고등 종교인 불교에 눌려 그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사상적 열세와 천황 권의 약화로 막부체제하에서 민간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던 신도가 17, 18세기 일본의 유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고유한 것을 찾기 위하여 고전을 연구하는 가운데 신도에 주목하고 복고신도(復古神道)를 제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문하에서 막부말기에 신도사상에 입각한 배외적 국수주의와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신도는 천황을 절대 신으로 여기는 천황제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화되었고, 지배 통치의 원리로 채택되었다. 그 후 신도는 일본 정부의 보호와 육성 하에 급속히 발달하여 국수적 토착 종교로서 국교적 지위를 확립하여 갔다. 1871년에 일본 정부는 일본의 모든 신사를 국가의 종사(宗祀)로 하고 사격제도(社格制度)를 마련하여 신사에 공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1) 조선에 신사 건립과 참배 강요
이런 신도, 신사에 대하여 일제는 합병 후 조선총독부를 통해서 문화침략 내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에게까지 신사신앙을 강요하였다.
총독부는 합병 직후부터 관립신사건립계획을 추진하여, 그들의 식민지 지배의 상징적 존재인 조선 신궁을 세우고 여기에 그들이 국조신으로 받드는 천조대신과 명치 천황을 봉제하였다. 그리고 일반 신사에 대해서도 점차 법령 정비를 통하여 관․공립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그 설립을 장려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신사와 식민지 교육기관을 통하여 한국인에게 신도사상과 천황숭배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사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여기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강요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교육계였다.
일제는 신사신도를 국민적 애국교육정책의 기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충성과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훈련의 일환으로서 재학중인 모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 학교들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다시 신사문제가 일어났던 것이다.
즉 1932년 1월 전남 광주지역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을 참석하도록 하였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이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평양지역에서도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학교도 참석하도록 도지사가 공식 통첩을 보냈으나 숭실전문학교를 위시한 1O개교의 기독교계 학교가 불참하였다. 이듬해 9월 원산지역의 캐나다장로교 소속 진성여자보통학교도만주사변 2주년 기념 순란자(殉亂者) 위령제의 참가를 거부하여 경고를 받았다. 일제는 이러한 불참 저항에 대하여 행정기관을 통하여 강력히 경고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고 탄압을 가중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학교 교장 맥큔(윤산온) 박사와 숭의여학교 교장 스누크는 파면을 당하였고, 1938년 3월 평양 3숭(숭실,숭의,숭덕)이 폐교 당했고, 대구의 계성, 신명, 재령의 명신, 선천의 보성, 신성, 강계의 영실, 서울의 경신, 정신학교 등이 문을 닫았으며, 9월에는 광주의 숭일, 수피아, 목포의 정명, 영흥 4개교와 춘천의 매산, 매산녀, 담양의 광덕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당했으며, 이어 순천의 매산, 전주의 신흥, 기전, 군산의 영명 학교도 폐교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울의 경성신사와 부산의 용두산 신사를 각각 국폐 소사(國幣小社)로 승격시켰다. 이어 1면 1신사 정책을 세워 산간 벽지의 면 단위에까지 신사를 세우게 하고, 일반 민중에게까지 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파출소, 주재소 둥 관공서나 학교에 신궁대마를 넣어두는 간이 신사라 할 수 있는 가미다나(神棚)를 설치하게 하더니, 마침내 관할 행정기구를 통하여 일반 민가에까지 신궁대마(神宮大麻)를 강매하여 가미다나를 설치하게 하고 아침마다 이에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2) 교회에 신사참배 강요
조선교회에 대하여 총독부가 직접적으로 일본적 전향을 요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였다. 중일전쟁 이후 이른바 황민화 운동의 고조와 함께 교육계에서의 신사참배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 되어가자 이제직접 그 강요의 마수를 교회로 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1938년 2월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새워 일반 교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개의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노회, 총회에까지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신사참배거부 교도 단호 검속’ 이라는 강경책과 함께 한국 교회 목사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이미 그들의 정책에 굴복한 일본교회들을 돌아보게 하는 등 방책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일본기독교대회 의장인 도미다(富田滿)를 내한하게 하여 신사참배에 대한 설득 강연을 하게 하였다. 1938년 여름부터는 개 교회에 대해서도 경찰을 통해 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냐? 국가의식이냐? 국가지상(至上)이냐? 종교지상이냐?라는 유치한 질문서를 보내 그 답변 여하에 따라 집회를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일제는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예배순서에까지 애국적 의식을 넣도록 강요하는 한편 예배당에도 가미다나를 설치하도록 강요하였다.
Ⅱ 교회의 훼절과 부일 행각
1. 신사참배 결의와 일제화 교회
신사참배에 대하여 한국 교회들은 일치된 행동을 보이지 못하였다. 반대론이 있었는가하면 일본의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교회들도 있었다.
1) 각 교단들의 신사참배 참여
각기 시기의 차이는 있었지만 천주교, 감리교,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교파들이 줄줄이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에 응했다.
1936년 감리교회에서는 양주삼 총리사가 총독부 초청좌담회에 참여 후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감리교 교회들이 신사참배들을 하고 감리교 계통의 학교들이 해방될 될 때까지 그대로 존속할 수 있었으며 교회의 수난도 가벼웠다. 감리교의 제3차 연회(1938.10. 5-13)가 모였을 때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참석하여 축사까지 할 정도였고, 총리사 양주삼 박사는 내선일체를 강조하기까지 하였다.
2) 장로교의 신사참배 결의
장로교의 경우는 그 양상이 달랐다. 1931년 9월, 경남 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자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 실행 위원회를 1936년 초에 소집하고 미션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정하며, 그해 1O월의 실행 위원회에서는 1938년까지 평양 내외의 학교 폐쇄를 단행하였고, 본국의 승인도 얻었다.
