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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토선 보급단체 결성을 위한 움직임
2003년 대구 광덕사의 운성 스님과 거제 오송암의 굉송 스님이 정토선 보급을 위해 꽤 열심히 노력하였다. 두 스님 모두 정토선을 위해 필요한 토지나 사찰을 내놓겠다고 하였고, 한 번은 광덕사 운성 스님이 정토선을 하는 스님들을 소집한 적이 있어 나도 대구에 가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이때 실제 큰스님을 모시고 정토선을 크게 선양해보려는 스님들이 몇 분 계셨기 때문에 잘 진행되었더라면 한국에서 큰스님이 크게 뜻을 펼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뒤 진행 소식이 없었다.
(5) 금강선원 총재 활안스님과의 인연
2002년 9월에 오셔서 등인 스님 계를 주시고 한 달 만인 10월에 갑자기 오셨기 때문에 일정을 많이 준비하지 못했다. 신촌 봉원사에 가서 만봉 스님(당시 94세)도 만나고 했지만 쉬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법회도 없이 하루 이틀너머 며칠씩 한가히 쉬게 할 수도 없었다. ‘법회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법회를 마련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꿈에 한정섭 박사(활안 스님)가 보였다. 어찌된 일인지 꿈속에서는 내가 활안스님을 엄청 꾸지람 하고 있었다. 평소 교분도 없었고, 현실에서는 어이없는 일이겠지만 꿈에서는 가차 없었다.
스님은 국내에서 출가자를 3,000명이나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분으로 한정섭 박사로 이미 널리 알려졌고, 일찍이 불교계에 공로가 많으신 분으로 남방에서 수계마치고 삭발 염의하여 활안 스님으로 불리며 청량리 금강선원에 주석하시며 불교방송 등 여러 곳에 다니시며 교화를 펼치시고 계셨다.
나는 간밤의 꿈을 내심 두고 관정 법사님을 소개하고자 여러 경로를 통하여 활안 스님과 통화를 시도하였다. 마침내 통화할 수 있었고, 관정 큰스님을 초청하여 법회를 가지면 어떻겠는지 여쭸다. 친절한 활안 스님은 당장 초청법회는 어렵고, 큰스님께 공양을 한 번 대접해드릴 수 있겠다고 답하셨다. 다음 날 약속대로 나는 큰스님을 모시고 청량리 금강선원에 찾아가서 활안 스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때 한순남 연당 보살이 큰스님을 처음으로 친견하였고, 인사동 여래선원에 오게 되며 등인 스님과 만난 뒤 중국에서 큰스님 오실 때마다 정성껏 모셨다.
4) 2005년 이후 : 어려웠던 마지막 초청
2000년 이후 큰스님과 인연으로 정토선을 접하며 우리는 어느 사이 자신들도 모르게 정토로 가고 있었다. 큰스님을 친견하러 왔던 위강원한의원 전병롱 원장이 자신의 임대 상가 건물을 이용하여 포교하면 좋겠다는 제의가 있어 점포 건물을 전면 수리하여 인사동 ‘여래선원’을 그쪽으로 옮기면서 ‘아미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4년 만경사 중창불사 회향 및 점안식 행사를 가진 다음해인 2005년 7월 10일 아미타사 포교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아미타사 개원을 기념하여 효란 스님을 초빙하여 ‘무량수경 강좌’를 개설하였다. 효란 스님은 정토계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셨는데(당시 88세) 일본 정토진종으로 출가하신 이력이 말해주듯 일본 정토진종의 개조 ‘신란’에 대한 경외심이 남다르신 분이셨다.
무량수경 강좌가 끝난 이후, ‘정토불교대학’을 열어 정토관련 강습회를 열었는데 강사는 2000년 「화두 놓고 염불하세」를 써서 불교계에 신선한 정토의 깃발을 나부낀 전남대 김지수 교수, 일본 유학에서 박사학위 마치고 귀국하여 불화강습을 통하여 정토세계를 설명한 강우방교수의 영애 강소연 박사, 3000배 일만 배를 밥 먹듯이 하며 불력회를 이끌고 있는 박종린 거사, 신심 수행과 원력 전법으로 아미타사 도량을 세울 수 있게 뒷받침한 위강원한의원 전병롱 원장 등 주로 정토 수행과 관련 있는 학자와 수행인들이었다.
