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자 차(五味子茶)
朱實離離綠蔓長(주실이이록만장)-알알이 붉은 알, 덩굴은 푸르게 뻗혀
酸甛霜後可時嘗(산첨상후가시상)-시고 단 그 맛은 서리 내린 뒤에 맛보리라.
山齋採掇勤蒸曬(산재채철근증쇄)-산속 서재에선 따 모아 정성들여 쪄 말리고
藥院題封謹護藏(약원제봉근호장)-약방에선 이름 써 붙여 조심스레 간직하네.
病眼訝看丹鼎粒(병안아간단정입)-병든 눈의 선약인가 조심하여 살펴보고
渴喉欣飮紫霞漿(갈후흔음자하장)-마른 목구멍 자하장인양 기쁘게 마시네!
胸中査滓眞堪洗(흉중사재진감세)-가슴에 막힌 것들 시원히 씻어내니
兩腋生風信有方(양액생풍신유방)-겨드랑이 바람 생기는 처방이 오미자일세.
권근(權近)
며칠 전 역사 유적지를 같이 탐방하는 편안한 친구 한사람과 성북동 서울성곽밑에 자리한 만해 한용운선사의 옛집 심우장(尋牛莊)을 5년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를 보기 때문에 등지고 북향으로 지었다는 심우장은 부자동네인 성북동에 위치하지만 이곳은 게딱지처럼 작고 낡은 옛날 집들이 좁은 골목사이로 다닥다닥 들어서 있는 달동네입니다. 이곳에 4칸크기의 조그마한 심우장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5년전 비가 오던 날이나 오늘 찌는 듯 한 더운 날에도 심우장 좁은 마루에 앉으니 고요함은 여전합니다. 숨막힐 듯 조용합니다. 담장 밑에는 철이른 코스모스 한 송이가 가날프게 흔들리고 들리는 것은 이름 모를 산새소리뿐입니다. 여기에 오면 성북동 마을을 눈 아래 담으면서 그냥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합니다. 친구도 나도 간간히 깊은 호흡만 조용히 쉬면서 마치 명상속의 적막감 같은 시간의 흐름에 마음을 얹고 있습니다.
한참 만에 등에 땀이 식으니 “이제 그만 내려갈까” 하고 좁은 마당과 소나무 마루를 한번 둘러보고 내려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언제쯤 다시 오게 될까?” 글쎄요!
심우장에서 내려오면 상허(商虛) 이태준(李泰俊) 고택인 수연산방(壽硯山房) 있습니다. 이태준은 월북 작가로서 1933년에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당호(堂號)를짓고 『달밤』『돌다리』『황진이』『왕자호동』등 소설을 쓴 순수문학의 작가이고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집필의 산실(産室)입니다.
수연산방은 고택이라는 말 그대로 옛날 한옥 그대로 입니다.
이집은 규모는 작지만 기품이 있는 전형적인 한국정원의 멋을 갖춘 선비의 집입니다. 마루에 올라서면 저만치 북악산 자락의 산 능선을 따라 서울성곽이 보입니다.
정원에는 상허(商虛)가 심은 나무들이 그대로 있고 제비꽃이 무성하게 화단을 덮고, 이름 모를 꽃나무들이 잎사귀를 펼치고 그가 물을 길어 올리던 우물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 수연산방이 전통 한옥 찻집으로는 서울에서 1호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자리는 위의 그림인 사랑방의 바깥 쪽 자리입니다. 여기 앉으면 담장 너머로 북악산 자락이 건너 보입니다. 수연산방의 전통 차맛은 달밤이 제격이랍니다.
주단빛 탁자위에 여름을 식혀주는 명차 “오미자”가 놓였습니다.
냉정하리만큼 하얀 차그릇속에 수즙은 시골처녀의 뺨처럼 볼그레한 수면 가운데 하얀 잣 한 알이 떠 있습니다.
붉은 심장 속에 하얀 마음. 단심(丹心) !
가을바람에 흘러내린 미인의 눈물 같이 차고 맑아서 얼른 찻잔에 손이 가질 않습니다.
한 목음 입에 머금으니 이가시린 차가움 속에 새콤한 맛과 향기가 사지를 오므라들게 합니다.