이런 장로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의 고통을 겪다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강압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참배 결의를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 1938년 전국적으로 노회가 모이기 시작하자 일본은 조직적으로 파괴 공작을 하기 시작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검속이 일어났다. 이런 험악한 가운데 1938 9월 9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회 총회가 회집 되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 97명이 193명의 총대들 사이에 끼어 앉아 회의를 감시하는 가운데 다음날, 오전 1O시 일제의 각본대로 박 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니 국민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 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 제안을 하였다. 이에 회장 홍 택기 목사는 가(可)만 묻고 부를 묻지 않은 채 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방 위량 선교사와 한 부신 선교사가 결의의 불법을 외치자 일본 경찰들은 폭력으로 밖으로 끌어냈다. 총회 폐회 후 부회장 김 길창 목사가 각 노회장들을 인솔하고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다. 한국 교회의 신앙적 지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3) 변질 신학교 설립
(1) 조선 신학교 설립
1938년 9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체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선교회에서는 평양신학교 제2학기 개강을 무기연기 하였다. 제3학년 1학기 수강자들에게 대하여는 통신으로 수업하여 1939년 3월 28일부로 졸업증서를 우편으로 보내었다. 이것이 선교사들의 마지막 신학교육이었다. 이 때의 졸업생은 52명이었다. 이렇게 선교사 운영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서울에서 새로운 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1939년 9월 신의주에서 모였던 제28회 총회에서 조선신학원 설립 경영을 인준하였으며, 194O년 4월 19일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 하층에서 개강을 보았다. 이 신학교의 설립 목적은 「본 신학원은 복음적 신앙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량유위의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한다」이었다. 역대 교장과 교수, 강사 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학원장 : 김 대현〔金大鉉), 윤 인구(尹仁駒), 김 재준〔金在俊), 송 창식〔宋昌植), 함 태영〔咸台永), 김 정준〔金正俊)
▶ 교수, 강사 : 윤 인구, 김재준, 궁내창〔宮內彰), 이 정로, 전필순, 현제명, 김 창제, 갈 홍기, 송 본탁〈松本卓), 전 성천, 유 호준, 花村芳夫, 村岸淸彦, 박 태준, 한 경직, 정 대위, 권태희, 공 덕귀, 최 윤관 (1945년까지).
이 신학원은 1943년 2월에 감리교 신학교와 합동 수업을 실시하였으나 5월에 분리하여 덕수교회에서 수업하게 되었고, 김 재준 목사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군정청에 학교인가를 제출하여 인가를 받고 김 재준 목사가 신학교장으로 정식 취임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인 오늘의 한신대학인 것이다.
(2) 평신〔平神)의 변신 복교(變身復校)
1939년 3월 평양에서 신학 교육부가 모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신학교는 총회에서 직영한다. 기본금 5O만원을 모금하고 신학교 인계 청원을 선교부에 발송한다」 이 청원에 대하여 선교사 연합 공의회에서는 수락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동년 9월 총회에서는 평양신학교 복교를 결의한 뒤 1940년 4월 11일에 개교하였다.
그 진영은 다음과 같았다.
이사 : 이사장-김 석창〔金錫昌), 실행이사-김 석창. 이 문주, 이 인식, 이 승길, 이 영희, 김 선환, 고 한규, 김 관식.
교장 : 채 필근. 교수, 강사 : 고려위, 田中理夫, 이 승길, 齊藤佐, 山本新, 김 관식.
이렇게 되어 장로교회의 신학교가 서울과 평양에 따로 따로 서서 일본의 어용 기독교 일군들을 양성하였다.
(3) 만주 신학교 설립
1941년 만주에 있는 교회들이 총회를 결성하여 신학원을 설립하였는데 교장에 정 상인, 교수에 박 윤선, 박 형룡, 菊地一郞 이었으며, 강사에는 김 선두, 안 광국, 와다나베, 이 성주, 김 세진, 제 창봉 이었다.
졸업생들을 보면 3회에 걸쳐 이 웅화, 김 치묵, 황 금천, 이 성찬, 장 동훈, 오 병수, 최 의종, 남 영환, 전 영흥, 장찬준, 백 리언 이었다.
4)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
일제는 기독교 계통의 기관들을 해산하고 일본 체제에 알맞게 변형시켜 나갔다. 선교사들은 아무리 총회의 결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할 수가 없어 한국 교회에서 제명하고 개인 자격으로 전도하였다. 선교부 경영의 미션 스쿨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한국인이나 일본 재단에 이양하기 시작하였고. 1939년에 그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연희 전문학교의 경영은 194l년까지 원 한경 박사의 고집으로 유지되었으나 총독부 손에 넘어갔고, 이화 여자 전문학교는 1940년 1O월에 경성 여자 전문 학교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자 1940년 1O월 서울 주재 미국 공사 마쉬(Marsh)는 선교사의 완전 철수를 명령하였고 이에 대부분이 철수하였다. 마지막으로 철수한 것은 원 한경 박사인데, 1942년6월에 부산을 떠났다.
194l년 l2월 18일,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영국에 도전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 박해는 더욱 심하여졌다. 미국식 교파 이름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식의 교단(敎團)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하였으며, 여러 교파들을 합동하여 일본기독교조선 교단을 만들었다. 침례교, 성결교 등이 재림 사상 문제로 1943년 해체되었고, 지도자들은 시골에 은거하거나 만주 등지로 망명하였으며, 감옥에서 수난을 겪고 있었다.
조선 교회의 일본화를 꾀하기 위하여 일본은 1942년 3월 <革新敎團>을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하며 전 필순 목사를 의장으로 뽑았다 .성경에서 출애급기, 다니엘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구약성경을 없애고, 요한 계시록과 찬송가를 개편케 하였다. 이 부분을 떼어내든지 먹으로 칠하여 보지 못하게 하였으며. 후에 와서는 구약을 전부 없애고 신약성경도 4복음서 외에는 모두 없애 버렸다, 그러다가 1945년 7윌 19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교파들도<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통합하여 일본 기독교화 시켜버렸다.
