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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진리와 존재 방식
김동원 시인 ' 평론가
환상
사랑은 죽음의 키스보다 더 달콤하다. 환희와 쾌락으로 심장을 뛰게 하는 사랑은 순수와 모순, 갈등과 욕망이 뒤엉킨 불의 언어다. 사랑의 시는 행마다 연마다, 귀를 열라, 가슴을 열라, 영혼을 열라 외친다. 이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람은 첫사랑이 없는 자이다. 사랑은 길을 가다가도 느닷없이 온 우주, 온 생명의 힘으로 안겨 온다. 사랑은 ‘영대(靈臺)’. 태초로부터 들려오는 어떤 이의 비밀한 속삭임이다. 사랑은 질투와 광기의 누설이다. 때로는 상처와 용서의 방식으로, 때로는 떨림과 울림의 방식으로 압화 된다. 하여, 사랑은 몸의 공허와 외로움의 절절한 비가(悲歌)로 현시된다. 사랑은 이별의 독주(毒酒)를 마시고 홀로 건넌 망각의 강이다. 추억은 폭력적이고 통증은 아득히 사라지는 휘파람이다. 결코 말할 수 없는 타자, 내밀한 공간의 비밀이다. 하여, 사랑의 문을 열면 거기, 환상의 창이 펼쳐진다. 눈빛은 달콤하나 속내는 간교하다. 사랑은 거짓의 마법이다. 불가능의 가능에 이르는 매혹의 기술이다. 하여, 사랑의 시와 기술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롭고 ‘낯설게 하기’이다.
고대가요 「황조가」에서부터 고려의 「가시리」, 황진이의 「동짓날 기나긴 밤」, 근대시 김소월의 「초혼」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한국 문학의 중요한 테제이다. 사랑의 패러독스는 ‘사랑하기에 사랑을 버린다’는 모순의 극치다. 첫사랑의 아픔을 비극적으로 다룬 김기림의 「길」, 백석과 기생 자야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유치환과 이영도의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가 낳은 「행복」, 제자 여대생과 애정 도피에서 탄생한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는, 수많은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그 밖에도 신비로운 연인의 눈썹을 초승달로 은유한 서정주의 「동천」, 천형(天刑)의 아픔을 애절하게 승화시킨 한하운의 「여인」, 비극적 사랑의 곡조를 천년 바람에 새긴 조지훈의 「석문(石門)」, 사랑에 미쳐 돌이 된 이성복의 「남해 금산」, 불륜을 달빛으로 투사한 문인수의 「간통」의 현장까지, 실로 현대시의 사랑과 이별의 존재 방식은 끝이 없다. 남녀가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는 것은, ‘아니마(남성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여성적 요소)와 아니무스(여성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남성적 요소)’의 심리적 성향과 요소 때문이다. 하여, 사랑이란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서정윤 「홀로서기」) 이렇듯, 남녀의 사랑은 서로 다른 하나가 새로운 하나로 승화되는 과정이며, 동시에 둘의 진리가 표출되는 현상이다. 누구나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 아니, 누구나 이별을 하면 철학자가 된다. 질투와 분노, 그 사랑의 틈입에서 시가 싹튼다. 사랑은 이별의 감정 앞에서 언제나 차갑다. 황동규는 「즐거운 편지」에서, ‘짝사랑은 너무나 간절해 사소한 일처럼 여겨진다’는 놀라운 역설을 발견하였다. 고은의 「가을 편지」는 ‘모르는 여자’를 빌어 남자가 야누스임을 간파하였다. 현대시 속에서 사랑은 언제나 이율배반적이다. 이수익의 「그리운 악마」는 애첩이야말로 사랑의 묘경임을 설파한다. 하여, 사랑의 명시는 미친 자만이 볼 수 있나 보다. “떠나고 싶은 자 / 떠나게 하고 / 잠들고 싶은 자 / 잠들게 하”라는, 강은교의 「사랑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녀에게 사랑은 직유이자 이별은 미완성이다. 김승희는 「장미와 가시」에서 모순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임을 암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녀에게 사랑의 고통은 ‘눈먼’ 자의 꽃이자 묘약이다.
이 장에서는 이전 시대의 사랑법과 현대시의 사랑법을 소개한다. ‘시대에 눌린 비참과 폐허의 비가’를 부르다 홀연히 사라진 기형도의 「빈집」, ‘부름과 호명의 방식으로 적요에 이른’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주체와 객체 사이 부재의 현존’을 노래한 안상학의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를 오간 이규리의 「많은 물」, ‘몽환적 화법으로 이국적 정서’를 그려낸 손은주의 「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타자의 복화술로 생사의 피안’을 건너간 최백규의 「레드 파라다이스」에 나타난 사랑의 진리와 존재 방식이 그것이다.