더위에 오미자차가 좋은 것은 맛이 시기 때문에 몸에서 새어 나가는 침, 땀, 정기(精氣), 유정(遺精-몽정)등을 막아서 몸이 허해지는 것을 보호합니다. 오미자는 폐와 신장에서 약리작용을 하면서 폐(肺)의 기(氣)를 보호하고 신경을 이완시키고 간염을 치료하므로 적당히 복용하면 시력이 좋아집니다. 많이 먹으면 허열(虛熱)이 생기므로 하루 한두 잔이 적당합니다.
소음과 바쁜 일상에서 잠깐 일탈(逸脫)하여 고택(古宅) 수연산방(壽硯山房)에서 가까운 사람과 북한산을 바라보면서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은 피서가 될 것입니다. 한번 가보세요. 간송미술관도 있습니다.
-농월-
하조대(河趙臺)
祥雲南指一長亭(상운남지일장정)-상서러운 구름 이는 남쪽 십리 길 정자는
疊石爲臺入海汀(첩석위대입해정)-첩첩 쌓인 돌 누대가 바닷가로 들어갔다
蜃氣接天成殿閣(신기접천성전각)-신기루는 하늘에 닿아 대궐을 이루며
浪花環坐浸階庭(낭화환좌침계정)-사방 물꽃이 계단 뜰을 적신다.
扶疏松竹生淸韻(부소송죽생청운)-무성한 송죽의 맑은 운치 퍼져나가고
出沒魚龍見怪形(출몰어룡견괴형)-출몰하는 어룡은 도깨비를 보는 듯
徙倚乾坤懷抱在(사의건곤회포재)-하늘땅 배회하며 품은 뜻 있으니
杯樽今日酌東溟(배준금일작동명)-동해의 푸른 바다에서 오늘 잔을 드노라
김세필(金世弼)
여름철 피서지로 제일 많이 찾는 곳이 동해안이라 생각된다.
또한 “동해” 하면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노래한 관동팔경(關東八景)의 명승지를 제일로 꼽을 것이다.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이 그것이다.
다행으로 필자는 2000년 12월에 금강산을 관광하여 삼일포와 총석정을 구경하므로서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모두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남해안 한려수도(閑麗水道)가 곳곳이 절경인 것처럼 동해안도 발을 멈추는 곳이 바다와 연해 있는 아름다운 경관이다.
동해안에서 비록 팔경에는 들어있지 않고 규모는 작지만 양양군 현북면에 있는 하조대(河趙臺)의 절경을 빼 놓을 수 없어 여기에 소개한다.
하조대(河趙臺) 명칭은 조선조 개국의 중요 인물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의 성(姓)을 따서 만든 정자로 전하며 두 사람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청유(淸遊)하였다고 한다.
이성계의 조선조 개국이래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이르는 권력투쟁의 소용돌리에서 권력의 핵심인 정도전과 맞서 이방원의 줄 을선 태종의 일등 공신들이이니 권력과 영화를 얼마나 크게 누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하륜은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風水地理)가로 조선왕조 새 수도를 계룡산 신도안(新都內)에서 건설중인 것을 중단시키고 지금의 서울로 변경시킨 장본인이다. 하조대의 위치도 하륜의 풍수 영향이 아닌가 추측된다.
필자는 가족 끼리나 개인적으로 동해안을 여행시는 꼭 하조대를 찾아 풍경을 즐긴다. 8경이 나름대로 경승지(景勝地)를 자랑하고 있지만 삼일포와 총석정을 제외한 6경들은 실제로 바다와는 거리를 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거대한 바위들이 쌓여 이루어진 하조대는 바닷물과 맞닿아 높이 솟아 있어 언뜻 보면 바다 쪽으로 진입해 있는 모양으로 느껴진다. 정자 밑으로 집채만 한 파도가 성난 용의 혀처럼 세차게 밀려들어 금방이라도 대(臺)를 한입에 삼킬 듯이 달려들고 바위에 부딪친 하얀 물거품과 비말(飛沫)은 여름 더위를 한순간 씻어준다. 그러다 우연히 발밑을 보았다가 깎아지른 절벽 때문에 순간 아찔하는 전율로 몸이 움츠러든다.
그래서인지 하조대를 대하는 느낌은 건물의 규모에 비하여 강렬하다. 그런 풍경의 이유인지 하조대를 노래하고 있는 시들은 대체적으로 호방한 기상을 담고 있다.
