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 유배문화’ 축제 문화기행 시나리오(2019년)
1. 공설운동장(호돌이 탑에서 유배문화 체험촌까지)
1-1 일정 안내(버스 안에서)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월문화원에서 문화재 해설을 하고 있는 류중근입니다.
일월문화원에서 포항시민들을 대상으로 (2012)7년 전부터 실시하고 있는 문화기행은 이번이 여덟 번째입니다. 오늘의 문화기행 일정은 장기 근민당, 척화비를 시작으로 장기읍성, 장기향교 그리고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이 산책했던 오솔길을 걷고, 이어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으로 가서 유배 문화가 장기란 곳을 어떻게 유향(儒鄕)으로 변화시켰는가를 몸소 보시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비운의 가문인 황보인과 그 두 아들의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쳤던 광남 서원으로 이동합니다.
먼저 장기 고을의 연혁을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지답(只沓)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현종2년 1011)에 장기현<장기(長鬐)의 기(鬐)는 ‘말갈기’란 뜻입니다>으로 바뀌었으며, 일제 강점기(1934)에 지행면으로 잘못 기록<지답(只沓)-지행(知杏)으로 오기>되어 오다가 대한민국(1991)에 와서야 본래인 장기로 회복되었습니다. 1995년 포항시로 통합되어 현재 남구청에 귀속되었습니다.
장기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뜨는 곳(해돋이)으로, 고려 원나라 침공 때 장기목장을 만들어 말을 기르던 곳으로 ,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귀양 보내는 형으로 유배 3,000리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유배인은 149회 211명이며(현재도 계속 조사 중 : 향토사학자 이상준),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등 석학들로부터 중앙정계에서 내로라하던 실세 정객과 학자들이 머물면서 학문 연구와 더불어 그 지역 선비들을 교육시켜 독특한 유배문화를 남겼으며, 그 영향으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바닷가 작은 고을인 장기는 학문 연구와 문풍이 되살아난 대표적인 유향(儒鄕)이 될 수 있었습니다.
2. 장기 근민당과 척화비에 대하여
지금부터 오늘의 첫 코스인 장기 근민당과 척화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장기 근민당(近民堂)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24호)
조선시대 장기현의 관아 동헌 건물로, 영일 장기읍성 내에 있던 것을 199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행면(현 장기면) 사무소로 사용해 오다가 1986년 복원하였습니다. 현재 장기면 사무소 건물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지붕구조화 건물 규모는 원래대로 복원되었으나 내부구조는 약간 변형되었습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전면은 겹처마, 측면과 후면은 홑처마입니다. 낮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공포의 구성은 일익공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건물 전면 상단에 근민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현판은 복원할 때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 장기척화비(斥和碑)(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24호) 앞에서
근민당 왼편에는 1871년(고종8)에 흥선대원군이 서양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 서양인들을 배척<쇄국양이(鎖國洋夷)>하기 위해 전국에 일제히 세원 척화비인 장기 척화비가 서 있습니다. 장기 척화비 역시 장기읍성에 있다가 1990년 현 위치로 옮겼습니다.
척화비란 병인양요(1866 ; 선교사를 비롯한 수천 명의 천주교도 탄압에 분노한 프랑스의 침입)와 신미양요(1871 : 미국)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의 주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비(사암)는 반듯한 사각빋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운 모습이며, 비 몸의 네 모서리와 윗변의 양 끝을 단정히 다듬어 놓았습니다. 앞면에는 비문을 새겨 두었는데 내용에는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는 강한 어투의 경고를 적고 있습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이후 같은 해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고종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들은 철거되고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이 곳곳에 남아 옛 역사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3. 장기읍성(邑城) 앞에서
3-1 동문 앞에서
여기가 동문이 있던 자리입니다.
- 배일대(拜日臺)와 조해루(潮海樓) 앞에서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합니다.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동쪽으로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서 고려 현종 2년(1011)에 흙으로 성(토성)을 쌓았으나(<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시대(세종21년 1439)에 와서 돌로 성(석성)을 다시 쌓았다고 합니다.
배일대는 정초 현감이 해맞이 하면서 고을 읍민의 3재가 없기를 빌던 곳입니다. 지금은 돌에 새겨진 글자만 볼 수 있습니다.
장기 현감은 4품(보통 5품임)으로서 무장이 부임했으며, 신원님은 동문으로 들어오고 그러면 구원님은 북문으로 퇴임하였다고 합니다.
