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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부흥(1) - 부흥의 답은 기도이다.”
+ 본 문 : 사도행전 4장 23절 – 31절 (신약 192쪽)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아멘!
새로운 2025년 새해를 맞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범사에 잘 되고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옆의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2025년 우리교단과 우리교회 표어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 입니다.
그래서 “부흥” 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오늘은 첫 번째 말씀으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기도 - 부흥의 답은 기도이다.” 라는 제목으로 설교합니다.
교회 부흥의 진정한 모델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더하며,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숫자적 증가는 분명 부흥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행 2:41, 2:47)
그러나 숫자보다 더 중요한 부흥의 참된 표는 사도들의 담대한 모습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사도들로 인하여 나타난 기사와 표적도 부흥의 표식이지만, 믿는 사람의 삶이,
공동체를 이루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섬김의 모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도들끼리 한 식구, 한 가족같이,
섬기는 초대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였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숫자보다 중요한 부흥의 표징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구별된 자들로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R. A. 토레이 박사는 “기도와 영력” 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흥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 새로운 생명이 임하는,
부흥의 결과는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 크리스챤들이 참된 부흥을 체험하게 되면,
세상 중심의 삶에서 탈피하여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성도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흥이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삶의 구별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살던 방법대로 그냥 살아간다면, 부흥이 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참 생명에 부합되지 않는 일은 온전히 버리고, 세상의 삶의 행태를 떠나 분리된,
구별의 모습이 있을 때, 불신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게 되는 부흥이 있게 됩니다.
결국 진정한 부흥은 외향적으로 흘러나가는 사랑과 거룩의 파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술집이 문을 닫고, 도박장과 감옥이 문을 닫는 물결을 이루는 것이 부흥입니다.
이러한 부흥의 열매는 숫자적 증가를 저절로 동반합니다. 숫자적 부흥이 부흥이 아니라,
부흥의 열매로 숫자적 부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부흥이,
지금도 교회사 속에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정한 부흥을 일어나게 하는 그 열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첫째의 열쇠가, 오직 기도, 오로지 기도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 말씀입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는,
오로지 기도에만 힘썼습니다. 이 말은 기도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들의 경건 생활 속에 기도의 모습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를 하면서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성령과 부흥, 변화에 집중하지 않고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척 해서는 안 됩니다. 응답과 변화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적당히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기도의 사람으로, 오직 기도에 몰입해야 합니다.
세상일에 바쁘니까 기도 시간을 줄이고, 봉사와 섬김이 있으니까 기도 시간을 줄이고,
성경을 읽어야 하니 기도 시간을 줄이고, 집안 행사가 있으니 기도 시간을 줄이는 등,
기도를 홀대하고, 기도 없이도 교회의 사역을 해낸다는 잘못된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기도!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성도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120문도는 다른 일을 했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기도하는 것 외에,
부흥의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 외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들은 성령 받고도 오직 기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아멘! - 사도들은 성령 받고 방언을 하며,
사람의 수가 삼천, 오천, 허다한 무리가 돌아왔는데도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두 번째, 부흥을 일어나게 하는 열쇠는 한 마음으로의 기도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옥에 갇혔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들은 지극히 미미한 소수자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겨우 싹을 틔운 연약한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거기에다 회유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러나 사도들은 용감하였습니다.
저들의 어리석은 요구 앞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놓임을 받은 후에,
믿는 무리들에게 돌아와서 되어 진 일을 다 고하였을 때, 오늘 본문 24절 말씀에,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란 대개가 개인 기도로 이루어지고, 개인의 경건 생활 중 하나로 취급이 되었다면,
초대 교회의 부흥과 관련된 기도의 형태는, 한 마음으로의 기도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마음이 통한 기도, 관심과 목표, 방향이 같은 기도입니다.
사람이 몇 명이든지 마음이 연합하여 하나로 이루는 기도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너무나 좋은 기도 방법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도 서로 싸우고 갈등하고,
분열의 영으로 채워져 있는 곳에는, 기도는 있어도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마음으로 기도를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본문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기도의 자리가 흔들리는 강한 성령의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곳에는 문이 열렸습니다. 옥터가 흔들리고 열렸습니다.
귀신이 쫓겨 나가고, 질병이 치유되고, 영혼들이 자유를 찾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무지 완악한 자들의 마음, 결코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강팍하고 완고한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능력은, 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에 있습니다.
여러분! 한 마음으로 방해하는 것들을 물리치고, 미움과 편견, 오해를 내려놓읍시다.
세 번째, 부흥을 일어나게 하는 열쇠는 통성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사도들과 교인들은 한 마음으로 기도에 이어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소리를 높이는 기도, 즉 부르짖는 기도가 다함께 모아지면 통성 기도가 됩니다.