위의 시를 쓴 시인은 사방의 물꽃(浪花)이 계단 뜰을 적신다고 하였다. 드넓은 바다의 구름을 용궁이라 하였고
바다에 출몰하는 용같은 물고기들을 도깨비같이 신기하다고 한다.
여기에 소나무와 대나무의 싱싱한 운치와
웅장한 자연을 당당하게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
마지막에 시인은 푸른 동해를 향해 잔을 높이 든다고 하였다
얼마나 장쾌한 기상인가!
동해를 가슴에 퍼 담을 수 있는 기상이라면, 세상의 무엇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 있리오. 한 번 날개 짓하면 9만리를 날아가는 장자의 붕(鵬)새의 기상과 무엇이 다르랴!
좁고 숨 막히는 서울의 길거리에서 소고기를 핑계로 데모를 일삼지 말고 이길로 하조대로 달려가서 동해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라!
그리고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여라.
그러면 그대들의 부끄러움을 알 것이다.
-농월-
정훈(庭訓)
陳亢問於伯魚曰(진항문어백어왈)-진항(陳亢)이 백어에게 물었다.
子亦有異聞乎?(자역유이문호)-그대는 선생님으로부터 다른 공부를 배운 적이 있는가?
對曰 未也(대왈 미야)-백어가 대답하기를 아직 없습니다.
嘗獨立(상독립)-한번은 홀로 서 계실 때
鯉趨而過庭曰(리추이과정왈)-제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 말씀하시기를,
學詩乎?(학시호)-시(詩)를 배웠느냐? 하시기에
對曰 未也(대왈 미야)-아직 배우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不學時 無以言(불학시 무이언)-그러자 시를 모르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하시기에
鯉退而學詩(리퇴이학시)-물러나 시를 배웠습니다.
他日又獨立(타일우독립)-다른 날 또 홀로 서 계실 때
鯉趨而過庭(리추이과정)-또 뜰을 지나가자
曰 學禮乎?(왈 학예호)-예(禮)를 배웠느냐? 하시기에
對曰 未也(대왈 미야)-아직 배우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不學禮 無以立(불학예 무이립)-예를 배우지 않으면 세상에 나가 설 수 없다. 하시기에
鯉退而學禮(리퇴이학예)-물러나 예를 배웠습니다.
聞斯二者(문사이자)-들은 것은 이 두 가지뿐입니다.
陳亢退而喜曰(진항퇴이희왈)-진항이 물러나와 기뻐하며 말하기를
問一得三(문일득삼)-하나를 물어 셋을 얻었다.
聞詩 聞禮(문시 문예)-시와 예에 관한 것을 들었고,
又聞君子之遠其子也(우문군자지원기자야)-또 군자는 자식을 멀리한다는 것을 알았다.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
위의 글은 논어의 계씨편에 나오는 대화로서 공자의 제자 진항(陳亢)이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를 보고 혹시 아들이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특별히 과외 받는 것이 있는가 하고 물었는데
공자의 아들 백어가 대답하기를 “특별히 교육 받은 것은 없고 한번은 공자가 혼자 서있는 정원을 지나가는데 공자가 “시(詩)를 공부했느냐” 하고 묻기에 시를 공부안했다고 하니 시를 공부하라고 하시기에 돌아가 시를 공부했고 또 “예를 공부했느냐” 하고 묻기에 안했다고 하니 예를 공부하라고 하기에 물러나 예를 공부 했다 는 내용입니다.
이내용은 공자(孔子)가 아들 백어(伯魚)를 가르칠 때 자식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제자들보다 편애(偏愛) 하지 않고 그저 뜰을 지나가는 아들에게 몇 마디 가르침을 주었다는 뜻으로 과정지훈(過庭之訓)이라하며 줄여서 정훈(庭訓)이라합니다.
이 정훈(庭訓)이란 말은 한자(漢子)문화권 나라에서 자식교육에 고전(古典)적인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내자식은 내가 가르칠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가르치다보면 화를 낼 때가 있는데 그로인해 부자간의 사이가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남이 내 자식을 가르치면서 화를 내고 회초리를 쳐도 시간이 지나면 남이기 때문에 잊혀지므로 별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어릴 때 교육은 중요합니다.
