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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의 자랑 宗宅
韓國古文獻硏究所 所長 徐守鏞
종가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 종가의 건물
·종묘(宗廟)와 가묘(家廟), 종은 높다는 의미.
○ 현조(顯祖)는 누구인가?
"세상의 현인군자(賢人君子)와 명공거경(名公巨卿)들로서 그 학문이 족히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하고
그 공훈(功勳)과 덕망이 족히 후세에 자랑할 만하여,
이것이 역사의 문헌에 기록되고 종정(鍾鼎)과 이기(彝器)에 새겨진 자는 굳이 이를 전하기 위해
연보를 만들 필요가 없을 것도 같다.
그런데도 오직 이들만이 연보가 있을 뿐,
그 이외의 사람들은 정작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것은 곧 스승에 대한 그 제자들의 경우나 선현에 대한 그 후생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다들 눈과 귀로 보고 들어서 그 속에 젖어들었으며 이를 마음과 정성으로 열복(悅服)할 뿐 아니라,
그 수집한 것들이 모두 그들의 손에서 나온 것들로서 역시 각기 그들이 존경하는 자를 존경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한 가문에서 연보를 가진 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를
‘명조(名祖)’니 ‘현조(顯祖)’니 하고 일컬으니,
이런 분은 수십 대에 걸쳐 불과 한두 분이거나 아니면 서너 분에 불과하며
결코 빈번하게 있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그것이나 선현에 대한 후생들의 그것으로 말하면
각기 그들이 존경하는 분만을 존경하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이 없지만,
만약 자손된 자의 처지로 말한다면 자신의 조선(祖先)은 어떤 분이나 다 존경스러운 분이요
또한 다들 명조이고 현조인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더러 이를 구별하고 선택하여
어느 할아버지는 명조이고 어느 할아버지는 현조라고 하면서
이분들만 특별히 자세하게 하고 다른 조상들은 모두 이를 생략해 버린다.
아, 그렇다면 이는 바로 자기 부조(父祖)에 대해 그분들의 나이가 많고 적음을 따져서
그 존경하는 마음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는 것이라 하겠으니,
이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圭:1855, 철종6~1907. 8. 19.)
· 가풍(家風) 가학(家學)
"전(前)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최창대(崔昌大)가 졸(卒)하였다.
최창대의 자(字)는 효백(孝伯)이요 호(號)는 곤륜(昆侖)으로,
문정공(文貞公) 최석정(崔錫鼎)의 아들이다.
청명(淸明)하고 고랑(高朗)하여 빛나기가 빙옥(氷玉)과 같았고,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경전(經傳)과 백가(百家)를 깊이 연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720년, 4월 22일
"신은 청신(淸愼)을 세업(世業)으로 삼았고 근졸(謹拙)을 가학(家學)으로 삼아,
영광된 벼슬길에서 무리들의 선두가 되지 않겠다는 신조를
나름대로 평소 이마에 붙어 있는 부적처럼 지켰습니다.
" 전라감사 이호준 상소문
· 가범(家範)
·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詠始祖太師事 示同宗諸君
淸陰 金尙憲
麗代論功在史編 려대론공재사편 고려 인물 공 논한 게 역사책에 있거니와
煌煌吾祖冠張權 황황오조관장권 찬란할사 우리 선조 장 씨 권 씨 위에 있네
一時帶礪還餘事 일시대려환여사 한 시대에 대려 하신 거야 되레 여사이니
淸白傳家八百年 청백전가팔백년 청백함을 전해 온 지 팔백 년이 되었구나.
○ 후손들로 어떤 인물이 배출되었나?
○ 종부와 종손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대(代)를 이어왔나?
· 족보 보기
· 혼인 관계
○ 종가의 대표적인 음식은 무엇인가?
· 경당 장흥효 선생 종가
○ 종가의 저술과 야담(野談) 일화(逸話)
정재 류치명 종가의 가세영언(家世零言) 이야기
“양파공(陽坡公)이 근검하시와 벼슬이 높아져 귀히 되셔도 손수 하인의 일을 하시니
하루는 나라의 승소(承召)를 받아 역마를 타고 풍악(風樂)을 잡히고 집을 떠나시다
홀연히 말을 돌려 돌아오셔서 부엌의 재를 쳐내시고 흙 한 삼태기를 부엌 바닥에 깔고
다시 말을 타고 가시는지라 서리(胥吏)가 그 연유를 물으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릴 적부터 매양 흙을 파다가 부엌에 깔고
그것을 이튿날 끌어내고 다시 까는 일이 일과이더니 오늘은 내가 벼슬길을 떠난다고
마음이 잠시 해이해져서 잊은 것이다 하시거늘 그러면 나으리가 출타하시면 어떻게 하시나이까? 하니
내가 집에 없으면 밥을 아니 먹으니 관계없다 하시더라.”
“(양파 류관현의) 증손 정재 선생은 대산 이 선생의 연원으로 도학에 통달하시고
급문록(及門錄)에 기록된 문인이 육백여 분이고 대과에 급제하셔서 벼슬은 가의대부 병조참판이시고
외직은 초산부사를 지냈는데 초산서 회가(回駕: 집으로 돌아옴)할 때 진지 지을 쌀이 없어서
아랫마을 망지내 댁에 가서 쌀을 꾸어서 밥을 지었나니라.
부인께서 평생 모시치마를 입어보지 못하였다가 선생이 초산부사를 가시게 되자 말씀하시기를
사랑에서 지금 만금태수를 가시니 모시치마를 입어보겠다 하셨으나
불행히 돌아가시니 관 안에 모시치마를 썼나니라.
선생은 그후 계묘년 구월 이십오일 본가 길사(吉祀) 시 도유(道儒) 향유(鄕儒) 문친(門親)
육백여명이 모인 도회석상에서 불천위로 결정하여 봉사하게 되었나니라.”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된 안동의 종가
■임청각정침군자정
臨淸閣正枕君子亭
보물 제182호(1963.1.21)
안동시 법흥동 20
임청각 정침과 군자정은 안동에서는 임청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가 500여 년간 세거(世居)해온 집이다.
이 집은 고성(固城) 이 씨(李氏) 임청각(臨淸閣) 이하의 종택이다.
고성 이씨의 시조 이황(李璜)으로부터 씨족의 역사가 시작되어
8대손에 행촌(杏村) 이암(李嵒, 1279-1364)이 났는데,
이 분은 고려 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냈고 당시를 대표하는 명필로 이름난 이다.
그 10대손에 이르러 이원(李原, 1368-1429)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좌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청백리(淸白吏)로도 이름났다.
그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처남이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장인이기도 하다.
이 분의 6째 아들에 이증(李增)이란 이가 안동으로 낙향했다.
안동의 고성 이 씨 입향조인 이증은 당시 지역을 대표하던 12인과 함께 우향계(友鄕稧)를 조직해
향촌사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증의 셋째아들이 임청각 이명이다.
이명의 6째 아들에 반구옹(泮鷗翁) 이굉(李肱, 孫壻에 謙菴柳雲龍)은 부친인 임청각의 유지를 받들어
집을 맡았다.
이는 임청각 재세시에 ‘여섯째 아들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이 당시로 보면 임청각은 여섯째 집이 잘 된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그 가세(家勢)가 좋았다.
다시 대를 이어 17대손인 석주 이상룡에 이르러 3형제였다가
그 이하 양대(兩代)의 외동을 거쳐 20대에 이르러 다시 6형제의 번성함을 이루었다.
용헌(容軒) 이원(李原)의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 1419-1480)이
경기도 광주(廣州)로부터 안동 산수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이거 해 정착했다.
증의 둘째아들 낙포(洛浦)이굉(1441-1516)의 후손들은 안동'귀래정파(歸來亭派)로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아서 이 집을 ‘안동 고성 이 씨 종택’이라고 불러서는 온당하지 않다.
1557년(명종 12)에
수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함재 서해는 퇴계의 제자요 약봉 서성의 부친이다.
임청각의 종통은 그 아랫대에서 맏이에게 내려가지 못했던 것 같다.
장자(長子)인 요는 비안현감과 초계군수를 지내 임청각을 떠나 있었고
분재 당시 이미 당사자와 아들이 세상을 떠났으며 손자는 어린 상태였다.
그래서 재산을 줄 수 있었으나 제사를 맡길 입장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아들들 역시 사정이 있었고 종통을 여섯째 아들인 반구정이고에게 맡긴 것이다.
이는 근자에 발견된 분재기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으로, 그간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영산현감 이증의 셋째 아들 형조좌랑 이명(李洺)이 중종 때 건립한 정자는 평면이 ‘정(丁)’자형인
누(樓) 집으로 된 조선 중기의 별당형 정자 건축이다.
목조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어 온 오랜 건물이다.
임청각(臨淸閣)이란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登東皐以舒嘯),
맑은 시냇가에 시를 짓기도 하노라(臨淸流而賦詩)’에서 따온 것으로
바로 임청각 앞을 흐르는 맑은 물과 명미한 영남산 양지바른 곳에 터전을 잡은 본 건물과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임청각 11대 종손인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은 명품의 산수화를 남기기도 했다.
17대 종손인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임청각 이명의 17대 종손이다.
농암 이현보, 백사 윤훤 선생 등 제현의 시판이 게판 되어 있다.
임청각은 퇴계 선생 친필로 알려져 있다.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묘소는 대전국립묘지에서 서울동작동국립묘지 임정묘 옆으로
1996년 5월 26일 옮겼다.
임청각은 영남을 대표한 장서가로도 이름났는데 그 대부분의 장서는 고려대학에 기증되어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석주문고(石洲文庫)로 운영 중에 있다.
임청각은 현재 21대 이창수(李昌洙)가 종손이다.
안동의 고성 이씨들은 인조반정 이후 동족(同族)인 이괄(李适, 增 아우의 5대손)의 난으로
사환(仕宦)이 얼마간 막혔다.
그 뒤 임청각 명(洺)의 8대손 청옹(淸翁) 후영(後榮)이 숙종 10년에 이르러 비로소 문과에 급제했다.
그 뒤 9대손 팔회당 이시항이 경종 1년에, 시항의 증손인 대계 이주정이 정조 19년에 각각 문과에
급제해 벼슬에 나아갔다.
이 집에 관해서 참고해 볼 책은 석주유고(石洲遺稿, 고려대학교, 석주 이상룡 문집, 1973),
명가의 고문서(한국정신문화원장서각, 2003), 한국간찰자료선집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 편(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독립투사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
국역 허주유고(이종악 저, 서수용 역, 2008) 등이 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2008년에 상하 2 책으로 석주유고를 국역 간행했다.
국역 석주유고는 이상룡 선생의 문집이면서
독립운동 현장의 기록이기도 한 석주유고와 석주유고 후집을 완역(完譯) 한 것으로 국판으로
상하 1천 484쪽 분량이다.
이 책에는 석주 선생의 개인사는 물론 박은식, 안창호, 김좌진, 김창숙 등
1910~1920년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까지 수록되어 있다.
임청각 이후 알아둘만한 역사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반구정 이굉(李肱, 1414-1516) 여섯째 아들 예빈시별제, 안동에 반구정을 짓고 은거.
어은 이용(李容) 손자 후릉참봉 지냄, 벼슬을 버리고 은거.
청옹 이후영(李後榮, 1649-1711) 7대손 문과급제 병조정랑 지냄
허주 이종악(李宗岳, 1726-1773) 11대 종손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 17대 종손 건국공로훈장 단장(1962)
동구 이준형(李濬衡, 1875-1942) 18대 종손 건국훈장 애족장(1990)
소파 이병화(李炳華, 1906-1952) 19대 종손 건국훈장 국민장(1990)
■법흥동고성이씨종택
法興洞固城李氏宗宅
중요민속자료 제185호(1984.1.10)
안동시 법흥동 9-2
조선시대 양반집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는 집이다.
고성 이씨 탑동파(塔洞派) 종택으로
임청각(李洺)의 현손(玄孫)인 이적(李適, 탑동파 파조)의 증손인 이후식(李後植)이
1685년에 안채를 건축하고 그의 손자 이원미(李元美)가 사랑채와 대청[永慕堂]을 완성했다.
이 집터는 신라시대 고찰인 법흥사의 굳이(舊址)였다 한다.
지금도 종택 앞에는 국보 제16호로 지정된 7층 전탑이 있다.
대청의 북쪽에 사이를 두고 배치되어 있는 북정(北亭)은
소유자의 7대 조로 진사인 북정(北亭) 이종주(李宗周)가 1775년에 건립한 것이다.
안동댐 입구에 있는 임청각을 좌측으로 보면서 안쪽으로
법흥동 영남산 동쪽 기슭에 좁은 계류를 끼고 있는 넓은 대지에 종택이 들어서 있다.
수려한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또 연못과 화단 등을 조성해 도회 속에 있으면서도
속진을 벗어난 한적한 산간 저택의 정취를 자아낸다.
1824년에 대수리를 했고, 1991년 정침을 개축했다.
연못 뒤에 보이는 건물은 별당형식으로 당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다.
이 집은 안동의 ‘고성 이 씨 법흥파의 종택’으로, 이를 ‘안동 고성 이 씨 종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안동의 고성 이씨는 크게 임청각 종파(宗派)와 탑동파(塔洞派)로 나누어지는데,
팔회당(八懷堂) 집은 탑동파에 속하고,
파조인 이복원(李復元)의 5대손이 팔회당 이시항(李時沆)이며,
8대손이 대계 이주정이다.