2. 교회의 부일(付日)행각
일본의 앞잡이 교역자들은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여 하나님을 배신하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역자를 배신하고 신사참배에 동조하였고 황국신민이 된 것을 감사하였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을 깨끗이 씻고 천조대신 아들이 되기 위하여 한강에서, 부산의 송도 앞 바다에서 일본의 귀신대장 '미소기바라이'(淸淨)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44년 9월 경성 상동교회에 황도 문화관을 설치하여 갈홍기 목사를 관장으로 임명하고 류형기 목사 등은 교역자들에게 친일 교육사상을 교육시킨 후 이들을 한강에 끌고 가 '미소기바라'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남산 조선신궁까지 구보시켜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다.
해주 장로교 김응규 목사는 천황사진에게 배례하기를 건의하여 배례를 할 정도였고. 해주 강태동감리교회 관리자 박봉근은 신자 20여 명과 함께 아예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폐쇄해 버렸다. 경남 조평리 성결교회 신도들도 교회 사상이 일본 정신과 상용될 수 없다고 하여 해산하였다. 교인들은 가정에 '가미나다'라는 신사를 설치하고 거기에 '천조대신 지궁'이라는 팻말을 붙이도록 강요하였다.
전북 금산의 이칠봉은 기독교의 신사참배 거부에 불만을 품고 탈교하였고, 전남 보성에서는 기독교 교리가 국체에 반하는 것이라 하여 교인들이 탈교하고 예배당을 대일본 정신도장으로 개칭하고 그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정든 교회와 고향을 떠나 멀리 이역의 땅 만주로 이사한 은기호 집사를 한국인 목사가 일본 경찰을 앞세워서 고발하여 옥고를 치르며 탄식하게 하였다.
‘조선 종교 전시보국회’는 감리교의 갈홍기, 이동욱, 구세군의 황종률, 장로교 신삼일웅, 채필근, 천주교 김광한, 일본의 강본 등이 가담되어 조직되었다.
유형기, 정춘수, 정인과, 갈홍기 등은 '시국대응 전선 사상 보국연맹'과 '황도문화관'등의 단체에 적극 앞장섰다. 구자옥은 황도학회에 가입하여 일본을 찬양하였고 윤치호, 구자옥, 정인과, 정춘수, 양주삼, 신흥우 등은 임전대책 협의회와 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다. 김활란은 조선언론 보국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다.
정인과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하지 못할 자국에 반기를 든 것"이라고 하여 일본을 '자국'이라고 하였다.
교회 안에는 '가미다나'가 설치되었고, 예배를 드리기 전 여기에 절을 먼저하고 천황을 향해 머리 숙여 동방요배를 한 다음 예배를 드렸으며 목사들 복장은 일본식 군복이었다. 장로교 총회 교육부 사무실에는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데라스 오오카미의 사진을 걸었다.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신도의 창조설화와 위배된다고 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여 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또한 찬송가 260장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1939년 성결교회 이명직 목사는 기독교가 서양종교가 아니라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지지하면서 일본은 로서아보다 기독교를 보호한다고 일본을 찬양하였다. 1941년 활천 9월호에 그는 “우리는 황국의 신민이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세계 어느 곳으로 가든지 일등국민의 대우를 받는 것이다. 만세일계 천황봉대에 천황의 적자이다... 이것은 실제로 영광이다”고 하였다.
1940년 5월 31일 성결교 산하 성서학원이 경성신학교로 승격되어 11월 5일 오후 2시 개교식 때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제송, 만세삼창 등을 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성결교총회에는 굳이 신사참배를 결의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총회 기간 중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 목사는 총회 회원 전원에게 신사참배 즉시 실행하기를 특청하여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해서 평양 서기산 신사에 도착, 신사참배하였다.
1938년 12월 12일 홍택기, 김길창, 양주삼, 김종우, 이명직 목사 등은 전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일본의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등에 참배를 하였다. 이때 홍병선 목사는 “황국신민으로서 신사참배는 당연하다”고 하였다.
1939년 10월 8일, 경성 성서학원 강당에서 일제의 앞잡이 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 성결교회 연맹 결성식이 관계 당국자들의 축사와 함께 있었다.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규약선언, 묵도(황군장병과 동양평화 위해) 일제 내빈축사 일황을 위한 축포가 있었다. 규약에는 내선일체 거국일치 국민정신 동원이란 취지를 달성하고 전도보국을 실천하기 위해 각 지방에도 연맹을 조직하였고 이사장에는 이명직 목사였다.
1941년부터 활천의 매호마다 성결교회 신도(神道) 실천보고가 실렸고 십일조헌금을 명하여 총독부에 바쳤다. 설교시간인데도 12시가 되면 전체가 일어나 일본국가를 위해 일분간 묵도를 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황실은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요 통치자이므로 공경해야 한다. 신자는 제도에 순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 12일 이명직 목사는 경성 성결교회 신도에게 전시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수요일 정기 연합기도회를 시달하면서 “일본 필승의 기도”를 시달하였다.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서는 양주삼 목사에게 “감리교가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양주삼 통리는 “국민의 의무일진데 누구나 참배할 것이니 구태어 결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1937년 전영도 목사가 “중일전쟁은 성전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의 주지사, 시장, 상·하의원들에게 4,800여 통을 송달하였다.
1941년 8월 20일 조선 임전복구단에 윤치호, 구자옥, 정인과, 채필근, 정춘수, 양주삼 목사와 김활란, 신흥우 등이 앞장 섰으며, 1943년 11월 조선 전시 종교복구회가 조직되어 감리교 갈홍기, 장로교 채필근, 천주교 김한수 등이 앞장섰다.
혁신교단들은 예배시작 전 5분간 천황사진 또는 동방요배, 전몰용사들의 영혼을 위한 묵념, 출정장병의 무운장구 기원, 황국신민의 서사제송을 한 후 예배를 드렸다. 1943년부터는 밤 예배는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1942년 5월 8일 육밀 제1147호 “조선에 징병제 시행 준비의 건”이 발표되었다. 이 발표를 했을 때 친일파들은 일제히 환영을 하고 나섰다. 윤치호, 최린, 박춘금, 백락준, 배상명, 현제명 등은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던 것이다. 일반인들만 환영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까지 환영을 하여 세인을 탄식케 하였다.
