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폴라트 Erich Follath·빌란트 바그너 Wieland Wagner <슈피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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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엑스포 개막식이 열린 전시장 내 중국관. 한겨레 김봉규 |
무릎을 곧게 뻗어 내딛는 걸음걸이는 정확했고, 녹회색 위장복을 걸친 모습은 늠름했다. 주먹을 쥐어 하늘로 치켜올리며 청년 800명이 함성을 질렀다. “우리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우리는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다!” 상하이에서 벌어진 것은 전쟁이 아니라 거대한 자본주의 쇼인 엑스포다. 군인은 관객을 보호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경제는 언제나 기록을 깨뜨리기 위한 전투이자 최고를 능가하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었다. 5월1일 거대한 불꽃놀이와 함께 개막된 2010 상하이 엑스포는 6개월간 전세계 관객을 중국의 메트로폴리스로 유혹하게 될 것이다. 30억유로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을 들여 가장 큰 규모로 열린 이 엑스포에 예상 관객 수는 최소 7천만 명이다. 30억유로는 베이징 올림픽에 쓴 돈보다 많은 액수다. 미국에 부드러운 강요 상하이 엑스포에 참여한 국가와 국제기구의 수는 240을 넘어선다. 황푸강 좌우 강변에 마련된 가로 5㎢, 세로 3㎢ 크기의 행사장에는 ‘더 나은 도시, 더 나은 삶’이라는 주제로 100여 개 전시관이 서 있다. 가장 큰 전시관은 개최국인 중국의 전시관이다. 어떤 전시관도 ‘동방의 관’이라 이름 붙은 중국 전망대의 절반 높이도 되지 않는다. ‘참여하는 데 의의가 있다.’ 하지만 미국같이 참여를 원치 않는 국가에는 부드러운 강요가 가해졌다. 중국은 엑스포 참여 예산이 없는 미국에 전시관을 주려고 했지만,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기업들을 압박해 결국 비교적 적은 6100만달러의 비용에 미국관을 건설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의 전시관에 그 두 배 이상의 돈을 들였다. 상하이 푸단대학 국제학 교수인 선딩리는 “엑스포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결국 중국과의 비즈니스 기회를 없애는 일이라는 걸 국가들은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외교부장 양제츠는 엑스포가 중국 외교의 중심에 서 있다고 강조한다. 중국의 이런 태도는 과거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14∼20세기 초의 명·청 시대에 중국 황제는 이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외국인이 중국과 무역하는 특권을 얻으려면 선물을 바쳐야만 했다. 1890년 영국인들이 아편을 들여와 이 대국을 병들게 하고, 그와 함께 굴욕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중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경제대국이었다. 오늘날 이 나라는 다시 과거의 그 위치를 되찾으려는 중이다. 지난해 중국이 독일을 앞선 이후로 세계 최고의 수출국가는 이미 중국이다. 전문가들은 2030년에는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한다. 과거의 어느 경제대국도 중국처럼 최근의 경제위기를 인상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유럽연합(EU)과 미국이 2009년 3∼4%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데 비해 중국은 거의 9%에 달하는 경제성장을 했고, 올해 1분기에 베이징 정부는 11.9%의 성장률을 발표했다. 세계 최고의 외환보유액을 바탕으로 중국은 이제 서방세계의 의향을 배려하지 않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코펜하겐의 기후회의, 이란 제재 방안 협의, 그리고 위안화의 환율 문제에서도 베이징 정부는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2000년 독일 하노버 엑스포와 2005년 일본 아이치 엑스포는 이미 오래전에 잊혀졌다. 세계박람회로 세계를 놀라게 하려는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개념인 것 같다. 중국은 슈퍼쇼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세계로부터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세계와 중국을 분리하고 스스로 게임룰을 만들어내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은 지금 삼십육계 중 하나인 ‘상옥추제’(上屋抽梯·적을 지붕 위에 올리고 사다리를 치우는 병법)를 실행하는 중인가? 어쩌면 그들의 거만함은 빈부 격차, 부패, 국가적 단합력 부족 같은 숙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 따른 불안감의 표시는 아닐까? 상하이는 늘 대담한 아이디어의 산실이자 최종 실험의 도시, 아방가르드의 도시였다. 이 도시는 중국이 가장 번성하던 시절에도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에도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섹스와 죄악, 거대한 부와 형언할 수 없는 착취의 상징으로 혐오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이었던 이 도시를 1920년대 사람들은 ‘모험가와 창녀들의 파라다이스’이자 ‘동방의 파리’라고 칭했다.