안동 임청각 지하의 족보를 살펴보면,
이보향 이래로 조선시대에 안동 지방의 문과 급제자 총수는 366명인데,
그 가운데 고성이 씨가 9명이다.
임청각 이명의 셋째아들인 이반이 중종 9년(1514)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 분의 숙부인 이굉(안동 歸來亭派) 역시 문과에 급제한 분이다.
임청각 종파에는 숙종10년(1684)에 청옹(淸翁) 이후영(李後榮)이 문과에 급제했으며
그 이후로는 배출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탑동파 지하인 팔회당집에서는 팔회당 이시항(李時沆)이 경종 원년(1721)에 문과에 급제했고,
그의 증손자인 대계 이주정이 정조19년(1795)에 잇달아 문과에 급제해 가문의 성예(聲譽)를 드높였다.
■금역당 사당 및 종가
琴易堂祠堂 宗家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5호(1973.8.31)
안동시 송천동 1017
퇴계 선생의 고제인 임연재(臨淵齋) 배삼익(裵三益)의 종택이다.
이 집은 지정 당시 임연재의 아들이며 역시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금역당 배용길의 사당으로 인해
금역당 사당 및 종가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역당, 사당, 종가 등 총 3동의 건물은 일명 ‘임연재(臨淵齋) 도목촌(桃木村)’이라고 하며
안동댐 수몰로 1973년 12월 월곡면 도목리에서 현 위치로 이건 된 것이다.
‘임연재’는 퇴계 선생의 제자인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의 당호로, 글씨는 직접 스승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하며 현재 종택에 소장되어 있다.
금역당은 임연재의 맏아들 배용길(裵龍吉, 1556∼1609)의 당호다.
임연재(臨淵齋) 종가는 흥해 배 씨 득관조(得貫祖)인 고려 말 훈신 배전(裵詮, 興海君)의 셋째 아들인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의 종택이기도 하다.
백죽당으로부터는 21대 6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가다.
백죽당은 그 호와 이름에서 시사하는 바, 올곧은 선비였다.
그는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뒤에 안동 지방으로 낙향했고, 증손(曾孫) 대에는 영주 풍기로,
현손(玄孫) 대에는 경북 봉화로 터전을 옮겼으며,
5대손 대에 이르러 다시 백죽당이 터전을 잡았던 안동 금계로 환향했다가
400년 터전인 안동시 예안면 도목(道木里)에 새 터를 잡아 전거(奠居)했다.
도목리의 신기(新基)는 임연재의 부친인 참판공 천석(天錫)과 임연재 그리고 임연재의 아들인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 삼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그 기반이 공고하게 닦였다.
특히 임연재 종가가 있었던 도목(道木)은 임연재 금역당 두 분이 퇴계와 서애의 문하에 각각 들었고,
또 문과에 급제한 뒤 사환과 임란에 공을 세움으로 인해 흥해 배 씨의 현조(顯祖)가 된
유서 깊은 400년 터전이었다.
그런데 국가 정책으로 인해 400년 문조강산(文藻江山, 人文으로 명성이 높았던 지역)이 하루아침에
‘수국(水國)’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때 이향(離鄕)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실향민’이라 칭하며,
‘이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갈 수 있지만 자신들은 그보다도 못하다’고 한탄해 마지않는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종택이 1973년 9월 13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안동시 송천동 1017번지로 터를 잡아 이전될 수 있었다는 정도다.
후손들은 종가 이전을 계기로 형편을 불계하고 성금을 모아 진입로를 개설하고 담을 축조함과 아울러
4천여 평의 토지도 구입했다.
당초 종가는 광복 후 혼란기에 도목의 종가를 비워둔 채 봉화 선재(先齋)로 우거 중에 있었다.
그래서 새 터전이 마련되자 1980년 3월 27일 현 위치로 환안(還安)했다.
이 집 이야기는 600년을 이어 인구에 흥미롭게 회자되고 있다. 백죽당은 지조 높은 선비면서도
덕망을 갖춘 교육자였다.
자제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그 교과 과정이 엄중하면서도 대하는 태도는 너그러웠다.
어느 날 2, 3, 넷째 아들을 죽림사(竹林寺)라는 절에 글공부하라고 보냈다.
얼마간 아무 기별이 없자 백죽당은 궁금한 나머지 절을 찾았다.
이때 세 자제들은 여가를 보아 기생까지 불러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얼른 기생을 이불에 감싸 방구석에 밀쳐두고 부친을 맞았다.
이때 백죽당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고 잠시 앉았다가 시 한 수를 벽에 남기고 자리를 떴다.
一裵一裵復一裵 일 배 일 배 부일배
三裵會處春風廻 삼배회처춘풍회
名是竹林非但竹 명시죽림비단죽
竹林深處桃花開 죽림심처도화개
첫 구절은 세 아들을 마치 ‘한잔 먹고 또 한잔 먹세(一杯一杯復一杯)’에서 따온 느낌이다.
두 번째는 세 사람의 배 씨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에 춘풍, 즉 술기운이 만연하다는 말이다.
선비들이 있는 곳이라면 ‘서권기(書卷氣)’ 즉 책들이 가득하며, 그래서 문자향(文字香)이 있어야 했다.
더구나 세 아들은 기생까지 불러들여 술판까지 벌이고 있었다.
매우 실망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셋째와 넷째 구절은 이 시의 압권이라 할만하다.
공부하고 있는 절 이름이 죽림사다.
대나무(竹)의 이미지는 곧다.
그래서 선비가 즐겨 이와 벗했다.
부친인 자신 역시 이 대나무에서 따 아호를 백죽당이라 했다.
마지막 구절의 ‘대나무 숲 깊은 곳에 복숭아꽃이 피었네(竹林深處桃花開)’는
갑작스럽게 수습해 방구석으로 밀쳐둔 기생을 풍자한 것이다.
이 일화를 보면서 교육이란 강함과 유함을 조화롭게 써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뒷날 이들 삼 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그래서 이로부터 안동 지방에서는 ‘배문남무(裵文南武, 배 씨들은 문과, 남 씨들은 무과가 많이 났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임연재는 중국 진사사(陳謝使)의 정사(正使)를 수행했다.
임연재의 사행은 전해의 사신들이 거듭된 임무수행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잘못에 따른 외교적 마찰을
무마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지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지만, 그 직을 사임하고 명을 따랐다.
호조참판 직을 받아 1587년 6개월에 걸친 사행 길을 떠났다.
이 사행을 통해 임연재는 개국 이래의 중요 외교현안이었던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까지 바로잡아 오는 성과를 거둔다.
사신에게 명나라 황제는 선조에게 곤룡금의(袞龍錦衣)와 각종 비단을,
정사에게는 옥적(玉笛)과 앵무배(鸚鵡杯), 상아홀(象牙笏)을 하사했다.
종가에는 이외에도 조천별장(朝天別章) 건곤(乾坤) 두 첩(帖)이 남아 있는데,
조롱 홍성민(이조판서), 파곡 이성중(호조판서), 사양 심충겸(병조판서), 호봉 송언신(이조판서),
동원 김귀영(좌의정), 남악 윤승길(좌찬찬), 일휴당 금융협(익찬), 서간 이제민(좌참찬),
송당 황윤길(참판), 죽곡 이장영(부사), 매촌 이유(현감), 이정호(목사), 송암 권호문,
아계 이산해(영의정), 송당 유홍(좌의정), 신암 이준민, 송간 황응규(돈녕부사), 청암 권동보(군수),
서경 유근(좌찬성), 모당 홍이상(부제학), 준봉 고종후(현령), 노조 이양원(영의정), 간재 이덕홍(현감),
이교, 식암 황섬(대사헌) 등 여러 선현들의 격조 있는 필치를 감상할 수 있다.
임연재 14대 종손은 배재진이다.
■묵계서원 및 묵계종택
默溪書院 默溪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9호(1980.6.17)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35-1, 705
이 건물은 응계(凝溪) 옥고(玉沽, 1382∼1436) 선생과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 선생을 봉향(奉享)하는 서원으로
숙종 13년(1687)에 창건되었다.
보백당 선생은 조선 초기 성종 때 행 대사성(大司成) 증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시호 정헌공(定獻公)인
명현(名賢)이며, 응계 선생은 세종 때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지낸 바 있다.
안동 김 씨의 시조인 태사 김선평의 10 세손으로 조선 중기 안동 소산 출신의 학자요 정치가였던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가르침에
‘오 가 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 ‘우리 집안에는 세속적인 의미의 보물은 없다.
그러나 정신적인 의미의 보물은 청백이란 것이 있다’는 것이 있다.
이는 후대의 청음 김상헌의 백세청풍(百世淸風) 정신과도 연결된다.
그는 1430년(세종 12) 2월 풍산 불정동(현재 풍산읍 하리동)에서 태어났다.
31세에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며,
32세에 성주교수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고을 수령으로 나가서는 청렴함과 은혜로써 백성을 다스려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강직함과 청렴함으로 정치에 임하여 모든 관리들의 귀감이 되었다.
사림파의 거두였던 김종직과 도의의 친교를 맺었으며,
관직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선생은 50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때 사헌부 감찰에 올랐으나,
강직한 성품이 조정에 용납되지 않아 53세에 고령현감으로 나아가서 청렴함과 은혜로써 밝게 다스려
좋은 치적을 거두었다.
55세에 사간원 정언이 되어 천재(天災)와 당시의 폐단과 인사행정의 문란함을 논계했다가
권신들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이듬해에 홍문관 교리, 홍문관 부교리, 그 이듬해에는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으며,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을 때마다 벼슬은 높아졌다.
62세에는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으로 있다가 63세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풍산과 안동 길안(吉安)의 묵계(默溪)를 오가면서 휴양하였다.
65세에는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66세에는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어,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으며, 이듬해에 시정의 부조리로 인한 폐단을 척결할 것을 간언 했으나 용납되지 않자
즉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는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권신(權臣)들이 정권을 천단함에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우국충정으로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당초 안동 풍산에 ‘보백당(寶白堂)’이란 아담한 서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림파가 새로운 세력을 이루게 됨에 이를 싫어한 훈구파들이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 사실을 비방한 글이라 하여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 고해,
탁영 김일손 등 많은 사림파 출신 선비들이 피화되었다.
이에 김종직과 가까운 사이였던 선생도 의금부에 갇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그 해에 대사간이 되었으나, 다시 의금부에 잡혀가 고문을 당했으니,
그가 사간원에 있을 적에 자주 외척들과 권신들의 농간을 탄핵하였던 바 이들이 이 기회를 타
보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억울함이 밝혀져 풀려나 다시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지난 사건으로 인해 재차
의금부에 갇혔으니, 70 노구로 몇 년 사이에 18번이나 신문을 받았다.
다섯 달 동안의 형벌을 받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학문과 후진양성에 골몰하다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고종 6년(1869)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뒤에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와 진덕문,
동재(東齋) 건물 등을 복원하였다.
또한 서원 옆에 보백당 선생 신도비와 비각을 건립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각기와 지붕 건물로 가운데 3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온돌을 들인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서원 좌측에는 이를 관리하는 정면 6칸 측면 5칸의 ‘口’ 자형 주사(廚舍)가 있다.
종택과 서원은 100m쯤 구(舊) 고갯길을 올라 왼쪽에 서원이 있다.
서원은 복설령을 받았지만 아직 복원하지 못했다.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가운데 묵계 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종택 내에는 보백당(寶白堂, 東農金嘉鎭 筆)이 있는데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제청(祭廳)으로 사용되고 있다.
보백당은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의 둘째 아들이다.
백형은 김계권이며 맏조카는 학조(學祖) 대사다.
그는 세조 당시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고,
고승 신미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국사로 추앙되었다.
또한 맛집 조카 김영추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다.
백당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맡은 참봉, 둘째 셋째는 진사로 아버지가 물려준 가훈인 ‘청백(淸白)’을 지키며 살았다.
딸은 예천 금당실 박눌에게 시집가 다섯 아들을 낳아 모두 문과에 급제를 시켰다.
후손인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1567, 명종 22-1629, 인조 7)은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 구미당(九未堂)에 복거 했다.
그는 월천 조목과 영주에서 명망이 높았던 대사간 소고 박승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한강 정구에게도 배웠다.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예조정랑, 승지 등을 지냈다.
1614년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종손(宗孫)은 김우현(金玗顯)이다.
■긍구당
肯構堂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2호(1973.8.31)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612
이 집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 종택의 별당 건물로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이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종택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종택 별당건물이었던 이 집이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농암 선생 종택의 상징적인 건물로서 영천(永川) 이 씨(李氏) 예안파(禮安派) 파조(派祖)인
소윤(少尹) 이헌(李軒) 공이 분천리(汾川里)에 지은 것이다.
종택과 문중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대개 이곳에서 결정되었다.
농암 선생 당시 이미 많이 퇴락하여 아들인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이 중건하였다.
현판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의 글씨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집으로 앞면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달아 개방하였다.
원래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5년에 농암을 시축(尸祝)한 분강서원(汾江書院)과 함께 도산면 운곡리로 옮겼다가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집단화했다.
‘긍구당’이란 『서경(書經)』「대고 편(大誥篇)」에 나오는 구절로 ‘조상의 업적을 길이길이 이어
받으라’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老眼)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 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하여라
농암이 76세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지은
시조 농암가(聾巖歌)는 선생의 탈속한 삶을 잘 드러낸 대표작이다.