주술, 혹은 불길한 예감
차라리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나는 어떤 시에선가 불행하다고 적었다.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누군가 내 정신을 들여다보면 경악할 것이다. 사막이나 황무지, 그 가운데 띄엄띄엄 놓여 있는 물구덩이, 그렇다. 그 구덩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아직 죽음 쪽으로 가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 있는 이유를 그 물구덩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형도, 1988년「짧은 여행의 기록」중에서.
기형도(1960~1989, 경기도 안성 출생)의 시는 음습하다. 불길한 예감으로 휘몰려오는 검은 먹구름이다. 시대에 눌린 비참과 폐허의 노래다. 현실에 대한 절망과 고뇌가 몸부림친다. 80년대의 음화陰畫와 절규를 관통한 스물아홉의 비가(悲歌)다. 하여, 기형도의 “시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견디는 시의 강렬한 내구력이다. 그의 시 내부에서 떠돌고 있는 끊임없는 죽음에의 예감. 우리는 기형도의 시 도처에서 그 예감의 색깔로 물든 어느 푸른 저녁의 축축하고 불길한 안개를 만난다. 시인은 이미 그의 시 속에서 충분한 죽음을 살았다. (…) 그러므로 기형도의 언어들은 유예된 죽음의 언어들이다. 죽음에의 예감으로 끝없이 죽음 이후의 삶을 연장해가는 언어. 지금까지 우리 시에서 죽음과 절망을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았던, 그리고 그것을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의 성(城)으로 쌓아올렸던 시인은 없었다. 기형도, 그토록 치명적이고 불길한 매혹, 혹은 질병의 이름.”(『기형도 전집』, 1993, 문학과 지성사 표사)은 없었다. 그는 서울 종로 파고다 심야극장에서 뇌졸증으로 숨진 채 발견된다.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닥친 요절이다. 기형도는 예감과 비애로 가득한 슬픈 족속이다. 그의 시는 억압된 사회의 부조리에 눌린 압화이자 자폐적 나르시즘이다. 어두운 시대의 몽유(夢遊)이자 부정(성)의 시학이다. 이런 몽유와 자폐, 부정의 심리적 현실은 기형도에 와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현출된다. 1989년『현대시세계』에 첫발표된「빈집」(유고 시집『입 속의 검은 잎』, 1989, 문학과지성사)은, 사랑의 상실에 대한 낭만적 비극 시이다. 행과 행 사이의 속도와 긴장미는 압권이다. 이별의 상실을 통해 사랑을 호명하는 격리의 감정은 통절하기까지 하다. 어둠 속에 떠도는 몸 없는 것들의 환(幻)이자 부재를 말한다. 하여, 기형도의 시적 공포는 신경에 눌린 ‘내면적 자아’의 분출이자, “죽은 듯이 살아 있는 이유”이며, 불길한 예감이다. 딴은 영혼의 불모지이자, 구멍이다. 그 구멍은 “어디에서 왔을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빈집」 전문
「빈집」은 기형도의 죽음을 예언한 참언(讖言)의 시이다. 그는 지상을 버리고 영원한 천상의 시를 얻었다. 1989년 『현대시세계』에 처음으로 발표된「빈집」은, 이별의 통증에 대한 낭만적 비극시이다. “문을 잠그네”, “빈집에 갇혔네”에서 유추되듯, 그의 시는 언제나 죽음이 서성거린다. 말 속에 주술적인 힘이 들었음을 기형도의 시편은 증거한다. 「빈집」은 시인의 예민한 자의식의 불안이 술렁거린다. 하여, 이 시는 젊은 날의 좌절과 방황, 원죄에 대한 순결한 고백록이자 참회록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그의 단정적 알레고리는 깊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상실은 뼈아픈 법이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요절을 암시한 함의는 무겁다. 사적 서정이 시대적 암울함에 접목되어 우울하다. 사랑의 본질에 대한 화자의 고뇌를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낸 시구이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은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통과한 허무한 풍경이다. 젊음은 안개처럼 몰려와서 홀연히 바람 속에 사라진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그렇다. 그 무수한 사랑의 촛불들은 이별의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몽매했던 자신의 과거를 성찰과 후회로 번민한다. 기형도의 부정의 시학 속에 촛불의 밝음은 짧다. 사랑 뒤에 남은 이별의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은, 화자에게 극도의 환멸을 가져다준다. 그의 시작(詩作) 태도의 경건성과 정신적 염결성은 순결하다. 