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용문사 주지 승원 스님
“새벽예불, 오늘의 시작! 피곤 핑계로 흐트러지면 하루가 흔들려”
할머니 손 이끌려 불연 맺고, 고산 스님 은사로 삭발염의
나눔 봉사 ‧신도교육 열성 남해지역 ‘새 활력’ 기대
휴식형 템플스테이 지향 환한 ‘웃음꽃’ 만개한 절
유희경 ‘촌음집’ 목판 소장‧ 천혜비경 품은 천년 고찰
‘청소년 백일장’ 준비 ‘착착’ 내어 보일 ‘시제’ 무궁무진
“용문사 역사 고찰 절실 지장도량 위상 세울 터”
용문사 주지 승원 스님은 “은사이신 고산 혜원 스님께서
평소 강조하신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라’는 가르침
불식촌음(不息寸陰)을 늘 가슴에 새긴다”고 전했다.
지장예문을 독송하는 승원 스님.
‘지장보살 대성인의 성스러운 위신력은/
영원토록 설하여도 다 말할 수 없는지라/
보고 듣고 우러러서 한 생각만 예배해도/
인천 세계 이익됨은 그지없이 많으시네.’
남해 용문사(龍門寺) 명부전에서 올린 ‘지장예문(地藏禮文)’독경 소리가
새벽녘의 호구산(虎丘山) 자락에 스며든다.
용문사 주지 승원(承遠) 스님의 청량한 독경 소리 고결하게 들려오는데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대원을 오롯이 전하려는 마음이 빚은 소리일 것이다.
독자(獨子)였다. “절에 가면 오래 산다”는 말에
할머니는 고성에서 자란 일곱 살의 손자를 통영 안정사에 맡겼다.
절에서 초등학교까지는 800미터. 한낮에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가도 집 생각이 나곤 했지만
걸음은 늘 노을빛 찬연히 깃드는 산사로 향했다. 가는 길을 몰라서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다.
법화종 사찰이었던 안정사는 성도재일 등의 특별 정진 기간이면 ‘장엄 염불’을 했다.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 내어 염송하는 칭명염불 소리에 젖어가는 동안 나이도 6살이 더해졌다.
그해 해인사의 경덕 스님이 안정사에 들렀다가
고산 혜원(杲山 慧元‧1933∼2021) 스님이 쓴 ‘불자수지독송경(보련각)’을 건넸다.
“고산 스님은 조계종의 훌륭한 스님이시다. 염불도 잘하신다. 큰 절로 가자!”
경덕 스님을 따라 쌍계사로 가서는 고산 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했다.
법주사 강원을 졸업한 후 불국사 월산 스님으로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받고 봉암사 등의 전국 선원에서 10년 동안 정진했다.
대성암 주지(2014.7∼2022.5)를 맡으며 봉사와 나눔, 신도교육에 열성을 보이며
통영 포교에 새 활력을 불어넣은 승원 스님은
지난 5월 남해의 유서 깊은 고찰 용문사 주지를 맡았다.
수덕사 대웅전(국보)을 빼닮은 용문사 대웅전(보물 1849호)
바로 아래 오른쪽의 탐진당(探眞堂)이 주지실이다.
주지실로는 대웅전 참배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탐진당보다는
“명부전 옆 오붓한 곳에 자리한 삼소당(三笑堂)이 더 좋을 법하다”고 하니
승원 스님은 미소를 보이며 봉서루 툇마루에 앉은 할머님 한 분을 가리켰다.
“대웅전 부처님에 시선을 두었다가는 어느새 명부전 너머의 숲을 바라보셨는데
지금은 좀 더 위쪽의 산등성이에 눈길을 주고 계십니다. 참 편안해 보이지요?
그럼 저도 편안해집니다. 저기 좀 보세요. 엄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참배 오셨네요.
오랜만의 나들이인 걸까요? 산사의 풍경을 제대로 느낄 줄 아는 걸까요?
아이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옵니다. 그럼 저도 웃습니다.”
산사를 찾아온 모든 대중을 간접적으로나마 마주하고 싶은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대중과의 만남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2개의 단톡방을 열어 사경반과 경전 독송반을 운영하는데
새벽 6시에는 ‘불교입문’(조계종출판사)의 한 대목을 공책에 정성껏 쓰고는
핸드폰으로 촬영해 사경반에 올리고,
아침 8시에는 ‘경전 독송반’을 열어 ‘법구경’ 한 구절을 독송한다.
