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체포 (1621)
구에르치노
구에르치노(Guercino, 1591-1666)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조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Giovanni Francesco Barbieri)는
첸토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그는 귀도 레니(1575-1642)가 죽은 후 그의 작업실을 인계받아
볼로냐 화파를 이끌어가는 화가로 성장했다.
그는 화려한 색감에 명암의 극적인 대비와 강한 감정 표현을 결합하여
서정적이면서도 힘이 넘치는 바로크 미술을 탄생시켰다.
그가 1621년경에 그린 <그리스도의 체포>는
현재 케임브리지 피츠윌리엄 박물관에 있는데,
마태오복음 26장 47-56절, 마르코복음 14장 43-50절,
루카복음 22장 47-53절, 요한복음 18장 1-11절이 그 배경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7-48)
예수님의 강렬한 시선이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유다는 흠칫 놀라 몸이 뒤로 젖혀지고 손에 돈주머니를 챙겨 달아나려 하고,
유다가 예수님과의 입맞춤으로 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창과 등불과 밧줄을 든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예수님을 붙잡는 순간을 포착하여 구에르치노는 그림에 담았다.
구에르치노는 성경에서 이 중요한 사건을 본질적으로 인간 드라마로 재해석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희미하지만 의미심장한 후광이 있지만,
캔버스의 바로 중앙에는 밝게 빛나는 예수님의 몸이 있다.
이것은 세상의 폭력과 변덕스러운 우정에 대항하는 인간 예수의 모습이다.
오른쪽에는 젊은이, 노인, 중년의 조롱하는 군사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오른쪽의 움직임은 캔버스 왼쪽의 고요함과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군인들이 잡아채고 포박하고 조롱하는 동안,
유다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는 부드럽게 빛나는 예수님이 보인다.
폭력이 임박했지만,
지상 자유의 마지막 순간인 이 순간에 그분은 거룩하고 고요하다.
예수님의 창백하고 환한 얼굴 표정은 무엇을 전달할까?
충격? 슬픔? 분노? 실망? 두려움?
그분의 입은 마치 말을 하는 것처럼 약간 열려 있다.
그분의 눈은 배신자를 똑바로 바라보지만,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갖는 것 같다.
신학자, 작가, 예술가들이 유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구에르치노의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렇다면 유다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는 주님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밧줄에 돌리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목에 걸려 무심코 후광을 형성하려는 밧줄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머리 뒤에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식별해 주는
예수님의 후광을 보고 있을까?
아니면 이 순간 예수님을 배신한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있는가?
그의 몸은 죄를 지은 사람인 양 예수님 앞에서 움츠러들고 있다.
여기서 유다는 그리스도의 배신을 묘사한 중세의 그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악당의 이미지가 아니다.
사실 유다는 그림 반대편에 있는 군사들에 비해 훨씬 덜 잔인해 보이고,
평범한 중년 남자이다.
그의 머리는 회색으로 변하고 이마에는 주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구에르치노가 그토록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하는 등불의 빛은
그의 왼손에 쥐고 있는 돈주머니를 드러냄으로써 그의 죄책감을 조명한다.
이 작품은 1621년에 그렸고 런던 국립 미술관에 있는 <토마스의 의심>과
크기, 색채, 조명, 구성 방식, 극적인 표현이 비슷하여 한 쌍을 이룬다.
이 두 작품은 그의 고향 첸토의 후원자인
바르톨로메오 파브리(Bartolomeo Fabri)가 주문하여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배신당하는 그리스도 Betrayal of Christ>인데,
구에르치노는 배신과 의심을 똑같이 본 것이다.
의심이 불신이고, 불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이며,
의심과 배신은 모두 믿음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예수님을 결박하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