대담한 아이디어의 산실 ‘맨체스터 자본주의’(산업혁명이 시작된 맨체스터에 빗대어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관점으로 사용되는 용어.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절대적 지배를 목표로 함)가 지나간 뒤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들어와 다채로운 이 도시를 회색빛으로 변화시켰다. 1960년대의 끔찍한 문화대혁명 기간에 상하이는 마치 특별한 이념적 감시가 필요한 곳인 양 ‘4인방’(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야오원위안, 장칭, 왕훙원, 장춘차오-역자)의 본부 구실을 했다. 개혁자 덩샤오핑은 상하이를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이 황푸강변의 메트로폴리스는 당의 총애를 받았다. 이 도시는 중국이라는 용의 ‘머리’라 칭해졌다. 진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중국의 앞길을 밝히는 특별한 종류의 인간들, 상하이인들이 다시 나타났다. 위정성(상하이시 당서기)은 ‘모순의 제국’을 다스리고 있다. 1300만 인구가 황푸강 연안 상하이 중심부에 모여 있다. 위성지구까지 포함하면 약 2천만 명이다. 새로 건설된 비즈니스 지구인 푸둥에서는 주식 중개인들이 중국에서 가장 큰 거래장으에 가기 위해 서두르고 있고, 노동자들은 632m 높이의 상하이 타워 건설 공사에 투입되고 있다. 강 반대편에는 역사 깊은 푸시 지구가 있다. 과거 노동자들의 구역이었지만 지금은 유흥 지역이 된 신톈디(新天地)에서 스타벅스와 파울라너 맥주가 경쟁적으로 손님을 끌어모은다. 한가운데에는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설립한 석조 건물이 서 있지만, 혼자 동떨어진 느낌이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 강변 번드(Bund)의 ‘바 루즈’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는 인적이 드문 혁명박물관이 있고, 그와 멀지 않은 곳에는 이탈리아 스포츠카 제조업체의 쇼룸이 있다. 동방은 붉다(東方紅), 페라리처럼 붉다.
인민 아닌 중산층의 관리자 위정성은 그의 사무실에서 엑스포의 보안검색을 지휘하고 있다. 엑스포가 열리기 전 그의 부하인 경찰들은 상하이 거리에서 6천 명 이상의 경범죄자들을 몰아내고, 노점상·거지·창녀를 체포하거나 이동시켰다.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엑스포 관객은 누구나 불시 검문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이 검문은 호텔방에서도 이뤄질 수 있다고 보도하면서 ‘폭탄 테러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지만, 이 테러의 위협이 외국에서 오는지 아니면 자국 내 무슬림 소요 지역인 신장 지구에서 오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위정성은 최소한 상하이 시민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다. 모든 가구에 엑스포 무료 티켓과 20유로 상당의 차비를 약속했다. 위정성은 상하이 시민들이 세계박람회 준비로 인한 수많은 먼지와 소음을 참아내야 했다면서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달하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물론 상하이 시민들이 집을 새로 칠하고 잠옷 바람으로 담배가게에 가는 버릇을 없애야 했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위정성은 이 거대한 나라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문제와 싸우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 사회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 요소에 가끔 두려움워하는 것 같다. “우리는 모순이 폭발할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폭발한다면 그 위력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라고 위정성은 얼마 전 지역 TV에서 경고했다. 무엇보다 부패가 가장 큰 문제다. 당지도부 17명과 하위 당원 100여 명이 상하이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몇몇 사건은 “끔찍하고 쇼킹하다”고 한다. 