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濟衆院)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 설립, 역사적 우연인가 필연인가?
1884년 12월 4일 저녁,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가 벌어졌다. 조선 정부의 고위관리와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였다. 이 연회가 끝나갈 무렵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의 조카인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자객의 칼에 찔려 죽어갔다. 역사적 대사건인 갑신정변 1)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겸 의사인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 그는 당시 일본인 의사를 제외하면 조선에 거주하던 유일한 서양식 의사였다. 그는 민영익을 정성껏 치료하여 완치시킴으로써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그는 고종(高宗, 1852~1919)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여세를 몰아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을 제안해 조선 정부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럼 제중원 설립은 역사적 우연인가? 아니다. 역사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시 조선에서 서양 근대의학의 수용과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9세기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 비롯한 실학자 2)들은 서양의학에 관심이 많아 여러 저술을 남겼다. 1877년 부산에는 제생의원(濟生醫院)이라는 서양식 일본인 병원이 생겨 조선인들도 진료했다. 1883년에는 서울에도 일본공사관의원이 생겨 서양식 진료를 시작했다.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은 종두법 3)을 익힌 후, 1897년 역사적인 종두 시술에 성공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고종과 조선 정부가 서양 근대의학의 수용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76년 문호개방 4) 이후 국가 차원의 개화 프로젝트를 세우고 그 실천에 나섰는데, 이때 의료 근대화 5)에도 주목했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 6)(朝士視察團)을 통해 일본의 서양식 의료 현황을 탐색했다. 이듬해에는 전통의학에 기초한 국립 의료기관이었던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폐지하여 국가 의료정책의 전환을 모색했다. 1884년 정부 기관지<한성순보>를 통해 백성들에게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 같은 해 미국 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는 이를 허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신정변 때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한 사건은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제중원,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1885년 4월 고종과 조선 정부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지금의 외교통상부) 산하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당연히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병원 명칭을 지어 고종의 재가를 받았는데, 그 명칭은 ‘광혜원(廣惠院)’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조선 정부는 2주일 만에 이를 무효화하고 ‘제중원(濟衆院)’이라 새로 명명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고 제중원이라 부른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이 되어버린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집(관행상 국가 재산이 되어 있었음,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헌법재판소 자리)을 제중원 부지와 건물로 사용하도록 했다. 홍영식의 집은 넓은 한옥이었기 때문에 진찰실, 수술실, 입원실, 대기실 등 기본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제중원 진료가 시작되어 환자들이 늘어나자,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86년 10~11월경 제중원을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옮겼다.
고종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督辦, 지금의 장관)이나 협판(協辦, 지금의 차관)에게 병원장 격인 제중원 당상(堂上)을 겸임시켰다. 그래서 온건개화파 7)의 대표적 인사인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을 시작으로 민종묵(閔種黙, 1835~1916), 남정철(南廷哲, 1840~1916) 등 외무관료들이 제중원 운영을 총괄 지휘했다. 외국어에 능숙하고 서양 정세에 밝은 젊은 관리들은 제중원 주사(主事)로 발령받아 일했다. 특히 제중원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최초 국립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의 우수한 학생들이 배치되었는데, 고종과 조선 정부가 제중원에 거는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직 서양 의술을 갖춘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고종과 조선 정부는 알렌에게 환자 진료를 맡겼다. 그 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 헤론(John W. Heron, 1856~1890),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년), 빈튼(Cadwallader C. Vinton, 1856~1936),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
등 선교사 겸 의사들이 제중원 의사로 고용되어 근무했다.