끝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에게 비탄의 노래를 부른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은 망설임과 공포를 지나 마침내 무화된다. 화자는 지금껏 겪은 모든 아픈 고뇌를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라고 체념한다. 실존의 외로운 절규는 뼛속을 파고든다. 기형도는 그렇게 「빈집」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고, 사랑의 “빈집에 갇혀” 죽음의 문을 열고 만다. 이승엔 오직「빈집」 한 채만 남긴 채, 저승으로 새집을 지으러 떠났다. 또다른 시 한 편을 보기로 하자.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허수경(1964~2018, 경남 진주 출생)에게 ‘적요’는 너머에 이르는 길이며 정신의 공터이다. 고비사막의 모래 폭풍를 뚫는 견인주의자의 참혹한 실존이다. 그녀의 “당신”은 절해의 고독한 섬이다. 은유는 그녀의 슬픔에서 흔들리는 불안이 된다. 조곤조곤 풀어내는 말의 징검다리는, 독특한 무의미의 화법이 된다. 사유의 내면 공간은, 숨은 현실의 메타포가 되어 ‘말줄임표’에 암유된다. “나”와 “당신” 사이의 알레고리는, 유정(有情)이자 무정(無情)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과 이별을 ‘부름’의 방식으로 호명한다. 호명이야말로 ‘지금, 여기’의 ‘현대성(modemity)을 가리킨다. 그리움의 공간, 그 너머의 아득함을 지향한다. 문(門)은 추상적 정신을 지나 “눈물”의 모호에 닿는다. 그녀가 보여준 어둠의 뼈와 풍경의 밖은 여전히 “끽끽거”린다. 리듬을 타고 언어를 뛰어넘는 내재율의 다층적 흐름은, 허수경만의 묘법이다. 한 자 한 자 고도로 균제된 형식의 시구는 무너지는 방식으로 일어선다. 죽은 자의 발화법 같기도 하고, 산 자의 웅얼거림 같기도 한 경계는 신이하다 못해 순수하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당신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진설 : 제사 때, 법식에 따라서 상 위에 음식을 벌여 차림
** 치병 : 치료약
*** 환후 : 상처
―허수경,「혼자 가는 먼 집」 전문
어쩌면 시는 삶의 뒤쪽을 들여다보고 애써 닦는 일인지 모른다.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은, 사랑한 당신과 이별의 상처가, 시적 화자에겐 참혹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당신’이라는 화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2인칭으로 사용된 당신은, 꼭 곁에 누가 있는 것처럼 주절주절 혼자 넋두리를 풀어낸다. ‘집'은 '당신'에게 있어 사랑과 추억이 깃든 곳이자, 상실과 이별이 함께한 슬픔의 공간이다. 집은 인간에게 잠시 쉬고 가는 쉼터이며 죽음의 또 다른 상징이다. 당신은 먼 곳(저승)에 있고 끝내 화자의 상처는 치유 받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의 무덤 하나씩 갖고 산다. 피해 갈 수 없는 엄혹한 실존이 우리를 한없이 외롭게 한다. 시 속에 보면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이란 구절이 나온다. ‘킥킥’이란 청각적 시어 사용이 묘음이다. 시 속에 청각적 이미지를 사용하면, 즉각적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다. 울음과 슬픔의 상황에서 생뚱맞게 '킥킥거린다'는 이완된 시어 사용은 그야말로 낯설기하기defamiliarization이다. 그런데 이 낯선 불협화음이 도리어 묘한 매력으로 다가선다. 이 웃음은 아마 웃음도 울음도 아닌, 화자만이 느낀 생의 비극이자 허탈이겠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시인의 상실감이, 시 속 화자에게 감정 이입돼 보편적 죽음의 의미로까지 심화된다. 당신이 또다른 신(神)이라면 “당신라는 말, 참 좋지요”. 「혼자 가는 먼 집」은 어쩌면, 화자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이상향에 대한 소망처럼 멀다. 인간은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에서 죽는다. 죽음이 있기에 늘 불안정하다. 누구나 혼자서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 그 어떤 것도 ‘나의 부재’를 대신해 줄 수 없지만, 화자는 ‘당신’을 통해 잠시 위로받는다. 허수경은 “50년대 정서로 현실의 삶을 응시하고 있으며, 통속적 가락으로 밑바닥 인생의 넋두리를 잘 형상화”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뽕짝’ 가락을 지녔으며, 진부하고 청승스런 대중 가락을 훌륭히 시 속에 재생”(이남호)한 성공한 시인이다. 아버지의 죽음 충격으로 9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2018년 머나먼 타국에서 54세의 아까운 나이로 밤하늘 별이 되었다.