또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정토계 명사 특별초청법회를 열었는데 건봉사의 만오 스님, 정토에 관한 상설 강습을 하고 계시는 밀양의 정목 스님, 정토선을 직접 펴는 선용 스님, 홍련암에서 기도정진으로 유명했던 강릉 성원사 창건주시며 강청화 큰스님의 제자인 주경 스님, 울산에서 호스피스활동으로 유명한 정토마을 자재병원 원장 능행스님 등이다.
당시 서울 도심인 종로에서 이처럼 전문적으로 정토를 강의한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정토 수행하는 많은 불교인들이 강습에 참여하며 성원하였다.
그런데 아미타사 개원하며 최초 ‘무량수경 강좌’를 맡았던 효란 스님은 관정 큰스님의 한국 방문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역할을 하시기도 하였다. 이것은 큰스님 영향으로 정토 수행에 한 걸음 다가선 불자들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 강좌에서 오랜 기간 무량수경을 강의한 효란 스님은 강습 도중 일부러 마음먹고 큰스님을 비판하고 나선 것 같다.
“관정 스님 「극락세계 유람기」는 정토삼부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르다.”
“관정 스님은 한국에 와서 법회하며 여러 스님들과 불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내가 직접 중국에 가서 관정 스님에 대하여 조사해 보았는데, 관정 스님이 주지라는 삼회사는 이미 폐허가 된지 오래 되어 사람이 살고 있 않았고, 관정 스님이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갔다 왔다고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1997년 관정 큰스님이 한국에 와서 정토선을 펴고, 2000년 「화두 놓고 염불하세」가 정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고취시켰다면, 2005년 설립된 삼보제자가 정토를 선양하는데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삼보제자는 대만에서 출발한 정종학회의 지원으로 출발하였고, 정종학회가 마찬가지로 출판된 책을 모두 무료로 법공양하였다. 2005년 삼보제자가 출판사 등록한 후 가장 먼저 펴낸 책이 바로 효란 스님의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나」이다. 이 책은 관정 큰스님의 ‘극락세계 유람기’에 관한 것을 효란 스님 임의로 재편집한 것이다.
이 당시 효란 스님의 큰스님 비판은 미리 준비된 것이고, 또 비판을 바탕으로 자신이 속한 일본 종단인 정토진종의 교리를 펴려는 별도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집요하였다고 본다. 또 한 가지는 한국정종학회 설립 건이다. 이 문제로 처음부터 효란 스님과 상의하게 되었지만 당초 애기한 바가 중간에 변질되고, 당신 의도대로 진행이 안 되자 또다시 나를 부르는 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여러 번 전화하고, 장문의 편지도 내게 보내는 일을 하셨지만 응대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있었다. 효란 스님 자신은 설득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큰 괴로움이었고 그만큼 타격도 컸다. 사실 이 영향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효란 스님의 관정 큰스님에 대한 비판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효란 스님의 주장을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①관징 스님이 주지라는 삼회사는 지금 폐허가 되어 사람도 살지 않은 곳이다.
-.2002년 우리가 중국에 갔을 때 삼회사는 아주 오래된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경내에서 많은 스님들이 살면서 직접 경작하는 논밭까지 있었다.
②관징 스님은 미국으로 건너간 지 오래 되었다.
-.2000년 이후 여러 번 우리가 직접 중국에 가서 만나 뵈었다.
이처럼 효란 스님의 비난과 회유로 안타까워하는 중에 함께 큰스님을 친견하고, 아미타사를 통해 함께 정토를 펴시던 분들도 관정 큰스님을 비판하고 나서는 일이 있었다.