1942년 5월 11일 저녁, 기독교 대표들은 “징병제 시행감사 전 경성 신도대회”를 열었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화곡춘수 감독의 개회사에 뒤이어 전필순 목사로부터 징병제 시행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이날 밤 장내의 감격이 동포에 전하여지기를 기도한 후... 총독과 일본 수상 이하 관계 당국에 감사문을 타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2년 10월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31회 총회에서 교회 종 헌납이 1,540개였다. 다른 교단 것까지 합해서 2,500여 개를 헌납하여 교회는 군수물자 지원부대가 되었다. 감리교는 교회를 매각하여 군납헌금도 하였다.
1942년 7월 1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본군 환자용 자동차 2대를 헌납하였다. 그리고 조선 장로호라는 해군 비행기와 육군 비행기를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고 헌납하였으며 그들은 1942년 11월 17일 용산역 연병장 헌납식에서 기독교 예배가 아니라 일본의 신도의식으로 거행하였다.
1944년 2월 2일 기독교신보 사설에서 “미·영을 토벌하기 위하여 하루라도 빨리 일선에 비행기를 보내자”라고 외쳤다.
1942년 12월 김활란은 <신시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을 썼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라고 하면서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하라고 외쳤다.
1941년 12월 모윤숙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직후 조선임전 보국단이라는 친일 어용단체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우리들 여성의 머리 속에 대화혼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이라고 권장하였다.
김동환, 노천명, 김동인, 주요한, 김상용, 서정주, 장덕조, 김소운 등은 일본을 대대적으로 찬양하였다.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미·영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15명이 참석하여 7시간 동안 개최되었다.
1939년 박희도는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권두언에서 “반도 2천만 동포는 일본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황도를 앙양해야 한다. 또한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현재의 내지인 조선인이라는 호칭이 단순한 지방적 호칭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징병제가 실시되자 동방을 향해 엎드려 경배하며 “감격에 목이 메였다”라고 하였다.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라고 단정하였다.
친일파인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들에게 “유다 같은 사람이다”라고 매도하였다. 친일파들은 독립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감히 기독교는 얼굴조차 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
Ⅲ 교회의 수진과 항일 운동
1. 항일 민족 운동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은 복음에 대한 철저한 신앙과 함께민족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각종 항일 민족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도 일부 친일분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반일적 성향은 매우 강하였다.
황해도 해주의 감리교 전도사 김만식과 전남 나주의 기독교 개량서당 교사 김영환은전쟁은 죄악이라고 비난하여, 중일전쟁을성전(聖戰)이라고 선전하는 일제에 맞섰다. 강원도 이천의 감리교 유치원 보모인 전영신은 일본군 위문을 위한 천인침(千人針 : 출정 병사의 무사를 빌기 위해 천 명의 여자가 한 땀씩 붉은 실로 천에 매듭을 놓은 것)을 미신적 행위라 하고 금지시켰다. 평남 중화군 도제직회 때는 관할서에서 제직회 인도자 노영선 목사를 사전에 경찰서로 불러들여 시국좌담회 개최, 일장기 게양, 동방요배 실시 둥을 명령하여 실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교회 제직들이 반대하여 실행치 못하였다. 평북 강계의 기독교계 사립 영실학교에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할 때도 기독교를 믿는 학생 2O여 명이 고의로 결석하였다.
조직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로는 수양동우회와 흥업 구락부를 들 수 있다. 수양동우회와 흥업 구락부는 개량주의적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중의 목적을 가진 일종의 민족주의 비밀결사였다.
1) 수양동우회
수양동우희는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의 국내조직으로, 겉으로는 총독부로부터 양해를 얻은 인격수양․민족개조를 표방한 친목 수양단체였으나, 이면적으로는 민족의식고취와 민족 실력 배양을 통한 주권회복이 그 궁극의 목표였다.
한편,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의 국내 조직으로 겉으로는 산업의 진흥을 표방하였지만, 이면적으로는 해외 독립운동 자금의 지원과 국내 동지 확보, 계몽활동 전개를 통한 조국 독립운동 지원이 그 목적이었다.
이 두 단체는 다수의 사회 지도급 기독교인들이 가입, 활약하였고 해외 독립운동과 연계를 가친 국내 조직이었다는데 특색이 있다.
수양동우회는 1922년 이광수 등에 의해 조직된 수양동맹회와 1923년 김동원 등에 의해 조직된 평양지역의 동우구락부가 1926년에 합동하여 만들어진 단체이다. 여기에는 주로 서북계 장로교인들이 많이 참여하여 활약하였는데, 서울의 주요한․이용설․김윤경․이대위․이윤재 등과 평안도의 김동원․백영엽․정인과․김성업․김선량․김항복․김하현․한승곤․한승인 및 함북의 송창근 등이 그들이었다. 1937년 이들의 활동이 발각되어 6월부터 서울․평양․선천 ․안악 지회의 관계자 181명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하여 이들 중 42명을 기소하였다.
이들은 결국 1941년 1O월 제3심 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는 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일제의 술책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주로 변호사, 의사, 목사, 저술가, 상공인 등 지도적 위치에 있던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특히 평양 선천지역 회원들은 거의 기독교 신자들이어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 흥업 구락부
흥업 구락부는 1925년 신흥우․이상재 ․구자욱 등 기독교 유력 간부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표면으로는 국민의 복리향상과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사실은민족 관념을 보급하고 조선 독립을 도모하여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운동 자금을 대어주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적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의 주요 회원들은 모두 상류 유식 계충에 속하는 기독교 장로와 목사 및 교사 등 사회 유력자들로서 조직 당시부터 사회 각층의 우수한 지도자들 중에서 엄선하였기 때문에 기독교계 문화단체 및 사회단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한 보고서는 이를기독교를 통하여 조선독립운동의 실천에 착수한 현저한 사안(事案)이라고 보았다.