동문에는 조해루가 있었으며, 특히 조해루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 해돋이는 조선 10경 중 하나였으며,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장기일출이 조선 최고의 일출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회재 이언적은 그의 시 <장기동헌>에서 일출 장면을 “처음 본 금빛 항아리 바다에서 용솟음 치고”라고 표현 했습니다.
걸어가면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치성(雉城) 앞에서
성의 형태는 말밥굽 모양(타원형)으로 둘레가 약1,4km이며 3개의 성문(남문 없었음 : 아래 절벽)과 성벽 바깥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서 만든 치성(雉城)이 있습니다. 치는꿩의 꼬리란 뜻으로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활로 공격할 수 있습니다., 치와 치의 거리는 활비거리와 관계있도록 설치되었으며 11개가 있습니다.
- 서문-옹성(甕城) 앞에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작은 성인 옹성(甕城)이 보이는데 옹은 항아리란 뜻으로 독안에 들어온 적을 위에서 아래로 활과 긴 창으로 공격할 수 있으며) 3개가 있습니다.
또한 미석(眉石 : 눈썹)은 적이 성벽을 올라올 때 잡으면 미끄러지도록 되어야 하는데 평평하게 되어 있어 오히려 잡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고증이 잘못된 복원의 예입니다. 1998년 2월부터 복원공사를 진행 중이지만 예산 부족으로 현재 20~30% 정도입니다.
- 북문 앞에서
성 안쪽에는 대나무가 많이 보이며(화살, 연료로 사용)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말이 먹는 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교육기관이었던 장기 향교와 관청이었던 동헌 터가 남아 있는데 동헌(1922)은 현재 면사무소 안으로 옮겨 보호하고 있습니다.
- 특징
산꼭대기(산성)에 있으면서 읍을 다스리는 기능(읍성)도 갖추고 있는 장기읍성은 읍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입니다.
그러면 장기향교로 이동하겠습니다.
4. 장기향교(鄕校) 앞에서
4 -1 조선의 교육제도와 향교에 대해서
조선조는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성립한 나라입니다. 이러한 유교정신을 널리 보급하고자
교육을 매우 중요시 하였습니다.
(교육제도) 조선의 교육에는 국가가 운영하는 공교육과 개인이 운영하는 사교육이 있습니다. 공교육으로는 서울에 성균관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습니다. 향교는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의 공립 전문학교 수준이고 성균관은 국립대학 대학원 수준이었습니다. 사교육은 서원과 서당이 있었는데, 서당은 초등학교 수준이고 서원은 전문학교 수준이었습니다.
(분포) 지방의 공교육을 대표하는 향교와 사교육을 대표하는 서원은 약간 다릅니다. 먼저 향교는 조선조 초부터 전국에 걸쳐 시행하였습니다. 전국에 330여 개의 향교가 있었는데, 포항에는 흥해 향교를 비롯하여 연일, 청하, 장기 네 곳에 있습니다. 서원은 조선조 중기부터 향교교육이 쇠퇴하는 1500년대부터 시작됩니다.
(교육방법) (공통점) 향교나 서원의 교육방법은 성현의 위폐를 대성전이나 사당에 모셔놓고 그 성현과 같이 되고자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현의 위폐를 모셔놓는 장소를 향교에서는 대성전이라 하고 서원에서는 사당이라고 합니다.
(다른 점) 또 대성전과 사당에 모시는 성현이 다릅니다. 향교의 대성전에는 중국의 성현과 조선의 성현 열여덟 분을 함께 모십니다. 그러나 서원은 반드시 조선의 성현을 모시는데 한 분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여러 분을 모시기도 하는데, 5분을 넘는 경우는 극히 적습니다.
(구조) 향교의 구조는 성현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이 있는데, 여기서 대성이라는 것은 사찰에서 석가는 대웅이라고 하듯이 공자를 대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대성전에는 원래 공자의 위폐를 모신 곳입니다. 후대에 중국의 성현과 조선의 성현을 함께 모시게 된 것입니다. 성현이 되고자 공부하는 장소를 명륜당이라고 합니다.
통상 향교에서는 대성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대성전을 뒤에 배치하고 명륜당은 앞에 배치합니다. 그러나 평지인 경우에는 경주향교처럼 대성전이 앞에 오고 명륜당을 뒤에 배치합니다. 흥해 향교는 명륜당을 앞에 대성전을 뒤에 배치하였습니다.