이현보(李賢輔 ; 1467∼1555)는 영천인(永川人),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
예안 출신으로 참찬 흠(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예문관 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으며,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부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항거하였다.
허백당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향리의 후배인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어부가(漁夫歌)」,「효빈가(孝嚬歌)」, 「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이 있다.
보물 제522호로 지정된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가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표암 강세황(1712∼1791)이 도산서원의 실경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138.5㎝, 세로 57.7㎝ 크기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중앙에 도산서원을 배치하고
앞쪽에는 흐르는 강물과 함께 탁영담·반타석 등을 그렸다.
왼쪽에는 곡류 위쪽으로 분천서원·애일당·분강촌 등을 그렸으며 본인이 직접 쓴 글이 적혀있다.
이 그림에도 도산서원 바로 옆에 분강서원과 애일당, 분강촌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의 대표적인 고적(古蹟)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재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창석(金昌錫)이 그린
이문순공도산도(李文純公陶山圖)에 역시 애일당, 분천서원, 분강촌이 들어 있다.
그러나 유서 깊던 분강촌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그 옛 터만 남아 있고
건물 일부만 각처로 이건 되어 모든 이의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현 종손인 이서원에 의해 도산면 가송리에 터를 마련해 수년여의 공사로 마침내
2007년에 이르러 서원과 재사, 긍구당, 애일당, 신도비와 비각, 농암 각자 등 기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물론 종택 본 건물까지 1만 5천여 평의 대지로 옮겨 집단화해 명실상부한 분강촌(汾江村)을 이루었다.
농암 이현보 종손가에 소장된 고문서와 전적(典籍)·회화(繪畵), 32점.
고문서는 교지류(敎旨類) 총 23점이고 전적은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등 7종 8 책이며
1534년 승정원의 동료 관원들의 계모임 하는 모습을 그린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와 농암 영정 등이
각각 보물 지정되어 세전 되고 있다.
이 역시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되고 있다.
현 농암종택에는 선조어필로 ‘적선(積善)’이라는 대필이 각자의 형태로 게판 되어 있다.
이 글씨는 농암 이현보의 아들인 매암 이숙량이 선조 연간에 벼슬을 제주 받아 사은숙배할 때
국왕이 내린 글씨를 각자 한 것이라 한다.
이 서각 글씨 원판은 도산서원 장판각에 보관되어 오다가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 소장되어 있다.
17대 종손은 이성원(李性源)이다.
농암가(聾巖歌)
농암(聾巖)에 올라 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이로다.
인사(人事)이 변한들 산천(山川)이야 가실까.
암전(巖前)의 모수모구(某水某丘)이 어제 본 듯 하여라.
어부단가 5장(漁父短歌 五章)
1장
이 듕에 시름업스니 어부(漁父)의 생애(生涯)이로다. 이중에 시름없으니 어부의 생애로다.
일엽편주(一葉片舟)를 만경파(萬頃波)에 매워 두고, 작은 조각배를 끝없는 물결에 띄워 두고
인세(人世)를 다 니젯거니 날 가 주를 안가. 인간세상을 다 잊었으니 세월 가는 줄 알리오
2장
구버 천심녹수(千尋綠水) 도라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 굽어보면 천길 파란 물.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
십장홍진(十丈紅塵)이 언매나 그랫는고, 열 길 티끌 세상에 얼마나 가려 있었던가
강호(江湖)얘 월백(月白)거든 더옥 무심(無心)하얘라. 강호에 달 밝아 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3장
청하(靑荷)애 바싸고 녹류(綠柳)에 고기를 꿰여 푸른 연잎에 밥을 싸고 파란 버들가지에 고기 꿰어
노적화총(蘆荻花叢)에 배매야 두고 갈대 꽃 덤불에 배를 매어 두었으니
一般淸意味(일반청의미)를 어느 부니 아르실고. 한결같이 맑은 뜻을 어느 분이 아실까
4장
산두(山頭)에 한운(閑雲)이 起(기)고 수중(水中)에 산등성이에 한가히 구름 일고 물가엔 갈매기 나는구나
백구(白鷗)이 비(飛)이라.
무심(無心)코 다정(多情)니즌 이 두 거시로다. 무심코 다정한 것 이 두 가지 뿐이로세
일생(一生)애 시르믈 닛고 너를 조차 노로리라. 일생에 시름 잊고 너를 좇아 놀리라
5장
장안(長安)을 도라보니 북궐(北闕)이 천리(千里)로다. 서울을 돌아보니 대궐이 천리로다
어주(漁舟)에 누어신니즌 스치 이시랴. 고깃배에 누워있다 한들 잊은 때가 있으랴
두어라,내 시름 아니라 제세현(濟世賢)이 업스랴. 두어라 내가 시름힐 일 아니니 세상을 구제할 현인이 없으랴
■성성재종택
惺惺齋宗宅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64호(1992.11.26)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156
이 집은 조선 중기 학자인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 선생의 종택이다.
선생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퇴계 선생의 제자이며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과는 남매(男妹, 처남매부) 간이기도하다.
어려서는 청계 김진에게 수학했으며,
명종 16년(1561) 생원시에 합격한 뒤 70세로 봉화현감 등 직을 지냈으며,
정유재란 때는 예안(禮安)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했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에 녹선 되고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 되었다.
선생의 위패는 사림(士林)에 의해 종택 뒤편에 조성된 동계서원(東溪書院)에 봉안되었다.
선생은 25세 때 이미 현 종택 아래인 동계(東溪) 가에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힘썼는데
퇴계 선생은 손수 ‘성재’라는 현판과 아울러 동계(東溪)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팔영시(八詠詩)」를 써주었다. 서원은 훼철되었다.
금성재의 다른 정자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된 ‘고산정(孤山亭, 일명 日洞精舍)’으로
도산면 가송리 447번지에 있다.
이곳은 청량산 입구에 산과 강이 어우러진 곳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주인 자신이 퇴계 문도의 중요한 학자였기 때문에 당시는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명소로 학자나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부포(浮浦)에 있는 종택에는 중요한 고서(古書)가 포함된 천 여책이 넘는 전적(典籍)과
기타 고문서(古文書)가 소장되어 있었으나 도난당했고,
그 나머지 자료는 모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어 위탁 중에 있다.
종택 앞쪽으로 도로 아래에는 선생의 정자인 성재(惺齋)가 있는데,
‘성재(惺齋)’라는 현판은 정자 내부에 게판 되어 있다.
또한 그 외부 동계(東溪)가 자연석에는 임경대(臨鏡臺)와 활원당(活源塘)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선생을 향사했던 ‘동계서원(東溪書院)’ 현판은 성재 내부에 보관되어 있다.
서원 옛 터는 종택 바로 뒤편에 있는데, 지금은 농경지로 변하였다.
성재 종택은 문헌(文獻)이 많았던 집이었다. 퇴계 선생이 일찍이 성성재 앞에 와서는,
시내의 돌 위에 먹을 갈고 벼랑에 뻗어 있는 칡덩굴을 잘라먹을 찍어 종이 몇 장에 휘호(揮毫)하였는데,
이때 선생이 거나하게 주기(酒氣)를 띠고 주인에게 이르기를 ‘마침 이곳에 오니 흥취가 인다’고
했다는 고사도 남아 있다.
‘성재(惺齋)’라는 정자의 현판은 퇴계 선생의 대필 글씨이며 그 주변 시내가 바위 마다에도 퇴계의 글씨를
각자 한 것이 남아 있다.
■퇴계종택
退溪宗宅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1982.12.1)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의 종택(宗宅)이다.
정문에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1907년(순조 1)에 옛 종택이 일본군의 방화로 전소되어 사림(士林)들이 힘을 모아
종택으로 건립한 것으로 1926∼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공(霞汀公, 忠鎬)이
옛 종택의 규모를 따라 신축하였다.
이는 기록으로 잘 남아 있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口’ 자 형태인데 총 34칸으로 이루어졌다.
우측에 있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추월한수정 마루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란 현판 등이 게판 되어 있다.
본채의 솟을대문은 정려문(旌閭門)이기도 하다.
이 문은 선생의 장손인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의 처(妻) 안동 권 씨의 정려문으로 문 위에는
‘열녀 통덕랑 행사온서직장 이안도처 공인 안동권 씨 지려
(烈女 通德郞行司醞署直長 李安道妻 恭人 安東權氏之閭)’라고 적혀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의 팔작기와집으로
내부에는 불천위인 퇴계선생의 신위를 비롯하여 4대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도산면 소재지인 온혜리 못 미쳐 우측으로(표지판 있음) 난 포장도로를 따라 ‘상계(上溪)’에 이르면
그 오른쪽에 종택을 만날 수 있다.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현판이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앞 대문에 게판 되어 있다.
추월한수정은 마루를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방과 마루방을 꾸민 구조로 되어있다.
마루 좌측의 방은 ‘완패당(玩珮堂)’이라고 하며 마루 우측의 방은 ‘이운재(理韻齋)’ 라 하며
당(堂)과 재(齋)를 포함한 정자 전체를 통칭할 때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 한다.
선생은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성(誠)’을 기본으로 하고, 일생동안 ‘경(敬)’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주자(朱子)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발전시키고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였다.
선생은 계상서당(溪上書堂)과 도산서당(陶山書堂)을 건립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선생의 학풍은 뒤에 문하생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成一),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다.
이는 이이(李珥)의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사상적으로 대립된다.
후일 선생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직자로, 학자로, 교육자로 선생의 일생은 만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이 모신 중종, 명종, 선조로부터도 지극한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
사후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1576(선조 9)에
문묘(文廟) 및 선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선생은 정암 조광조의 도학정치가 현실에서 실패하는 것을 목도했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관학을 바로잡고자 했으나 여의치 못하자 관학적 아카데미즘의 전통에서 눈을 돌려
서원창설을 통해 사림 부흥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풍기 소수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고 제도를 정비했으며,
영주의 이산서원을 창설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서당(陶山書堂)을 만들어 도산아카데미를 열어 후일 이곳을 중심으로
주리론(主理論) 거점으로 만들었다.
조선 후기 서원의 병폐가 드러나기는 했지만 선생이 꿈꾼 서원은 선비들을 모아 참다운 공부를 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었다.
필자는 이 점이 우리 문화에 끼친 가장 큰 공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선생 자신의 삶은 참담했다.
그럼에도 선생은 이를 학문과 수양으로 극복해 마침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선생은 생후 6개 월 만에 부친을 여의었고, 두 번에 걸친 상처(喪妻)와 아들을 앞세웠으며,
사화(士禍)로 형님의 비명횡사를 목도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단양군수, 대사성, 첨지중추부사, 공조판서, 대제학(66세), 예조판서(67세)를
거쳐 우찬성(69세)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생은 벼슬살이보다는 수양과 후진양성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문집은 수십 차에 달하는 사직 상소문으로 넘쳐난다.
천 원 권 지폐 인물로 널리 알려진 덕분에 거개가 선생에 대해 얼마간은 안다고 생각한다.
퇴계 선생은 어떤 분인가?
조선왕조의 졸기 끝 구절과 자신이 지은 묘갈명 명문(銘文)이 일생을 가장 잘 요약했다고 본다.
졸기(卒記)에는 “논자들에 의하면 이황은 이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광조(1482-1519) 이후
그와 겨룰 자가 없으니, 이황이 재주나 기국(器局)에 있어서는 조광조에 미치지 못하지만,
의리(義理)를 깊이 파고들어 정미(精微)한 경지에 이른 것은 조광조가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라고 썼다.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조광조 역시 도학(道學) 적전(嫡傳)을 계승 유종(儒宗)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퇴계 선생이 우리나라 선배들 가운데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손수 행장(行狀)을 지어 기렸다.
다만 그가 품었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표출해기도 했다.
‘의리를 깊이 파고들어 정미한 경지에 이른 것’은 연구하는 학자의 자세다.
실제로 선생은 기묘사화로 꺾인 유림 사회를 진작했고 주자학을 깊이 연구해 마침내
주자학을 집대성한 이가 되었다.
이 연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기라성 같은 퇴계 문학의 학자군(學者群)의 도움도 지대했다.
다음은 자신이 지은 자신의 묘갈명을 통해 선생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퇴계 종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지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선생의 묘소는 오르기에 다소 힘겹다.
의아한 것은 묘소 가는 길에서 신도비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침내 묘소에 당도하면 고아한 품격으로 참배객을 맞이하는 아담한 묘소 봉분과 묘갈(墓碣),
그리고 석인, 동자석과 만나게 된다.
갓이 없는 아담한 묘갈에는 명문장에 명필(선생의 제자로 宣城三筆의 한 사람인 琴輔)로
비문이 쓰여 있는데, 전면에 대자로 ‘퇴도 만은 진성이 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적었다.
돌아가신 직후 선생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비문 전면에 행직인 판서보다 높은 찬성(贊成)과 증직인 의정부 영의정을 길게 적어야 함에도,
선생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엄히 유언했고 이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전면 대자 왼편에 다소 어려운 글자와 함축미를 느낄 수 있는 문자로 선생의 일생을 담담하게
응축(凝縮)한 글이 보인다.
