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동화수필】
도솔산 내원사 ‘배롱나무’와의 즐겁고 유익한 대화
― ‘원숭이가 떨어지는 나무’라니 손자가 웃다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새벽 도솔산 산책길에
내원사에 들렀다.
내 발걸음이 저절로
그리로 간 게 아니라
거기 활짝 웃는 연분홍 배롱나무꽃이
자꾸만 손짓하여 이끌려 간 것.
▲ 대전 서구 도솔산 내원사 배롱나무꽃(사진=필자 윤승원 폰카 촬영 23.7.31.)
어느 백발의 할머니가
대웅전 앞에서 합장하셨다.
할머니는 어딜 보고 합장하시는 걸까?
눈앞에 부처님도 아니 계신 데
어딜 향해 저리도 정성껏
허리 굽혀 합장 절을 하실까?
▲ 대전 서구 도솔산 내원사(사진=필자 윤승원 폰카 촬영 23.7.31.)
대웅전 아름다운 기왓장 곡선과
신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처마 끝
풍경(風磬)의 잔잔한 흔들림.
거길 바라보시는 것 같지만
아니다.
배롱나무꽃이다.
만개한 배롱나무꽃 바라보면서
백발의 할머니 따라
나도 합장했다.
합장하면서 허리를 굽혔다.
세 번 허리 굽혔으니
합장 삼배.
사찰 경내를 온통 붉게
물들인 배롱나무꽃은
만인의 애인이다
▲ 대전 서구 도솔산 내원사 배롱나무꽃(사진=필자 윤승원 폰카 촬영 23.7.31.)
부처님 미소처럼
날 보고 웃는다.
배롱나무가 웃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
하지만 내가 누군가.
산책길 낯선 사람에게도
곧잘 말 걸기 좋아하는
실없는 사람 아닌가.
배롱나무가 활짝 웃으면서
반갑게 맞아주니 잘 됐다.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보자.
사찰이나 서원, 향교,
옛 선비의 고택에 가면
요즘 한창 만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민가에서도 더러 보이지만
사찰이나 서원에서
유독 많이 보게 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치마저고리 모두 벗고 있습니다.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껍질 없는 나무가 어디 흔한가요.
맨살 피부이니 부르는 이름도 많지요.
‘간지럼 나무’라는 이름도 재미있어요.
만지면 사람이 간지러운 게 아니라
나무가 간지럼을 타듯
흔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라지요?
줄기가 굵어도 손으로 쓰다듬어보면
나무가 미세하게 흔들리니
실로 신기한 일입니다.
짓궂은 사람들은
피부가 부드러워
자꾸 만져보고 싶으니
‘희롱나무’라는
익살스러운 이름도 붙었지요.
그보다 더 웃기는 이름은
따로 있습니다.
‘원숭이가 떨어지는 나무’라는
이름도 재미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우리 손자에게 들려주면
아마도
배꼽을 잡을 겁니다.
원숭이가 정말 떨어질 정도로
피부가 매끈해요.
▲ 대전 서구 도솔산 내원사 배롱나무꽃(사진=필자 윤승원 폰카 촬영 23.7.31.)
붉은빛을 띠는 수피(樹皮) 때문에
사람들은 ‘나무 백일홍’(木百日紅),
‘백일홍 나무’ 또는 ‘자미(紫薇)’라고도 하지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만,
배롱나무는 열흘이 아니라
여름 내내 1백일 꽃을 피우지요.
신기한 것은 한번 핀 꽃송이가
1백일 동안 계속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연이어 릴레이 합창하듯
수차례 피어난다는 사실이지요.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자, 그러면 진짜 궁금했던 질문입니다.
고찰이나 오래된 종택,
사당, 서원, 정자에는
왜 배롱나무를 즐겨 심었을까요.
껍질 없는 나무라는,
욕심 없는 나무라는,
청렴 상징 때문일까요?
새벽 산책길 나그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대웅전 앞 큰 배롱나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는 해마다 껍질을 벗습니다.
매끈하고 깨끗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찰에서 제가 사랑을 받는 것은
그런 무욕의 모습 때문입니다.
출가 수행자들이 해마다 껍질을 벗는 저처럼
세속의 욕망을 떨쳐버리라는 의미지요.”
배롱나무의 명쾌한 답변에
나그네의 궁금증이 비로소 풀렸다.
배롱나무를 향해 ‘감사의 합장’을 하고
천천히 내려오는데
산사의 목탁 소리와
두꺼비 노랫소리가 묘한 화음(和音)을 이루었다. ■
▲ 도솔산에서 만난 두꺼비(사진=필자 윤승원 폰카 촬영 23.7.31.)
2023. 7. 31.
윤승원 새벽 산책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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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배롱나무가 해마다 껍질을 벗는 의미, 선비의 청렴과
출가 수행자들이 세속의 욕망을 떨쳐버리라는 의미라니
많은 것을 시사하는 깊은 철학과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피부가 매끄러워 간지럼 나무라는 이름도 재미있고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배롱나무가 흥미롭습니다.
요즘 한창 만개한 것을 사찰이나 선비 고택 등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배롱나무처럼 이름을 많이 가진 나무도 드물 겁니다.
'간지럼 나무'도 재미있고, '원숭이가 떨어지는 나무'도 재미있습니다.
나무가 껍질이 없이 매끈하니 붙여진 이름이지요.
대전 도솔산 내원사 배롱나무는 유명합니다.
사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사찰이 온통 배롱나무꽃으로 화사합니다.
지금이 한창 만개 시기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