오로지 기도에서 한 마음 기도로, 한 마음 기도는 자연스럽게 통성 기도로 나아갑니다.
보통 우리는 통성 기도, 부르짖는 기도를 무시합니다. 큰소리의 기도를 무식한 기도,
광신자의 기도, 천박한 기도라고 공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는 큰소리,
통성 기도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삶의 사역이 긴급할 때,
벼랑 끝에 선 위기가 있을 때에 소리 지르고, 너무 기쁘고 감사할 때 소리를 지릅니다.
다함께 영적 전행을 해야 할 때 통성 기도로 맞섭니다. 혼자 하는 기도는 군인의 기도요.
여럿이 모여 드리는 기도는 군대의 기도이기에, 소리를 높여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기도 중에는 침묵 기도가 있습니다. 통성 기도에 비하면 정반대 형태의 기도입니다.
이 침묵 기도의 깊이를 외면하는 것이, 통성 기도가 아닙니다. 수많은 영성가들이,
개인의 영성 수련을 위해 침묵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스파르의 아브라함은 ① 혀의 침묵,
② 몸 전체의 침묵 ③ 혼의 침묵 ④ 지성의 침묵 ⑤ 영의 침묵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에 의해 내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기도,
수동적 기도로서의 침묵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도 고통과 위기의 시간에는,
침묵 기도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 기도 이후 십자가에 매달린 기도를 보십시오.
누가복음 23장 46절입니다. “예수께서 큰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 예수님의 기도는,
여기서 침묵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큰소리로 하나님을 부르는 통성 기도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의 예수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크게 소리 지르셨습니다. 거기 모든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크게 소리 질러 기도했습니다.
기도란 고요한 정숙 기도도 있고, 소리 내어 기도하는 통성기도도 있습니다.
위협하고 협박하는 무리들 앞에 움츠러들지 않았다는 사자와 호랑이의 포효와도,
같은 기도가 당연한 통성 기도입니다. 그리하여 통성 기도는 성령 충만을 가져왔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용기 있는 복음 전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기도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선교,
교회의 든든한 섬김, 그곳에는 세 가지의 기도가 있습니다. 오로지 기도, 한 마음 기도,
큰 소리로 부르짖는 통성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 기도가 있을 때, 영혼과 교회,
가정은 다시 살아납니다. 시편 85편 6절입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18세기 요나단 에드워드의 대각성 운동은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너무도 애써 기도한 나머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마루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 고 하였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의 품에서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어떠했는가?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노라고 20세에 다짐하였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그는 북미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브레이너드의 기도 일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흥의 불을 붙여주어 그의 선교의 첫째도 기도요, 둘째도 기도요,
셋째도 기도라는 말을 남긴 로버트 머레이 멕체인과 같은 인물을 탄생시켰습니다.
17세기 영국 아일랜드의 부흥도 블레어를 포함한 7인의 합심 기도의 역사였습니다.
1859년, 19세기 중반 올스터의 부흥은 수백 명이 한꺼번에 회개하고 구원받았습니다.
감옥이 텅텅 비어 문을 닫았습니다. 영국을 구원한 웨슬리 형제의 부흥도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57년~1958년에 일어난 미국의 대부흥도 어느 선교사가 부흥을 위해,
기도한 것이 부흥의 시작이었습니다. 기도의 영은 퍼져나가 뉴욕, 교회, 극장에 수천 명이,
기도회에 참석하였고 기도하는 사람이 늘어선 길이는 2000마일이 넘었다고 합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기도, 한 마음 기도, 통성 기도로,
성령의 불이 붙은 평양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의 부흥이 한국을 불살랐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보여주는 기도의 원칙대로 우리 세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한 마음, 통성기도이며, 더 많은 기도이며, 성령의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위대한 부흥은 언제나 기도에 대해서 물러서지 않는 끈질긴 기도로 시작이 됩니다.
19세기말 유명한 부흥 운동가 스미스 목사님에게 한 성도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나는 부흥을 원합니다. 교회가 부흥을 맛보길 원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때 스미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분필로 당신이 앉아있는 기도의 자리에 원을 그리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흥은 바로 그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거기서 부흥이 일어나면 당신의 가정도, 교회도, 민족도 부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그토록 원하시는 심령의 부흥, 교회의 부흥은,
다른 사람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도, 기도하는 백성이 일으켰듯이,
기도하는 나, 바로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기도의 자리에 무릎 꿇고,
오로지 기도, 한 마음 기도, 통성 기도로 부흥을 맛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