부재의 현존
사랑은 노을을 먹고 자란 바람의 언어다. 쟁강거리는 달빛 소리가 난다. 어스름 깔린 저녁 강가 갈잎의 휘파람 소리가 난다. 하여, 이별은 짓물린 추억의 궤적을 혼자 닦는 작업이다. 얼레빗으로 고통스런 흔적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일이다. 너덜거린 가슴을 독주(毒酒)로 붓는 시간이다. 사랑은 아이러니다. 자아를 지우고, 타자를 지우고, 마침내 세계를 지운다. 하여, 사랑의 부재는 이별의 성소이다. 단절과 공허, 연속과 불연속, 끝내 해독 불가능한 시가 된다. 사랑의 명시는 보는 순간 심장이 먼저 안다. 체감한 날 것의 시어야말로, 심연의 통증을 치유할 수 있다. 사랑은 역설이다. ‘여기와 너머’를 관통한 통점의 행간이다. 사랑은 영감(靈感)과 계시로 응답한 이별의 거리다. 주체와 객체 사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불길이자 환(幻)이다. 그것은 빛과 색, 소리와 향기, 슬픔과 외로움이 스친 통로다. 하여, 사랑의 묘약은 호수에 비친 달빛을 건져 올리는 일이다. 고뇌의 정으로 아픈 기억의 편린을 새기는 작업이다. 안상학(1962~, 경북 안동 출생)의 시,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시집『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실천문학사, 2014)를 읽고 있으면, 시어의 살점은 아프다. 사랑의 통증과 이별의 슬픔은 적막하다. 행간을 거쳐 의미의 계단을 따라가면, 우리 역시 시인처럼, 그때 그 처녀를, 자유를, 그 사람을 노을 속에서 기다렸어야 했다. 붉은 심장에 불이 붙어 한 생(生)이 다 타더라도, 그 언덕 위에서 천년의 바람이 되어야 했다. “그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 다. 기다림과 그리움의 공간이 티끌처럼 사라질 때까지, 온몸으로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때 그곳에서 뿌리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안상학,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전문
절박한 시가 감동을 낳는다. 체험과 맞물려 사랑의 의미는 팽창한다. 사랑은 이별의 긴 한숨이다. 사랑은 사람의 수많큼이나 복잡계이다. 옮겨붙기만 하면 사랑은 대중에 폭발한다. 천지만물은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방황한다.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품는다. 사랑은 고통을 통과한 진실의 메아리와 같다. 새로움의 과잉과 눈물의 범람은 사랑시의 주적이다. 단절과 과장의 극대화는 사랑 시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이별은 침묵하고 사랑이 말할 때 명시가 된다. 안상학의 시,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는 억지로 사랑을 구부리지 않았다. 이 시는 어두운 시대의 민중들이 봄(자유)을 기다리는 아픈 사랑의 은유가 있다. 또한 시인의 어두운 내면에 귀 기울인 언어의 목소리와 살점과 뼈는 눈부시다. 행간 깊숙이 파고 들어가 사랑의 허(虛)와 실(實)을 자신만의 독법으로 꿰었다. 이 시는, 시어의 보폭이 매화 꽃잎 속 달빛 그늘인 양 서늘하다. 안고 뒹굴고 넘어가는 그 행간의 반복과 여운이, 읽는 이의 가슴 속에 저민다. 화자의 어긋난 운명의 애절함은 그래서 비극적이다.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현실 속의 그 처녀는, 시인에겐 한바탕 꿈이요, 돌아서면 사라져버릴 첫사랑의 그림자이다.
하여, 시는 눈물을 먹고 핀 불행한 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밤마다 절망한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그 무엇에 대한 갈구가 애절하다. 행이 끝나도 그 여운은 붉고 어둡고 깊다. 두 연인의 어긋난 시간과 공간의 레일은, 심장을 관통해 시가 된다. “~말아어야 했네” 그 간절한 숙명의 체념은, 오히려 이 시를 슬픈 이별의 노래로 승화시킨다. 불멸의 서정시에는 항용 사랑의 이별, 이별의 사랑이 있다. 밤낮 시마가 들러붙어 고뇌하는 시인은 영원하다. 아무리 그녀를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다녀도, 한 번 잃어버린 처녀는 다시 볼 수 없다. 그것이 시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정말이지, 부재의 방식으로 현존하는 그를 만나기 위해, 나는 거기 그렇게 서서 기다렸어야 했다.