태어나선 몹시도 어리석었고
장성해선 몸에 병도 많았다네
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고
늙어서는 어찌하여 벼슬을 하였나
학문은 구할수록 멀어만 갔고
벼슬은 사양해도 자꾸 내렸지
관직에 나아가선 차질 있었고
그래서 물러나 은거할 뜻 더욱 굳었네
나라 은혜엔 정말 부끄러웠고
성인 말씀엔 참으로 두려웠었네
산 있어 높이도 솟아 있고
물 있어 끊임없이 흘러가는 걸
벼슬하기 전으로 내 돌아가니
뭇사람들 비방도 줄어들었네
나의 회포 여기서 막히었으니
내 패옥을 누가 알아주리오
옛사람 모습 떠올려보니
참으로 내 마음 알아주셨네
이제 저세상에서는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근심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운 중에도 걱정이 있네
조화를 따라 이제 사라짐이여
내 다시 그 무엇을 구하랴?”
네 글자 24 구로 총 96글자는 음미할 수 있는 격조 있는 글이기도 하다.
‘우중유락(憂中有樂)/낙중유우(樂中有憂)’는 이미 신선세계에서 노닌 듯한 분위기다.
선생의 묘갈명은 특이하게도 스승과 제자의 합작인 셈이다.
생전에 총애했던 고봉 기대승이 자찬묘갈명 아래다 비교적 짧게 묘갈명을 적었다.
이는 선생이 극구 실정과 다른 과장을 금지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스승의 분부가 엄해도 고봉 역시 실상과 달리 축소할 수는 없었다.
간결하지만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묘갈명 내용 중에 묘한 부분이 들어 있다. 고봉이 직접 지은 글 내용이다.
선생께서 병이 위중해지자 아들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에서는 반드시 법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라고 청할 것이다.
너는 반드시 나의 유언이라고 해서 상소하여 굳게 사양하여라.
또 비석은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빗돌에다 전면에는 ‘퇴도 만은 진성이 공지묘’라고만 쓰고
세계(世系)와 행실을 뒤에다 간략히 적어 가례(家禮)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야 한다.
이 일을 만일 남에게 부탁하여할 경우, 아는 사람 중에 기 고봉(奇高峯, 奇大升) 같은 이는 반드시
실상이 없는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세상에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기술해 미리 명문(銘文)을 짓고자 하였으나 미루어오다가
끝내지 못하고 난고(亂稿) 속에 보관해 두었으니 이것을 찾아서 써야 한다.”라고 자세히 일러두었다.
결과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예시까지 한 기 고봉이 묘갈명을 맡았는데,
그렇다면 이는 선생의 뜻이 도리어 그에게 두어졌던 것이 아닐까 한다.
유명(幽冥)을 달리할 즈음에 참으로 은미(隱微)한 당부를 멋있게 남긴 셈이다.
계문(溪門)의 고제인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간재 이덕홍,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도
이를 추인했음은 불문가지다.
당호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과 정자 대문에 걸린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글씨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손자로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李棟欽)의 글씨이며,
마루 우측에 게판 된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은 현 종손의 셋째 삼촌인 이원태의 글씨다.
그리고 마루의 정면 벽에 병열로 게첨 된 ‘산남궐리(山南闕里), 해동고정(海東考亭)’은
근세 서예가로 대필서(大筆書)에 뛰어났던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작품이다.
완패당(玩珮堂)과 이운재(理韻齋)의 편액은 삼척(三陟) 사람으로 해강김규진의 제자인 홍낙섭의 글씨라 한다.
16대 종손은 이동은(李東恩)이다.
■퇴계태실
退溪胎室
경상북도민속자료 제60호(1985.10.15)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604
이 집은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의 종택으로 ‘노송정(老松亭) 종택’으로 불리고 있다.
이 집은 단종 2년(1454) 가을에 선성현(宣城縣) 북쪽 용두산(龍頭山) 남쪽인 현 위치에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이 세웠는데 후에 몸채의 중앙에 돌출된 방에서 퇴계가 태어났다 하여
‘퇴계태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퇴계의 후손들의 성력으로 중수한 바 있다.
이계양은 이 자수의 증손이고 군기시부정 이윤후의 손자며 선산부사 이정의 아들이다.
자는 달보(達甫), 호는 노송정(老松亭)이며, 1453년에 30세로 진사가 되었다.
둘째 자제인 송재 이우의 귀로 인해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 되었다.
몸채는 ‘口’ 자형 평면으로 중앙에 퇴계태실이 돌출되어 있고,
동남쪽 모서리에 마루를 두어 큰 사랑과 작은사랑이 분리되어 있는데,
마루 상부에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몸채 동쪽에는 ‘一’ 자형 평면의 노송정(老松亭)이 자리 잡고 있고 사당채가 있다.
대문은 성림문(聖臨門)’이다.
성림문은 퇴계 선생의 모부인인 춘천 박 씨(1470-1537)가 꿈에 공자가 문 앞에 오신 것을 기념해
후대에 이름 지은 것으로 게판 된 기문에 그 내용이 자세하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풍모를 지니면서 태실(胎室)과 같은 특이한 방을 둔 집이다.
이곳에는 별당형 정자에 노송정 외에도 옥루무괴(屋漏無愧,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 없게 함)
해동추로(海東鄒魯, 퇴계가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 등 많은 현판이 게판 되어 있다.
안동의 진성 이 씨들은 당초 진보현(眞寶縣, 현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 살았다.
퇴계의 5대 조인 이 자수(李自脩)는 왜구를 피해 안동부 풍산현 남쪽인 마애리로 옮겨 살았고
다시 주촌(周村, 안동시 와룡면 주하 1리)으로 이주했다.
예안 온계에 터를 잡은 이는 퇴계의 조부인 노송정 이계양(李繼陽, 1424-1488)으로,
그는 단종이 선위 한 뒤 영월로 갔다는 말을 듣고 처자를 거느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왔다.
퇴계의 선친도 이곳 노송정 종택에서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노송정 뒷산인
수곡(樹谷) 선영에 장사 지냈다.
퇴계 선생이 1501년 11월 25일 진시(辰時)에 태어난 방을 말하며 집 전체를
‘노송정종택(老松亭宗宅)’이라 부른다(父 贊成公 李埴·母 春川 朴氏).
이계양의 사적(事蹟)과 수곡암기(樹谷菴記)는 퇴계 이황이, 묘갈명은 이조판서 신용개가, 유사(遺事)는
동몽교관 김시찬이, 유사보(遺事補) 11대손 광뢰 이 야순이 각각 지었다.
광뢰 이야순이 지은 유사보에는 노송정 이계양의 단종 절의에 대한 추숭이 길게 실려 있다.
이는 퇴계 선생의 현달에 매몰된 노송정 종택의 주인공에 대한 바람직하고 시의 적절한 평가라고 본다.
종손은 이창건이다.
■수졸당종택
守拙堂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30호(2003.8.14)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15
이 집은 퇴계(退溪) 선생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와
그의 아들 수졸당(守拙堂) 이기(李岐, 1591∼1654)의 종택이다.
동암공(東巖公)은 조선조 명종 때 청백을 신조로 산 인물로 여러 고을을 거쳐 원주목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의 공로와 광해(光海) 혼조시의 의리를 지킨 공으로 인해 증직 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랐다.
수졸당은 증조부인 문순공(文純公)의 유훈(遺訓)을 따라 운천(雲川) 김용(金涌)에게 수학하고
심경(心經)과 주자서(朱子書)를 전심하여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400여 년
하계마을은 도산면 소재지에서 퇴계 종택 방면으로 1km 거리에 있다.
마을 앞으로는 청량산을 지나온 낙동강이 흐르고, 그 남쪽으로 작은 언덕을 넘으면 도산서원이 나온다.
또한 이 마을을 지나 강을 끼고 약 1km 올라가면 이육사의 고향인 원천리에 도달한다.
현재 그곳에는 이육사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또한 수졸당 바로 뒷산에는 퇴계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유서 깊은 하계마을은 오랫동안 150여 호에 달하는 큰 마을이었으나 이제는 10여 호 정도만 남아있다.
현재 향산고택, 계남고택, 정언댁은 외지로 옮겨졌고,
수졸당, 새 영감댁, 초산댁, 수석정과 백동서당만 남아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퇴계 후손들의 전체 문과 급제자 33인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15명의 급제자를
배출했고, 25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를 낳았다.
삼대독립운동가의 중심인물인 향산 이만도는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지도자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열어 제자들을 육성하던 중,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자 창의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다 급기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당하자 이를 막지 못한 죄인으로 자처하며 2일간 단식 후 순국했다.
순국유허비를 백범 김구와 위당 정인보의 글로 글씨로 세운 것만 보아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며느리이자 만주의 독립지사 김대락(金大洛)의 동생이며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처제이기도 한 김락(金洛) 여사 또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주관한 남편 중업(中業)과 광복회 사건에
걸린 아들 동흠(棟欽)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자신은 3·1 예안만세 운동으로 고문을 당해 실명인 채
10여 년의
향산의 삼종질로서 그와 을미의병에 참여했으며 향산의 순국이 임박할 무렵 단식에 동참하여 순절한
동은 이중언(李中彦), 3·1 예안만세 운동의 이비호(李丕鎬), 만주항쟁의 이원일(李源一),
한말에 의병 활동을 한 이만 원(李萬源), 군자금 모금 활동의 이종흠(李棕欽) 등도
우리 항일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분들이다.
종손은 이재녕(李載寧)이다.
■관물당
觀物堂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호(1985.8.5)
안동시 서후면 교리 207
선조 2년(1569) 강호고사(江湖高士)로 알려진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 선생이 건립하여
학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뒤에 건립된 종택 내에 있다.
관물당(觀物堂)은 송암 권호문의 종택 당호로 널리 사용되었다.
송암은 퇴계 선생 백 씨(伯氏)인 이 잠(李潛)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송암의 평생 공부는 ‘관물(觀物)’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관물이란 인간 내면 수양이며,
동양철학의 전형적인 수양 과정이며 숙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관물당이란 스승인 퇴계 선생이 직접 지어준 것으로,
이후 자신의 당호로 그리고 후대에는 송암 종가의 명예로운 이름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관물당 종가’ 하면, 영남에서는 서애 종가인 충효당(忠孝堂) 학봉 종가인 풍뢰 헌(風雷軒) 오천 군자리의
후조당(後凋堂) 종가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내려온 존경과 인정의 대상이 된 집이다.
송암 권호문 선생은 15세에 퇴계 선생의 문인이 되어 평생 벼슬에 뜻을 버리고 스승을 따라 배우며
청성산(靑城山) 기슭에 연어 헌(鳶魚軒)을 짓고 유연자적(悠然自適) 하였다.
동문수학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은 ‘백세(百世)의 사표(師表) 요, 강호(江湖)의 고사(高士)’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송암은 많은 수의 시와 가사체로 독락팔곡(獨樂八曲)을,
그리고 연시인 한 거 십팔곡(閑居十八曲)을 남겼다.
독락팔곡은 현존하는 마지막 경기체가 작품을 제목은 8곡이나 7곡만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작품 전반에 은일(隱逸)한 선비의 격조가 담겨 있다.
권호문은 관물당이란 당호를 스승인 퇴계로부터 받았다.
芸芸庶物從何有 춘운서물종하유 많고 많은 저 사물들 어디서 왔나
漠漠源頭不是虛 막막 원두부시허 아득한 저 근원은 허망치 않네
欲識前賢興感處 욕식전현흥감처 전현의 흥감처를 알고 싶은가
請看庭草與盆魚 청간정초여분 어 뜰의 풀과 어항 고기를 자세히 보게
퇴계의 관물시(觀物詩)다. 마지막 구절은 중국의 정명도가 뜰의 풀을 베지 않고 어항의 물고기를
기르며 그 생의를 관찰하며 존심양성의 공부를 했던 일을 원용한 내용이다.
송암은 스승의 이런 공부 모습을 올곧게 따르고 있다.
이 건물은 평면(平面)은 ‘一’ 자형인데 비해 지반의 이음새는 ‘丁’ 자형으로 되어 있고,
지붕 좌측은 남북으로 뱃집이다. 우측은 팔작(八作) 지붕이다.
보통 ‘소밤(松夜) 종택’ 또는 ‘관물당’으로 불려지는데,
안동에서 풍산 방면으로 소밤다리를 건너 ‘권복야공단소(權僕射公壇所) 입구(入口)’라는 표지석에서
우회전(비포장 도로)하여 작은 고개를 넘어서면 마을에 당도한다.
종택은 맨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소밤에는 1994년 4월 5일 조성된 복야파(僕射派) 파조(派祖, 守洪)의 단소(壇所)와
신도비(神道碑) 외에도, 판서공(靷) 신도비각과 묘소, 송파재실(松坡齋室)이 있었다.
현재 관물당에는 퇴계 선생이 준 「기제관물당(寄題觀物堂)」을 위시해서 기문과 당시 명사들의
시판이 걸려 있다.
종택 관물당에 게판 된 퇴계 선생 시(1561년, 61세 작)
寄題觀物堂
觀物須從觀我生 관물수종관아생
易中微旨邵能明 역중미지소능명
若敎舍己唯觀物 약교사기 유관물
俯仰鳶魚亦累情 부앙연어역누정
사물을 보는 법은 자신을 보는데서 생기니
주역 가운데 미묘한 뜻을 소옹은 밝게 알았네
만일 자신을 버리고 사물만을 본다면
천지의 도를 살필지라도 또한 정에 얽매이나니.