교회나 사찰에서 유아에서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신앙생활의 체험시간을 보았습니다. 인성(人性)이 날로 험악해지는 사회현실에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신앙을 통해서 선(善)한 생활을 몸에 익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의 감수성은 매우 민감하여 평생을 좌우하므로 특히 어른들의 언어 행동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린이 성장시절의 보고 듣는 환경은 매우 중요합니다.
프로이드 심리학에서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는 성장과정에서 받은 영향이 일생을 좌우하는 학설의 결과를 우리주위에서 심심찮게 보고 있습니다.
교회어린이는 예수님의 사랑을 몸에 익힐 것입니다.
사찰의 어린이는 부처님의 자비를 배울 것입니다.
노름하는 부모의 자식은 화투를 배울 것입니다.
부모가 항상 싸우는 가정에서 자란 어린이는 갈등을 배울 것입니다.
TV에서 모방 범죄를 배우고 있습니다.
부잣집 자식은 어연중 부자의식이 몸에 배이고 가난한집 자식은 가난했던 기억이 항상 남아있습니다.
TV에서 흥미 본위의 상업성 드라마에 가정을 갖인 남녀가 저지르는 불륜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혼인외 자녀가 출생되는 장면이나 억지로 꾸미는 남녀의 갈등을
우리 어린이들은 죄의식없이 그대로 배우고 또 따라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촛불시위에서 부모들이 어린이에게 촛불은 쥐어주고 같이 데모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촛불시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7장 9절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자라나는 새싹에게 정훈(庭訓)을 알려줍니까 아니면 뱀을 손에 쥐어 줍니까?
-농월-
자야사시가(子夜四時歌) 소서(小暑)
江南蓮花開(강남연화개)-강남에 연꽃이 피면
紅光覆碧水(홍광복벽수)-붉은빛이 푸른 물을 뒤덮지요
色同心不同(색동심불동)-빛깔은 같아도 마음이 다르기도 하고요
藕異心無異(우이심무이)-연뿌리는 달라도 마음은 같기도 하지요
소연(蕭衍)
오늘이 작은 더위라는 의미의 7월 7일 소서(小暑)이다.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로 접어드는 한여름 이다.
요 며칠간 계속되던 열대아 더위가 소서날 아침에 이슬비로 열기를 식히고 있다.
어제 광주(廣州)에 볼일이 있어서 성남시를 지나면서 모처럼 논들을 보게 되었다. 모내기를 한창 하던 망종이 어제 같은데 제법 웃자란 볏모들은 요즘 갑자기 뜨거운 더위에 여름 견딜 준비라도 한 듯 검푸른 빛이 역력하다. 바람이 한번 부니 들판의 논은 푸른 융단처럼 물결친다.
저 건강한 식물의 몸에서 우리를 먹여 살리는 쌀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니 온 세상이 촛불시위에다 기름값 물가고 보도에 번데기처럼 오므라든 마음에 한 가닥 위안이 된다.
한가한 곳에서 차를 세우고 논 두름에 들어가 논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목욕탕 물처럼 따뜻하다. 손으로 벼를 한번 쓰다듬어 본다. 손의 방향 따라 고개를 숙인다. 씨알에서 볏짚 열매까지 전부를 희생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숭고함에 겸손까지 갖추었다. 소서의 절기가 주는 자연의 미덕이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는 18층이다. 어제저녁 하도 더워서 눈을 떠니 새벽 3시다. 서늘한 마루바닥에 등을 대고 눈을 감는데 어디서 갑자기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도시에 웬 개구리 소린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아파트 정원에 연못이 있는데 개구리가 서식한 모양이다. 참 생명의 번식은 경이롭다.
작은 연못이지만 연꽃도 있을 것이다. 자비롭게 펼친 연잎 밑에서 개구리는 소서(小暑)를 알리는 교향곡을 들려주는 것이다.
옛날 농촌 이맘때 연꽃이 필 무렵이면 남녀 간의 사랑도 익어 갈 때다. 총각들은 저녁상에 보리밥을 고봉으로 배를 불린 뒤 낡은 수건 하나 어깨에 걸치고 마을 옆을 감돌아 흐르는 시내로 나간다.
처녀들도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빨래거리를 갖이고 냇가로 나간다. 교교한 달빛을 덤서리 대나무와 덤불 그림자가 살짝 가려준 개천둑 아래서 처녀 총각이 조우(遭遇)하는 것도 이 소서(小暑) 시기다.
