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소설 ‘손님’이라는 책을 읽기 전까지 황석영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그리 아는 게 없었다. 단지 그가 월북 작가였다는 것과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배웠던 단편 소설 ‘삼포 가는 길’의 작가였다는 것뿐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어딘가 딱딱한 문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동시에 동생인 요섭과 형인 요한의 시점도 계속해서 바뀌는 바람에 책을 읽는 내내 집중을 해야 했다. 또한 나에게는 익숙치않은 북한의 사투리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옛 어른들에게서 고향이라는 말은 참 여러 가지 의미일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서 가족을 만나고 고향을 방문하기도 하지만 그 고향이 이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처음에는 무슨 향내나는 산열매 같은 맛으로 혀끝에 맴돌다가 발효시킨 생선의 썩은 냄새로 돌변하는 듯한'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다시는 고향을 아름다운 고향으로 기억하지 못하고 꿈에도 찾아볼 수 없는 고향으로 만들어버린 사연은 무엇일까.
'손님'은 반가운 손님이 아닌 마마의 또 다른 이름으로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는 섬뜩한 귀신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 민족을 반토막으로 잘라버린 미국과 러시아, 일본 같은 외세를 의미할 수도 있고 인간을 엄청난 비극으로 치닫게 만든 망령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귀신은 얼마나 무서운가. 반세기가 넘었지만 여전히 망령은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서 자신이 이 소설을 ‘황해도 진지 노귀굿’을 기본 얼개로 하여 열두 마당으로 소설을 썼다고 했다. 마치 굿판에서처럼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회상하도록 구성했다고 한다. 작가가 말하는 이 하나의 사건이란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졌던 기독교인들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손님이란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을 말한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사상이 동시에 우리나라에 유입됨으로써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역사적 사건을 작가는 되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천연두’ 라는 전염병이 돌아서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했던 것처럼 작가는 학살사건에 대해서 기독교도 마르크시즘도 절대 이 땅에서는 주인이 될 수없는 손님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의 대립을 이 소설 구성의 기본 얼개가 되는 굿이라는 틀 안에 담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의 중심 틀은 대립적인 구조에 있다. 단지 외부 손님인 마르크시즘과 기독교의 대립이나, 그들을 대신하는 인물들의 대립만이 아니라 각각 대립되는 두 항이 결합에 이르려는 과정이 시종일관 유지된다. 이러한 대립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수업과 소설의 내용을 연계시키기 위해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결국 손님의 큰 줄거리는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에서도 배웠던 내용이다. 곧 기독교인들과 공산주의자들 간의 갈등이 그것인데, 손님에서는 그 참혹함이 더욱 적나라하게 부각된다. 두 이념의 대립은 화를 초래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다. 누구를 위한 이념인가? 결국 이념이란 인간을 위한 것인데, 그러한 명분아래 인간은 배제되는 모순된 현실. 그것이 한국, 나아가 이 세계의 현실이다. 황석영은 그러한 현실을 소설로 풀어냈을 따름이다.
결국 내 가슴에 남은 말은 이것이다. 이념이 손님이라는 망령으로 변질될 때, 그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