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시절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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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꽃이 피니 봄이 온 걸까...
영화 속에서 메이가 했던 이 말이 자꾸만 생각납니다.
베란다창으로, 그리고 쬐끄만 주방창으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날아드는 늦은 밤에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초록빛 대나무숲에서 쏴아아~ 하고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까지 느껴지는 듯한
그러한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 내리는 토요일 아침, 아직도 이 영화의 잔상이 내 머릿속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습니다.
호우시절...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이 말,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알싸하게 만듭니다.
아... 나에게도 때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좋은 비가 내렸던 적이 있었을까...?
*
시계추처럼 학교와 집을 오가던 그랬던 시절에는 변화없이 매일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삶이 지겹기도 하여서
그때는 어린 마음에 비극적인 영화가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뭔가 임팩트가 강한 영화, 아니면 내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영화,
또는 한여름날의 무서울 정도로 몰아치는 푹풍같은 그런 영화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현실 돋는 아줌마가 된 까닭일까요...
이제는 그저 하루하루가 아무런 나쁜 일 없이 무던하게 흘러가는 그런 영화가 참 좋으네요.
거기에 더하여 해피엔딩이면 더 좋구요...
ㅎㅎ, 살다보니 사람이 이렇게도 변하나 봅니다.
예전에는 내 방으로 날아드는 한 줄기 후텁지근한 여름날의 밤바람에도 괜스레 설레여서
잠 못 들어 하였는데, 이제는 훈훈한 봄바람에 가슴이 설레어 옵니다.
어린시절에는 <봄>이라는 계절이 참 시시하였습니다.
별 특징도 없는 것 같고, 그저 무덤덤한,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개성이 하나도 없는
그런 지루한 계절이 바로 <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혹독한 사춘기를 거치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들어서면서 나는
봄날처럼 지루하디지루한 날들보다는 한여름날 뙤약볕 아래에서의 강렬함이 좋았고,
봄날의 꽃향기 가득 머금은 달달한 바람보다는 한밤에 갑작스레 쳐들어오듯 몰아치는
태풍같은 거센 바람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놀고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혜린처럼, 니나 붓슈만처럼 그렇게 폭풍같은 삶을 살기보다는
내 삶이 그저 아무런 굴곡없이, 오히려 지루하더라도 잔잔하게 흘러가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게요, 살아가다보니 사람이 이렇게 변하기도 하네요.
언제쯤이었던가, 아는 분을 따라서 어느 교회의 행사장에 갔었는데
그곳에서는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회덮밥>을 준비해 주셨죠.
그런데 말이지요, 길게 줄을 서 있다가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는데
회덮밥을 챙겨주시던 집사님이 음식 재료들 중에서 먹지 않는 것, 그러니까
빼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나는 서슴치 않고 <회를 빼주세요> 하고 대답을 했지요.
아, 그런데 그 순간 내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데...
정말정말 민망해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회덮밥에서 메인이 되는 <회>를 빼달라고 하는 것이 그리도 이상한 건가...???
못 먹는 것을 빼라고 하길래 그랬을 뿐인데... ㅎㅎ
ㅎㅎ, 지금 생각하니 참 많이 웃기는 상황이기도 하네요.
지금은 회덮밥에 회를 넣어서 먹을 수 있으니 그때의 나를 이상스레 쳐다보던 그 시선들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네요.
그래요, 이제 나는 <회>를 아주 조금은 먹을 수 있답니다.
광어, 우럭, 돔... 뭐, 이 정도를 조금 먹을 수 있는 그런 경지까지 올랐다는 거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세월이 흘러흘러 여기까지 흘러오다보니 예전에는 꿈조차 꿔보지 않았던 일들을
지금은 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태연하게,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더라는 것이죠.
살다보니 나 또한 이렇게 변해가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은 훈훈한 봄바람 속에서 가슴 훈훈한 영화 한 편 보고, 그 훈훈한 설렘이 너무 좋아
이렇게 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답니다.
가끔은 내 가슴 속에서 매섭게 날을 세우고 있던 번뜩이던 그 어떤 것이 사라져가는 것이
조금은 아쉽고 서글플 때도 있지만, 그렇지만 매섭던 그 어떤 것이 둥글둥글 다듬어져가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또한 깨달아가는 요즘이랍니다.
어느새 나도 폭풍 속을 거닐기 보다는 보드라운 봄빛 아래에서 가만가만 거닐고픈 그런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가슴 아프도록 눈물짓기 보다는 해피엔딩을 암시하며 끝이 난 <호우시절>, 이 영화에
이토록 내 마음이 잔잔하게 동요하는 것을 보면 어느새 나도 나이를 꽤 많이 먹었나 봅니다.
결코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이>이긴 하지만, ㅎㅎ, 어쩔 수가 없네요...
봄바람에, 그리고 아른아른한 봄비에 가슴이 파르라니 떨려오는 토요일이네요.
ㅎㅎ, 매일매일 놀고먹는 아짐 입장에서는 토요일이라고 해서 별 다를 것도 없겠지만요...
그래도.. 어쨌든... 주말은 주말...!!
그래서 모두들 아름다운 영화처럼 아름다운 주말되시라구요... ^^
< 2013/04/20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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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호우시절, 이 영화가 궁금하신 분이 있으시면...
한번 보실래요...?
첫댓글 스와니님 잘 계시죠..
여러번 들어와 님의 글 감상하고 가곤해요..
요즘 스와니님의 글이 뜸해졌네요..
마음을 뭉클하게하는 글 음악 기대 합니당..
멋진 수필가님..
잘 지내시죠...?
ㅎㅎ, 그동안 조금 바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