보물 제538호로 지정된 『퇴계선생필법및유첩』 3 책은 종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는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그의 제자인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 공에게
글씨 체본으로 써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大)·중(中)·소(小) 등 크고 작은 글씨체와 해(楷)·행(行)·초서(草書)의
각 체를 따로 써 주었다.
『퇴계선생유첩(退溪先生遺帖)』은 2 책으로 장첩(粧帖)되어 있는데,
스승인 퇴계 선생의 편지를 모은 것이다. 또한 선생을 제향(祭享)한 청성서원(靑城書院, 풍산읍 막곡리)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15대 종손은 권기철(權奇哲)이다.
■의성김 씨 학봉종택
義城金氏鶴峯宗宅
경상북도기념물 제112호(1995.12.1)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
학봉 선생의 종택이 있는 금계(金溪)는 선생께서 45세 때인 선조 15년(1582) 가을에
자자손손 천 백세를 위해 터전을 다진 곳이다. 종택 당호는 풍뢰 헌(風雷軒)이다.
의성현(義城縣) 제일의 토성(土姓)인 의성(義城) 김 씨(金氏)는 여말(麗末)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여
안동으로 이주하면서 전형적인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로 발전한 가문이다.
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택은 원래는 현 위치에 지어졌으나
지대가 낮고 침수가 자주 된다 하여 선생의 8 세손인 광찬(光燦)이 그의 나이 27세이던
1762년에 현 위치에서 100m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던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 하였는데,
이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케 하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종택의 사랑채로 사용하였다.
정침(正寢)은 ‘口’ 자형의 평면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에 좌측으로 아랫채를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보면
‘一’ 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가구(架構)는 모두 오량가(五樑架)의 간결한 구조이다.
정침의 우후측(右後側)에는 3칸 규모의 사당을 배치하였으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였다.
안동을 대표하는 웅장하고도 당당한 종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학봉 김성일 선생 이후의 귀중한 유물·유품을 지금까지 완벽에 가깝게 보존해 왔으며,
근자에는 현대적 설비를 갖춘 전시 공간까지 갖추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안동에 와서 학봉종가를 찾아 이 전시관(운장각)을 관람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 있는 답사가 될 것이다.
보물 제905호(1987.3.7)로 지정된 학봉김성일종손가소장전적(鶴峯金誠一宗孫家所藏典籍),
보물 제906호(1987.3.7)로 지정된 학봉김성일종손가소장 고문서(鶴峯金誠一宗孫家所藏古文書)는
1987년 현대식 유물전시관인 ‘운장각(雲章閣)’을 지어 보관하고 있고, 이를 다시 짓고 있다.
학봉 종가의 많은 유품 중에 목판에 새긴 퇴계병명(退溪屛銘, 題金士純屛銘)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 종가의 자긍이기도 한데 지금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보관상태가 양호하다.
학봉 선생의 도학(道學) 연원(淵源)을 계승한 조선 후기의 학자요 정치가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이 병명을 “퇴도 노선생의 병명(屛銘)을 첨부하여 연원(淵源)을 전하여서 부탁한 실제를 드러내었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잘 읽어 보면 무언가 얻는 바가 있을 것으로,
반드시 마음속에 융합되는 바가 있어 옷자락을 잡고 문하에 나아가서 친히 말씀을 듣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그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병명은 4자 대구(對句) 형식을 모두 80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절정은 마지막 구절인 ‘박약양지(博約兩至) 연원정맥(淵源正脈)’이다.
이 구절로 인해 후일 집안은 물론 유림사회에서 도학의 적전을 유념한 스승 퇴계의 징표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깥이 이견도 있었고,
이는 다양한 형태로 학문적 토론과 논쟁으로 길게 이어졌다.
현재 이 글은 퇴계집 권 44와 학봉집 부록 권 3에 함께 실려 전하고 있다.
이 당시 퇴계가 66세, 학봉이 29세였다.
완숙한 학자와 문과 급제를 앞둔(학봉이 31세에 급제함) 신진 학자 간의 의미 있는 만남의
징표로 남은 것이다.
堯欽舜一 요흠순일 공경과 정일로서 덕 이룬 인 요순(堯舜)이요
禹祗湯慄 오지탕률 두려움과 공경으로 덕 닦은 인 우탕(禹湯)이네
翼翼文心 익익 물심 공손하고 삼감은 마음 지킨 문왕(文王)이요
蕩蕩武極 탕탕 무극 호호 탕탕 드넓음은 법도 지킨 무왕(武王)이네
周稱乾惕 주창건척 노력하고 조심하라 말한 인 주공(周公)이요
孔云憤樂 공운분낙 발분망식 즐겁다 말한 이는 공자(孔子)였네
曾省戰兢 증생전긍 자신을 반성하며 조심한 인 증자(曾子)이요
顔事克復 안사극부 사욕 잊고 예(禮)를 회복한 인 안자(顔子)였네
戒懼愼獨 계구신독 경계하며 조심하고 혼자 있을 때 삼가서
明誠凝道 명성응도 명성으로 지극한 도 이룬 인 자사(子思) 요
操存事天 조존사천 마음을 보존하여 하늘을 섬기면서
直義養浩 직의 양호 바른 의료 호연지기 기른 인 맹자(孟子)였네
主靜無欲 주정무욕 고요함을 주로 하며 욕심 없이 지내면서
光風霽月 광풍제월 맑은 날 바람 비 갠 뒤 달인 염계(濂溪) 요
吟弄歸來 음농귀내 풍월을 읊조리며 돌아오는 모습에다
揚休山立 양휴산립 온화하고 우뚝한 기상 지닌 명도(明道)였네
整齊嚴肅 정제 엄숙 정제된 몸가짐에 엄숙한 품격으로
主一無適 주일무적 전일을 주로 하여 변동 없는 이 이천(伊川)이요
학봉종가의 유물은 퇴계 문인의 후손가에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었음은 물론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하지 않고 본가에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현대적 전시 공간을 마련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15대 종손은 김종길(金鍾吉)이다.
■원주변 씨 간재종택 및 간재정
原州邊氏 簡齋宗宅 簡齋亭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31호(2003.12.15)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162 외
조선후기의 유학자인 간재 변중일(簡齋 邊中一,1575~1660) 후손의 살림집과 변중일이 강학하던 정자이다.
자(字)는 가순(可純), 호(號)는 간재(簡齋), 원주인(原州人)이다.
1592년(선조 25)
곽재우(郭再祐) 휘하로 들어가 의병(義兵)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나이 18살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화왕성(火旺城)에서 박수춘(朴壽春), 성안의(成安義), 남사명(南士明),
류복기(柳復起), 정사성(鄭士誠) 등과 협력하여 적과 싸웠다.
1686년(숙종 12)에
난 후에 나라에서 받은 노비가 가락 땅에 살고 있음을 알고 찾으려 하였다가 도리어 무고죄에 걸려
옥에 갇혔다가 인조반정 때 풀려났다.
만년에 금계의 동쪽에 집을 짓고 간재(簡齋)라 현판을 달고 부지런히 독서하고 시를 읊었다.
인조 때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60년 84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와(訂窩) 김대진(金垈鎭)이 묘갈명을 지었다.
종택은 본래 ‘금고(琴皐) 종택’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 지명 때문이었다.
1796년에 지은 것이라 하나, 1949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건축연혁을 확인할 수 없다.
간재정은 변중일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초·중반 경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의 건물은 1874년(고종 11) 변중일의 8대손인 변석찬(邊錫瓚)·석하(錫夏) 등이 중건한 것이다.
종택은 완전 ‘口’ 자형의 정침과 이 정침 앞마당 좌·우에 각기 일자형의 대문채와 별당(무민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자인 간재는(簡齋)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一’ 자형 집이다.
이 건물은 1874년과 1934년과 1947년에 중수되었지만, 당초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간재 종택과 정자는 19세기 전후한 시기의 건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건물로
종가의 품위와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작은 산골짜기에 정침 및 별당·사당·정자가 아래서부터 위로 자연 지형에 순응하면서 각기 기능에
적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종택은 2004년 중수했고, 2007년에 간재정을,
2009년에 사당을 중수했으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간재정과 사당 사이 좌측 언덕에 있었던 금고서원(琴皐書院, 동호와 간재 양위 배향)에 대한 복원은
본가뿐 아니라 유림의 숙원으로 남아 있다.
종택 사랑채에는 ‘충효고가(忠孝古家)’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 오른편 앞에는 무민당(无憫堂)이란 건물 한 동이 있다.
간재는 매우 아담하고 격조 있는 정자로 종택 뒤편에서 아름다운 실계천인 금계(琴溪)를 바라보고 서있다.
원주 변 씨 간재 변중일 선생은 업적에 비해 안동지방에서 잘 알려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간재는 임진왜란 당시 효자로 그 이름이 높았을 뿐 아니라 망우당 곽재우 의병진에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워 충과 효를 함께 이룬 이다.
후일 그의 이러한 이력은 조정에 알려져 벼슬이 내려졌고 정려까지 되었다.
간재 종택으로 접어드는 길에 그 입구에 홍살문이 눈길을 끈다.
또한 상쾌하고 아담한 형국은 군자가 세속에서 벗어나 학문과 수양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느낌이 있다.
11대 종손은
■안동전 주류 씨삼산 종택
安東全州柳氏三山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36호(1982.12.1)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830
이 건물은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1702∼1761) 선생의 종택으로 조선 영조 26년(1750) 경에 건립하였다.
대문채·사랑채·안채 그리고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口’ 자형을 이룬 이 지방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를 갖추고 있다.
선생의 호는 삼산(三山) 자는 순백(淳白)이며, 영조 때 학자요 명신(名臣)으로 높은 인품과
경학(經學)으로 『목민심서(牧民心書)』에도 그 치적이 크게 실려있는 분이다.
저서에 『역해참고(易解參攷)』 10 책, 『삼산집(三山集)』 4 책 등이 있다.
다산은 목민심서의 절용(節用), 공납(貢納), 유애(遺愛), 전정조(田政條) 등에서
삼산의 귀감이 될 만한 사례를 소개했다. 삼산은 여러 번에 걸쳐 고을을 맡아 다스렸다.
그런데 항상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말에 올라 채찍 하나만 들고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고을에 남아 있던 자제들이 뒤미처 헌 장롱 한 틀을 집으로 부쳐왔다.
마을 주민들이 그 속에 좋은 비단이 들어있을까 싶어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단지 짚만 가득 들어 있었다. 구경하는 이들은 한바탕 크게 웃고는 돌아갔다.
이는 자제들이 농을 보내면서 비어 있으면 부서질까 염려해 속을 일부러 채웠기 때문이다.
다산은 삼산이 통천군수를 지내다 부교리 직을 받고 돌아갈 때 고을 주민들은 은혜에 감사하며 차마 보내지 못했고, 뒤에 동(銅)으로 유애비(遺愛碑)를 주조해 기념했다는 사적도 적고 있다.
삼산은 대신들이 경학(經學)이 있다고 추천해 경연에 입시했고,
국왕인 영조의 인정으로 사도세자의 선생님이 된다.
이때의 정황은 ‘서연강의(書筵講義)’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53세의 완숙한 학자와 20세의 세자가 경전 구절을 풀이하며
이끌고 따랐던 장면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산은 주역(周易)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물로 역해참고(易解參攷)를 남겼다.
이는 주역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준 책이다.
14살에 처음으로 접한 주역은 그의 일생동안 주된 연구의 대상이었다.
30년 뒤인 44살 때 마침내 방대한 역해참고 18권 10 책과 하락지요河洛指要,8권 4 책)가 동시에 완성된다.
사후 이 책은 후학들의 검토를 거쳐 함께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이들 책자가 자신의 문집(8권 4 책)보다 12년 먼저 간행된 것은 그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왜 역해참고를 저술했을까?
삼산은 세상에서 주역을 공부하는 이들이 주역의 글에만 몰입하면 지리멸렬해 산만함에 빠지고,
세부적인 괘(卦)만 주목하면 음양술수(陰陽術數)의 말단에 빠지기 쉽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한(漢), 진(晉), 원(元), 명(明)으로부터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선배 학자들의 학설을 상호
참작하고 자신의 견해도 더해 책을 만들었다.
이는 후대 학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삼산은 글씨에도 조예가 있었던 이다.
안동시 풍산읍 장터에 아름다운 정자 한 채가 남아 있다.
정자 이름은 체화정(棣華亭)이다.
‘산 앵두나무 체’ 자는 여러 형제를 상징하는 글자다.
그림 같은 정자에 게판 된 ‘체화정’ 현판을 보면 그 왼편 하단에 삼산주인(三山主人)이란
주인(朱印)도 함께 새겨져 있다.
분명 삼산 류정원의 작품이다.
삼산이 이 현판을 쓴 것은 이 정자 주인과 사돈의 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삼산이 문과에 급제한 것과 관련해 영남 지방에 내려오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가 있다.
영조는 즉위 후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썼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영남 남인(南人) 인재들을 적극 발굴했다.
이때 안동 지방에서 다섯 사람이 동시에 영조 11년(1735) 문과에 급제한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영조는 이를 고대했고 현실로 나타나자 크게 기뻐했다.
나이순으로 보면, 제산 김성탁(을과 1인), 양파 류관현(병과 8인, 삼산의 再從叔),
하음 김경필(을과 6인), 삼산 류정원(을과 5인), 대산 이상정(병과 28인)이 그들이다.