그리고 오전 10시의 사시 기도는 ‘경전 독송반’을 통해 라이브로 전달한다.
대성암 주지 때부터 지속해 온 신행이다.
“어느 날 신도님들에게 아미타 부처님의 상주처가 어디인지를 물었는데
우물쭈물하기만 하고 극락이라고 답을 못해요.
새벽 기도문 ‘달마야중(達摩耶衆)’의 달마를 물으니 법이나 가르침이라 답하지 못하고
중국에 선(禪)을 전한 ‘달마 스님’이라고 해요.
우리가 부처님 생애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직접 쓰고 독송하면 뭐 하나라도 남겠지 싶었습니다.
처음엔 저와 신도가 같은 경전을 사경하고 독송했는데 지금은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불교입문’을 사경하고 있으나 어떤 분은 ‘금강경’을 사경하고,
저는 지금 ‘법구경’을 독송하고 있지만 어떤 분은 ‘부처님 생애’를 독송합니다.”
통영 최초 조계종 불교대학은 승원 스님이 연 ‘대성 불교대학’이다.
철원 심원사, 고창 선운사 도솔암과 함께 남해 용문사는 한국 3대 지장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용문사가 언제 기도 도량으로 정립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선운사 경우 1481년에 지장전이 조영되었다는 사적(寺蹟)의 기록이 있고
‘중종실록’에서도 1518년 시왕도(十王圖)를 안치했다는 대목이 있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용문사는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의 주둔지였습니다.
임란으로 희생된 영가를 천도하기 위한 ‘통제영 수륙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견이지만 통제영 수륙재 봉행에 용문사가 나름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용문사는 지장도량으로 정평 났을 것입니다.
그 후 숙종(재위 1674∼1720) 때 남해 앞바다를 지키는 호국도량
즉 수국사(守國寺)로 지정됐는데 이를 방증하는 금패(金牌)가 남아 있습니다.
학술회의를 열어 통제영 수륙재와 수국사 용문사의 연관성을 짚어보려 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장도량으로서의 용문사 역사는 짧게 잡아도 숙종 때까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용문사 유물관은 복장에서 나온 지장 유물 한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지장보살과 시왕(十王) 조성에 보시한 사람의 이름까지 나옵니다.
이것은 숙종 재위 때의 문헌입니다.”
승원 스님은 쌍계사 염불원장을 맡을 만큼 염불 정진에 매진해 왔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다양한 답변이 있을 수 있어 여쭈어보았다.
‘지장보살영험기’에는 총 32편의 영험담이 실려있다.
불교사상에 기반에 효(孝)와 치병(治病)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지장보살’을 칭명하면 정말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염불하면 뭐가 좋은가를 따진다는 건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전제를 세운 겁니다.
방아 찧기(精)를 부지런히(勤) 해야 쌀 한 톨 얻을 수 있습니다.
하여 정근(精勤)이라고 합니다.
시루에 뿌린 물은 거의 그대로 빠져나오지만 콩나물은 조금씩 조금씩 자랍니다.”
템플스테이관 전경.
전 주지스님들의 열정으로 사격이 갖춰진 만큼 “더 이상의 건축불사는 없다”고 선언한
승원 스님은 템플스테이 운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아이들이 좋아할 ‘부모와 함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8월26일부터 12월23일까지 5개월간 운영한다.
‘사물 체험’ ‘스님과 함께 염주 만들며 부처님 마음 느끼기’
‘사찰 주변 숲속 식물, 동물 친구 이름 알기’ ‘스님과의 차담’ 등의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편안한 템플스테이를 지향합니다.
일례로 발우공양 대신 뷔페식 공양을 합니다.
공양의 형식보다는 오관게(五觀偈)에 담긴 의미를 진중히 전하려 합니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살피고,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
고생한 분들의 노고를 기억하다 보면 자연의 소중함과 마음의 고귀함을 조금씩 알게 될 것입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직접 북, 운판, 목어, 범종도 치게 할 겁니다.
새벽을 가르는 소리에서 누군가는 거룩함을, 누군가는 신비감을, 누군가는 담대함을 느낄 겁니다.
그 느낌 위에 생명의 존귀함을 얹으려 합니다.”