지금 소서(小暑)의 글을 쓰면서 패티김의“4월이 가면”을 듣고 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잠이 들 면은 꿈속의 사랑
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1966년 패티김이 부른 이 노래에는 4월이 갖어온 애절한 사랑의 사연이 담겨 있다.
연꽃핀 연못가를 달그림자를 밟으며 채련가(採蓮歌)를 부르면서 사랑을 속삭이던 7월의 청춘 남녀들은 지금쯤 아마 칠순을 넘겼을 것이다.
7월이 가면 8월이 온다.
8월을 기다림은 울어야 할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기다리는 달이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에 간간이 들리는 개구리 소리에 소서(小序)를 맞이하면서 지난시절 여름 회상에 잠깐 젖어본다.
-농월-
저승에는 다시 새벽이 없는가?
誰家長不死(수가장불사)-어느 집의 누구인들 죽지 않으리.
死事舊來均(사사구래균)-죽는 일은 예부터 공평한 것이니라.
始憶八尺漢(시억팔척한)-처음에 팔 척 사내로 알았더니
俄成一聚塵(아성일취진)-어느새 한 줌 티끌이 되었구나.
黃泉無曉日(황천무효일)-저승에는 다시 새벽이 없는가?
靑草有時春(청초유시춘)-푸른 풀은 때 있어 봄이 오는데
行到傷心處(행도상심처)-가는 곳마다 무덤이 있어
松風愁殺人(송풍수살인)-솔바람이 마음을 아프게 하네.
한산시(寒山詩)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선 물리 생물학적으로는 심장의 고동이 멈추고 더 이상 호흡을 하지 않는 상태(심폐사)를 죽음이라고 한다. 영적(靈的)인 관점에서의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다. 즉 초월적(超越的)혼이 육체를 떠나고 빈 몸만 남는 것이 죽음이다.
어릴 때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타고 땅에 묻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내 고향 성내미재를 가는 길에 우측에 상여집이 있었는데 낮에도 그 옆을 지나면 무서워서 고개를 건너편 저수지 있는 쪽으로 돌리고 걸어갔다.
지금도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죽는 것이 무엇이 두려워?”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명예고 재산이고 권력이고 이세상의 그 어떤 것이 없어져도 두렵지 않다고 하는 말은 수긍이 갈수 있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쉽지 않다. 죽음은 “연습”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의 모든 신앙(信仰)의 존재 이유는 궁극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는 수단에 불과 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카필라성(城)의 동서남북 4문(門) 밖에 나가 인생의 4고(四苦)를 직접 보고 출가를 결심한 사문유관(四門遊觀)도, 기독교의 “부활(復活)”도 모두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 자살을 하는 사람은 정상을 떠나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성을 상실한 행위로 정상적인 죽음으로 볼수 없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집착은 끝이 없다. 나이 100살을 먹어도 죽고 싶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런 면으로 보면 불로초를 구한 진시왕은 참 솔직한 사람이다.
성경 구약에 나오는 사람들은 보통 600년 800년을 살고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 시편 5장 12절 에는 인생을 덧없고 유한 것으로 “이는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 베어져 마른다.”다고 하였고 또 시편 90장 10절에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라는 기록으로 사람은 영원히 살수 없고 사는 것도 힘들다고 한다.
일반 문헌상으로 가장 오래 산사람은 사기 초세가(史記 楚世家)에 나오는 중국의 팽조(彭祖)로서 800년을 살다가 죽었는데 그 부인이 매우 슬피 울기에 옆에 조문객 한사람이 묻기를“ 당신의 남편이 800년을 살다가 죽었는데 무엇이 슬퍼서 우느냐” 하고 말하자 팽조 부인이“800년이 길지만 900년보다 짧지 않으냐” 라고 대답하여 생명에 대한 애착을 말해주고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어본 사람의 말을 아무도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전혀 모른다. 내세(來世)의 천당(天堂)이니 극락(極樂)이니 하는 말은 전부 사람이 만든 문자(文字)도구의 부호에 불과 한 것이다.
“죽음(사死)”이란 말도 사람이 만든 문자의 한 단어에 불과한데 인간이 만든 글자 의 허상 앞에서 인간이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불상(佛像)과 십자가상(十字架像)앞에서 사람이 빌고 있다.
죽음을 구원해 달라고---
생(生)과 사(死)의 단어가 없어도 여전히 태어나고 죽을 것이다.
