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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이 살짝 열려 있는 주전자, 주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어야 할 주전자가 탁자 위에 있다. 때가 묻은 주전자는 독립된 작품이다. 예술이다. 일상의 삶으로부터 온 것들, 유리잔과 레몬, 도기와 크고 붉은 자두, 밥그릇과 사과 역시 일상의 사물이 아니다. 구자승 화가의 눈 속에 박혀 든 순간, 그가 화폭으로 옮겨오는 동안 사물들은 서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끝없이 깊은 침묵이 흐른다.
오래도록 작품 앞에 서 있던 초로의 신사가 말한다.
“나에게 주술을 거는 것 같아.”
초로의 신사는 깊은 침묵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어쩌면 섬광같이 빠르게 달려온 시간들이 응축된 삶의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자승 화가의 작품 앞에서 쉽게 발길을 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노래를 만드는 이가 오면 그의 작품은 곡이 되고, 노래를 부르는 이가 오면 아리아가 될 것이다. 그의 그림은 무수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앳된 소녀의 심정으로 꽃 한 송이를 꺼내 들게 한다. 아니다. 꽃이 가득 담긴 화병을 안고 배시시 웃게 한다.
구자승 화가는 충주시 앙성면 남한강변길에 보금자리를 틀고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는 왜 서울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 한강의 상류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어쩌면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시작되는 너른 곳에 삼백 년이나 먼저 둥지를 틀고 있었던 느티나무가 그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느티나무들은 남한강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았다. 느티나무가 푸른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일렁이는 강물을 보여주었을 때, 나뭇잎에 묻어있던 햇빛은 일직선으로 물에 달려가서 떨어졌고, 순간 강물은 빛으로 반짝거렸다. 그 반짝임을 목격한 순간 구자승 화가는 눈이 부셨고,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지를 수 없었으리라. 오래오래 침묵하며 나뭇잎을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흘러가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그는 이미 남한강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보았으리라.
예술가의 숙명을 안고 태어난 구자승 화가, 할아버지도 화가였고, 아버지도 화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 놀이터는 아버지의 화실이었다. 그가 화가로 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구자승 화가의 그림엔 배경이 없다. 풍경도 없다. 화면 중앙에 매우 정교하게 늘어선 오브제들이 서로 배경이고 풍경이다. 참 독특하다. 보이지 않는 빛들이 주는 독특한 질감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꽃을 그렸으나 꽃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친숙한 도구들을 그렸으나 무척 신비롭다. 무수한 빛이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빛에 따라 흩어지는 이야기들을 듣느라 사람들은 작품 앞에서 오래도록 서 있다.
아주 익숙한 것들, 꽃, 탁자, 사과, 레몬, 자두, 단지, 병, 오래된 물건들, 작은 그림 액자....... 거기 있는 사과를 하나 집어서 깨물면 새콤한 단물이 와르르 소리를 낼 것 같다.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 과수원 농부의 발걸음이 보이고, 그 과수원을 낮게 날았을 새들, 혹은 그곳에서 한참 머물렀을 바람과 햇살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기 있는 꽃은 어느 들판에서 피었을까? 꽃이 들고 온 바람이 배경이었을까? 사람들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크게 떠 본다. 그리고 알아챈다. 그림 속에 있는 깊고 간절한 이야기들을. 그 이야기들은 어느 날 가볍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한다. 구자승 화가는 더 오래, 더 깊이 남한강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강변 작은 풀이 건네주는 이야기에도 오래 발걸음을 멈췄을 것이다. 아침마다 남한강 비내섬을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작업실로 달려가 종일 붓을 들었을 것이다.
구자승 화가의 그림은 참 아름답다. 살아서 숨을 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붓질 끝에 얻어낸 결과일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화폭 앞에 앉아 있었기에 그런 이야기가, 그 깊은 침묵이 우리에게 오는 것일까??
구자승 화가가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없을 것 같다. 정말 철처하다. '극적인 사실, 극적인 묘사, 극적인 색채감, 극적인 생동감'으로 꽉 차 있는 화면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구자승 화가, 그는 소리 없이 시대를 통찰한다, 그에게는 시대의 아픔을 넘어서는 이해가 있다. 용서가 있다. 사랑이 있다. 자유가 있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구자승 화가, 그러나 그는 매우 치밀하고 절제된 사람이다. 누가 그의 작품을 보고 단순하다고 했는가? 그의 작품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구자승 화가가 그린 꽃병, 그 꽃병에 꽂힌 꽃 그림은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꽃을 꽂아놓고 간 손의 고운 움직임과 마음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구자승 화가는 그리고 싶은 것을 자연스럽게 그렸을 것이다. 사과 한입 베물다가 문득 사과를 바구니에 담아서 작업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구도라든가, 어떻게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그에게 가당치 않은 일들이었을 것이다. 오랜 사유, 오랜 시간의 고통, 그보다 더 길었을 불면의 시간들을 오직 붓을 들고 치러냈을 것이다.
구자승 화가, 그의 그림 앞에 서 있으면 묵직함과 날렵함의 느낌이 동시에 온다. 그의 색채와 선들은 너무 심오해서 전율이 온다. 그의 손은 이미 신이다. 그의 손에서, 그의 마음에서 무엇이 그려지든 살아 있다.
구자승 화가, 고맙다. 참 고맙다. 현대미술의 소란한 와중에서 그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다. 올곧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면서 세파에 찌든 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낭만을 선사하고 마음을 즐겁게 하니 어찌 찬사와 경의를 아끼겠는가.
우리 집 벽에 구자승 화가의 꽃 그림 하나 걸어 두면, 평생 영혼에 시들지 않는 생기를 넣어줄 것 같다. 그의 꽃은 이미 꽃의 세계를 넘어섰다.
박은자 작가 pulbat@daum.ne0
출처 : 아산포커스
https://www.asanfoc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