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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불신이 바로 악한 마음입니다. 시편1편의 악인은 여호와 율법을 묵상하지
아니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지옥 가듯 하나님을 알고도 믿지
않는 것이 불신이요 악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죕니다(롬14:23)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으로는 멀리 있는 자입니다.
달란트는 돈입니다. 우리가 돈을 가지고 있으면 그 돈을 굴립니다. 그냥 쥐고 있겠어요?
만약 1억을 1년만 은행에 예금시켜두면 그 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입으로는 주여!
주께서 내게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를 제게 주셨으니 이 소중하고 존귀한 복음을
받았으니, 이 사랑을 받았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만 묻어 두고 사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로 마음은 먼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깨달았습니까? 성경은 진리를 깨달았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는 것을 돈으로 비유합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의 엄청난
돈을 맡긴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이 원리를 아시고 사람들이 이 돈을 가지고
은행에 맡기면 이자라도 나오지 않느냐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네게 준 은혜의
이자를 받는 게 뭐가 나쁘냐? 그 말은 이자를 달라는 말이 아니고 ‘돈은 그냥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은행도 돈을 돌리기 때문에 이자가 나오는 거 아니냐
내가 네게 준 은혜는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인데 그걸 받을 때는 가치 있다고 날름
받아 놓고 활용하지 않는 걸 봐서 너는 그 가치를 인정치 않는 거야.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렇게 나오시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우리가 악하고 게으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귀하다 또는 주의 진리가 너무 귀하다고 말은 하면서
그냥 갖고 묵혀 두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동하지 않는 겁니다. 그 이유는
말로만 귀하다는 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 가치를 모른다는 얘깁니다.
이는 진리의 귀중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래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십니다(마25:30)
주님께서 내 것을 너는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불신이요
바로 악한 마음이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불신으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께 분리될까 항상 염려하라 영영 이별할까 염려하라 이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믿음을 가동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을 때가 많습니다.
13절“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만약 떨어질까 염려가 되면 이 ‘오늘날’의 구원을 받으면 됩니다.
구원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영적으로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계속 건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 중에 “오늘날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시고”라고 하는 겁니다.
피차 권면하라 완고하게 된 사람들을 성령과 말씀을 가진 자들이 권면하라 우리가
받은 위로를 가지고 위로하라 이 말은 주께서 ‘너희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3절에 오늘이라 일컫는 이 날을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 날은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좌를 향해
주의 이름을 부르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날입니다.
14절 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왜냐하면’ 시작이 되고 끝까지 라는 말씀인데 곧 어느 날, 오늘이라
일컫는 날 바로 농사의 추수기입니다. 그럼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이 뭡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생명입니다. 농사로 보면 열매의 씨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내용으로는
‘확실한 것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파악하여 붙잡았으면
하는 것이며 그 참예하는 방법으로는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겁니다.
13절에 마음이 완고하게 되는 가능성은 죄의 유혹입니다. 그 첫째는 육체,
둘째는 율법이고 셋째는 철학적인 인간의 말입니다. 지금 땅에 가득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로마서를 듣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깨닫긴 했는데 유지가
안 되는 이유는 말씀을 듣다가 그만 다시 율법적인 말씀을 듣는 겁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듣다보면 진리는 희미해지고 나도 모르게 그 말에 의해 그렇게 되는
가보다 그렇게 안하면 안 되는가 보다 하고는 돌아가고 맙니다.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미혹이 되고 맙니다. 뇌피셜이라고도 하지요.
또 세상의 철학의 말을 많이 들으면 저렇게 해야 되는구나 하고 진리를 잊고 맙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한참 들으면 그렇지 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도 우리는 저렇게 해야지 하고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심각한 미혹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2:8에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말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뭘 듣느냐는 겁니다. 과거에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 안에 진리를 깨닫고
자유 하던 사람이 잘못된 신앙생활 하다보면 사람이 멍해져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진리를 깨닫고 교육학에 의한 말씀을 들은 사람을 물갈이 하는데
거의 7년 10년이 걸리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것이 바로 철학사상입니다.
그리고 율법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말들입니다. 계속 듣다 보면 미혹이 되어
진리의 길을 잊고 맙니다. 주님으로부터 그 진액을 공급받는 원리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이 멍해지는 겁니다. 요즘 안타까운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나고 있습니다.