용문사 대웅전과 탐진당.
용문사는 ‘부모와 함께 템플스테이’ 외에도 햇살나눔, 토닥토닥, 내 마음의 보물찾기 등
다양한 휴식형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통영 대성암 주지를 맡았을 때부터 신도들과 함께 나눔‧봉사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장병들을 위해 피자를 들고 위문했다.
자장면 150인분을 준비하는가 하면 350인분의 간식도 준비했다.
해마다 노인잔치를 열고, 자비의 김장김치를 나누고, 저소득층 가정의 노후 보일러를 교체하고,
장애인을 둔 가정에 에어컨을 넣었다. 대성암이 작은 암자인 점을 고려하면 참으로 ‘큰 불사’이다.
“절 살림 아끼면 나눌 수 있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신도들과 함께 추진하는 게 중요합니다.
처음 두어 번 할 때는 ‘그러려니!’ 하던 신도들이 매년 몇 차례의 행사를 지속하니 부담스러워해요.
하지만 거듭되는 행사를 통해 나눔의 진가를 확인하고는
직접 나서서 된장, 고추장을 담아 팔아 나눔 기금을 모으더군요.
용문사에서도 남해 지역민들을 위한 나눔 행사를 시작할 겁니다.”
‘대성암 백일장’은 지역에서 ‘작은 청소년 문예마당’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꿈, 바다, 얼굴, 평화, 다문화가족 등 다양한 시제를 선보였는데
입시 위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인성이 점점 메말라 가는
아이들이 창의성과 문학적 감수성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것이어서 호응이 컸다.
용문사에서도 백일장을 개최하려 한다.
“조선 시대 시인 유희경(劉希慶‧1545∼1636)의 시집이 ‘촌은집(村隱集)’입니다.
2009년 경남 남해군이 최초로 ‘촌은집 완역본’을 간행했습니다.
유희경 연구 학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논문에 게재해 온 정도인데
자치단체가 완역해 내놓았으니 이례적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용문사가 ‘촌은집 목판 52매(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72호)’를 소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희경의 시는 하층민으로서 한시를 창작한 여항문학(閭巷文學)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남해군에서 간행한 촌은집 텍스트는 민족문화추진회(현 고전번역원)가
영인본으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 55집’이고 이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그러나 유희경의 증손자 유태웅씨가 용문사에서 3권 2책으로 발간한 책판(冊板) 일체는
용문사가 오롯이 소장하고 있다.
붉은 게와 물고기.
“용문사 대웅전 천장에는 게, 거북이, 전갱이, 보구치, 뱀장어 등의 물고기가 노닙니다.
소나무, 측백나무 즐비한 숲은 차밭과 어우러져 매일 명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름이면 수국이 만개하며 ‘꽃 절’로 변모합니다.
앵갱만 품은 푸른 바다도 내려다보입니다.
천혜의 비경 속에 산사의 문화가 숨 쉬고 있으니 시제는 무궁무진합니다.”
동진 출가했기에 환속 가능성도 컸을 법한데 끝내 절을 떠나지 않았다.
승복을 입고 학원을 다니며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던 승원 스님이다.
“혼자 운 적도 많아요. 그런데 돌아가도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만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듯싶어요. 집에서 구하기 어려운 과일과 과자가 하산길로 향한
저의 발목을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별일’ 없는 한 일주문을 나서지 않는다.
새벽예불과 지장기도 마친 후 아침 공양까지 남은 자투리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밭으로 나가 풀을 뽑을 정도다. 조석예불을 빼놓지 않는 스님이지만 특히 새벽예불을 중시한다.
“은사스님께서는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라는 가르침 ‘불식촌음(不息寸陰)’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새벽예불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피곤을 핑계 삼아 불참하며 흐트러지면 하루가 흔들립니다.”
한여름의 수국보다 더 크고 환한 웃음꽃이 용문사에 사시사철 만개할 듯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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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원 스님은
고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사미계는 1981년 해인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는 통도사에서 청하 스님을 계사로 1998년 수지했다.
법주사 강원을 졸업한 후 봉암사 등의 전국 선원에서 10년 동안 정진했다.
세진암(2005∼2009)과 대성암(2014.7∼2022.5) 주지를 맡았다.
현재 용문사 주지이며 쌍계사 염불원장을 맡고 있다.
2022년 8월 24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