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화학과 류문식
주제:
․ 예술에 관하여: 작가들이 예술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에 출품 하는 것은 관객을 염두한 행위이다. ‘예술’이란 지휘도 관객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가 집단의 집안 놀음’에 불과할 것이다.
․ 종교에 관하여: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종교가 가진 신화에 대한 감정이 사멸되고,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종교가 사멸되는 것은 아니다. 한 종교를 향한 ‘신앙’을 소유 했을 때는 그 신앙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외부적인 변화와 새로운 신념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 음악에 관하여: 음악이 가지는 보편성이란 것은 음악을 들었을 때 느끼는 보편적 감정에서 찾는다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 음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확실하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음악은 최고도로 보편적인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없다.
구성 및 내용:
예술철학 수업과 윤리학 수업을 받으면서 제법 많은 책을 읽었지만, 비극의 탄생만큼 힘들게 읽은 책도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시간에 밀려 읽는 듯한 느낌을 풍기고 있지만, 그게 사실 그렇다. 책의 처음 20페이지 정도를 3번은 읽은 것 같다. 그래도 교수님 책을 빌려서 교수님이 줄을 그어둔 곳을 중심으로 읽었더니 정리하기가 참 수월했다.
예술에 관하여
비극의 탄생은 과학과 예술과의 관계와 그리스 문화와 연관된 현대 문화의 전반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다. 책에 나오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책에서 예술과 종교, 음악에 대한 니체의 언급에 대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나의 비판적 의견을 적어볼 것이다.
관객이란 개념으로부터 비로소 성립하는 예술이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일까? 관객 자체를 예술의 본래의 형식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연극 없는 관객이란 모순된 개념이다. [p. 70]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는 예술에 대해 ‘모든 인간의 인생 그 자체가 예술이다’라고 정리한 적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참된 행위를 모두 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예술이란 것은 작가의 사상과 경험 등이 조각가라면 조각상 속에, 사진작가라면 사진 속에, 음악가라면 음악 속에 배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이 세상 속에서 각자의 역할 속에서 자신의 사상과 경험 등을 내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예술의 개념은 나의 이런 생각과는 다르다. 모든 사람들이 볼 때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서 인정 받을만 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어떤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거나, 소위 예술가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예술로서 대우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상적인 작품들 예를 들어 뒤쌍의 ‘샘’이란 작품을 살펴보면,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품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예술 작품이란 인정을 받았다. 뒤쌍이 ‘샘’이란 작품 속에 어떤 사상과 의지를 담았는지, 또한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술가 집단으로부터 인정받음과 전시회에 출품 된 작품이란 것에서 예술이란 지휘가 부여되는 것이다.
작품 자체는 평가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언뜻 쉽게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 예술이 추구 하는 것이 관객들의 감정과 사상에 충격을 유발하는 것이 주된 의무라고 보면,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객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에서 어떤 예술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란 것은 주관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런 주관성 때문에 어떤 작품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 하기 위해 객관적 집단과 제도를 만들어 둔 것이라 이해 하겠다.
그렇다면, 예술에 있어서 관객의 위치는 어디일까? 관객이 어떤 작품의 평가나 지휘를 수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예술과 관객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예술과 예술가가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작품을 만들어낸다면, 이것을 과연 예술이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들이 예술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에 출품 하는 것은 모두 관객을 염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이란 지휘를 얻는 것도 관객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가 집단의 집안 놀음’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스인은 그 당시에 벌써 그들의 청춘기의 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화를 날카로운 감각과 자유로운 의향을 가지고 실용적인 청춘의 역사로 바꾸어 쓰는 일을 착수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흔히 종교가 사멸해 가는 방식이다. 종교가 사멸하는 것은 종교가 갖는 신화적 여러 전제가 정교적 독단론의 엄격한 오성적인 눈에 대상물이 디고 역사적 사건의 결산필의 총체로서 체계화 되어 사람들이 신화의 신빙성을 소극적으로 변호하면서도 신화의 자연적 생명력과 번식력에 대해서는 모조리 저항하기 시작하는 경우다. 따라서 신화에 대한 감정이 사멸하고, 그 대신 역사적인 기초를 가진 종교의 욕구가 시작 될 때 종교는 사멸하여 버린다. [P. 97]
인간은 언제나 실용성만을 추구하는 동물인가? 예전에 어떤 사람이 겪었던 인간이 실용성만을 추구하지 않는 동물이란 것을 느끼게 만든 예화를 들어본다. 겨울 내내 더플코트만 입고 지내는 사람이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 더플코트를 고수하는 사람에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고, 유행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왜냐하면, 가볍고 보온성이 뛰어난 실용적인 오리털 잠바가 새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그 사람은 더플코트를 고수했고, 마침내 사람들이 더플코트를 다시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란 동물은 언제나 실용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에 제시한 예가 내용에 맞지 않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달나라에 우주선을 보내고, 복제 생물을 탄생시키는 등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과학적 발전의 성과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첨단문명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종교는 무속 신앙이다. 어떤 사람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만을 주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환히 밝혀주겠다는 ‘철학관’들이 설쳐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참 안타깝다.
이렇게 허무맹랑한 것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 그 자체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종교는 신앙이다. 이러한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그 종교의 신화에 대한 감정이 사멸되고,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종교가 사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 종교를 향한 ‘신앙’을 소유 했을 때는 그 신앙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외부적인 변화와 새로운 신념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며 차에 폭탄을 싣고 돌진하는 이슬람의 테러리스트의 모습을 바라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음악은 세계의 표현으로 보여질 때 최고도로 보편적인 하나의 언어이며, 이것은 개념의 보편성에 대해서마저 거의 개념이 개개의 사물에 대해서와 같은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음악이라고 하는 언어의 보편성은 결코 추상적인 공허한 보편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며, 어디까지나 명확한 피규정성과 결부되어 있다. [P. 138]
음악이 가진 보편성, 과연 어떤 음악이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보편적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얼마 전 ‘꽃피는 봄이 오면’이란 영화를 봤다. 트럼펫을 연주하는 주인공 현우는 자신의 아픈 사랑을 표현해 만든 곡이 있다. 어느 날, 친구가 신이 작곡한 곡을 밤무대에서 연주하자 크게 화를 낸다. 우선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울하게 작곡된 그 곡이 밤무대에서 ‘통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곡이 보편적이지 못할 것이란 반증이 되는 것이다. 현우에 의해 작사된 그 곡은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우울한 사랑의 노래가 될 뿐, 밤무대 사람들에게는 악사가 연주하는 흔한 밤무대 연주용 음악일 뿐이다.
결국 음악이 가지는 보편성이란 것은 음악이 가진 특정한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음악을 들었을 때 느끼는 보편적 감정을 찾는다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 음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확실하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음악은 최고도로 보편적인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없다.
제법 많은 낱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