위정성이 미디어를 통해 당의 상황을 이렇게 자세히 설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때 중국 공산당이 말하는 ‘인민’은 주로 노동자와 농민이었지만 지금은 중산층이 점점 부상하고 있는 중산층 위정성은 이들의 관리자다. 지난해 완공 단계에 있던 고층 아파트가 갑자기 붕괴했을 때는 직접 사건 처리에 나섰으며, 자신이 사고 조사를 즉시 시작하게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러한 건축 비리는 상하이인 모두가 공유한 내 집 마련의 꿈을 뒤흔들어놓을 뿐만 아니라 항상 강조되는 사회적 조화에도 해를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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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둥지역 중심가 빌딩에 엑스포 전광판이 보인다. 한겨레 신소영 |
도심에서 밀려나는 노동자 위정성은 앞으로 해당 지역 거주자의 과반수가 찬성할 경우에만 철거를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새롭고 진보적인 발언이다. 이같은 방식으로 당은 “인민과 밀접하게 결합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털털거리며 모페드(보조 동력장치를 단 자전거 또는 배기량 50cc 이하의 초경량 오토바이)에 시동이 걸렸다. 상하이 인근 지역인 장쑤성에서 온 이주노동자 옌옌(24)은 이 모페드로 18시간의 노동이 기다리는 직장에 야간 근무를 하러 출근하고 있다. 그녀의 일은 공장에서 디지털 카메라의 플라스틱 커버에 스프레이로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다. 위험한 작업이다. “페인트가 아주 독해요. 그래서 머리가 많이 아파요.” 중국 전역에 널린 사설 석탄 광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업 현장의 안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매년 수천 명의 사람이 사설 석탄 광산에서 죽어간다. 하지만 옌옌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그녀는 젖먹이 아기를 키우느라 반년간 일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아기가 분유를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시어머니가 육아를 맡고, 그녀는 매달 약 1500위안(약 160유로)을 가계에 보탠다. 옌옌은 농민공이 살고 있는 낮은 시멘트 블록 집을 모페스를 타고 지나친다. 농민공이야말로 중국의 경제 기적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하이에만 약 500만 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운영하는 값싼 음식 노점, 잡화상 그리고 미용실이 모인 이곳은 작은 마을과도 같다. 집과 집 사이에는 기름이 떠 있는 웅덩이가 있다. 한때 민물고기를 양식했던 웅덩이에는 이제 비닐 봉지 같은 쓰레기가 쌓여 있다. 고층 빌딩들이 중심부에서 옌옌과 이웃들이 사는 오두막으로 점점 밀려들고 있다. 조만간 이 구역도 철거돼 새로운 택지로 개발될 것이다. 옌옌의 가족은 이사에 익숙하다. 그들은 ‘후코우’, 즉 거주권이 없다. 옌옌은 상하이에서 태어난 딸의 출생신고를 고향에서 해야 했다. 고등학교에 가려면 딸은 부모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은 상하이 같은 거대도시 주변에 인도나 남아메리카처럼 슬럼이 형성되는 걸 원치 않기에 이주노동자에게 일을 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한다. 나쁜 노동환경과 심한 차별에도 불구하고 옌옌과 그녀의 가족은 되도록 오래 상하이에 머물 예정이다. 그들은 미래가 더 나으리라고 믿는다. 얼마 전 옌옌의 시아버지는 두 번째 중고 소형 트럭을 장만했다. 15년 전 그는 이주노동자로 상하이에 왔지만, 이제는 아들과 함께 상하이의 공사현장을 누비며 철강빔과 대나무판을 배달한다. 안정 그리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 이것이 이 가족이 원하는 전부다. 스프레이 뿌리는 말썽꾼 바오산 구역의 주택지 입구, 북상하이의 중심지와 멀리 떨어진 이곳은 경비원이 허가받지 않은 사람의 출입을 통제한다. 그럼에도 얼마 전 이곳에서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는 움직임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거주자가 저지르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직도 낡은 연립주택의 회색 벽에 남아 있다. 벽에는 “공산당 간부들은 돼지 새끼들이다”라고 쓰여 있다. 