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번제단의 불, 다른 불, 소멸하는 불
3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10장에는 ㉠ 하나님이 명하신 불, ㉡ 다른 불, ㉢ 소멸하는 불, 이렇게 세 종류의 불이 있습니다. 10장은 9장과는 상반(相反)되는 장입니다. 9장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9:6) 했는데, 10장에서는 여호와의 진노가 나타나고, 9장에는 “여호와의 불이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살랐는데”(9:24), 10장에서는 여호와의 불이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를 삼켰던 것입니다. 그 원인은 오직 한 가지, 9장에서는 “여호와의 명령하신 대로”했고, 10장에서는 “여호와의 명령하신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행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즉 불신자들은 멸시한다하여도 믿는 자들이 무시하는 것은 용납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즉각적으로, “우리는 주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명령하신 대로 섬기고 있는가?” 고 자문하게 합니다.
도표를 보시면 첫째 단원의 “여호와의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중심으로, ① 두 명의 제사장이 직사하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하십니다. ② 모세는 아론에게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치지 않게 하라 합니다. ③ 왜냐하면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은 아론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하십니다. 둘째 단원은 제사장의 소득인 “속죄제 염소를 찾은즉 불살랐는지라”를 중심으로, ⑤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네 소득이라”, ⑥ 이를 먹으라 하신 것은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라”고 주신 것인데 어찌하여 먹지 않았느냐고 책망합니다. ⑦ 오늘은 “속죄제 제물을 먹을 수 없었다”는 아론의 변명을 듣고 좋게 여겼다 합니다. 이를 두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주제(主題) : 번제단의 불, 다른 불, 소멸하는 불
㉠ 우선적으로 유념할 점은 성막 계시 중 영광스러운 곳은 지성소이지만 그 영광(지성소)에 이르는 핵심은 “번제단”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번제단에서 드려지는 대속제물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최우선적으로 한 것은 번제단을 만들어, “그 터 위에 세우고 그 위에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스 3:3)를 드린 일이었습니다. 성전 건물도, 법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서 대신 죽임을 당하는 대속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유지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분향할 때에는,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라”(16:12-13)하십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분향”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명령하심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삼하 12:9)한, 말씀에 대한 “업신여김”이라고 밖에는 달리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를 묵과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성막의 식양은 구속교리에 대한 모형입니다. 이는 의문에 가려있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변경한다면 “다른 복음”이 되기 때문에 용납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 10장에는 제사장들이 범한 두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불”로 분향한 것이고, 둘째는 먹어야 할 속죄제물을 먹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잘못에 대해서는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20)할 뿐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불”은 용납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성막 계시를 통해서 보여주시려는 복음을 변하게 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신약성경에서는,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 1:8)합니다.
㉣ 이점에서 상기하게 되는 점은 4장에서,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4:3), 속죄제를 드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는 육신의 연약으로 말미암아 부지중(不知中)에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범한 죄는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번제단의 불”을 부정(否定)한 고의로 범한(고범죄) 죄였던 것입니다. 이를 신약성경에서는,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고 경고합니다.
㉤ 10장의 사건을 문맥적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지는데 9장에서 첫 예배를 드렸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9:24)한 그 “불”을 분명히 목격한 제사장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분향을 하다니!
㉥ 그러므로 계시록에서는,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계 8:5)합니다. 어찌하여 번제단의 불이 징벌로 임하게 되는가? 번제단의 불은 우리 죄로 말미암아 우리 대신 진노를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다면 죄에 대한 진노를 자신들이 받을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 나답과 아비후가 죽자 모세는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3)고 말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28)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영광을 위해서 죽으셨으나, “다른 불”을 드린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첫째 단원(1-11) 번제단의 불과 다른 불
둘째 단원(12-20) 먹어야 할 속죄제물
첫째 단원(1-11) 번제단의 불과 다른 불
①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1),
㉠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2)합니다. 우리는 8장을 상고하면서 “명령”이 11번이나 등장하면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모든 일을 준행하니라”(8:36)고 마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9장도 “명령”을 5번이나 강조하면서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이”(9:21)행함으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9:24)고 마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10장에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분향을 하다니? 이를 용납하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 그러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불”은 어떤 불입니까? 본문은 말씀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불이 어떤 불인가 하는 점은 능히 분별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명령하신 불은 9장 마지막 절에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9:24)한 불이었음이 분명합니다. 16:12-13절에서 하나님은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분향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라”하십니다.
㉢ 나답과 아비후는 거짓 제사장이 아닙니다. 8장에서 영광스럽게 위임을 받고, 9장에서 첫 예배를 집전한 아론의 아들들이요,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이 파렴치한 죄를 범한 것도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여호와의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째서 죽어 마땅한 죄인지 아십니까?