사랑의 환영(幻影)
시는 ‘억압적 기제와 정제된 언어’의 페르소나이다. 하여, 이규리(1955~, 경북 문경 출생)의 사랑은 묘오하다. 그녀에게 사물은 몸이다. 어떤 성찰을 관통한 언어다. ‘변(變)과 통(通)’의 시학이다. 몸은 사물의 통로이자, 현실의 직지심경(直指心境)이다. 알레고리는 그녀를 먹는다. 그녀는 ‘마지막 입술 모양은 시란 말로 보였으면 좋겠어요.’라고 토로한 바가 있다. 그녀는 사물의 귀엣말을 어떻게 알아챘을까.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그녀의 시는, 매력적인 빗물의 숲이다. 바람의 기미를 알아챈 술렁이는 언어다. 행간의 자작나무 사이로 번지는 모호한 안개다. 그녀에게 몸은 주체와 객체가 공존하는 장소다. 그녀의 시는 가까우면서도 멀고, 멀면서도 가깝다. 시결은 흐르는 뭉게구름의 해체이다. 아니, 그 흰 것에 칠해진 붉은 노을이다. 현대시의 어떤 현란함에도 사뭇 비껴 있다. 사유의 형과 태를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는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내재율은 속수무책이다. 종결형의 어미는, 그녀의 귀를 잡고 조곤조곤하다. 무심한 말투와 응축된 묘사는 음표적이다. 언어의 점과 면, 선과 입체의 다양성을 연주한다. 그녀의 사막은 디스토피아적이다. 불안을 꽉 물고 있는 언어의 어금니는, 강하다. 사물의 비극적 페이소스는, 현실의 음화(陰畫)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에서, 그녀의 은유는, 잠깐 사라진다. 이규리의 3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는, 타자와의 관계를 ‘미학의 관점’으로 끌어올린다. 그녀의 시들은 일상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데려간다. 깨달음은 ‘절제와 균형 감각’에서 오는 현실의 방향등이다. 그녀의 독특한 사랑의 화법은, 원숙한 스킬(skill)을 지나 아트(art)의 세계로 진화 중이다. 「많은 물」을 보자.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다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이규리, 「많은 물」 전문
이규리의 시는 ‘표면의 시학’에 부합한다. (이수명의 말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기에 보지 못하는 표면을 보게 해준다.” 보이지 않는 방식을 통해, 보는 방식으로 치고 나온다. 물의 몸을 열어 가능한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법이다. 사물의 구상을 지나 비구상-추상의 미학으로 펼쳐내는 일련의 작업은, 이규리 시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체가 된다. 소재를 새롭게 발견하여 재해석하고, 이를 묘파하는 기법은 탁월하다. 「많은 물」(3시집『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은, 형상 미학의 측면에서 보면 독자적 언어 사용 기술이 돌올하다. “결국 다 젖게 하는 사람은 /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행간의 비극과 역설, 아이러니가 이 시에 깊이를 더한다.「많은 물」의 시적 상황은, 누군가를 좋아했는데, 그 사람은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고,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비극은 최고조에 달한다. 하여, 그것은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이 되고, “젖고, 아프게” 한다. 이규리는 어느 대담에서 시가 태어난 지점에 대해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비가 굉장히 많이 쏟아졌어요. 윈도브러시가 바삐 움직여야 할 만큼 비는 퍼붓고, 그 사람이 불현듯 보고 싶고, 비는 줄창 내리고, 온갖 상념이 너무 많아 갓길에 급주차를 했어요. 해놓고 보니, 내가 차 안에 있지만, 밖에 퍼붓는 저 비에 흠뻑 젖어있다는 느낌이 든 거죠. ‘한때는 생각만 해도 나에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인데, 결국 오늘 나를 젖게 한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아픔이 밀려왔죠.” 그는「많은 물」에서 그 사람과 비를 동일시한다. 사랑과 이별, 따뜻함과 차가움, 밝음과 어둠, 이런 사물의 양면들을 비극과 일치시킨다. 현실로 은유된 ‘윈도브러시’는 소재 선택의 압권이다. 결국 화자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슬픔의 질량을 반복해 밀어내어야만 하는 그것은, 아픔이자 애절한 몸짓이다. 서정시의 극치는 사랑과 이별 사이에 놓인 비극에 있다. 사랑의 갈등은 몸의 통증을 통과해 결국, 아이러니와 역설의 공간을 지나, 궁극엔 카타르시스를 낳는다. 모든 비극적 사랑의 결말이 다 그렇진 않지만,「많은 물」의 시적 모티프인 ‘윈도브러시’와 ‘빗물’, ‘막무가내가 된 나’와 ‘건너오지 못한 한 사람’은,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는 거리 속에 존재한다. 하여, 이규리 시의 전편을 관통하는 지점은, 사랑과 이별로 은유된 ‘환영幻影의 미학’이다.