4 - 2 장기향교(鄕校) 외삼문 앞에서
장기향교는 조선 태종 5년(1405)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습니다. 정조 9년(1785)에 마현동으로 옮겨졌고 1931년 군수 김영수가 읍성 내에 있던 구객관을 수리하고 위패를 모셔 지금의 향교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문경, 서극인, 이대임, 이눌 등이 향교에 모시고 있던 위패를 용암석굴에 옮겨 놓아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제사 지내는 공간이 대성전,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습니다.
-명륜당 앞에서
명륜당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같이 공부하는 장소입니다.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어 교관의 거처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명륜당의 좌우로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마주하고 있어야 하나 현재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성현들의 위폐를 모신 대성전으로 가겠습니다.
-대성전 앞에서
대성전 앞에 있는 문을 내삼문(신삼문)이라고 하는데, 가운데 문은 신이 출입하는 문이고 일반인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는 서쪽 문으로 나갑니다.
이곳은 향교에서 가장 엄숙한 공간으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습니다. 원래 대성전에는 중국 성현의 위폐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에는 조선의 성현 열여덟 분의 위폐를 모셨으나, 100여 년 전부터 모든 성현을 대성전에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전사청 : 제사 준비하는 곳
-대성전 앞에서의 참례
원래 살아있는 분에게 참례는 절을 한 번, 죽은 사람에게는 두 번, 왕에게는 네 번을 합니다. 그런데 공자는 문선왕으로 추증되었기에 왕에게 하는 것처럼 참례합니다.
참례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집사가 “공수”하면 왼손을 오른손 위로 잡습니다.(여자는 오른손이 왼손 위에) 공수한 상태로 집사가 “국궁”하면 15도 정도 몸을 굽힙니다. 그런 상태에서 “배”하면 30도 몸을 굽히고, “흥”하면 15도로 합니다. 이것을 네 번하고 난 뒤에 “평신”하면 몸을 바로해서 끝나게 됩니다.
이상으로 향교에 대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다산 정약용이 산책했다는 오솔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옛 선비의 기품을 느껴 보고 이어서 유배문화 체험촌으로 이동하겠습니다.
4. 유배문화 체험촌 앞에서
4-1 유배(流配)문화에 대하여
- 유배의 정의와 종류
조선시대 형벌제도는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을 따랐는데, 형벌은 사형, 유형, 도형, 장형, 태형 등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중죄인을 멀리 보내 쉽게 돌아오지 못하게 유배를 보내는 유형은 목숨을 끊는 사형 다음으로 무서운 형벌이었습다.
유배(流配)란 죄인을 귀양 보내는 형으로 오형(五刑)의 하나. 조선 시대에는 그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원근(遠近)의 등급을 결정하였는데, 2000리, 2500리, 3000리 형의 세 종류가 있었으며, 모든 경우에 반드시 장 100을 더하여 부과했습니다. 하지만 이 규정은 국토가 넓은 중국의 형법으로 국토가 좋은 조선 땅에 맞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유배지로 가는 길을 구불구불 가는 곡행(曲行)이란 편법을 썼으나 세종 때 3등급에 해당되는 유배지가 조선 실정에 맞게 정해졌고, 장기는 유3000리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유배의 종류는 부처(付處), 환도(還都), 안치(安置)등 세 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는 주로 관리들에게 내려진 형벌로 유배지 관내 수령에게 유배인 관리에 대한 재량권을 일임하는 것이고 환도는 범죄인을 고향에서 약 40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안치는 다시 본향안치, 위리안치, 절도안치로 구분되는데, 본향안치는 죄인을 고향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가장 가벼운 형벌이라 할 수 있고, 위리안치(혹은 가극안치)는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탱자나무 등으로 가시덤불을 쌓은 뒤 그 안에 유배인을 유폐시키는 것이었으며 절도안치는 유배에서 가장 가혹한 조치로 중죄인을 멀고 험한 섬에 유폐시키는 형벌이었습니다.