제산(52세)과 대산(27세)은 무려 25세 차를 보이고 있다. 당시 삼산은 34세였다.
국왕은 이들 중 대표자인 제산을 어전으로 불러 기뻐하며,
어제의 영남의 추천받던 사람이
오늘엔 머리 위에 어사화 새롭구려
어버이 위하려는 그대에겐 기쁜 일
내게는 문학하는 신하가 생겨서 좋아라”라는 시를 짓고 직접 써서 내렸다.
그러나 스승인 갈암 이현일을 신원(伸寃, 억울한 사정을 품)하려고 상소했다 반대파의 모함을 받고
유배되어 11년 뒤 황량한 바닷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의 기림을 받던 영남의 대표적 학자가 당파의 참담한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처럼 열악한 정치적 환경 하에서 삼산은 벼슬에 즐겁게 나갈 수도 경륜을 펼 수도 없었다.
외직을 택해 목민관으로서 시험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한 정도였다.
‘문예와 학식에 있어서 앞설 이가 없었다’는 삼산이 문과 급제 뒤 26년 뒤 대사간(정 3품)에
이른 것이 이를 말해준다.
삼산의 행장(行狀)은 고향 후배면서 퇴계학의 적전(嫡傳)을 계승한 대산 이상정이,
묘갈명은 영남 남인의 종장(宗匠)이었던 번암 채제공이,
묘지명은 대산의 대표적 제자인 입재 정종로가 각각 지었다.
이들 필자의 면면을 통해 당시 삼산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혁혁한 그에게 뚜렷한 사승(師承, 선생님으로 모신 이) 관계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다.
삼산은 어려서는 선친에게 배우다 20세에 족부(族父)인 용와(柳升鉉, 문과)에게 배운 정도다.
그런데, 그의 문하에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영남의 대표적 예설서인 상변통고 16 책 편저자)이 났고
또 손자가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이 났다.
삼산정(三山亭)이 있는 마을 못 미쳐 경사진 사진 비포장 소로를 따라 내려가면 산기슭 외딴곳에
자라 잡고 있다.
10대 종손은 류동철(柳東澈)이다.
■안동송소종택
安東松巢宗宅
중요민속자료 제203호(1984.12.24)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557
이 집은 송소(松巢) 권우(權宇, 1552∼1590) 선생의 후손들이 사는 종택으로서 선생이 직접 지었다고
하나 대청 서보의 묵서명에 따르면 순조 24년(1824)에 이 집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송소 선생은 경학(經學)에 능통하였던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 1523∼1587) 선생의 맏아들로서
경릉참봉(敬陵參奉)을 지냈다.
‘口’ 자형의 몸체와 ‘一’ 자형 강당 및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계재 사도록(伊溪齋舍都錄)』에 의하면 몸체는 재사(齋舍)로 사용하였고,
강당은 이계서당(伊溪書堂)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답사노트
와룡면 이상리(문천초등학교 옆)에서 철길(중앙선)을 넘어서면 왼쪽으로 이계서당(伊溪書堂)과 종택
그리고 사당이 보인다.
이 마을은 큰 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곳에 황새가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황새골’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서당과 종택 사당 모두에는 게판이 되어 있지 않다.
이계서당(伊溪書堂)은 부친인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 선생의 강학지소이다.
■후조당
後彫堂
중요민속자료 제227호(1991.8.22)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 28-1
이 건물들은 광산(光山) 김 씨(金氏) 예안파(禮安派) 종택에 딸린 별당(別堂)이다.
후조당은 선조 때에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선생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후조당’ 현판은 스승인 퇴계(退溪) 선생의 친필이다.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은 운암(雲巖) 김연(金緣)의 아들로 태어나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순조조에 이조판서에 증직 되고 문순공(文純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집 4 책이 남아있다.
▶ 답사노트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후조당 및 재사’에서
조당만 중요민속자료 제227호로 승급되었다.
■탁청정종가
濯淸亭宗家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호(1973.8.31)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 28-1
중종 36년(1541)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공이 건립한 제택(第宅)으로 몸채와 탁청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께 지정되어 있던 탁청정은 1991년 8월 22일 자로 중요민속자료 제226호로 승급되었다.
▶ 답사노트
탁청정과 접해 있다. 오천군자리 문화재단지 내에 있다.
탁청정(1491∼1552)은 증 이조판서 효로(孝盧)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525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
무예를 익혔으나 과거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퇴계 선생이 묘비문을 지었다.
■안동주하동경류정종택
安東周下洞慶流亭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72호(1987.12.29)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634
진성(眞城) 이 씨(李氏) 대종택이다. 송안군(松安君) 이 자수(李子脩) 선생이 지었다고 전한다.
별당인 경류정(慶流亭)은 성종 23년(1492)에 이연(李演)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공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지냈고,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난리에 공을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 되어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며 판전의 시사(判典儀寺事)를 역임하였다.
당초 풍산(豊山) 마애(麻厓)에 이거 하였다가 만년에 두루 [周村]에 입 향하였다고 전한다.
본채는 정면 9칸, 측면 7칸, 경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정침 외에 별당, 사당,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口’ 자형이며 전면 좌측에 사랑채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띄우고 앞쪽에 툇마루를 내었다.
사당채에는 ‘고송류 수각(古松流水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경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식(翼工式) 건물로 기둥은 원형인데
일부에 배흘림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조선시대 이 지역 사대부가의 면모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
종택 건물이다. 종택 당호로 시행되는 경류정(慶流亭)은 퇴계 선생이 명명했다고 한다.
▶ 답사노트
안동시에서 북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이곳은 속명으로 ‘두루’라고 부른다.
‘이로촌(二老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류정 정자 바로 앞에는 유서 깊은 ‘뚝향나무’가 서 있는데, 현재 천연기념물 제3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택 건너편에는 낙금헌(樂琴軒) 이정백(李庭栢, 1553∼1600) 선생을 향사한 유암서원(流巖書院)이 있다.
경류정 정자 안에는 미수 허목 글씨로 ‘경류정(慶流亭)’ 전자(篆字) 현판과 후손인 퇴계 선생의 시판이
게판 되어 있다.
■광산김 씨 유일재고택
光山金氏惟一齋古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13호(1996.1.20)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613
이 건물은 광산(光山) 김 씨(金氏) 유일재공파(惟一齋公派)의 종택이다.
이 파(派)의 선대는 퇴촌(退村) 김열(金閱)을 파조로 하고 있다.
그의 23 세손인 담암(潭庵) 김용석(金用石, 1453∼?)이 풍천면 구담리로 낙향하였고
이후 유일재 김언기(金彦璣) 대에 이르러 와룡 가야(佳野)로 이거 하였는데
도상(道常, 김언기 9대손)이 다시 이곳으로 옮기면서 이 집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담암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었는데, 무오사화 당시 화를 피해 낙남한 분이다.
유일재는 담암의 손자다.
이 종택은 배산(背山)하여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집은 ‘口’ 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당은 정침의 좌후방 약간 높은 언덕 위에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침은 전면 중문 간(中門間)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랑채와 행랑채가 일렬로 연접하여
일자형을 이루었고 이들 각각이 양 익사(翼舍)로 안채와 연결되어 폐쇄적인 ‘口’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사랑채는 좌측으로 돌출되어 날개 모양을 하고 있다.
기단(基壇)은 상면(床面)이 몰탈로 마감되어 있고 주초(柱礎)는 자연석으로 만들어 각주(角柱)를
세웠는데 귀를 접어 올려 다소 둔중(鈍重)한 느낌을 감해주고 있다.
상부가구(上部架構)는 오량가(五樑架)로 대량(大樑)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도리(宗道理)를 받게 하였으며 처마는 양 익사(翼舍)보다 약간 높게 구성하였다.
사당은 일곽(一廓)이 따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 반칸의 퇴(退)를 두어 개방한 삼문집이다.
▶ 답사노트
유일재 김언기(1520∼1588) 선생은 평생 일민(逸民)으로 자처하며 벼슬에 뜻을 버리고 자연과 벗 삼으며
후진양성에 전념하다 서재인 유일재에서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인록에 오른 문도만도 189인에 달하는데, 비지 남치리, 지헌 정사성, 북애 김기, 옥봉 권위,
장곡 권태일 등 현달한 분이 많다.
“안동에 뒷날 도학(道學)이 성한 것은 공의 공로가 크다(花山後來道學之盛 公之功爲多)”라는 평가는
아주 적절하다.
선생 사후 사림에 의해 용계서원이 건립되고 그곳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와룡면 산하리에는 스승의 뜻을 기린 보덕단(報德壇) 비가 서 있다.
■광산김 씨 긍구당 고택
光山金氏 肯構堂 古宅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16호(2000.4.10)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228
이 고택은 본래 영천 이 씨 참봉공파 종택이었는데
광산김 씨 퇴촌파 유일재 김언기(1520∼1588) 선생이 재혼을 하면서 처가인 이 집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뒤에 광산 김 씨 자손들이 물려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집 이름은 김언기 선생의 후손 김세환(金世煥, 1640∼1703)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생활의 중심 공간인 정침은 사랑마당 북쪽에 위치하고, 사랑마당 서쪽에 외양간채,
정침 서쪽에 방앗간, 동쪽 높은 터에 사당을 배치하고 있다.
■대산종택
大山宗宅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08호(2001.11.1)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537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의 종택이다.
대산은 한산 이 씨 안동 입향조인 수은 이홍조의 현손(玄孫)이요 목은 이색의 15대손이다.
종택 왼쪽에는 대산 선생을 불천위로 제사하고 있는 묘우가 있다.
본채는 ‘口’ 자형 목조 와가로 되어 있다.
본채와 붙어 있는 사랑채 앞에는 허함이 설치되어 있다.
안동 지역 종택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형태인 대문간채는 건립되지 않았다.
이상정(李象靖 : 숙종 37, 1711-정조 5, 1781)
한산인(韓山仁).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밀암 이재의 문인으로 퇴계 선생의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성리학(性理學)의 정통을 이어받아
19세기 영남 주리론(主理論)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영조 10년(1734)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퇴계서절요』, 『경재잠집설』, 『이 기휘 편』, 『제양록』, 『약중편』, 『병명발휘』, 『결송장보』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대산은 도학(道學)으로 나라에 보답하려는 일념으로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으며
경국지리(經國之理)를 밝힌 「구조소(九條疏)」는 정조를 감동시킨 상소문으로 유명하다.
문인록에 오른 제자만도 273인에 이른다.
고종 때에 이조판서에 증직 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며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답사노트
안동시내에서 대구통로로 20리쯤 가다 보면 미천(眉川)이 나온다.
미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인 암산유원지에는 선생을 제향 한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자리 잡고 있다.
대산종택은 다시 그곳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대산 선생의 종택은 소호리(蘇湖里)에 달성 서 씨 함재 선생의 정자인 소호헌과 남쪽으로 마주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큰집인 한산 이 씨 안동 입향조 수은 이홍조의 종택 바로 뒤편에 있다.
소호교회 쪽인 남쪽으로 진입하여야 한다.
종택 사랑채에는 ‘선조고태실구지(先祖考胎室舊址)’라는 전서체(篆書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래서 이곳이 대산 선생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임을 알려준다.
다만 옛터라는 표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건물은 찾을 수 없고 수 십 년 전에 지어진
현재 종택 건물에 게판 되어 있다.
이 방에서는 4명의 문과 급제자를 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다행스럽게도 선생이 평소 쓰시던 유품들 중 명아주 지팡이 한 점을 만날 수 있어
선생의 체백(體魄)을 느낄 수 있다. 유물 유풍들은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중에 있다.
■전주류씨무실종택
全州柳氏 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47호(1984.5.21)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470-43
이 건물은 전주(全州) 류 씨(柳氏) 무실 대종택이다.
무실의 입향시조는 전주(全州) 류 씨(柳氏) 시조(始祖)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 공의
6대손 류성(柳城, 鶴峯 金誠一과 남매지간) 공이다.
무실 문중은 퇴계학통으로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고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7대손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 선생과 문규(門規)를 제정한 8대손 도헌(陶軒) 류우잠(柳友潛) 공이
그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 후 월회당(月會堂) 류원현(柳元鉉) 공이 문중의 화목과 학문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종택의 기도유업(岐陶遺業)과 월회당(月會堂) 현판은 예학의 산실임과 충효, 숭조 애족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납도리 홑처마팔작지붕 형태이다.
부속건물로는 솟을대문 행랑채와 사당이 있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임동면 수곡리 691-1번지에서 1988년 현 위치로 이건 했다.
▶ 답사노트
무실정려각 바로 옆에 있다.
입구(정려각) 쪽에는 최근에 이가원 박사의 ‘기봉선생구려명(岐峯先生舊廬銘)’을 새긴 표석을
후손 류승번(柳升蕃)씨가 세웠다.
■지촌종택
芝村宗宅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4호(1985.8.5)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1182-1
현종 4년(1663) 건립된 의성(義城) 김 씨(金氏)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 선생의
종택으로 1989년 임하댐 건설로 임동면 지례리 625에서 현 위치로 이건 되었다.
지촌 선생의 자는 사흥(士興)으로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의 현손(玄孫)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친인 표은(瓢隱)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행동거지가 고결하고 세상의 명리에 초연한 기품을 지녔다.