상하이시의 높은 분들에게 도전하는 남자의 이름은 장준웨이로, 연립주택의 지상층에 살고 있다. 그는 은테 안경을 쓰고 회색 머리카락을 한 65살 남자로, 흔히 생각하는 낙서꾼과는 달랐다. 장이 사는 집의 현관문 반대쪽, 우체통 옆에 놓인 칠판에는 이웃이 분필로 엑스포의 모토 ‘더 나은 도시, 더 나은 삶’을 깔끔하게 적어놓았다. 그에게 이 모토는 씁쓸한 아이러니일 뿐이다. 그의 인생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비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12년 전부터 그는 시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홍코우 구역의 옛 집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집은 현대적인 아파트를 짓기 위해 철거됐다. 3월의 어느 날 밤, 관청은 급기야 장과 그의 낙서에 인내심을 잃어버렸다. 밤 9시 수십 명의 경찰이 들이닥쳐 고집불통인 그를 체포했다. 이런 일은 상하이는 물론 중국 전역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저항의 한 사례일 뿐이다. 당은 희생자를 배려하지 않은 채 중국을 강제로 현대화하려 한다. 저항하는 자는 불평분자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장은 아내의 침대 옆에 앉아 그의 투쟁에 대해 말했다. 그의 아내는 이불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 그녀는 거의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도 그는 국가 책임으로 돌렸다 . “아내는 너무 흥분했어요.” 당시 그는 새벽 6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공무원 4명이 한 팀이 되어 장의 문제점을 심사했다. 그는 자신이 ‘정신적으로 병든’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서명을 거부했다. 집안은 눅눅하고 어두웠다. 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을 종이 상자로 막아놓았고 바닥은 그냥 시멘트였다. “중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싶은 게 아닙니다. 난 그냥 우리 집에 대한 보상금을 받고 싶을 뿐이에요.” 장과 아내는 예전에 무기 공장에서 일했다. 이제 그들은 한 달에 800위안의 연금으로 살아가야 한다. 부인에게 꼭 필요한 의료 비용에도 한참 모자란다. “우리 일생을 당에 바쳤는데 결과가 이거군요.” 컴백 커리어맨 “어딘가에서 ‘골드러시’(19세기 미국에서 금광이 발견된 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현상)가 벌어지고 있다면 너도 그곳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윌리엄 정(35)의 삶의 신조다. 그가 이 신조를 완벽하게 따르며 살 수 있던 것은 부모 덕이다. 상하이 한 병원의 외과의사이던 아버지와 대학교수이던 어머니는 모두 공산당원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중국에 얼마나 끔찍한 상처를 입혔는지, 그들의 이념적 확신이 어떤 괴물로 변했는지를 깨달은 순간 두 사람은 중국을 등지고 당시 3살이던 아들과 함께 새로운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윌리엄 정은 국제법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성공했다. 하지만 친구들로부터 고국의 발전과 새로운 경제적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2003년, 그가 태어난 도시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이후 다른 귀향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한 결정을 후회한 순간은 단 1초도 없다. 감성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좋은 교육을 받아 능력과 야심이 있는 중국인이라면 이제 서양보다 중국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윌리엄 정의 사업은 잘되고 있지만 이제 우선순위가 달라졌다. 과거에 이 똑똑한 법률가의 고객이 중국 시장을 개척하려는 미국인이었다면, 이제 그는 상하이와 다른 지방의 회사에 미국 경제의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중국 기업이 서방세계의 기업을 인수하거나 그곳에 자체 공장을 만들어 확장하려 하기 때문이다. 뉴욕은 과거가 되었다. 