- 조선조의 유배문화
유배는 대부분 모반이나 반란을 꾀한 자, 중부의 정책을 비판해 상소를 올린 자, 권력 다툼에서 패한 자 등 정치범과 사상범을 대상으로 했으며, 일반인 중에서는 사형을 감형해 유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유배형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사화와 당쟁 등의 정치상황이 전개된 조선시대에 특히 성행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조 대표적인 지식인 4,000여 명 중 700여 명이 유배형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정치적 이해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력을 잃고 불우한 운명으로 유배된 관리 중에는 학문이나 사상적으로 주목되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의 귀양살이는 그들의 유배지에 영향을 미쳐 그곳에 독특한 유배문화를 남기기도 했다는 점이 특히 주목됩니다.
유배인들은 한 지역에만 머무른 게 아닌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이북지방으로 옮겨 다녔다고 합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유배인들은 유배기간이 1년 미만이었다고 하며, 다산 정약용의 경우 장기로 유배 온 지 7개월 여 만에 다시 강진으로 이배되었고, 우암 송시열도 덕원에서 장기로, 다시 거제로 이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장기와 유배
장기에 유배 오신 분(149회 211명)
장기는 제주도와 전남 강진, 경남 남해 등과 함께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한 곳이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장기현은 서울과 8백 64리 떨어져, 신라 멸망이후 변방으로 전락한 장기현은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장기는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거명되는 우암, 다산 등이 회안의 눈물을 흘렸던 땅으로 장기에서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우암에게 날아든 아내의 부음, 그 소식을 접하고도 애통한 마음만을 슬픈 제문에 실어 손자에게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유배인은 조선조 태조 1년(1392년) 설장수이며, 이렇게 장기는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과 같은 석학에서부터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거물 학자와 정객들이 머물렀다가 간 곳으로 독특한 유배문화가 간직된 곳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조사된 장기유배인은 211분이나 되며 계속 더 밝혀지고 있습니다.
조선조 실세 정객과 학자들이 유배와서 중앙의 고급문화와 최고수준의 학문(學文)을 유포해 유향(儒鄕)으로 변화되었고 그런 영향으로 동일지역 내에서 가장 많은 서원(8곳)이 창건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기는 비록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窮僻)한 바닷가 작은 고을(해곡(海谷)에 불과했지만 중앙의 학식과 지조를 갖춘 학자와 정객, 그리고 좋은 서적들을 접하면서 지식과 문호 교류를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고 이렇게 얻은 지식과 정보를 슬기롭게 소화하여 유향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습니다.
유배인들은 고난 속에서도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과 저서를 쓰고 지역 선비들을 교육시켜 유배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남겼습니다. 이들의 영향으로 장기는 학문을 중히 여기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되었고 이런 풍토는 은연 중 학자 또는 관직 지향적 문화를 만들어 그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2 우암 송시열 체험가 앞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은 조선조 숙종 원년(1675)윤 5월 장기현으로 와서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숙종 5년(1679) 4월 10일에 자신이 머물던 사관 안에 홀연히 자생한 느티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죽교에 올라 거제도로 떠났습니다. 가는 도중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습니다.
장기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은행나무 또한 우암이 심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9년 되는 해 장기에 살고 있던 선비들이(오도종, 이석증, 황보현, 이동철, 한시유 등) 죽림서원을 항건하여 배향했습니다.
장기인들은 우암을 통하여 유학의 진수와 중앙정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접할 기회를 가졌고 아울러 궁벽한 해곡이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우암은 장기에서 <주자대전차이>와 <이정서분류>등의 명저를 저술했고 많은 양의 시문도 창작했습니다.
(우암에 관한 기록)
*마산촌은 바다와 가까워서 바람이 심해 선생이 거처하는 방밖 처마 밑에 별도 이중벽을 치고 출입문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다니셨다. 또한 뜰 안에 바람막이를 만들어 놓고 해풍을 막았다.
*뜰 앞에 조그만 포전을 만들어 놓고 한가로이 거닐며 장삽으로 산초와 생강을 심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생강과 잣을 드셨다.
*앉으실 때는 자세를 똑바로 가지셨고 포전에 나가서도 식사는 거르지 않았다.
*행단을 쌓아놓고 그 아래 우물을 파서 금붕어를 기르며 집 뒤쪽으로 물을 끌어 들여 산초열매와 잎줄기가 물에 젖게 하였다.
*창 밖에는 벌을 기르며 아침저녁 들여다보곤 하셨다.