산토리니, 지중해의 춤선
손은주(1975~, 경북 의성 출생)의 시는 대담한 구성과 실험적 이미지로 인한 낯선, 풍경의 돋을새김이다, 그녀의 화법은 이국적이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멈블링(mumbling, 중얼거리는 말소리)과 몽환적인 어투는 매혹적이다. 그녀의 시는 감성적이며 언제나 사랑의 울림과 떨림이 있다. 물결의 행간 속에는 노을의 웃음소리가 수평선에 잠긴다. 그녀의 언어는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다. 발랄함은 시의 리듬과 묘사를 돋보이게 한다. 서정을 치고 나와 현대시로 접근하는 힘이 강하다. 사랑의 화법은 수채화처럼 밝고 모던modern하다. 몽상의 이미지와 비밀한 심리의 사유 전개에는 내러티브가 있다. 하여, 손은주의 언어는, 섬과 섬 사이 이 시대 숨겨진 것들의 은유로 읽힌다. 모호와 난해 사이에서 그녀의 시적 본질은 번뜩인다. 「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3시집『애인을 공짜로 버리는 방법』, 시와사람, 2022)는, 그녀의 독특한 사랑법이다. 푸른 바다 에게해의 아름다운 섬 ‘산토리니’를 주제로 한 이 시는, 그녀의 밝은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낭만적이자 환타스틱한 이미지가, 지중해의 이국적 풍경 속에서 재구성된다. 시는 자유를 찾아가는 낯선 여행이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오로지 나를 찾는 과정이다. 삶은 오늘 이 순간 여기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꾼다는 아름다운 섬 ‘산토리니’를 통해, 그녀는 유토피아를 그린다. 「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제목은 벌써 우리를 먼 그리스로 데려간다. 기원전 15세기 화산 폭발 당시 모습 그대로 발굴된 산토리니는, 지중해의 보물섬이다. 새 둥지처럼 절벽 위에 세워진 ‘이아 마을’과 ‘피라 마을’은, 흰색과 코발트블루의 대비색으로 둘러싸인 동화의 섬이다. 집과 집 사이 미로 같은 골목, 끝없이 펼쳐진 남국의 햇빛과 아득한 수평선, 아슬아슬한 붉은 암벽 위의 카페와 식당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곳의 늙은 악사가 연주하는 이국적인 아코디언 소리, 푸른 바다 물속에 무작정 뛰어든 연인들의 비명은 천국 같다. 특히, 산토리니의 위스키와 와인을 마시며, 절벽 성곽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의 일몰은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하다. 이런 분위기의 시 「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전문을 보기로 하자.
부겐빌레아 꽃 지는 날,
정열은 죽었어요 그리스 에게해의 작은 섬에 갇혔죠
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
나의 사랑은 어디로 갔을까요
당신의 장례식장에선 울지 마세요
쪽빛 노을은 파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걸음마
하얀 수평선이 찰랑거려요
다시 돌아올 거란 말, 거짓말
위스키잔에 살짝 기댄 바람이 말해주더군요
사랑은 사탕이라 불러도 괜찮아요
이응을 빼면 사라가 되겠죠?