비밀리에 활동을 전개하던 흥업구락부가 일제 당국에 탄로난 것은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의 일이었다. 신흥우․이건춘․구자옥․이관구․최두선 ․홍병 덕․정춘수 등 54명이 체포되어 견디기 힘든 가혹한 신문을 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두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었으므로, 이를 계기로 이들을 이른바 전향(轉向)시켜 그들을 전쟁 협력자로 역이용하고자 온갖 위협과 회유를 하였다. 결국 이들은 이러한 일제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사상전향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6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비록 강요에 의한 것이긴 하였지만 일단 절개를 굽힌 이들은 일제의 각종 부일 협력 활동에 동원되어 철저히 이용당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행각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과 교회의 변질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2. 신사참배 반대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첫째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의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하는신사참배 강요 금지청원운동이요, 둘째는 일제의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었다. 물론 저항자들 가운데는 청원이나 거부 권유 등 대외적인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은둔하여 자신의 신앙만이라도 지키려는 소극적인 항쟁 자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일제의 경찰에게 끌려가 많은 고난을 받고, 이러한 것이 증거가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신앙과 용기를 주고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다.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수차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여러 차례 경찰서에 끌려가 구류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청원, 경고가 효력이 없자 1939년 2월 일본 정계 요로 및 제국의회에 청원하기 위하여 마침 신사참배 거부로 선천 보성여학교 음악교사직을 사퇴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을 대동하고 일본에 건너갔다. 이들은 일본에서 신학교에 다니던 박장로의 아들 영창(永昌)과 함께 구세군 사령관 야마무로(山室軍平) 중장, 일본 기독교회 장로 히비끼 중장, 정우회(政宇會) 대의사 마쪼야마(松山常次郞), 전 조선총독 우가끼 등을 방문하여 진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순교할 각오를 하고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제74회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첫째, 종교법안 제정 반대, 둘째, 국교를 신도(神道)에서 기독교로 할 것, 셋째, 신사참배강요 등 악법 실시 강요와 양심적 교역자 투옥을 철폐할 것 둥을 내용으로 한 경고서를 단상을 향하여 투척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경시청에 구금되었다가 평양으로 회송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박장로는 6년간의 옥고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일제의 강압으로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과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하는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 간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 중심 인물은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경상남도의 한상동․이주원 ․주남선, 전라남도의 손양원 등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만주지역에서도 박의홈․헌트(B. F. Hunt, 韓富善)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교회와 개인의 인적 지역적 연대를 가지고 활동하였으나 점차 지역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경남지역, 서북지역, 만주 봉천지역 간의 교류가 있었다.
의주의 북하단동교회 목사로 시무하던 이기선은 1938년 7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교회를 사면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다가 경찰에 여러 차례 검속을 당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순회활동을 통하여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1940년 3월경에는 만주의 안동을 방문하여 이 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자들인 최용삼․김형락․박의홈․계성수․김성심 등과 회합을 갖고 첫째,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할 것, 둘째,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셋째, 세속화되어 신사참배 하는 현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넷째, 신사 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다섯째, 신앙동지들을 확보하여 신령한 교회출현의 소지를 육성할 것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 그리고 계성수와 함께 지방전도를 하면서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거부를 역설한 뒤 평양의 채정민 목사에게 자신의 활동을 보고하고 향후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황해도 지역 순회운동 계획을 세워 김의창과 함께 황해도 각지를 돌며 활동하다가 1940년 6월경 일경에게 체포당하였다.
1938년 마산 문창교회 목사로 시무 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목사직을 사면한 한상동은 이주원과 함께 경상도 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1939년 12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단지 종교운동으로만 그치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조속히 정치운동으로 전회시킬 필요가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첫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老會)를 파괴하도록 할 것, 둘째,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로 신노회를 조직할 것, 셋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할 것, 넷째, 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 원조를 도모할 것, 다섯째, 가정 예배 및 가정기도회를 힘써 개최하며 한편 개인전도 둥의 수단으로 동지들을 획득할 것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그리고 부산․마산․진주․거창․통영 등 활동구역을 나누어 맡아 맹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주기철 목사가 3차 구속에서 석방된 기회를 이용하여 평양을 방문하여 최봉석 ․박관준․주기철․채정민․오윤선․김의창․김지성․김인후․김형락․박의흠 등과 회합을 갖고 그 확대방안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한상동 목사는 이 운동의 전국 확산의 실행을 위해 노력하다가 그해 7월 부산 경찰서에 검속 되었다.
3․1운동 직후 독립군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 모집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룬 바 있는 주남선(朱南善) 목사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38년 말경에는 그가 시무 하던 거창읍교회를 사임하고 한상동․이인재 등과 함께 조직적인 거부운동을 펴기 위하여 거창․합천․함양 등지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를 통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수차 거창경찰서에 끌려가 수난을 당하였다. 1940년 7월 16일 다시 검속되어 부산을 거쳐, 이듬해 7월 평양으로 이송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거기서 옥고를 치렀다.
▶ 평양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본거지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였다. 주기철 목사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주목을 받아 1938년 1차 검속 이래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전후 4차에 걸쳐 검속 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순교하였다. 산정현교회도 주기철 목사를 쫓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40년 폐교되었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 저항은 전국 어디서나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전남지역의 손양원 ․백영홈 ․박영대 등과 전북의 배은희․김가전. 충북의 허성도․송희용, 경남의 조용학, 황해도의 이종근․박경구 등이 있으며, 교파적으로도 감리교의 이영한․강종근․권원호, 성결교의 박봉진․김 연, 동아기독교의 전치규․김영관, 안식교의 최태현 등이 있고, 천주교 신자들도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여 명에 달하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한국 기독교가 두 가지 상반된 행동 양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저지른 친일 ․부일 행각과 민족정신과 순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행적이 그것이다. 대다수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적 교회, 기독교 기관들이 친일․부일적 행위를 보여준 반면에 소수무명의신앙인들은 주로 지방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같은 저항운동을 폈던 것이다.
3. 민족 문화 수호 운동
일제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기독교 지식인들은 민족문화 수호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구한말 이래의 전통을 이어 일제하에서도 우리의 얼과 문화가 담긴 국어․국문․국사 등을 연구, 수호하고 가르친 것 등이 그것이다. 한말 기독교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한글학자들이 나타나 일제하에서 활약한 한글학자․교육가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다.
