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시 전문지<애지>신인작품상 /유연정의 에피소드 외 4편
에피소드 외 4편
유 연 정
세월이 눌러앉은 집의
정원 향나무들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심었고
마당귀 텃밭은 어머니 놀이터였지요
나는 그때 담벼락 아래 채송화 씨앗을 뿌렸어요
그건 일종의 영역 표시 같은 거였지만
마루를 밟는 순간
골다공증의 추억이 분절음을 내고
눅눅한 흙내와 곰팡이 냄새
여기저기 숨어 있던 비밀들이 고개를 내밀어요
한 집안의 내력이란 건
가없는 시간일까요 아니면 한량없는 깊이일까요
거실에 걸린 빛바랜 액자는
아직도 생레미의 뽕나무를 키우고 있어요
흐린 날엔 혼자 노란 눈물을 흘리곤 하죠
마룻바닥이 어두운 채색을 덧입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오랜 부재의 증거랍니다
하늘거리는 얇은 커튼 뒤로 그림자 하나가
사라지고 있네요 숨바꼭질 하듯
서재의 취미는 늘 서향이에요
옛날 주인이 오천 권의 책을 읽었다는,
가끔씩 난독의 문장들이 골기와를 타고 추녀 끝으로 떨어졌어요
나는 돌탑처럼 쌓인 책 더미 속에 묻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곤 했죠
맨 끝 쪽엔 ‘꿈꾸는 다락방’
층계를 올라가면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알 수 없는
아득한 곳으로 공중부양 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사각의 천정에선 별빛이 쏟아지고
벽은 거울로 꾸며져 있어요
이곳은 한밤중이 되어도 무섭지 않죠
어둠이 따뜻하게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이에요
반짝이는 은하수를 베고 누우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였다가 나이지 않았다가 하는
그런 아득함이 밤의 지층 너머로 흘러가곤 했지요
그런데 어떤 이야기는 왜
세월이 흘러도 더 또렷해지는지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으면
발끝에서 글쎄,
어린 채송화들이 가만가만 피어나곤 하지요
비오는 날과 눈오는 날 사이
유연정
이끼 잔뜩 낀 어항 속에서
구피들이 뻐금뻐끔 힘겹게 산소를 빨고 있다
덜컹거리며 유리창 외벽을 타고 내리는 검은 비
영끌 거품이 터진 자리를 대신한 사글셋방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늪 속에서
수심을 읽어낼 때마다 어지럼이 찾아왔다
사각의 수조에 갇힌,
물류센터 라인 앞에서 택배 박스를 선별할 때면
상자 더미 속에 섞여 어디론가 실려 가고 싶었다
스캐너의 레이저는 쉴 새 없이 번뜩이고
송장 위로 붉은빛을 쏘며 미지의 행선지를 분류했다
창고 피킹, 편의점 알바, 머리핀 리본붙이기…
인라인스케이트, 인라인스케이트
“엄마 애들이 나보고 깡통집에 산대”
아홉 살 딸 아이는 입을 뻐금거리며 문밖으로 뛰쳐나간다
라인 위의 짐들은 무너지지 않는 완고한 성벽
한 치의 실수조차 허락되지 않는 톱니바퀴에 물려
상자 하나에 오십 원, 열 개면 오백 원
천 번의 붉은 점을 찍어야 일당 오만 원
어제는 구피 두 마리가 죽었다
젓가락으로 건져 내자 배가 퉁퉁 부어 있었다
흐린 날들을 뭉치면 잠시 내일이 될 수 있을까
대설주의보 내린 창밖엔
어느새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다
무한 루프
유연정
새벽 5시
휴대폰 알람이 그를 부팅한다
최적화된 경로로 로그인되는 시스템
오늘이 커서처럼 깜박인다
지하철은 프로그래밍 된 하나의 함수
자동화된 프로세스들이 빠르게 입력되고 출력된다
저마다 손바닥 안의 고립을 들여다보는 동안
전광판은 정해진 정차역을 반복해 실행한다
엘리베이터 안
침묵은 타자를 대하는 가장 안전한 전송방식
아라비아 숫자판이 그를 스캔한다
사무실
파일이 몸을 인식하는 순간 전원이 연결된다
허리는 콜로세움의 기둥처럼 곧게 세워지고
오른손은 마우스를 쥔 채로
손가락이 부리처럼 키보드를 찍어 숫자를 호출하고
두 눈은 모니터 속 보고서를 훑는다
회의실, 무거운 얼굴들이 착석하면
창밖엔 눈이 오려는지 흐린 하늘이 펼쳐진다
상사가 고개를 끄덕이면 커밋되고
고개를 저으면 다음 안건을 포워드 한다
'오늘은 점심을 뭐 먹지?'