현종 1년(1660)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지산서당(芝山書堂)을 지어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 답사노트
종택은 현재 ‘지례예술창작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안동에서 수곡 신단지를 지나 비포장길을 반시간쯤 가야 하는 오지에 이건 되어 있지만 창작촌으로
지정되어 경향각처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곳을 찾고 있다.
1994년 지촌 선생의 방송으로 세계적 물리학자였던 김호길(金浩吉) 박사의 유해가 예술촌 뒤편에
안장되어 있다.
■정재종택
定齋宗宅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52호(1985.8.5)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1037-3
이 건물은 퇴계(退溪) 선생의 적전(嫡傳)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 선생의 종택으로,
선생의 증조부인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선생이 영조 11년(1735) 창건한 집이다.
현재 ‘양파 구려(陽坡舊廬)’와 ‘정재(定齋)’ 및 ‘세산(洗山)’이란 현판이 게판 되어 있고,
내부에서 정재 선생 자찬(自撰)인 ‘명당실소설(名堂室小說)’과 이재(�齋) 권연하(權璉夏, 1813∼1896)
찬(撰)인 ‘경서정재명당실 후(敬書定齋名堂室後)’ 현판이 게판 되어 있다.
임하댐 건설로 임동면 수곡리 1096번지에서 현 위치로 이건 했다.
▶ 답사노트
종택 건물로는 아주 짜임새 있고 웅장한 건물이다.
특히 임하댐 건설로 이건한 현재의 터는 지대가 높으면서도 평지에 자리 잡아 임하댐 호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오른쪽 끝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된 만우정(晩愚亭)이다.
만우정은 임하면 사 의리 ‘악사’에 있었던 건물로서 선생의 강학지소이다.
■의성김 씨 종택
義城金氏宗宅
보물 제450호(1967.6.23)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80-1
의성(義城) 김 씨(金氏)의 종가인 이 집은 16C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이 재건한 것이라 한다.
16C말 학봉 선생이 명(明) 나라 사행길에 북경(北京)에서 그곳 상류층 주택의 도본(圖本, 설계도)을
그려다가 완성했기 때문에, 그 배치나 구조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 많다고 한다.
건물은 ‘口’ 자형 안채와 ‘一’ 자형 사랑채가 행랑채와 기타 부속채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巳’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다른 ‘口’ 자형 평면과 달리 안방이 외부 쪽에 놓이고 커다란 대청이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동향하고 있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오히려 깊숙이 별채보다 외진 곳에 배치되어 내객이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곧장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와 같은 남자 주인의 거처방으로서의 사랑채의 기능은 약하다.
몸채(안채와 사랑채)는 1.6m가량의 좁은 기단 위에 세워져 바깥채보다 높다.
사랑채에 이어지는 부속채는 완전한 2층 구조로 되어 위층은 서고로 사랑의 대청과 이어지고,
아래층은 헛간으로 되어 있다.
집의 외관은 가지런하게 수평으로 이어진 지붕 위에 4개의 합각지붕으로 변화를 주어 아름답고
조화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 답사노트
안동시에서 동쪽(안동대학교 방면)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따라가다 보면 임하 보조댐 후문을 지나
길 왼편으로 나지막한 구릉을 배경으로 웅장한 규모의 고가들이 들어선 남향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의성(義城) 김 씨(金氏)가 500여 년을 세거해 오고 있는 ‘내 앞[川前]’이다.
내 앞에 정착한 분은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의 조부(萬謹, 호 望溪)이며,
청계 선생은 의성(義城) 김 씨(金氏)의 중흥조(中興祖)로서 그의 다섯 아들을 모두 훌륭하게 성장시킨
분으로 유명하다.
■안동귀봉종택
安東龜峯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35호(1982.12.1)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79-1
이 건물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의 종택으로 현종 원년(1660)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 집 양식을 갖춘 건물로 고종 25년(1888) 선생의 12대손 김주병(金周秉) 공이
중수한 바 있다.
납도리를 홑처마 팔작지붕 ‘口’ 자형집으로 대문채·사랑채·안채·사당채 등 건물이 있다.
묘우(廟宇)에는 선생의 맏아들 운천(雲川) 김용(金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 시 주서(注書)로 수행(隨行)하며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호종일기(扈從日記)』가 보물 제484호로 남아있다.
▶ 답사노트
내 앞 ‘작은 종가’로 알려진 집으로, 큰 종가(의성김 씨 종택, 보물 제450호)와 담을 사이하고 있다.
큰 종가와 같이 집의 당호(堂號)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호종일기(보물 제484호)』가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백운정(白雲亭,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75호)에 게판 되었던 현판 역시 보관 중에 있다.
■이우다 종택
二愚堂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49호(1984.5.21)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587-1
이 건물은 안동(安東) 권 씨(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 임하지파(臨河支派) 이우다(二愚堂) 권한(權�)의
종택으로 인조 18년(1640)에 건립한 것이다.
원체는 목조 와가 납도리 홑처마집으로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 자형집이며 대청(大廳)은 6칸으로
오량가(五樑架)에 우물마루를 깔았다.
사랑채는 영조 49년(1773)에 정침(正寢)을 보수하면서 지었는데 높이 기단 위에 팔작지붕을 올리고
건물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마을의 모든 건물이 북향인데 반하여,
이 건물만이 북동향을 하고 있다. 1963년과 1994년에 건물 전체가 보수되었다.
▶ 답사노트
이우다(二憂堂) 권한(權�, 1580∼1652) 선생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인으로 5형제가 모두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권 씨 오현자(權氏五賢子)’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병자호란 때 창의하여 의병부장(義兵副將)으로도 활약했다.
인조 17년(1639)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유곡도찰방·강원도사·성균관직강 등 직을 역임했다.
수은 이홍조, 표은 김시온, 도헌 류우잠, 호우 이환 등과 막역지교(莫逆之交)를 맺었다.
■의성김 씨 운암종택
義城金氏雲巖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50호(1984.12.29)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 669-3
이 건물은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의 셋째 아들인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1534∼1570) 공의 종택이다.
건물의 종도리에 쓰인 상량문(上樑文)의 건륭 19년 갑술(甲戌) 영조 30년(1754)으로
건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정침(正寢)은 납도리 홑처마 팔작지붕에 ‘口’자형와가로 정면 6칸 측면 6칸이며
사랑채는 굴도리 홑처마의 팔작지붕집으로 방과 마루를 꾸미고 툇마루에 난간대를 두른 오량(五梁) 집이다.
▶ 답사노트
운암공은 추월리(秋月里)에 분가하여 살았다.
마을 상류에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속명이 운건암(雲蹇巖)이어서 그것으로 아호로 삼았다 한다.
‘장륙당(藏六堂, 은둔군자를 지칭함)’이란 정자를 선유정(仙遊亭) 앞에다 지어
평생 장수지처(藏修之處)로 삼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1994) 후손들이 종택 뒤편에다 운암정(雲巖亭)을 중건했다.
■제산종택
霽山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29호(2002.10.14)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56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인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선생의 종택이다.
제산 종택은 전형적인 ‘口’ 자형 목조 와가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와 선생의 정자인 가헌(可軒)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들 구사당(九思堂) 현판이 게판 되어 있다.
김성탁(金聖鐸 : 숙종 10, 1684-영조 23, 1747)
의성인(義城人).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이다.
약봉 김극일의 5대손이요 표은 김시온의 증손이며 갈암 이현일 선생의 문인이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용와 류승현, 강좌 권만과 함께 창의 하였다.
그 당시 공은 「토적격문」을 지었다.
귀록 조현명의 추천으로 어전에서 강론하고 유일로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했다.
영조 11년(1735) 중광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스승인 갈암 선생의 억울함을 논변하다가 반대당의 미움을 사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광양으로 이배(移配) 후 11년 만에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삭직(削職)을 각오로 붕당과 폐정을 고발했으며 학파를 초월하여 많은 학자들과 학문을 논했으니,
당색을 달리했던 조현명, 오광운, 박문수 등과도 교유가 있었던 것이 그 예다.
현재 불천위로 봉사하고 있다. 문집 9 책이 있다.
▶ 답사노트
‘금적제구(錦適霽九)’라는 문자가 있다.
의성 김 씨 내 앞마을의 문한(文翰)을 이어간 분들을 말하는데,
금융 김학배, 적암 김태중, 제산 김성탁, 구사당 김락행이 그들이다.
‘화산풍우오룡비(花山風雨五龍飛)’라는 문구도 있다.
그것은 국왕인 영조가 영남의 인재 다섯 사람을 동시에 문과급제로 얻은 기쁨을 즉석시로 노래한
시구 중 한 구절이다.
여기서 ‘오룡’이란 바로 다섯 사람의 새로 얻은 인재를 말하는데,
제산 김성탁, 양파 류관현, 하음 김경필, 삼산 류정원, 대산 이상정을 말한다.
당시 제산이 52세인데 비해 대산은 25세로 현격한 연령차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선생이 벼슬에 뜻이 없어 진작 과거 시험에도 뜻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공을 추천하였기 때문에 유일(有逸)로 자신을 대우하는 것이 못내
혐의스러워 뒤늦게야 응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문과 급제는 개인적으로 보면 스승을 신원하다 몰려 유배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의미하기도 했다. 국왕인 영조의 즉석시는 이러하다.
昨日嶺南貢擧人 작일영남공거인
今辰頭上桂花新 금진두상계화신
豈徒於爾爲親喜 기도어이위친희
爲予金門文學臣 위여금문문학신
어제 영남에서 추천되던 사람이
오늘엔 머리 위에 어사화 새롭구려
어버이 위하려는 그대에게만 기쁜 일이겠소
내게도 금문의 문학신(文學臣)이 되었는걸.
■예안이 씨 충효당
禮安李氏 忠孝堂
보물 제553호(1971.8.30)
안동시 풍산읍 하리 1리 189
이 집은 예안 이 씨 16대손으로 안동(安東)에 들어온 근재(近齋) 이전(李횢) 공의
둘째 아들 풍은(豊隱) 이홍인(李洪仁, 1528∼1594)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었다. 일반적으로 ‘충효당(忠孝堂)’이라 부른다.
공은 무예와 병법이 능숙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풍천(豊川) 구담(九潭)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진중(陣中)에서 순국하였다.
‘口’ 자형 몸채와 ‘一’ 자형인 쌍수당(雙修堂)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채는 홑처마의 납도리 집이고
쌍수당은 중층(重層) 팔작집이다.
▶ 답사노트
‘쌍수당(雙修堂)’이란 충과 효를 한 집안에서 겸전(兼全)하였다는 의미로
풍은(豊隱) 이홍인(李洪仁) 공의 충과 그의 8대손 용눌재(톜訥齋) 이한오(李漢伍) 공의 지극했던 효를
기리는 것이다.
충효당(忠孝堂) 현판은 쌍수당 안에 게판 되어 있다.
이 집은 나지막한 야산을 등지고 풍산(豊山)들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안동 풍산에 낙향한 중시조의 가운데 집이기에 ‘예안이 씨 종택’은 정확한 표기가 아니며,
‘충효당종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풍산의 예안 이 씨는 ‘영남지방의 고가 망족[嶠南之古家望族]’이라는 칭(稱)이 있었다.
■의성김 씨 율리종택
義城金氏栗里宗宅
중요민속자료 제181호(1984.1.10)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33
이 집은 선조 8년(1630)에 세워진 것으로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 선생의 손자인
도암(陶庵) 김후(金煦, 1613∼1695) 공의 종택이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口’ 자형 집이다.
이 집은 공의 장인 광풍당(光風堂) 권제가(權際可) 공이 사위인 도암공에게 분재한 집이며,
그 소재지가 도연명의 고사를 따라 선생이 율리(栗里)라고 이름 지었기 때문에
‘율리종택(栗里宗宅)’이라 한다.
▶ 답사노트
도암(陶庵) 공은 효우(孝友)로 이름이 드러난 분으로서,
시문(詩文)이 간고(簡古)하여 사우(士友)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던 분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춘추(春秋) 의리(義理)가 없어졌으니 다시 세상에 나가 무엇하리오’ 하고
안동부(安東府) 서쪽 청성산(靑城山) 아래 낙동강변에다 터를 잡고 은둔하였다.
안동에서 풍산 방면 국도를 따라 ‘소밤다리’를 막 건너면서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안동김 씨 종택(양소당)
安東金氏宗宅(養素堂)
경상북도민속자료 제25호(1981.4.25)
안동시 풍산읍 소산 1리 218
이 건물은 성종 때의 명신(名臣)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1446∼1502) 공의 종가댁(宗家宅)이다.
목조 와가 팔작지붕 ‘口’ 자형 집으로 내당(內堂)의 정침(正寢)은 중앙에 대청(大廳)을 두고 3개의
고주(高柱)를 높이 올렸으며 외당(外堂)은 오른쪽에 사랑채를 돌출시켜 배치하였다.
사랑채의 왼쪽에는 2칸의 방을 두고 오른쪽은 전체를 마루로 꾸며 제례시(祭禮時) 제청(祭廳)으로
활용토록 하였다.
김영수공은 자가 적옹(積翁), 호는 양소당이라 하며,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 공의 후손으로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 답사노트
삼구정(三龜亭,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13호)을 지은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공의 종택이다.
‘안동김 씨 종택(安東金氏宗宅)’이란 표지가 있다.
■안동김 씨북애공종택
安東金氏北厓公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27호(1981.4.25)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 358 외
이 건물은 안동 김 씨 북애 김후(金�)) 공의 종택으로 납도리홑처마 팔작지붕 ‘口’ 자형 집이다.