*장기 고을은 바닷가 벽지인지라 풍속이 예절에 맞지 않았다. 선생이 이곳에 유배 온 후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섣달 그믐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장 잘못된 풍습이라고 하시고 정월 초하루 날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장기 고을 사람들에게 크게 교훈을 베풀었다.
선생의 집주인 오도전은 처음 선생이 유배 오실 때부터 떠나실 때까지 5년 동안 가르침을 받아 많은 진도가 있어서 그 후 장기고을 훈장으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해서 유풍을 일으켰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풍습을 고쳐 양반고을을 만들게 되었으니 선생의 가르치심이 장기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도움을 주었다.
4-3 다산 정약용
다산은 1801년 신유년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그해 3월 9일에 이곳 장기 고을 마현으로 유배를 왔다가 사위인 황사영이 작성한 백서사건이 발생하면서 관련 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에 서울로 다시 압송되었으니, 7개월간 이곳에 머물렀던 셈입니다. 다산은 이곳에 머물면서 장기고을 백성들이 삶의 모습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형태를 글로써 남기게 되었으니, 부용정가 기성잡시27수 장기농가십장, 아가사, 해랑행, 오적어행, 타맥행 등 130여수 가 그것입니다. 전하는 시작들은 토석적이고도 사실적이며 비판적이면서도 은유적입니다. 그 밖에도 <이이술>, <기해방례변>등의 서책도 장기에서 저술하였으나 의금부로 압송과정에 유실되어 없어졌습니다.
시대적 어려움을 떨쳐낸 사상가로서, 바름을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현실 참여와 서정을 적절히 표현해내는 문학가로서 정성을 다해 살다간 다산의 혼백이 장기에 남아 있습니다.
5. 광남서원(廣南書院)
- 서원 앞에서
조선의 교육제도와 서원에 대해서
장기 향교에서 조선의 교육 제도와, 향교와 서원의 공통점 및 차이점을 설명했기에 광남 서원에서는 사교육 기관인 서원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해 보겠습니다.
서원은 개인이나 문중, 또는 유림이 만들었기 때문에 사교육 기관입니다.
조선 중기 연산군 때부터 사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화가 일어날 때마다 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유배(180여명)를 감에 따라 뜻있는 선비들이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죠. 지방에 내려온 이들은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만든 것이 서원입니다. 서원은 조선 중기(소수서원1550, 옥산서원1574, 도산서원1575 병산서원1863)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공교육인 향교가 쇠퇴하고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게 됩니다.
서원은 1500년대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을 시작으로 많을 경우는 600개가 넘었습니다. 서원은 병력이나 세금에 특혜가 있어서 서원이 너무 많이 세워지면서 국가 재정 결핍을 가져오고 군역을 피하는 장소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원군이 전국에 47개만 남겨두고 전부 없애버렸습니다.
우리고장인 포항에는 47개 중에 포함된 곳은 하나도 없지만 경주에는 옥산서원과 서악서원이 살아남았습니다.
- 복양문(復陽門)앞에서
광남 서원의 연혁에 대해서
뇌성산(磊城山 : 뇌록) 기슭에 위치한 광남서원은 단종을 보좌하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살해당한 아들 황보석(皇甫錫), 황보흠(皇甫欽)을 배향하기 위해 1791년(정조 15)에 지방유림과 그 후손들이 세웠습니다. 세덕사라 하다가 1831년(순조 31)에 ‘광남서원’이라고 사액(賜額)되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다가 1900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황보인(皇甫仁, ?~1453)은 어떤 분일까요?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호는 지봉(芝峰)입니다.
1441년 함길도에 파견되어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소보(小堡)를 설치해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후 빈번하게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되어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나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귀환했으며, 1452년(단종 즉위년) 문종의 국상을 총지휘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습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남지 등과 함께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전가문이 멸문지화되었습니다. 단 갓 태어난 손자 ‘단’만이 충비 ‘단량’의 희생으로 가문의 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지 못하다가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 端宗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습니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구룡포읍의 경남서원(慶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되었습니다.
복양문(復陽門)은 솟을삼문형식의 문간채로 문의 좌우에 방이 있습니다. 고직사는 서원의 우측에 배치되었으며 3칸 규모의 ‘ㅡ’자형 민도리집입니다.