“자성염불이라고 하는데, 자성이 뭡니까? 그 자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아미타사의 강좌는 마치 큰스님을 성토하는 장이 되는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국내 사정을 전혀 모르시는 큰스님은 북경의 홍거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초청을 해달라고 여러 번 연락을 해오셨다. 큰스님은 2004년까지 미국의 영주권을 가지고, 늘 재입국비자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한국 비자를 신청하면 언제든지 입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미국비자 기간이 만료하여 새로 중국 여권을 만드셨기 때문에 한국에서 초청장이 없으면 비자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시 상황에서 우리가 초청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너무 비판세력이 많이 생겨 한국에 오시면 오히려 여러 가지 면에서 비난을 크게 할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하도 여러 사람이 중국에 가서 보니 큰스님이 가짜라고 해서 우리가 중국에 갈 때 통역을 했던 북경의 홍거사에게 삼회사 주지스님에게 관정 큰스님의 실체에 대한 사실을 물어서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답장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부정적인 답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믿음이 변하지 않은 등인 스님이 아니었다면 나조차 비판하는 쪽에 나설 정도의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서길수 교수님이 큰스님 일대기인 「극락과 정토선」에서 자세하게 조사하여 분석한 결과 모두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극락과 정토선」 972쪽 이하 참조). 그 제자가 큰스님이 투병 중일 때 자기가 직접 한국과 교류하기 위해 악의적인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5) 맺는말
이글을 쓰고 있는 요즈음 보정 거사가 우리 절에 와서 큰스님 일대기를 쓰고 있다. 그런데 큰스님 7살 때 허운 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여 15세에 구족계를 받은 계첩을 입수했고, 1958년 허운 화상이 큰스님에게 조동종 법을 전한 정법안장도 찾아서 분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큰스님 입적하신 뒤 유품에서 허운 화상 100살 때의 사진이 나오고, 사진 뒤에 큰스님 이름과 함께 허운 화상이 사부라는 큰스님의 자필까지 확인하고 있다. 이런 자료들을 대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다.
‘큰스님이 당시 이런 자료들 가운데 하나도 우리들에게 내보이시지 않으셨다. 만약 그 때 자신의 품속에 있는 귀한 자료들을 조금이라도 확인해 주셨더라면 우리는 더 큰 믿음을 가지고 힘들지 않게 큰스님을 당당하게 변호했을 것 아닌가?’
2001년 이후 큰스님을 가까이 모셨고, 2005년 이후부터는 한국에 모시지는 못했지만 큰스님이 편찮으실 때 중국에 직접 가 뵈었다. 자신에 쏠린 수많은 비난과 모함에 대해 단 한 마디 변명 없이 묵묵하셨다.
원적하신 뒤에도 등인 스님이 신도들과 함께 두 번이나 큰스님의 유지가 배인 사찰을 찾아가 사리를 비롯한 몇 가지 유품도 모셨지만 아쉬움은 여전하다.
큰스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큰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 게송의 요지로써 불제자의 도리를 헤아린다.
불타의 혜명을 드날리고, 정토의 가르침 힘써 전하라!
불타의 혜명을 드날리고 宏揚眞慧命
원만 빛 자성 절로 밝아져, 圓光性自明
정토의 가르침 힘써 전해 騰契淨土法
연꽃 마음에 가득 채워라 滿上蓮花心
<덧붙임>
이글은 「극락 가는 사람들」 원고이다.
「극락 가는 사람들」은 불자님들의 관정 큰스님과 관련한 법연담으로 이 시대 진정한 선지식인 큰스님의 면목을 생생히 알려줄 것이다.