13절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미혹의 영이 있으니 이게 바로 환란입니다. 용의 입의 물을 땅이 흠뻑 들여 마시고
있는 것이 계시록의 상황입니다(계12:16) 어떤 단체가 지금의 교회들이 음녀들이라고
말한 것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땅에 장막을 세운다고 하니 사기꾼이죠.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 진저(계12:12)
만일 회개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로 성령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으면 위엣 것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기도를 쉴 수가
없습니다. 잠시라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면 그게 죽음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절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미혹이 되는 사람이 있고 진리를 따라
머리이시며 근본이신 주님을 견고히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들은 바
믿음의 말씀을 화합(결부)하도록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됩니다. 독약인지
알고 먹으나 모르고 먹으나 죽은 건 똑 같습니다. 진리의 지식을 알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으면 아나 마나입니다.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자와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은 항상 긴장합니다. 지금까지 워낙 여러 길이
있어서 광야와 같이 수많은 세월을 방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겁니다.
목사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넘어갑니다. 까닥하면 엇갈립니다. 제가 50년 목회를 한 목사를
향해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당신 구원이나 제대로 이루라고 핀잔을 줬습니다.
그와 같이 구원과 상관이 없는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건 구원이
얼마나 대단하고 영광스러운지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고속도로처럼 활짝 열린 줄 아세요? 아닙니다.
이 길은 좁은 길입니다. 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 보일 듯 말 듯한 길입니다.
기도해 보세요. 이 길 곧 생명의 길이 그렇게 쉽게 열리는 길인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비를 베푸시지만 우리 자신이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식물보다는 동물이 복잡하고 동물보다는 사람의 인체가 훨씬 복잡합니다. 인체가 얼마나
복잡한지 인체를 연구해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그리고 인체보다
더 복잡한 게 영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단하게 길을 내 놓으셔도 이런 말, 저런 소리 듣고 나면 또 이 길이 희미합니다.
미혹이 되고 나면 ‘그렇지 나도 이렇게 해야 되지 않나 그래 해 야지’ 하게 되고
한참 당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의욕이 앞서 있습니다. 해야 된다는 강박 관념이
앞서 있습니다. 언제 내가 당했는지 모르고 내가, 나는 하고 메마른 침을 삼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는데 만약 우리가 이 길을 느슨하게 잡아도 된다면 성경이 왜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겠습니까?
지금 전무후무한 환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미혹이 굉장히 많다는 겁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미혹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다는 것이 얼마나 좁고 협착한 길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나면 한 번은 이가 갈릴 겁니다. 내가 그 동안 속았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워낙 여러 길이니까 큰 일 날 뻔했다는 거 아닙니까. 백가쟁명입니다. 백 사람이면
백가지의 길이 있는 것처럼 떠듭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6-17) 이 말은 바울이 ‘내가 율법을 따라 그대로 갔다면
큰 일 날 뻔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안 믿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었잖아요. 아주 특별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몰랐고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다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겁니다. 복음에 대해 이와 같은 자부심이 있어야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다 된 것 같지만 시중에 나오는 책 몇 권만 읽어보세요.
옛날로 돌아가 버립니다. 설교 몇 편만 듣고 나면 홱 돌아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 견고히 붙잡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길입니다. 딱 하나의 길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엔 아들로만
말씀하십니다.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의 영과 생명이 배어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기 자신을 믿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와 하나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나 자신의 정체감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시면 사람이 나누지 못합니다.
잘못하면 신앙이 밤새도록 도깨비하고 싸웠는데 이튿날 빗자루 몽둥이
붙잡고 있는 꼴이 됩니다. 2-3십 년 예수 믿었다고 해도 남는 게 하나 없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도 하나의 과정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온전하신
구주 그리스도께로 넘어가는 길이지 십자가가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예수의 초상화,
십자가, 교회의 장식 이런 것들이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사람들이 그것들이
최종 목표인줄 착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 나아가는 이유는 거기에 내 무덤이
있는 곳이고 그 이후에 부활의 영광이신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거기에 내가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산 곳이기
때문에 십자가 밑에 나아가는 거 아닙니까? 또한 우리가 확실한 길을 알고도
남에게 전파하지 않으면 그들의 피 값도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겔3:18)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