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가야의 왕도, 김해를 가다
최 화 웅
여름더위가 쌓이는 유월의 세 번째 불금. 수영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탔다. 낙동강을 건너 대저로, 대저에서 다시 김해경전철을 갈아타고 김해의 국립김해박물관역에 가 닿았다. 한 시간 남짓 달려가 닿은 옛 가야의 왕도, 김해는 공기가 맑고 녹음이 짙어 쾌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늘 하루는 일흔 번째 생일을 맞은 아내와 함께 김해를 답사하고 김해문화의 전당에서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비엔나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를 듣는 데이트일정을 잡았다. 김해를 관통하는 해반천의 징검다리를 건너 가야의 거리로 올라섰다. 첫 눈에 들어온 것은 소뿔형태의 술잔인 각배분수가 목마름을 풀어주었다. 그 뒤로 셰익스피어 영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1964년 신춘문예 당선으로 한국문학 비평의 현대화에 이바지한 이곳 출신 평론가 가산 김종출 선생의 문학비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무엇을 쓰든 간에 자기의 작가정신이 사회적 양심의 최후의 보루이며 스스로가 사회적 양심의 대변자라는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문학이 우리 사회에 있어서 더 뚜렷한 존재이유를 확립할 수 있다.“는 그의 올곧은 주장이 비문에 새겨져 있었다. 부산문인협회는 '2016년 제2차 찾아가는 시민문예 강좌'에서 박문하 수필가와 김종출 평론가를 조명한 바 있다.
문학비 오른편으로는 경전철 박물관역이 내다보이고 왼편으로는 구봉초등학교가 아늑하게 자리 잡았다. 아내의 생일을 앞둔 서프라이즈 나들이의 첫 답사지를 가야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잡았다. 1998년 7월 개관하고 2014년 3월에 상설전시실을 개편 재개관한 박물관 앞 가야의 거리에는 금관가야의 청동거울과 토기, 항아리 등 다양한 유물이 관람객을 반기고 있었다. 철광석과 숯을 이미지화한 검은색 벽돌을 사용하여 철의 왕국, 가야를 상징한 본관 1층 전시실 ‘가야로 가는 길’과 낙동강 하류역의 선사문화 가야의 여명과 가야의 성립과 발전을 나누어 전시하고 있었다. 2층에는 가야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가야토기, 그리고 철의 왕국, 가야와 해상왕국 가야를 전시하고 있었다. 고고학계의 발굴조사로 가야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1998년 설립된 국립김해박물관은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가야의 역사 유물을 정리했다. 나오는 길에 가이드북 ‘가야로 가는 길’을 구입하고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잃어버린 왕국, 가야의 1700년 역사와 문명을 더듬었다. 가야는 낙동강 서쪽에서 발달한 나라로 가야(伽倻), 가라, 가량, 가락, 임나(任那) 등의 다양한 나라 이름을 가졌다.
어느 날 하늘로부터 금빛 상자에 담긴 여섯 개의 황금알이 구지봉으로부터 내려왔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그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가 수로이며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가야의 건국설화다. 낙동강은 가야의 역사와 함께 흐른다. 그 옛 사람들은 가야의 동쪽으로 흘러 남해바다로 떨어지는 강을 보고 무엇이라 불렀을까? 그 이름이 바로 낙동강(洛東江)이다. 박물관 뒤 산길을 따라 가야의 건국설화가 깃든 구지봉과 그 너머 가락국 시조 김수로 왕비릉으로 걸었다.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는 일제강점기로부터 시작한다. 어용학자들이 식민지배의 명분을 찾기 위해 임나일본부 고대사를 조작하기에 혈안이 되었고 가야유적을 마구 파헤친 만행이 오늘에 와서 새삼 우리를 분노케 한다. 다시 해반천이 흐르는 김해대로로 나와 김해문화의 전당에서 예약한 입장권을 받은 뒤 건너편 연지공원으로 들어갔다. 오후 5시 시원하게 뿜는 음악분수를 지켜보며 우리의 지난 삶을 되새긴 뒤 외동의 조박사 냉면집을 찾았다. 김해에서 냉면을 먹으면서 가야사의 역사기록이 광개토대왕비에 처음 전해진 역사를 떠올렸다.