㉣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살랐다”(9:24)는 것은 우리 죄로 말미암아 우리 대신 진노를 받으실 “대속제물”에 대한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부한다면 자신의 죄에 대한 진노를 자신이 받을 수밖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해서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한 것은 다른 복음에 대한 분노만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갈 3:13) 복음을 변개하려 한다면 “너희가 저주를 받게 되리라”는 경고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6:7절에서는 “(번)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자기 아들을 심판하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신 복음을 끝내 거부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면 “참되시고 의로우신”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는 나답과 아비후에게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또 다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3)하신 말씀은 목회자들이 명심, 또 명심해야 할 좌우명인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목회자로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와 정비례한 책임과 “더 큰 심판”이 따른다는 점을 명심해야만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로 분향한” 나답과 아비후를 묵과하셨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막계시는 시작부터 손상을 입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 역사상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하신 첫 창조의 초기도 3장에 이르러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 3:17)한 저주와 사망이 침투합니다. 대망하던 약속의 땅에 입성하자마자, 구약교회를 부패시키려는 누룩이 아간을 통해서 침투합니다. 유무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인 신약교회가 세워지자마자 이를 부패시키려는 누룩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서 침투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적발해내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만홀히 여기는 것을 묵과하신다면 하나님의 엄위는 업신여김을 받게 될 것이며 백성들도 자행자지하게 될 것입니다. “아론이 잠잠하니”!
㉥ “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4-5), 역설적인 말 같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어야 했고, “진영 밖으로 메어 내어” 백성들 앞에 증거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훗날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수 7:19)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아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진영 밖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구약시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不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불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 11:52)하신 복음진리에 대한 오류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범한 잘못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이점이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리라”(10)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느냐” 여부에 참과 거짓, “여호와의 명하신 불과 다른 불”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②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6)합니다.
㉠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는” 행위는 극도의 비통과 절망을 나타냅니다. 옷을 찢는 절망(絶望)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징벌하신 것에 대해 애통(哀痛)해한다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반항(反抗)과 같은 것입니다. 제사장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 “허물”(4:3)이 백성에게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라”(21:10)하십니다. 이점을 얼마나 중요시 했느냐하면 대제사장의 옷을 만들 때에,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같이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출 28:32), 즉 입고 벗을 때에 실수로라도 찢어지지 않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③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7).
㉠ 제사장들이 다른 사람들과 인격적으로 다른 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만 결정적인 구별은 “관유”로 부음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성도들이 불신자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찬송을 부르고 기도할 줄을 안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한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점입니다.
④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8),
㉠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9)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10-11)하십니다. 이로보건데 나답과 아비후가 포도주나 독주에 취하여 분별력을 상실함으로 이런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 이사야 선지자는,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사 28:7)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29:9절에서는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 원인이 무엇인가? 이점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애 2:14)고 말하고, 에스겔 선지자는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겔 22:26)하고, 지도자들이 “분별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 이는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느냐 하면 설교자가 입에 술 한 방울을 대지 않았어도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면 영적인 맹인이 되고 술 취한 자가 되어 비틀거림을 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독주”보다 치명적인 것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삼사 3:2)한 영적인 혼미(昏迷)인 것입니다. 나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둘째 단원(12-20) 하나님이 주시는 소득
첫째 단원이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행한 것이라면, 둘째 단원은 행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실수입니다.
⑤ “모세가 아론과 그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중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단 곁에서 먹되”(12),
㉠ 둘째 단원에는 “소득”이라는 말과, “먹으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제사장의 “소득”이라 함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음식이라는 뜻인데, “먹지 말라”는 금령이면 몰라도, “먹으라”고 독려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 하나님께서 “먹으라”하신 것을 받아먹어야 한다는 점을 문맥적으로 보면 나답과 아비후의 실수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렘 15:16)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 네 소득과 네 아들의 소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13)고 말합니다.
㉢ “흔든 가슴과 들어올린 뒷다리는 너와 네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 그 들어올린 뒷다리와 흔든 가슴을 화제물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소득이니라”(14-15)하십니다. “가슴과, 뒷다리”를 먹으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하시는데, “가슴”을 먹음으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뒷다리”를 먹음으로 능력 있게 활동하라는 격려일 수도 있습니다. 12-16절 안에는 “소득”이라는 말이 5번, “먹으라”는 말을 3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16상)합니다. 이는 9:15절에서 행한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가리킵니다. 4:13절의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는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휘장에 뿌린 것이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으나, 여기서 먹으라 하시는 것은 “그 피는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는 것이었으니 그 제물은 너희가 내가 명령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했을 것이니라”(18)합니다. 그런데 이를 먹지 않고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노하여 “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16하-17상)고 책망을 합니다.
⑥ 이처럼 속죄제 제물을 제사장에게 먹으라 명령하시는 데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17하)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속죄제 제물을 “소득”으로 주셔서 “먹으라”하심은 음식을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게”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의미입니까? 그래서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회중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라는 점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는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회개)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하십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죄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저지른 죄까지를 담당해야 한다는 점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⑦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하니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19-20), 즉 수긍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다.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드린 것은 “좋게 여길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행 4:12)때문입니다.
10장을 마치기 전에 “먹으라”하신 주제가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5:12-14절에서는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합니다. 그리고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아 “먹으라”하신 것을 먹지 않는다면 성장이 멈추고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어찌하여 영적 수준이 저급한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은 못 먹을 자가 되었기”때문입니다.
묵상해보겠습니다.
㉠ “다른 불과 다른 복음”에 대해서,
㉡ 어찌하여 제사장은 옷을 찢어서는 아니 되는지에 대해서,
㉢ “소득”으로 주신 제물을 먹어야 하는 점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