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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梧里의 저녁 흥치 유금
늦가을은 큰 들에 다하고
저녁 해는 뉘엿뉘엿 밭에 지누나
나그네라 추운 밤을 걱정하게 되고
집 생각에 먼 하늘을 근심스레 보네
깊은 골목은 나무 성글고
마을에선 흰 연기 하늘하늘 오르네
들집에는 국화 아직 있으나
타향의 연꽃 이미 시들었고나
한 마리 소는 외양간을 찾고
기러기는 떼지어 찬물에 있네
쓸쓸한 누군가의 무덤을
시냇물이 빙 둘러 북으로 흐르네
귀향이 늦어짐을 슬피 여기나
주인 어질어 그나마 다행이고녀
쉬면서 몸을 보양해야지
밥 잘 먹고 잠도 푹 자면서
梧里는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오리라는 지명이 있지만 그곳인지는 미상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나크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앉아 있는 마음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 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은유로 오는 가을 유재영
달빛이나 담아둘까 새로 바른 한지창에
누구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행렬인가
기러기 머언 그림자 무단으로 날아들고
따라 놓은 찻잔 위에 손님같이 담긴 구름
펴든 책장 사이로 마른 열매 떨어지는
조용한 세상의 한 때, 이 가을의 은유여
개미취 피고 지는 절로 굽은 길을 가다
밑둥 굵은 나무 아래 멈추어 기대서면
지는 잎, 쌓이는 소리 작은 귀가 간지럽다
미션(1986년)
이 가을에 나는 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다른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구옥일까 아니면 대전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아이들이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저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나도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무를 뽑아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을 돈다
저 건너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이별 G 아폴리네르
내 히드나무의 어린 싹을 꺾었네
가을은 지금 저물고 ...
그대는 가슴에 간직하는가
우리들 다시 이 땅 위에서
또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니
세월의 향기여, 히드나무의 어린 싹이여
그리고....그리고...
그대 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가슴을 파고 간직하여 주시기를 ...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9)와 마리 로랑생(1883-1956)은 5년 간의 연애 끝에 이별을 하게 된다
마리 로랑생은 독일인과 결혼하고, 그로부터 한 달 뒤 세계 1차대전이 터진다
전쟁 중에 아폴리네르는 다시는 로랑생과 만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아폴리네르는 ㅡ 그대 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가슴을 파고 간직하여 주시기를 ㅡ 죽을 때까지 바랐고
마리 로랑생은 ㅡ 죽은 여자보다 더 불행한 것은 잊혀진 여자 ㅡ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괴로움을 노래했다
조용한 일 김 사인
이도 저도 마땅히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초가을 김용택
산 아래
동네가 참 좋습니다
벼 익은 논에 해 지는 모습도 그렇고
강가에 풀색도 참 곱습니다
나는 지금 해가 지는 초가을
소슬바람 부는 산 아래 서 있답니다
산 아래에서 산 보며
두 손 편하게 내려놓으니
맘이 이리 소슬하네요
초가을에는 지는 햇살들이 발광하는 서쪽이 좋습니다
초추 이문재
초가을 아침
나팔꽃 앞에서 심호흡
꽃을 등지자
탄성 같은 한숨
낯선 겨울
혼자 남아
늦수박을 베어물다
북극해 쇄빙선 생각
머리 들이밀고 깨질듯
나아갈 때만 길이 되는
혹한의 바다
배 지나자마자
결빙으로 길 지우는
극지 바다
대문 걸어 잠그고
마당 가득
늦수박 씨처럼 남아 있는
지난 날들을
내다 넌다
새카맣게 빛난다
벌써 문 두드리는
낯선 초겨울
秋夜一景 백석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
안방 큰방은 홰즛하니 당둥을 하고
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어 있어서들
오가리며 석박다를 썰고
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늘을 다지고
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
양념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밖에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추강에 밤이 드니 월산대군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추석 이병초
굵은 철사로 테를 동여맨 떡시루
어매는 무를 둥글납작하게 썰어 시루구멍을 막는다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호박고지를 깔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통팥 뿌리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낸내 묻은 감 껍질 구겨넣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자식들 추석옷도 못 사준 속 썩는 쑥 냄새 고르고
추석 장만한다고 며칠째 진이 빠진 어매
큰집 정짓문께 얼쩡거린다고 부지깽이 내두르던 어매
목 당그래질 해대는 것이 무지개떡 쇠머리찰떡만은 아닌지
쌀가루 이겨 붙인 시루뽄이 자꾸 떨어지는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어매는
부지깽이 만지작거리며 꾸벅꾸벅 존다
추야우중秋夜雨中 최치원
가을 바람에 이렇게 힘들여 읊고 있건만
세상 어디에도 날 알아주는 이 없네
창 밖엔 깊은 밤비 내리는데
등불 아래 천만 리 떠나간 마음
추일미음 秋日微吟 서정주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규는 붉은 물이 들었다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았으면 좋을꼬
秋日山朝 백석
아침볕에 섶구슬이 한가로이 익는 골짝에서 꿩은 울어 山울림과 장난을 한다
山마루를 탄 사람들은 새꾼들인가
파란 하늘에 떨어질 것같이
웃음소리가 더러 山밑까지 들린다
巡禮중이 山을 올라간다
어젯밤은 이 山 절에 齊가 들었다
무리들이 굴러나리는 건 중의 발꿈치에선가
추일서정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러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 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래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1940년 7월 인문평론
추풍에 부치는 노래 노천명
가을 바람이 우수수 불어옵니다
신이 몰아오는 비인 마차 소리가 들립니다
웬일입니까
내 가슴이 써-늘하게 샅샅이 얼어 듭니다
"인생은 짧다"고 실없이 옮겨 본 노릇이
오늘 아침 이 말은 내 가슴에다
화살처럼 와서 박혔습니다
나는 아파서 몸을 추설 수가 없습니다
황혼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섭니다
하루하루가 금싸라기 같은 날들입니다
어쩌면 청춘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습니까
연인들이여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은 듯이 지나 버리는 생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꽃밭을 그대 만나거든
마음대로 앉아 노니다 가시오
남이야 뭐라든 상관할 것이 아닙니다
추흥秋興 두보
이슬이 내려 단풍잎이 떨어지니
무산과 무협에는 가을빛이 쓸쓸하구나
강에 파도는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고
변방에 이는 구름은 천지에 덮여 있다
국화를 바라보니 다시 전날처럼 눈물이 나고
배를 저어가니 고향 생각이 이어진다
겨울 옷을 곳곳에서 마련하고 있는지
백제성 부근에 다듬이소리 요란하다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채호기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넌다
베지 않은 키 큰 옥수숫대가 있고
누렁빛 들판에는 풍성한 예감이 있다
먼 데 산이 선명하다
형은 펌프 옆에서 양말을 빨고
하, 참 이 가을엔
햇빛이 뼛속까지 보이는구나
향수 박세영(1902 - ) 호 白河. 함북 출생.