- 숭의당(崇義堂) 앞에서
공교육기관인 향교와 사교육기관인 서원에서의 교육 방법은 똑같습니다. 즉, 사당에는 유교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성현을 닮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을 법성현 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모시는 성현을 모델로 하여 공부를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광남서원 강당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서원은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교육을 하는 강당 2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강당영역은 선생님과 학생이 같이 공부하는 장소인 강당과 학생들이 잠을 자고 공부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재는 학생들 중에서 고학년이, 서재는 저학년이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서열, 질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사당은 성현의 위패를 무시는 곳이니 제일 높은 지역에 배치하고 그 다음 중요한 지역은 강당이며, 그 다음이 동재, 그 다음이 서재, 그리고 끝이 외삼문입니다. 또 서원은 유교의 중용사상이 반영되어 중심선에 좌우대칭이 되도록 건물을 배치합니다.
강당인 숭의당(崇義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공포는 초익공 구조이다. 한 단의 대리석 기단에 원형 초석과 원기둥을 얹었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 1칸을 두었다.
- 충정묘(忠定廟) 앞에서
광남서원 강당의 뒤에 충정묘(忠定廟)라고 하는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은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공교육기관인 향교와 사교육기관인 서원은 사당영역에서 다릅니다. 향교에서 사당은 대성전이라고 합니다. 유교에서 대성, 즉 공자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대성전은 중국의 여러 성현과 한국의 열여덟 분의 성현을 동시에 모십니다. 그러나 서원은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한국의 성현만 모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향교는 대성전이지만 서원은 모신 분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사당의 이름으로 삼습니다.
사당인 충정묘(忠定廟)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으로 공포는 이익공 구조입니다. 방형으로 다듬은 자연석 기단위에 콘크리트 마감을 하고 원형 초석과 원기둥을 얹었습니다. 사당의 주위는 기와를 얹은 돌각담으로 둘렀으며 평삼문을 두어 신문(神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모처럼 광남서원에 오셨으니 사당에 모셔진 황보인께 참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참배하는 방법은 살아있는 분에게는 1번, 돌아가신 분에게는 2번, 부처에게는 3번, 왕에게는 4번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공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향교는 문선왕으로 추증된 공자를 모셨기 때문에 4번 참배해야 하나, 서원에는 우리나라의 성현만 모셨기 때문에 2번 참배하면 됩니다.
참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국궁을 합니다. 국궁(남자 왼손 위)을 한 상태에서 배하면 허리를 45도 정도 굽히고 흥하면 국궁의 자세로 오며, 다시 배하면 절하고 흥하면 국궁의 자세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평신하면 허리를 폅니다. 그러면 저의 구령에 따라 하시겠습니다. “국궁, 배, 흥. 배, 흥, 평신”
- 충비단량 앞에서
사당 영역의 우측에 숭의당 옆쪽으로 계단을 통해 진입이 가능한 곳에 충비단량지비각(忠婢丹良之碑閣)과 추원단(追遠壇)을 볼 수 있습니다. 추원단(追遠壇)의 경우 입구를 낮게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충비 단양(딸랑)의 비석 사연
충비 단양은 조선조 세종과 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보 인의 여종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던 1453년(단종 1)에 황보 인이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에 화가 전 가문에 미칠 것을 예견한 단량은 황보 인의 손자인 황보 단을 물동이에 숨겨 이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와 100여리를 걸어 황보 인의 사위가 살고 있던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닥실리(닭실마을) 까지 죽을 듯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하진 못했습니다. 화가 곧 그곳에도 미칠 것을 우려한 단량은 노자를 얻어 무작정 남쪽(평해, 임곡의 바닷가 길)으로 도망치다가 장기현 관할인 오늘날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에 다달아 그곳 주막 여인의 도움으로 짚신골이란 곳에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단을 친자식처럼 키워 성인이 된 뒤에야 그에게 집안 내력을 일러 주게 되엇습니다.
단의 증손 황보 억은 현 성동리 뇌성산(뇌록) 자락으로 이거하여 세거지를 이루었다. 이처럼 황보 가문은 충비 단량의 도움으로 가문의 멸문지화를 막고 4대가 숨어 살다가 290년만인 숙종 때에 와서야 누명이 풀려 황보 인과 그의 두 아들이(황보 석, 황보 흠)이 관적을 회복했다. 황보 인은 영조로부터 충정공이라는 시호도 하사받았다.
단양의 뜻을 기리기 위해 황보 가문의 후손들이 서원 뒤뜰에 비를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