한말 한글운동의 선구자인 주시경을 비롯하여 이윤재․김윤경․정태진․정인승․장지영 ․최현률이 그들이다.
안동교희 장로로 시무하였던 이윤재는 한글연구, 《우리말 사전》의 편찬,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한글보급에 한평생을 바친 인물로 한글장로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그는 결국 이러한 활동 때문에 일제의 주목을 받던 중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943년 12월 함흥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정동교회 장로였던 김윤경도 한글연구와 교육에 힘쓰면서 《조선문자 급 어학사》(1938년)를 저술하였다.
조선어 전기,(1924년)와 《조선어 철자법 강좌》(1930년) 등을 지은 장지영도 1920년도부터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한글연구와 보급운동에 헌신하였다.
새문안교회 집사로 봉사하였던 최현배도 한글연구와 교육에 일생을 바쳤는데, 그는【우리말본》(1935년),《중등 조선어법》(1936년),《한글의 바른길》(1937년), 《한글갈》(1940년) 등 수많은 값진 한글연구 저서를 남겼다.
이들은 모두 한글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조직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활약하였기 때문에 1942년 일제가 국어에 대한 탄압정책의 일환으로 조직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해방이 되기까지 함흥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관학자들에 의해 날조된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우리 역사를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주체적으로 보고했던 기독교인 역사가들도 출현하였다. 이러한 역사가들로 <동사략>(東史略) 5권과 아동용 한국사인 《죠션니약이》 5권 저술한 남궁억(南宮億), 우리 역사를 기독교적 사관에 입각하여고난의 역사로 인식하고 이러한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갈파한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써서 <성서조선〉지에 연재한 함석헌, 《한국개신교사》를 쓴 백낙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여 《조선상고사감》을 쓴 안재홍, <조선과학사>를 쓴 홍이섭 등이 활약하였다.
1930년대에 기독교인의 민족문화 수호운동과 관련된 유명한 사건으로 모곡리 무궁화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건은 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그들의 국기인 일장기와 그들의 국화인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는데 대항하여 홍천 모곡 감리교 전도사로 시무 하던 남궁억과 그 동지들이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해서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을 일제가 탄압한 사건이다.
한말 기독교인으로서 언론활동과 교육활동을 전개했던 남궁억은 1918년 자신의 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보리울)에 내려와 모곡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교회 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선교활동과 함께 민족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한국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한편, 민족 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무궁화심기운동을 펴고 무궁화 묘목을 가꾸어 보급하였다. 이와 함께 무궁화 자수, 무궁화 창가, 무궁화 시 등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1933년 남궁억의 무궁화보급운동을 불온사상을 고취하고 민족주의를 선전하는 것이라 하여 그와 모곡학교의 직원들, 그의 친척들을 모두 구속하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사르고 모곡학교도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932년에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춘천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십자가당이 적발되어 홍천지방 감리사로 시무하던 남천우(南天祐) 목사, 유자훈 목사 등 많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를 십자가당 사건이라 한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기독교인 문인․예술가들이 출현하여 활약하였다. 문학에는 전영택 목사․김말봉 장로․김현승․박두진․박목월․윤동주 등이 출현하였고, 미술 분야에는 한국화가로 김은호․김기창 둥이 활약하였다. 음악 분야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찬송가 창가 등이 한국 근대음악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기독교인 음악가로서 현제명․안익태 등이 활약하였는데, 안익태는 그때까지도 외국 곡에 붙여 몰래 부르던 애국가에 곡조를 붙여 오늘날의 애국가로 발전 시켰다.
◉ 과 제 ◉
1.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대하여 쓰라
2. 일본의 신도에 대하여 설명하라
3. 교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하여 약술하라
4. 교회의 항일 민족 운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5. 교회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대하여 쓰라
제9장 해방과 교회의 재건
l945년 8월 15일, 박해와 고통과 순교의 질곡에서 해방되었다. 연합군의 승리로 세계 제2차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안겨다 준 해방이었다. 열강들의 임의대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남에는 미군, 이북에는 소련군이 우리 땅에 진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래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한국의 정부 수립을 준비할 수 있도록 전후의 질서를 평화적으로 유지하려는 것이 국제연합의 의도였으나, 소련은 이런 목적과는 달리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점차로 드러남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남에 있어서는 미군정의 민주주의 정책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지도원리에 따라 교회는 활발하게 재건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으나, 이북의 정세는 그렇지 못할 뿐더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이 매우 어려움을 면치 못하였다.
Ⅰ 북한 교회의 재건과 수난
8․15해방과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던 〈수진성도(守眞聖徒)>들은 감격적인 출옥을 하였다. 그러나 주 기철 목사를 비롯한 5O여 명의 성도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출옥 성도들은 평양 장대현 교희에 모여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하여 기도하고 의논하다가, 1945년 9월 2O일, 다음과 같은 재건 원칙을 발표하였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와 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것
(2)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을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은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기간에는 집사와 평신도들이 에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하게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재건 복구할 것.
그러나 출옥 성도들의 이러한 재건 방안은 일제하에서 교권을 가지고 일본과 타협하며 지냈던 일부지도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5년 11월 평북 노회 주최로 선천 월곡동 교회에서 모인 교역자 퇴수회에서 박 형룡 박사의 공박을 받은 신사참배 결의 당시의 총회장인 흥 택기 목사가 반발하였다. 홍택기 목사는 해외로 도피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나섰던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하고, 신사참배 회개 문제는 각 사람이 하나님과 해결할 문제라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일제와 타협하고 배도(背道)한 자들의 자기 정당화 주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현실은 한국 교회가 분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보여 주고 있었으며, 일제 치하에서 타협하며 지냈던 자들의 기회주의적인 교권에의 집착이 신앙의 경건성을 주장하는 출옥 성도들의 의견을 압도하고 만 것이다.
1945년 11월 14일, 평양에서는 38이북 지방의 노회 대표들이 회집하여 잠정적으로나마 총회를 대행할 기관으로서 <이북오도 연합노회>를 조직하고 다음과 갈이 결의하였다.