앞의 글은 내가 필자로 되어 있지만 실은 온전히 서길수 교수님께서 바탕을 써 주신 것이다. 그냥 써 달라고 하면 안 쓰기 때문이다. 서교수님은 이것을 빤히 아시고 당신이 들은 내용을 참고하여 원고를 미리 다 써 주신다. 그리고 나서 본인에게 수정할 것이 있으면 고치라고 요청한다. 나도 그 매뉴얼에 따라 써 주신 원고를 받아 몇 가지 단어와 토씨만 수정했을 뿐이다. 불과 몇 사람 이외는 다 이런 식이다. 노교수님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중국 근현대불교사의 큰 별 허운 노화상의 전법제자 관정 큰스님을 조명하는 일은 백사장에 떨어뜨린 바늘 찾기와 같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첫째는 큰스님 관련 자료가 희박하며, 둘째는 한국과 중국에서 큰스님과 관련된 분들의 무관심이요, 셋째는 중국에서 큰스님 관련한 사실을 알거나 자료를 가진 분들이 드러내놓고 밝히기를 꺼려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중국 현대사의 격변기 국공내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아 나오신 관정 큰스님의 파란 만장한 수행 삶의 역정을 밝혀내기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국적이 다른 상황에서 이 일을 진행한다는 것은 보통 열정과 인내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보정 서길수 교수님은 해내셨다.
작년 2014년에는 관정 스님 저작집 「淨土와 禪」을 출간하셨고, 금년 10월에는 관정 큰스님의 대서사시인 일대기를 「極樂과 淨土禪」이라는 이름으로 펴내셨다. 이제 곧 「極樂 가는 사람들」도 나오게 된다.
교수님은 강원도 영월 해발 900m 만경사 무문관에서 3년 기도수행을 온전히 마치고 하산하여서 관정 큰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미국 동부와 서부, 대만, 싱가포르 등 동남아 일대와 중국의 곳곳과 국내 여러 곳을 수 회 왕래하며 발품을 팔아 인연 있는 분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샅샅이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마침내 교수님의 8년에 걸친 노력 끝에 방대한 분량의 관정 큰스님 일대기를 완성하신 것이다.
교수님께서 온몸으로 세계 각 곳을 뛰어 밝혀낸 새로운 원고를 대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큰스님을 좀 더 잘 모실 것을....’하는 뼈아픈 후회가 엄습한 것이다. 한 때 우리 곁에 가까이 오셨던 참다운 선지식이 자칫하면 그 면목이 오도되고, 사장되고 기억에 사라질 뻔했는데 다행히도 서길수라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불자께서 나타나 숫제 진흙 속에서 진주를 캐내듯 묻혀 있던 큰스님의 면목을 유감없이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자- 보시오!
여러분들이 한 때나마 가르침을 받았던 분의 진면목이 바로 이러합니다.“
서교수님이 외롭게 외치는 광야의 울림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출가사문의 한사람으로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갖는다. 우리 곁에 가까이 오셨던 진정한 보살이요, 선지식을 몰라보고 함부로 대했던 지난날이 회상되며, 또 큰스님의 발자취를 탐색하는 서교수님의 노력을 대수롭지 않게 평가했던 날들을 돌아보며 깊이 참회하게 된다.
그러나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極樂과 淨土禪」이라는 큰스님 일대기를 통하여 또다시 진정한 선지식이요, 우리 모두의 스승인 관정 큰스님을 조명하며 진실된 수행심을 깨우치고, 겸허한 마음으로 기꺼이 선지식을 공경할 수 있게 되었으니 ....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의 실상에 대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밝혀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던 고구려 관련 실증연구의 화신답게 ‘보정 서길수’ 교수님이 집념어린 열의와 끈질긴 실증탐사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 번 진정한 학구정신으로 일궈낸 서교수님의 선지식에 대한 애정과 공경심으로 일로매진한 쾌거인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불교인물사에서는 관정 큰스님은 그야말로 감춰진 보물의 발견이며 이 일을 이뤄낸 일은 커다란 불사 공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큰스님의 행적이 유감없이 펼쳐진 「極樂과 淨土禪」이라는 일대기는 서교수님과 부인 불모화 보살님 두 분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속에서 함께 수행하며 세상의 수모를 무릅쓴 인고의 답사세월 속에 오랜 시간 공들여 일궈낸 피땀어린 대작불사인 것이다.
두 분께 이 자릴 빌어 깊이 고개 숙여 감사 올린다.
덕분에 ‘정토선’의 불조혜명은 다시 천년 세월 두고두고 사바예토의 중생 성불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모아미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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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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