이제 상하이는 능력 있는 중국의 젊은 세대를 허드슨 강변에서 황푸 강변으로 유혹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들은 국가의 대계를 도와 2020까지 상하이를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로 만드는 데 동참해야 한다. 주가 상승을 위한 행운의 마스코트로 상하이 유지들은 엑스포에 맞춰 번드 지역에 황소 동상을 세웠다. 중국인들은 이 동상 제작을 월스트리트의 황소를 만들었던 예술가에게 맡겼다. 다만 상하이의 주식시장 마스코트는 원본보다 좀더 붉은색으로 번쩍이고 꼬리를 위협적으로 위로 치켜들고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윌리엄 정은 엑스포 박람회장 근처에 아파트 한 채를 살까 고민 중이다. VIP용 전화번호를 통해서만 연결되고 스스로를 ‘사유재산 상담자’라 칭하는 현지인 부동산 중개인이 비잔틴 형식의 기둥과 로마풍 모자이크로 장식된 ‘포르토피노’(Portofino)라는 이름의 호화 아파트를 팔고 있다. 지난 가을 강변의 엑스포 박람회장 가까이에 위치한 아파트 80채가 단번에 팔렸다. 고객들은 1㎡당 약 8천유로를 냈다. 심지어 몇몇은 그 자리에서 바로 현금을 냈다. 수백 명의 구매 희망자들이 마치 시즌 오프 세일에서 물건을 사려고 다투는 것처럼 아파트값을 지불할 권리를 위해 다투는 것은 윌리엄 정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엑스포가 끝나서 가격이 내려가거나 부동산 거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부동산 거품 붕괴를 많은 사람들을 실제적인 위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컴백 커리어맨’은 말한다. “하지만 이 도시는 그 정도의 충격은 충분히 견딜 겁니다. 전 상하이에서 사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여기에서 미래가 만들어지고, 전세계를 춤추게 하는 음악이 연주되고 있잖아요.” 꿈을 파는 아가씨 미셸 예(25) 역시 꿈을 팔고 있다. ‘상하이식’으로 고객을 속이지는 않는다. 해안도시 샤먼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 젊은 여성은 신용 있는 거래를 중시한다. 그녀는 제품을 언제나 가지고 다닌다. 강력 추천하는 모델은 가격이 150만유로인 ‘시 스텔라’(Sea Stella)다. 그녀는 ‘이홍’ 요트회사의 사장으로, 호화 요트를 판다. 경쟁자인 이탈리아 업체와 달리 이 매력적인 미국 코넬대 졸업생이 판매하는 시 스텔라 같은 모델은 중국인 취향에 맞게 노래방 기계와 마작 탁자가 설치돼 있다. 그녀는 이미 이런 종류의 요트를 4대 팔았고 4대 더 주문받은 상태다. 고객은 주로 기업이지만, 곧 개인 주문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샤먼에 거주하는 기업가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고객이 아무것도 신경 쓸 것이 없는 ‘종합 패키지’도 판매하고 있다. 이 패키지에는 고급스러운 선상 파티를 즐길 수 있는 상하이 마리나의 정박 장소도 포함돼 있다. “여가 산업이야말로 중국의 미래 산업입니다.” 취미로 골프를 즐기는 미셸 예는 특별 주문·제작된 공기역학적 디자인의 여가용 자동차도 판매했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고객을 물결 따라 출렁이는 호화 요트로 안내했다. 강변에 있는 미셸 예의 임시 사무실에서 강 너머 엑스포 행사장 쪽으로 눈을 돌리다 와이마 거리의 공사현장 한가운데에 아직 오래된 집 한 채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군사작전처럼 진행되는 도시미화 계획 중에 누군가 그 집을 철거하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곧 불도저가 다가왔다. 그 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소리를 치며 저항했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철거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도시의 관리인들은 도시미화 계획에 따라 무너뜨린 집 더미 앞에 3m 높이의 적갈색 돌벽을 세우게 했다. 이 벽은 거의 완성된 상태로 사람들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가리고 있다. 불도저가 마지막 철거 작업을 하는 동안 다른 노동자들이 이곳에도 가림막을 세우고 있었다. “더 나은 도시, 더 나은 삶.” 흉물이 사라지고, 필요 없는 것들이 제거됐다. 경비병의 훈련도 끝났다. 화려한 엑스포가 상하이를 수놓고 있다. ⓒ Der Spiegel
번역 황수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