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문예전고(文藝典故)'에는 화가들만 모아놓은 대목이 있는데, 칠칠(七七) 최북(崔北) 등과 함께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示石:1686~ 1761)도 들어 있다. 이덕무도 '청장관전서'에서 조영석을 겸재(謙齋) 정선(鄭�)과 같은 반열에 놓았듯이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조영석은 의령(宜寧) 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인데, 영조는 그가 형 영복(榮福)을 그린 것을 보고 "실물과 너무 흡사하다"면서 부왕(父王) 숙종의 어진(御眞)을 모사(模寫)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조영석은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의 "무릇 기예(技藝)를 가지고 윗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면 사류(士類)의 반열에 끼지 못한다"는 구절을 들어 "국가에서 도화서(圖畵署:그림을 담당하던 관청)를 설치한 것은 이런 일에 쓰기 위한 것"이라고 거절했다. 영조는 "그대의 소견이 잘못"이라며 섭섭해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조영석의 문집인 '관아재고(觀我齋稿)'에는 그의 그림이 남아 있는데, 그중 내의원(內醫院)이나 사복시(司僕寺) 소속으로 추정되는 관료들이 암소 젖을 짜는 그림이 있다. 미수 허목(許穆)이 지은 조경(趙絅)의 신도비(神道碑)인 '용주(龍洲) 신도비'에는 효종 1년(1650) 북사(北使:청 사신)가 와서 삼정승, 육판서, 육승지와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 관원들을 모아놓고 낙장(駱漿)을 베풀었는데, "조경이 홀로 받지 않으니 사신이 노한 빛을 띠었다"는 구절이 있다. 낙장은 우유와 쌀을 끓여 만드는 타락죽(駝酪粥)을 뜻한다.
조경은 타락죽이 여진족의 상징이란 뜻으로 거부했겠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명종 20년(1565) 대간에서 "사복시의 타락죽(�酪·수락)은 임금께 올리는 것인데 윤원형이 낙부(酪夫)에게 기구를 가지고 제 집에 와서 조리하게 했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있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원래 궁중음식이었다. 은초아(銀招兒)란 기구에 끓이는 타락죽은 10월 1일부터 임금에게 바쳤던 보양식이다. 10월을 맞아 여기저기에서 음식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지금은 흔해졌지만 과거에는 귀했던 음식이 타락죽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