아 - 그립구나 내 고향,
익은 들이 물결치는 가을
누르런 들과 새파란 하늘을 볼 땐
생각키느니 내 고향
산골짜기엔 약수
마을 앞엔 푸른 강
강엔 배 띄우고 고기 잡던 옛시절
내 고향은 이리도 아름다워라
산 없는 이곳에서
물 흐린 이 땅에서
흘러 다니는 나그네 몸이 외롭구나
지금은 추석달, 끝없는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저 달
북만北滿의 들개 짖는 소리에 마음만 소란쿠나
고향의 하늘을 날으는 새, 땅에 기는 짐승들도
지금은 따스한 제 집에서 단꿈을 꾸련만
팔려 간 노예와 같이
풍겨난 새와 같이 이 몸은 서럽구나
고추를 널어 새빨간 지붕
파란 박은 實貨같이 넝쿨에 달리고
방아 소리 쿵쿵 울릴 때
이 가을, 이 추석을 맞는 이
아 - 고향에 몇이나 되노
가라는 이 없건만 아니 나오면 왜 못살며
들은 익어 누르른데 배를 곯리지 않으면 왜 못살더란 말인가?
사랑하는 연인과 결별하듯이
내 고향 떠난 지도 이미 십년
그야 이 내 몸뿐이랴
마을의 처녀들도 눈물지고 떠나들 갔으며
마을의 장정들도 고향을 원망하고 달아났다
그리운 고향은 야속도 하구나
수수이삭에 걸린 추석달
잠든 호숫가에 거니는 기러기
지금은 그 멀리 들릴거라 다듬이 소리
아 - 그립고나 이 내 고향!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년
호수의 그림하나 이광석
늦가을 호수에 그림 하나 걸려있다
새들의 수화같은 물안개가 수초 위에 등지느러미를 파닥인다
주남저수지가 만든 또 하나의 낯선 섬
그림 속에 갇힌 호수가 그림 밖으로 얼굴을 돌린다
가을이 키운 사유만큼 세월의 무게로 흔들리는 갈대밭 머리에
들국화 몇송이 물수제비를 뜨고 있다
차마 그냥 발길 돌릴 수 없는 내 젖은 화선지에 낮달이 내려와 물감을 푼다
노을빛 물든 향긋한 커피 한 잔 청해 마시는 여인의 눈빛엔 어느새 가을이 만삭이다
'호수에 그림 하나' 주남 저수지 한켠에 이런 낯선 시 한 편 숨어 있다
혼동 문태준
가을밤에 뒷마당에 서 있는데
풀벌레가 울었다
바람이 일고
시누대 댓잎들이 바람에 쓸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풀벌레 소리
댓잎 소리
또 한번은
겹쳐
서로 겹쳐서
그러나 댓잎 소리가 풀벌레 소리를 쓸어내거나
그러나 풀벌레 소리가 댓잎 소리 위에 앉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혼동이라는
그 말에
큰 오해가 있음을 알았다
혼동이라는
그 말로
나를 너무 내세웠다
홀로 남기 프로스트
예전에 어디에서 들은 적 있었던가?
바람이 이토록 사납게 바뀌는 것을
닫히지 않으려는 문 열린 채 쥐어잡고
저 언덕 너머 해안의 물거품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바람은 도대체 무어라 여길까?
여름이 지나고 오늘 하루도 지나 이제
어둔 구름이 서쪽 하늘에 모인다
저기 쳐진 현관 마루
회오리바람에 요란하게 올라온 나뭇잎들이
내 무릎을 부딪히려다가 스쳐갔다
그 소리 속의 불길한 무엇이
내게 비밀을 밝히라고 알려준다
내가 집에 혼자 있다는 소문이
밖에서 나돌았나 보다
내 일생 동안 외로웠다는 소문이
이제 내게 남은 것은 神밖에 없다는 소문이
첫댓글 친구들위해서 카페 관리하느라 애많이쓰네친구.. 풍성한가을만큼 부자되세요..
우진아 고맙다...덕분에..
더욱 진한 가을을 맛보는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