(1) 이 연합 노회는 잠정적인 총회의 대행이며
(2) 교단의 규칙은 총회가 재건될 때까지 존속하게 하며
(3) 전국 교회는 과거의 죄를 자복하고 교역자는 두 달 동안 근신에 임하며
(4) 신학교를 연합 노회 관할 하에서 경영하교
(5) 전국적으로 독립 기념 전도를 실시할 것.
한편 이북 각 지역마다 해방의 기쁨을 가지고, 자치단체 또는 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조직되었는데, 대개 기독교인들이 주동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는 그만큼 교회와 교인들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눈치챈 북한의 소련 주둔군들은 기독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의주 제일교회 윤하영 목사와 제이교회 한경직 목사가 주동이 되어, 1945년 9월에 기독교 사회민주당이란 정당을 조직하였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민주주의 정부를 세워, 한국사회를 이끌어나가게 하자는 취지였다. 같은 해 11월 16일 용암포(龍岩浦)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지부조직 때 공산주의자들과의 첫 충돌이 생겼다. 공산당이 거기 있는 공장의 직공들을 충동하여, 대회장을 습격하고 간부들을 폭행하여 수라장을 만들었다. 이런 야만적 행동에 격분한 그곳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어나 그들의 폭행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평양에서는 김화식 목사를 중심 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를 탐지한 내무서가 결성식 전날 김화식 목사 이하 40여명을 검속하여 결성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검거된 분들은 대개 옥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3 ․1 만세운동 기념일에 각 지방별로 연합기념예배를 드리는 것을 폭행으로 방해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했던 것은 의주 동교회 사건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위원회가 주최한 3 ․1절 기념행사에 참가했던 수천 군중을 몰고 와서 동 교회를 습격하고 사회자 김석구 목사를 모욕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후견을 받아 공산 정권을 수립하고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정권인 인민위원회는 그 이후 교회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여 그들의 주요한 행사를 꼭 주일에 거행히여 교인들의 출석을 강요함으로 예배 출석을 방해하는 한편, 예배당에서 정치강연을 강행하였다.
박해의 구실로는 1946넌 11월에 북괴 정권 수립을 위하여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이 날이 주일이기에 연합 노회는 강경한 반대 의사 표시를 하였다. 연합 노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어떠한 행사에도 볼참하며,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구분, 교회당은 예배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현직 교역자가 정계에 종사할 때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5개조 교회 행정의 원칙과 신앙 생활 규범을 당국에 통보하였다. 공산당은 자신들의 각본대로 일이 되어가자 반대자들을 투옥하고 강제 노동에 동원하는 등 강압적인 탄압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11월 28일에는 김일성의 외숙 강양욱(康良煜 - 일제 때 목사)을 내세워 기독교도 연맹을 조직케 하고 이 기관을 통하여 측면 공격으로 교회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교회를 어용종교단체로 변질케 할 것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부흥사 김 익두 목사와 산동성 선교사였던 박 상순 목사를 강제로 가입시켜 선전물로 사용하였으며, 처음에는 교직자들만 연맹에 가입시키다가 1948년에는 일반 평신도들의 가입을 강요하고, 면 ․군 ․도의 연맹을 조직한 후 1949년에는 소위 기독교도 연맹 총회를 결성하였다. 이에 끝까지 가입을 반대하는 오도연합노회의 주요간부를 일제히 검거투옥하고 감리교와 장로교의 신학교를 폐지하였으며, 기독교 신학교라는 명칭으로 통합하여 연맹 총회에서 직영하였다. 1950년에 와서는, 이 연맹 총회에 들지 않은 교역자들은 거의 다 투옥되고 예배당은 그들의 정치 계몽소로 변하게 되었다. 과거 일제시대의 교회 탄압보다 더 혹심한 지경이 되었으므로, 많은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남한으로 내려오거나 지하에 숨어버렸다. 그해 6월 25일에는 드디어 북한은 남침의 전쟁을 감행했었다.
Ⅱ 남한 교회의 재건
남한 교회들은 북한과 달리 미군들의 진주로 말미암아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와 과오들을 참회하는 것을 전제로 한 재건 운동이 일어났으나, 남한에서는 이와 판이하게 일제 말엽에 교파의 합동으로 이루어진 교단의 존속을 그대로 계속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9월 8일, 새문안 교회당에서 감리교의 변 홍규, 이 규갑, 박 연서 목사들과 장로교의 김 관식. 송 창근, 김 영주 등 여러 목사들이 모여서 교단의 존속을 논의하였다. 이것을 민족 교회의 형성이라고 칭찬하는 교회 사학자도 있으나, 이러한 존속 운동은 일제하의 변절과 배교를 교권이라는 권위로 상쇄하려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감리교의 퇴장으로 각자의 교파 재건 운동이 되고 말았다.
장로교회는 1946년 봄에 모든 노회가 재조직되고 6월 12일에는 서울에서 총회가 모였다. 북한의 노회가 참석할 수 없으므로 명칭을 남부총회라 하고 ,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교회 헌법을 개정하지 말고 그대로 사용할 것과, 제27회 총회에서 가결된 신사참배 문제는 죄악 된 처사이므로 이를 취소한다고 결의를 하였다.
1947년 4월 대구에서 모인 남부총회에서는 통일의 희망이 희박하므로 남부총회를 전국적인 정식 장로교 총회로 인정키로 하고, 이 총회를 제33회로 하기로 하였다.
감리교는 1945년 9월 8일 동대문 교회에서 재건 중앙 위원회를 개최하고 이 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는 등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여기에 호응하는 교회가 그리 많지 못하였다.
1946년 1월에는 서울 정동교회에서 연합연회를 개최하여, 감리교 신학교를 재건하고 변 홍규 목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성결교는 일제하에 교단이 해산 당하는 비운을 겪었으나 1945년 11월 9일, 서울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하고 의장에 천 세광 목사, 총회장에 박 현명 목사를 추대하고 신학교의 개교와 <활천(活泉)>의 복간, 부흥 대책 등을 논의하였다. 또 교파 이름을 <조선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 교회>에서 <대한 성결 교회>로 변경하고, 헌법을 자주적으로 수정하고 대의(代議) 정체로 개정 하였다.