역사문명은 한반도를 하나로 꿰고 있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가야유적을 발굴 정리하면서 옛 왕국, 가야에 대한 실마리가 하나씩 풀려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저녁을 마치고 김해문화의 전당을 찾았다. 1,464석의 마루홀은 수납식 오케스트라쉘(음향반사판)을 통해 극장 속에 전용콘서트홀을 하나 더 있듯 다목적극장으로 이중회전무대를 갖추어 다양한 공연의 연출이 가능한 곳이다. 오늘 콘서트는 고희를 맞은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슈테판 블라더가 지휘하는 비엔나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협연이다. 이 시대의 아티스트 중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미샤 마이스키는 옛 소련 라트비아에서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나 1969년 누나의 이스라엘 망명으로 2년가량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타의로 첼로를 놓았던 그는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고초도 겪어야 했다. 그는 사사를 통해 전설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로부터 힘과 피아티고르스키의 감성을 이어받았다. 그의 연주는 숨을 쉬는 듯 살아 있으며 자유롭고 노래하듯 시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1부에서 차이콥스키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엘레지 G장조와 녹턴, 로코코 풍 주제에 의한 변주곡 등을 연주하고 앙콜 요청으로 안단테 칸타빌레를 연주해 차이콥스키에 올인 하여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2부에서는 비엔나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정통의 모차르트 사운드로 모차르트 교향곡 제39번을 연주했다. 관객들은 악장이 끝나는 사이사이마다 마구 손뼉을 쳐 연주의 맥과 흐름을 끊었다. 중간박수로 마지막 음이 허공에 흩어지는 잔향을 음미할 수 있는 분위기를 앗아가 버린 게 아쉬웠다. 박수는 전적으로 객석 청중의 책임이다. 연주회에서 곡이 끝나자마자 틈을 주지 않고 쳐대는 일명의 ‘안다 박수’가 산통을 다 깨기 일쑤다. ‘안다 박수’란 ‘나는 이 곡이 언제 끝나는지 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박수를 치는 것을 비꼬운 말이다. 연주회 때 시도 때도 없이 쳐대는 박수가 연주의 여음을 놓치고 연주자를 당황케 하는 연주회의 폭력 행위다. 오죽했으면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귀국연주 때 “박수가 싫다”고 했을까? 박수는 연주자에 대한 찬사와 감사의 표현이기 보다 폭력일 때가 잦다. 지난 시대 베를린 필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청중의 박수도 평소 훈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을까? 좋은 시설에 비싼 입장료를 내고 차은 귀한 연주에 청중의 기본적인 품격가 기대되었다. 순간 ‘존재하는 것에는 다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 부부는 김해나들이 뒤의 행복감에 젖어 귀가를 재촉했다. 나이가 들수록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삶과 잘 지내려는 마음가짐이 새로웠다. 연주회가 끝난 시간에 김해 외동에 사는 딸의 대학원 제자 설리 양을 만났다. 밤길을 걱정하여 수영행 지하철이 출발하는 대저역까지라도 바래다주겠다는 고마운 제의를 끝내 사양하고 김해박물관역까지 와서 헤어졌다. 밤 10시가 지난 깊은 밤 행복한 피로감이 온몸에 몰려와 넘쳐흘렀다. 경전철 안은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들려오는 크고 거친 승객들의 대화가 귀에 거슬렸으나 감성을 일깨운 콘서트의 여운을 간직하면서 김해 나들이의 기억을 애써 반추했다. 아~ 인생은 아름다워라! 김해의 밤을 관통하는 경전철은 김해에서 느낀 행복감에 젖은 우리 부부를 태우고 부산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