제중원, 조선인 환자를 치료하다
제중원에서 치료한 환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1886년 알렌과 헤론이 작성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제중원은 개원 이래 첫 1년 동안 1만 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일반 백성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걸인, 나병 환자로부터 위로는 궁중의 귀인까지 조선의 전 계층이 망라되어 있었다. 여성 환자들도 800명이 넘었다. 양반층은 주로 왕진을 요청했으며, 지방에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제중원에서 첫 1년 동안 치료했던 환자들의 주요 질환을 살펴보면, 말라리아가 가장 흔했다. 소화불량, 각종 피부병, 성병(매독) 등도 많은 편이었다. 그 밖에도 결핵, 나병, 기생충병, 각기병 등이 있었다. 외과 수술을 받은 환자는 모두 150명이었는데, 팔과 다리 등의 절단 수술이 많았다. 괴사병 환자의 대퇴골 절제수술, 척추골 수술처럼 대수술도 있었다. 백내장 수술도 열 건이나 되었다. 입원 환자 중 폐렴 환자, 각기병 환자 등 일곱 명은 사망했다.
국립 ‘제중원의학당’, 한국 최초의 의과대학
1886년 3월 29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의과대학이 문을 열었다. 양의(洋醫, 서양식 의사) 양성을 위한 국립 ‘제중원의학당’이다. 당시 조선 정부의 근대 인재 양성 프로젝트는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883년 영어 통역관 양성을 위해 동문학을 세웠고, 1886년 이를 육영공원으로 발전시켰다. 1888년에는 사관생도 양성을 위해 연무공원을 개설했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학당 운영지침을 마련하고 부지와 건물을 제공했으며, 학생들을 선발했다. 제중원 의사 알렌은 조선 정부 예산으로 의학교육에 필요한 도구를 사들이고, 교수들을 섭외했다. 조선 정부는 처음에 16명의 학생을 선발하고, 그 중 12명을 본과에 올려보냈다. 학생들은 영어, 물리, 화학, 해부 등 기초과목은 물론 의료기구 다루는 법, 약 조제법, 환자 간호법 등을 배웠다. 수업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성적 우수자는 표창을 받았고, 중도 퇴학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오늘날의 외교통상부 장관)과 교수회(敎授會)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1890년 무렵 제중원의학당의 의학교육이 중단되고, 졸업생은 배출되지 않았다. 조선 정부의 재정난으로 말미암은 의학당 운영예산의 부족, 알렌 등 미국인 교수진의 이탈, 학생들의 선교사thumbnailType="w210" 와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학생들의 학구열 부족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1894년 제중원 운영권이 이관된 까닭은?
1894년은 파란만장한 해였다.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세 사건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대사건들이었다. 특히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사건은 고종에게는 치명타였다. 고종은 국왕으로서의 자존심과 권위에 큰 타격을 입고 생명까지도 위협받아야 했다. 조선 정부도 힘을 잃고 일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의료선교사 에비슨의 요청을 수용하여 미국 북장로회에 제중원의 운영권을 이관했다. 일본이 국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제중원을 일본에 빼앗기는 것보다는 미국 북장로회에 운영을 맡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구나 일찍부터 미국이야말로 약소국 조선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라고 기대했던 만큼, 미국에 무언가 도움을 청하기에 제중원 운영권 이관이 유리한 카드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에비슨이 제중원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다가 1904년 다른 곳에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했고, 이듬해 대한제국 정부는 제중원의 땅과 건물을 되찾았다.
제중원은 왜 중요한가?
우리나라 근현대 의료사, 특히 서양식 의료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8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이 개원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중원은 고종과 조선 정부가 19세기 조선의 제반 의료 상황에 대처하여 서양의학 도입을 능동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1877년 부산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서양식 병원이 등장했고, 1879년 송촌 지석영이 역사적인 종두 시술에 성공했지만, 왕조시대였던 만큼 어명으로 서양식 병원이 설립되어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상대로 서양식 의료를 펼치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근대 의료사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제중원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한국 근대 서양의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우선 대한제국 정부의 의학교와 광제원을 통해서였다. 정부와 한국인들이 제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은 의학교와 광제원 등 국립 의료기관의 건립과 운영, 나아가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 의학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경로는 세브란스병원을 통한 것이었다. 제중원에서 일했던 여러 의료선교사의 경험은 개신교가 설립하고 운영한 세브란스병원의 발전뿐만 아니라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 의학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제중원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생물산책, 김상태, 과학창의재단)
2023-01-17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