그렇다니까요 내 이름이잖아요
상큼한 오렌지 터트리며 우리 만나기로 해요
산토리니 씨 이아마을 색의 향연 보이나요,
지중해 물결은 영원히 죽지 않아요
나지막이 속삭이는 춤선
그러니까
내 안에 이별을 가둔 건 명백한 유기
이제 흩뿌려진 그 섬을 돌려드릴게요
아름다운 해변 선술집에서 만나요
산토리니 씨는 오늘부터 나와 사랑에 빠질 걸요
―손은주, 「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 전문
초승달처럼 생긴 ‘산토리니섬’을 “산토리니 씨”로 명명한 이 시에서 “부겐빌레아 꽃”속의 진짜 꽃은 작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듯,“그리스 에게해의 작은 섬”“산토리니 씨”의 존재 또한 미미하다. 존재하는 것은 이름을 불러 줄 때 홀연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말이다. 명사 ‘산토리니 씨’야말로 ‘섬’이란 언어의 깊이에 인간성을 투영한다. 그리고 그 섬에 신성한 마력을 부여한다. ‘섬’은 수평의 시간과 수직의 지층을 드러내며 웃는다. 수천 년 단절된 바다와 육지와의 내밀한 말을 거짓말처럼 복원한다. 손은주는 시를 통해 마법처럼‘섬’을 부린다.“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이 제목은 신기하게도 공감각적이다. 왜 이제야“나의 사랑”으로 온 거죠라고 되묻는 것처럼 여겨진다. 화산 폭발로 묻혔던“당신의 장례식장”을 빨리 잊어버리라고 위로한다.“쪽빛 노을”이 지중해에서“걸음마”를 배웠듯,‘산토리니 씨’의 인생도 이제는 아름다울 거라고 속삭인다.
“하얀 수평선”이 그렇듯, 물론 “다시 돌아올 거란” 사랑의 약속은 “거짓말”이다.“사랑”을“사탕”으로, 사탕을 “사라”로 유희한 말 부림은 절묘하다. 사라의 여성성이야말로 ‘산토리니 씨’의 남성성과 함께 멋진 대구(對句)가 된다. 그 두 이름은 “영원히 죽지 않”는 “이아 마을”의 흰색과 코발트블루로 찬란히 부활한다. “상큼한 오렌지”를 “터트리며” 손은주의 시 속에서 ‘산토리니 씨’는 극적으로 살아난다. 하여, 손은주의 사랑법은 “이별”의 또 다른 형식이다. 물론 그 출발점은 ‘산토리니섬’과 영원히 ‘상상’속에서소리 은유로 여행 한다. 「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를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종결형의 ‘~죠, ~요’의 반복적 리듬에서 오는 매력이다. 이런 화법의 반복은 그녀 시의 행간과 연 사이 압축과 비약을 푸는 중요한 열쇠이다. “지중해 물결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사랑과 사탕 사이, 산토리니는 지중해의 춤선이다.
극채(極彩)와 격절(隔絶)
최백규(1992~, 대구 출생)의 언어는 연대기적 시공간의 휨이다. 그의 시는 시간과 풍경의 상처이며, 사라진 나타남으로서 비극의 메타포다. 그의 시적 기법은 타자의 복화술 내지 실존을 관통한 피안의 거처에 있다. 그의 시는 미완을 추구하며 감정의 내러티브로서 은폐와 반사경, 혹은 주체(타자)의 불확정성에 기인한다. 딴은, 주체의 유령과 불안 심리가 지배적이다. 그런가하면, 다성성(多聲性)과 환유, 상징과 알레고리의 불연속면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적 경계는 ‘보다’와 ‘죽음’ 사이에 있다. 최백규가 갖는 이러한 포즈에는 불편한 진실과 자기 유(類)의 인디indie가 있다. 탁월한 부조(浮彫)의 언어와 균열이 그것이다. 그것은 닫힌 언어의 추상이자 열림의 가능태로서 영화의 장면 분할과 클로즈업에 해당한다. 그리고 시적 리듬은 힙합적이며 자아는 중층의 메타포로, 시적 진술은 일상의 착란과 징후로 이루어져 있다. 전도된 주체와 순수한 파생으로서 그의 언어는 소리와 접(接)한다. ‘다름’과 ‘차이’의 발견 내지 부조리의 해체로서 의미와 무의미의 중첩된 영역을 흡수한다. 작품 바깥에서 작품 내부의 의미를 규정하는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에 거부감을 갖는 그의 시는 언어의 해체와 실험의 경계 지점을 찌른다. 자의식이 강한 그의 시는 그 자체로서 전위적이다. 기존 언어 체계를 부정하며 언어와 이미지를 충돌시켜 파열시킨다. 최백규의 상상과 감각은 참신하고 이채를 띤다. 이는 시제를 통해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텍스트의 현관玄關에 해당하는 시제는 시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규정한다. 데뷔작 「얼룩의 반대」만 하더라도 도로 표지, 즉 ‘횡단보도’라는 세계, 그 안과 밖을 피아노의 흑백 건반과 대비하면서 상상력의 공간 확대를 꾀한다. 얼룩이 유와 무의 경계와 흔적이라면 그 너머-반대엔 무엇이 있는가? 그가 내심 추구하는 미래시에는 난해와 비약이 주를 이룬다. 그런 만큼 형식과 문체가 파격적이다. 또한 포노사피엔스phonosapiens의 언어를 추구하는 미래시는 기술-문명 지향적이며 산문 지향적이다. 최백규의 시어는 카피적이며 그 신경망은 양자역학적이다. 느닷없이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는 디지털 기호가 그것. 그럼 여기서 최백규의 시 「레드 파라다이스」를 보자.