건립연대는 미상이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처음에는 노 씨 문중(盧氏門中)의 종택으로 창건되었던 것을
그의 외손인 황 씨(黃氏)가 입주했으나 자손이 없자 또 그의 외손인 아주(鵝洲) 신 씨(申氏)에 인계
입주시켰으나 이들 역시 후손이 없으므로 그의 외손인 북애공이 약 370년 전에 인수,
여기서 세거 하였다고 한다.
▶ 답사노트
풍산읍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30리쯤 비포장 소로를 따라가면 된다.
예천군 호명면·보문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대봉산(大鳳山) 아래 자리 잡고 있다.
독립지사로서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하구(何求) 김시현(金始顯, 1883∼1966) 공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당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아동풍산김씨종택
安東豊山金氏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38호(1982.12.1)
안동시 풍산읍 오미 1리 233
이 건물은 선조 때의 학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1553∼1602) 선생이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고 선조 33년(1600)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1572∼1630) 공이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정면 8칸 측면 7칸의 ‘口’ 자형 주택으로 경상북도 지방의 일반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채 전면 우측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랑이 있는데 기단을 높이 조성하고 팔작지붕을 올려
주인어른이 거처하는 곳의 격식을 갖추었다.
좌측에는 별도로 작은 사랑이 있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中門)의 앞에 토벽(土壁)을 쌓아 밖에서
들여다보이지 않게 막아 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 답사노트
오미동 풍산(豊山) 김 씨(金氏)의 큰 종가이다.
당호는 ‘유경당(幽敬堂)’이다. ‘유연당(悠然堂)’이란 당호는 현재 영주시 휴천동 소재 망와(忘窩) 종택에
게판 되어 있다.
■삼소재(선안동김 씨 종택)
三素齋(先安東金氏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66호(1985.12.30)
안동시 풍산읍 소산 1리 257
이 집은 선안동(先安東) 김 씨(金氏) 시조의 18대손인 김용추(金用秋, 1651∼1711)의 종택으로
조선 현종 15년(1674)에 건립하였다 한다.
당호는 용추공의 5대손인 김종락(金宗洛, 1796∼1875) 공의 호를 딴 것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첩이 내렸으나 돌아가신 뒤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口’ 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중문 간으로 연결하였고,
지붕은 따로 꾸며 팔작지붕을 이루는 납도리집이다.
특히 안대청 건넌방 앞에 뒤주를 둔 것과 중문가 옆 외양간 위에 부엌에서처럼 다락을 둔 점
등이 주목된다.
▶ 답사노트
삼소재(三素齋) 김종락(金宗洛)은 정조 20년(1769) 7월 소산(蘇山, (안동 김 씨와 같은 마을인 素山이나,
구분 짓기 위해 이렇게 쓴다)에서 태어났다.
삼소(三素)란 ‘소산에 살며 깨끗한 행실을 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벼슬에 뜻을 버리고 소산마을에다 초가집 몇 칸을 짓고 ‘지곡서당(芝谷書堂)’이란 현판을 달고 날마다
그곳에 거처하여 서사(書史)로 자오(自娛)하다가 고종 12년(1875) 80세로 몰(歿)했다.
삼소재 기문은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 1763∼1837) 공이 지었는데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예안이 씨 상리종택
禮安李氏上里宗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67호(1986.12.11)
안동시 풍산읍 상리 1리 486-1
이 건물은 예안(禮安) 이 씨(李氏) 7 세손(世孫) 이훈(李薰, 1486∼1552)의 종택으로
중종 20년(1525) 경에 건립되었다.
공은 연산군 10년(1504)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의
참혹함을 보고 나서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남하(南下)하여 이 집을 짓고
유유자적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口’ 자형 주택의 안채는 대청이 중앙에 놓이고 좌우로 상방과 안방이 대칭적으로
구성되는데 비하여 이 집은 대청이 좌측에 놓이고 안방이 중앙 쪽으로 나오면서 상방이 대청 앞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특히 안동 지방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형태이다.
▶ 답사노트
부사직 이 필간의 셋째 아들인 이훈의 묘소는 풍산읍 만운리에 있다. 묘전비는 개 갈한 것이다.
묘소 입로에 있는 마을에 재사가 있다. 사랑채 마루 벽 상단에 감실이 모셔져 있다.
■안동양진당
安東養眞堂
보물 제306호(1963.1.21)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29-4
이 건물은 문경공(文敬公)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선생의 종택으로서
하회에서 으뜸가는 고가로서 풍산 류 씨 큰 종가이다.
이 집은 입암(立巖) 류준영(柳仲쿸, 1515∼1573) 선생의 고택이란 의미로 대청건물에는
‘입암고택(立巖古宅)’이란 당호가 게판 되어 있다.
양진당이란 당호는 겸암 선생의 6대손인 류영(柳泳, 1687∼1761) 공의 아호에서 유래한다.
풍산 류 씨 하회입향조인 전서공 류종혜(柳從惠)의 22대(종손 柳相鵬) 내려온 대종택이다.
▶ 답사노트
현재 사랑주인인 종손이 외지에 나가 있는 관계로 일반인들은 대청의 문을 열고 들어갈 기회가 적어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와 아울러 양진당 기문 등 게판 된 편액들을 쉽게 볼 수 없다.
양진당 당호는 석봉(石峯) 한호(韓濩) 공의 글씨이다.
또한 퇴계 선생이 짓고 양진당 주인인 류영(柳泳, 1687∼1761) 공이 글씨를 쓴
제하회화병병서(題河回畵屛幷序)와 운계산인(雲溪散人)이 지은 ‘하회십육경(河回十六景)이 게판 되어 있다.
자좌오향(子坐午向)인 남향집이다.
사당은 크고 작은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입암고택 현판은 진사 최동진(崔東鎭) 필이다.
■안동충효당
安東忠孝堂
보물 제414호(1965.11.14)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56
임진왜란시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극복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의 종택이다.
충효당은 서애 선생의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 공이 창건한 이후 증손인
눌재(訥齋) 유의 하(柳宜河, 1616∼1698) 공이 확장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랑채는 선생의 8대손 일우(逸遇) 류상조(柳相祚, 1763∼1838) 공이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불시에 닥칠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급조한 건물이라 한다.
충효당(忠孝堂)이란 당호가 게판 된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왼편 북쪽으로
사랑방과 침방이 있고 중앙에는 사랑 대청이 있다.
대청의 전서로 쓰인 충효당이란 현판은 명필인 미수(眉윚)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것이다.
사당채는 몸채와 방향을 달리하여 남향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면에는 삼문(三門)이 세워져 있다.
▶ 답사노트
충효당(忠孝堂) 뜨락에 신축한 전시공간인 영모각(永慕閣)이 있어 관람객의 발길이 빈번하다.
영모각으로 가는 길에 선생을 위시한 충효당의 조상들을 모셔놓은 사당이 있기에 다른 전시공간을 관람할 때보다 경건한 자세가 요구된다.
‘충효당(忠孝堂)’이란 전자 현판은 서애 선생 임종 시 자손들에게 남긴 시구에서 나온 것이며,
‘충효당기(忠孝堂記)’는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 공이 숙종 32년에 지었다.
서애 선생 14대 종손 류영하(柳寧夏)씨가 거처하고 있다.
■안동시습재
安東時習齋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70호(1999.12.30)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415
도승지(都承旨)와 경상도관찰사 등 직을 지내고 연산군 11년(1505)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세상을 떠났던
화산(花山) 권주(權柱, 1457∼1505) 선생의 고택이다.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존 건물은 19C중엽에 후손들에 의해 중건된 것으로 전한다.
이 건물은 드넓은 풍산평야(豊山平野)를 바라보며 정산(井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 터로 알려져 있다.
500여 평의
사당 건물은 퇴락해 있고 담장은 일부 허물어져 있다.
약 60년 전에 대문간 오른쪽에 있던 사랑채를 철거했다고 전한다.
▶ 답사노트
시습재(時習齋)에는 보물 제549호로 지정된 ‘권주종가문서’와 보물 제1002호로 지정된
‘권주종가 문 적’이 금고 안에 보관되어 있다.
시습재는 화산 선생의 7 손 병곡 권구의 재호(齋號)다.
현재 종택 오른쪽에 있는 사당은 병곡 권구 선생의 부조묘다.
이 재사는 전통건조물 제9호(1987.4.7)로 지정되었으나 전통건조물보호법이 실효된 바 있다.
현재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70호(1999. 12. 30)로 지정되어 있다.
‘선비’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계승해야 할 정신문화에 대해 논할 때 '선비정신'을 앞세운다.
선비란, 일반적으로는, 학식이 있고 예절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벼슬이나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 의미가 그렇다면 이러한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알아보고 지킬만한 덕목이 아닐까.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정보화된 시대를 살면서, 구리는 ‘급변(急變)하는’
또는 ‘인간성 상실(喪失)’이라는 단어를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시대에 어떤 사람이, 유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듯한 품성까지 지녔다면
이는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어른들이나 상급자의 눈에 들고 그래서 사랑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개인의 성취도 보다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맹자(孟子)가 그 혼란한 전국시대에 나서 정말 세상과는 동떨어진 듯한 어진 정치,
즉 왕도정치(王道政治, 반대는 覇道政治)를 주장하면서, 주변의 모든 나라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할 때 아주 작은 나라에 서라 할지라도 인의(仁義)를 앞세운다면 온 천하의 백성들이 기분 좋게
렇게 통치하는 나라로 몰려들어 너무나도 쉽게 큰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맹자의 예는, 백 근 정도의 중량이 나가는 물건도 번쩍 들 수 있는 사람이 만약 새의 깃털 하나도
들지 못한다면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일지언정 진정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결론에 이르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지키는 따위 역시 깃털을 드는 것과 같아서
하지 않는 것일 뿐 힘이 모자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선비라는 단어를 비교적 쉽게 설명한 조선 후기의 실학파 세 분의 글을 소개할까 한다.
먼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다.
일반에게는 그는 열하일기(熱河日記)나 양반전(兩班傳)을 쓴 작가로 더욱 유명하다.
연암의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렇게 아름답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했던 인물이다.
그는 가장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게 글을 쓴 사람이다.
그럼에도 연암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조선후기라는 그 당시까지
읽고 쓰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천상 한문학자였던 것이다. 그는 선비를 이렇게 풀었다.
“사(士)는 아래로는 농공(農工)과 나란히 하고 위로는 왕공(王公)과도 벗하며,
자리를 말하면 등급(等級)이 없고 덕(德)으로 말하면 고상(高尙)하고 운치(韻致)가 있는 자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고상하고 운치가 있는 사람’으로 풀어쓴 것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요즈음 주변에 너무 ‘고상’과 ‘운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이다.
이분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인물인데, 대단한 독서가이며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 방대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들어있는 사소절(士小節)이라는 책으로 주목되는 작가다.
‘사소절’이란 책은 쉬운 우리말로 번역까지 되어 출판되었는데,
선비가 일상에 있어서 알고 지켜야 할 제반 범절에 대해 사례 중심으로 쓴 교양서(敎養書)다.
우리가 동양 고전을 읽고 싶어도 너무 방대하고 난해해 얼른 손대기가 어려운데,
이 책은 손에 잡힐 듯한 분량과 비근한 설명 때문에 학생들이 읽는다면 자신의 인생 향로를 설정하는데
퍽 유익하리라 본다.
“어떤 이가 묻기를, ‘선비가 지켜야 할 직분은 대체로 몇 가지인가?’ 하니,
나는 ‘대략을 들면,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경하고,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 읽는 것, 이 네 가지 일일 뿐이다.’라 했다.”
선비가 지켜야할 덕목 네 가지를 말한 것인데,
특이한 것은,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 읽는 것’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학생들은 요즈음 얼마나 편안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은 부모에게 매우 감사할 일이다,
문제는 그 감사할 줄 모른다는데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가난한 선비 집에서 늘 있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자는 그렇게 강조했던 것이다.
이 현실적으로 설명한다면 고학(苦學)을 하는 학생에게는 해당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설명이다.
다산은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實學者)인 동시에 최고의 저술가이기도 하다.
“사(士)란 학도지인(學道之人, 도를 공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써 위로는 공경(公卿)부터
아래로는 대부(大夫)에 이르기까지 벼슬하여 임금을 섬기며,
백성들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를 위하는 자이다.”
다산이 생각하는 선비는 그 규모에서부터 예사롭지 않다.
우선 선비는 ‘도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그 도(道)란 논어(論語)에서 공자는 ‘충서(忠恕, 충성과 용서)’로, 또는 ‘인(仁)’의 다른 이름이었다.
달리 말하면 인격을 닦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때문에 이 경우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 높은 벼슬을 하거나 세상에서 출세하는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다산 역시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요 선생님, 학자였음에도 그의 지위는 대단하지 못했다.
도리어 죄인 신분으로 전락해 조선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오랫동안 유배에 처해졌던 장본이이다.
당시로 돌아가서 보면, 그보다 훨씬 출세하고 잘났던 사람들로 사회는 넘쳐났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에 이르러 남북한 모두에서 그를 존중하고 배우려 하는 이유는 그의 정신이 곧았고
지향하는 바가 훌륭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은 선비는 학문을 통해 백성들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라고 맺고 있다.
지도자는 지도자에 걸맞은 품성을 지니는 사람이 이르러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실학자의 시각이 매서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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