늘 새로운 듯하지만
가까운 곳, 기다리지 않는 곳
이미 서버에 저장된 결과값이다
오후 3시
피로가 몸의 기능을 세이프 모드로 전환시킨다
동공이 초점을 잃고
눈꺼풀은 중력을 이겨내지 못한다
의자에 기댄 등이 달리의 시계처럼 흘러내린다
예정된 변화는
시스템 전체를 지키기 위한 예방적 디그레이드다
퇴근 시간 모니터 전원이 차단되고
사무실 세션이 로그아웃된다
이 디지털의 도시에서는
긴장도, 초조도, 불안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어두워진 밖으로 나서면
가끔씩 먼 곳에서 낯선 신호가 수신되지만
도착할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다
완고한 스케줄러는 내일도 그를
같은 시간, 동일한 자리에 배치해 놓을 것이다
무한 반복의 런타임은
인증 루틴에게 끝내 기준값을 부여하지 않는다
동그라미의 타자他者
유연정
방바닥에 누워
왼손 엄지 끝에 검지를 붙여
동그란 모양을 만드네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또 다른 동그라미를 만들고
두 개를 살짝 맞대어 보네
∞가 되었다가
8이 되었다가
마주 선 손가락들이 서로를 바라보네
그건 내가 나를 응시하는 일
나 아닌 내가 나 아닌 나를 궁극하는 일
거울 속에 나를 비추어 보네
꽃이었단 별이고
새였단 구름이고
다시 동그라미를 겹치면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우리는 서로 둘이었다가 하나였다가
나는 언제나 나를 만날 수 있고
너는 언제나 너를 이별할 수 있다는 걸
동그라미 놀이를 하면서 알게 되네
손가락을 펴면
우린 멀어져 또다시 둘이 되네
은하가 은하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상강 아침에 만난 장미
유연정
유리창에 흰 장미가 피었다
계절이 모든 꽃을 버릴 때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가 흘러나온다
잎을 다 비워낸 감나무는
무슨 염원으로 등불 몇 개 허공에 매달아 놓은 걸까
서리 앉은 담장 위
고양이는 수척한 계절을 앓으며 지나가고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이 손님은
차가운 시간의 백지 위에서 조금씩 이파리를 펼친다
티베트 사원의 만다라처럼
인간의 눈에 있는 세 가지 색을 느끼는 세포들이 일정한 정도로
자극되면 흰색이 된다는데
간밤
날개가 흰 새는 자꾸만 추락했다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또 날려 보내도
비상砒霜 같은 붉은 가루를 품고 다니던
아득한 시절이 꿈속을 다녀가고
거실 한켠
잎만 남은 제라늄에도 언젠가는 꽃이 찾아오겠지
해가 비치자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어느 날의 노래
잠시 소멸의 찰나가 스러진 다음
허기진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평 -- 유연정 씨의 시에 대하여
시란 무엇인가? 시란 언어의 예술이지만, 우리 인간들은 이 언어를 통해서 잘 삶을 꿈꾼다. 잘 산다는 것은 즐겁고 기쁘게 물이 흐르듯이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삶을 말한다. [에피소드] 외 4편을 응모해온 유연정 씨의 시 세계는 전통과 역사를 이어가며 ‘꿈꾸는 다락방’이 있는 곳에서 시를 쓰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비록 “영끌 거품이 터진 자리를 대신한 사글셋방”([비오는 날과 눈오는 날 사이])에서 살거나 사각의 수조에 갇혀 “무한반복의 런타임”([무한 루프])을 살고 있을지라도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우리는 서로 둘이었다가 하나였다가”([동그라미 타자])라는 시구에서처럼,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인 ‘우리들’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역사이고 전통이며, 모든 집은 꿈 꾸는 다락방이 있는 집이고, “세월이 흘러도”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는 둥근 집이다. 유연정 씨는 디지털 시대의 무한경쟁 속에서 너무나도 피곤하고 마비된 의식을 일깨우며, 아득한 그 옛날의 역사와 전통 속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시에는 정답이 없고, 정답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정답을 찾아 떠나는 개척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반경환, 배옥주(글 반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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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유연정
먼 길을 오래 돌아온 것 같습니다.
망막박리 수술받고 긴 침체기 속을 서성이며 눈물 흘렸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왈칵 밀려옵니다.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그동안 자꾸 사소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에도 오래 눈길을 두었고, 가로등 아래 번지는 어스름 속에서도 시어를 찾아 헤매다녔습니다. 하지만 시를 쓰는 일은 자주 외로웠습니다. 어떤 날은 한 줄조차 쓰지 못했고, 어떤 날은 어렵게 적어 둔 문장을 통째로 지워 버리기도 했습니다. 원고를 보내고 난 뒤 돌아오는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의심한 적도 많았습니다. '내가 끝까지 시를 쓸 수 있을까?' 오래 자문하곤 했습니다.
그 막막함 끝에서 날아든 신인상 당선 소식은 긴 겨울 끝에 찾아온 봄볕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문장이 깨어나 이제 기지개를 켤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보잘것없는 몸짓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어주신 <애지>의 반경환 선생님과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힘들 때마다 손 잡아준 김영식 시인께 좋은 소식으로 보답할 수 있어 기쁩니다. 언제나 곁에서 묵묵히 기다려 준 가족과 소중한 인연들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당선이라는 영광은 끝이 아니라, 더 치열하게 고뇌하라는 매서운 채찍질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더 낮고 소외된 곳을 바라보는 시선, 쉽게 지워지는 것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오래도록 <애지>의 든든한 가족으로 남아 이 귀한 인연을 이어가겠습니다.
유연정: <월간문학> 동시등단. 동서문학상. 동아꿈나무아동문학상
전국디카시 경북문경연가디카시 공모전 및 다수 공모전에서 수상
경주문예창작대학 수료.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연구반 4년 수료
경남정보대학 교육원 디카시창작과정수료-디카시창작지도사 1급
前 경주시청근무. 초,중,고 학생 독서지도 논술지도
한국문협, 경주문협 회원, 디카 포엠, 경주 회원으로 할동 중
이메일 green5120.naver.com
계간 시 전문지신인작품상 /유연정의 에피소드 외 4편
출처 : -메타포랑 .. |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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