커튼을 치고 음악 소리는 나머지 틈 정도만 키워줘
너의 손톱은 왜 그렇게 파란 걸까
모든 것이 저물어갈 즈음 우리는 서로 다른 노을 앞에 서 있어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거라 했었지만 모두 다 거짓말이야
시계 초침은 태양이 각도를 뒤집을 동안 겨우 제자리를 움찔거렸지
고장 난 시간만 바라보다 둥근 어제를 떠올렸어
네가 나의 반대편으로 허리를 구부릴 때
피어나는 동그라미의 안쪽
손목 위를 맴돌던 햇볕의 흔적이 지워지면 너의 따뜻함도 잊혀질까
얼어붙은 구름 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모양인가 봐
우리는 그저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 우리만의 모닥불을 간직하자
시든 봄마저 꽃을 틔우기 시작했으니까
계절들이 조도를 낮출 때마다 방 안 온도를 체크해야 할 것만 같아
따뜻한 노랑과 뜨거운 빨강의 차이를 알고 있니?
문득, 오후가 너무도 커다랗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길 건너 차들도 하루의 끝으로 이어진 주파수를 맞추고 있잖아
오늘의 라디오 기상캐스터는 날짜변경선 근처 어딘가에 영원히 머무르지
이제 머지않아 천장에서 비가 쏟아져 내릴 거야
타오르는 계절이 창틈으로 새어나가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너의 옆자리에 나란히 누워 붉은 달로 떠올랐어.
―최백규, 「레드 파라다이스」 전문
「레드 파라다이스」는 언젠가 부산 모텔에서 실제 일어난 여대생 동반자살을 모티브로 하였다. ‘레드 파라다이스’는 피로, 뜨거운 빨강으로 차고 넘치는 죽음의 천국이다. 존재의 의미를 부재의 끝까지 밀어부침으로서, 실존을 성찰케 한다. 이런 유니크한 제목이야말로 얼마나 역설적인가. 둘은 “커튼을 치고 음악”을 들으며 나란히 누워 지상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다. “너의 손톱은 왜 파란 걸까” 멜랑콜리의 극치다. 머지않아 죽어 “서로 다른 노을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세상 밖은 “비가 올 거라 했었지만 모두 다 거짓말이야” 어쩌면 이별은 순간의 영원, 영원의 순간일지 모른다. 하여 나는 “고장 난 시간만 바라보다” 너의 “손목 위를 맴돌던 햇볕의 흔적”에서 자해의 흔적을 발견한다. 사랑은 둘이라는 하나, 즉 죽음의 진리 사건이다. 동성애의 이미지에다, 죽도록 사랑하여도 그들에게 “내일 아침이 올”까. 세상의 “일기예보”에서도 암시하지만, 결코 구원의 “비”는 오지 않을 터. 둘은 “계절들이 조도를 낮출 때마다 방 안 온도를 체크”하다, 종내 각자 사라진다. “인류는 사라짐을 발명한 유일한 종(種)이자, 사라짐의 예술”(장 보드리야르,『사라짐에 대하여』)이다. 아무리 “반대편” “허리를 구부”리며 껴안아도, “따뜻한 노랑과 뜨거운 빨강의 차이를” 사라진 이들은 알지 못한다. 노랑과 빨강은 그 사라짐의 방식으로 나타난 세상의 시선이자 극단적 색채이다. 「레드 파라다이스」는 세계와 대지의 감춤과 드러냄, 아니 불가능한 가능성의 소통이다. 차이의 생성이다. 이를 통해, 고립된 개인과 개인의 절규는 ‘붉은 천국’으로 번신(翻身)한다. 연민과 냉온감각 이미지는 최백규 시의 특장이다. “나는 너의 옆자리에 나란히 누워 붉은 달로 떠”오른다. 레드의 파라다이스가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