1946년 1O월에 구세군 본영과 지방의 본영이 재건되었고 사관학교는 1947년에 재개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침례교회가 재건되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문제로 옥중 생활하다가 출옥된 끝까지 순수한 믿음을 지키려던 성도들이 기성 교회를 떠나 재건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북에서는 김 린희 전도사, 남에서는 최 덕지 전도사(여〉를 중심으로 한 극렬한 신도들이 규합되었는데, 이들은 현존 예배당도 파괴해 버리고 새로이 예배당을 세워야 하며 현실교회 교인들과 사귀면 「동참죄」를 범한다 하여 만일 가족이 일치하지 못할 때에는 「이혼」도 사양하지 않았으며. 신사참배 한 교인들과는 비록 부모 형제일지라도 악수를 거절하였다. 이들을 재건파라고 불렀다.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으나 역시 신사참배 한 교인들을 기피하여 따로 모여 신사참배 이전의 옛 신앙을 회복해야 된다고 주장한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복구(復舊)파라고 불렀는데, 이 기선 목사의 주창을 따르는 일파였다. 이 목사의 주창으로는 이미 신사참배 한 교역자들은 3~6개월간 자숙한 뒤에 복직하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복구파는 결코 노회, 총회를 따로 구성할 의사가 없었고 모(母)교회가 회개하고 정화되기를 소원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교권주의자들(신사 참배자, 친일파, 자유주의 신학자 등등)은 출옥자에 대한 경계심으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Ⅲ 장로교 신학교 재건과 갈등
장로교회는 해방과 함께 신학교 문제로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 신학교, 조선신학교, 장로회 신학교 사이의 알력과 여기에 연결된 교권 문제 등으로 매우 복잡하였다. 고려 신학교는 1946년 9월 20일에 한 상동 목사가 조 남선 목사와 함께 설립한 학교로서 박 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만주에서 모시고 오기로 하였으나 박 형룡 박사의 귀국이 지연되자 박 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경남노회와의 문제가 어려움 속에서 지탱되어 오다가 1949년4월 제35회 총회는 고려 신학교가 총회와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하므로 고려파라는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서울에 소재하고 있던 조선 신학교의 재건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 되어져 갔다. 조선 신학교는 남부 총회(南部總會)에 총회 직영 청원을 내어 허락을 받았고, 김 재준 교수는 자유주의적인 자기의 신학을 대담하게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김 교수의 신학은 한국 교회에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는데, 1947년 봄에 조선 신학교 학생 5l명이 제33회 총회에 진정서를 내고 김 재준 교수의 자유주의적 교수 내용을 항의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총회가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에 착수하려 했을 때, 김교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진정서> 형식의 글을 발표하여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박 형룡 박사가 고려 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가 한국장로교의 진로 문제에 대하여 고려 신학교 설립자들과 견해 차이가 생겨 교장직을 사임하고 나서 상경하자, 김 재준 교수의 문제 처리는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박 형룡 박사는 1948년 총회의 요청으로 김 재준 교수의 <진정서>를 세밀하게 검토하고 나서 결론을 내리기를 김 재준 교수가 한국 교회를 <능욕>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래서 총회는 조선 신학교 개혁안을 제안하고 김 교수의 l년간 해외 유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김 재준 교수는 <편지에 대신하여>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하고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총회의 신학 대책위원회는 1948년 5월, 장로회 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하고 임시 교장에 박 형룡 박사를 임명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총회 직영 신학교는 조선 신학교가 이미 인준을 받고 있었으니 두 신학교가 총회 안에 있는 격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신학교를 합하는 방안 외에는 별도리가 없게 되었다.
l950년 1윌, 대구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에서 이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만 했다. 그려나 개회 벽두부터 소란이 일어나 비상 정회를 하고 말았다. 그후 2개월 만에 6․25사변이 일어나 1년 후에야 피난 수도 부산에서 총회를 속회할 수 있었다. 이는 교회의 비극이요, 민족의 비극이었다. 교회가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 여기에 따른 박해는 너무나 심각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Ⅳ 6.25 전쟁의 피해
1950년 민족 분열의 상징인 6․25 전쟁을 통하여 교회는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6․25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과 준동으로 여러 가지 비극들이 있었다. 여수와 순천 반란사건을 통하여 순교의 피를 흘린 젊은이들이 많았으며. 여기에 이은 6․25전쟁의 피해는 참혹하였다.
귀한 저명 목사들의 순교와 피납으로 많은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 신석구 목사, 정일선 목사 등이 순교하였고 송창근, 남궁혁, 양주삼 목사 등이 납치 당하였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손실된 교회의 수는 장로교가 완전 소실이 152교회, 파괴가 467동이었으며 감리교는 완전 소실이 84교회, 파괴가 155동이었고 성결교가 완전 소실이 27교회, 파괴가 79동이었으며 구세군은 완전 소실이 4교회 파괴가 4동 외에 많은 교파들에 피해가 있었다. 인적 손실을 보면 순교 혹은 피납된 교직자는 장로교 150명, 감리교 48명, 성결교 11명, 구세군 7명이었다.
전북 옥구군 원당(元堂) 교회에서는 75명의 교인 중 73명이 학살당하였다.
북한군들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자칭 교인인 김 욱(金旭)과 전직 목사 최 문식(崔文植) 등이 나타나 교회를 박해하고 목사들을 구금하는 데 앞장을 서는 비비극이 연출되었다. 이와 같은 배신자들의 행동을 통하여 교회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고 1.4후퇴 때에는 대부분 부산으로 피난을 하였던 것이다.
◉ 과 제 ◉
1. 북한 교회의 재건과 수난에 대하여 쓰라
2. 장로교 신학교 재건의 진통에 대하여 진술하라
3. 6.25 전쟁의 교회 피해를 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