이 세상에 문명이 없어도 종교가 없어도 나고 죽는데 는 아무 장애가 없다. 어쩌면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것을 사람이 만들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고 죽는 것은 그냥 스스로 그러한(자연自然)것이다.
저승에 새벽이 없다는 것은 나고 죽음도 없다는 것이다.
-농월-
수정포도오절(水精葡萄五絶) 수정 같은 청포도
是水精耶非水精(시수정야비수정)-이것이 맑은 구슬인가, 구슬이 아니로세.
團圓箇箇更通明(단원개개경통명)-둥글둥글 알알이 모두 다 투명하고
最憐獨得中和味(최련독득중화미)-가장 사랑스럽기는 홀로 조화된 맛이로세!
氷蘗徒誇苦與淸(빙벽도과고여청)-얼음 황벽은 쓰지만 맑음만을 자랑하는데
이색(李穡)
7월 더위 !
어제 울산 36도 서울도 32도입니다. 36도면 체온과 같습니다.
도시의 7월 더위는 생활 시설에서 배출되는 열로 인해서 더욱 견디기 힘듭니다. 농촌은 같은 태양열을 받지만 툭 터인 자연 속에서 각종 초목과 강과 산들바람이 열기를 식혀주기 때문에 같은 더위라도 느낌이 다릅니다.
도시에서야 요즘 같은 더위에 급한 해결책은 에어컨 바람입니다.
시골은 툭 터인 마당 한편에 숭숭 구멍이 뚫린 대나무평상과 위에는 자연 차양(遮陽)인 포도나무가 덮여 있습니다. 청포도입니다.
식전(食前) 아침일 을 하고 땀에 젖은 등에 시원한 등물을 몇 바가지 껴 얹고 찬물에 담가둔 막걸리 한 사발을 입한번 떼지 않고 단숨에 넘기면 그 시원함이란 비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늘한 대나무 평상에 등을 대고 반듯이 누워 위를 쳐다봅니다. 알알이 열린 포도송이 사이로 파란 하늘이 유리조각처럼 보입니다. 눈을 돌리면 장독대 옆에 심은 수탁벼슬처럼생긴 맨드라미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청포도의 계절 7월!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잘 아시는 이육사의 “청포도”입니다.
청포도가 익는 7월에 찾아오는 청포 입은 손님을 기다리는 주인의 흐뭇한 정서가 그대로 나타난 시입니다.
이육사 시인이 청포 입은 손님을 암시하는 조국 광복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오늘은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흰 앞치마를 입고 해맑은 웃음을 띠며 입넓은 하얀 대접에 이제 막 씻어 수정 같은 물방울이 초롱초롱 맺혀있는 청포도를 들고 오든 형수님을 떠올린 7월입니다.
※참고
수정(水精)-수정水晶-(무색투명의 석영石英)의 다른 이름. 달의별명 물속에 사는 요정
-농월-
하일산중(夏日山中)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懶搖白羽扇(나요백우선)-날씨가 더워서 백우선(白羽扇)을 부쳐도 보고
裸體靑林中(나체청림중)-윗도리를 벗고 숲속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라,
脫巾掛石壁(탈건괘석벽)-망건을 벗어 돌 바람벽에 걸어 놓고
露頂灑松風(로정쇄송풍)-맨 머리에 솔바람을 쐐니, 좀 살것 같구나...
이백(李白)
더워도 너무 덥다. 더위에 사람이 죽으니 살인(殺人)더위다.
올해가 무자년(戊子) 물(水)의 해인데 물의 상극인 화(火열)가 너무 강하다. 년초부터 촛불을 들고 열을 올리더니 결국 7월 열(熱)이 사람을 죽인다. 모든 것은 너무 과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포항제철 광양제철소를 바닷가에 건설하는 것은 반드시 운송수단의 편리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물과 불의 균형을 위함도 있다.
사람도 남(火) 녀(水)간에 속궁합이 잘 맞으면 웬만한 어려움도 잘 견딘다.
양(男)이 너무 강하면 수(女)가 고갈되어 터전을 잃게되며 수(女)가 너무 강하면 양이 열기를 잃어 고사리 머리처럼 고개를 들지 못한다.
우리나라 사회분위기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의사표시인 데모도 너무 심하면 결국은 부작용으로 나쁜결과를 갖어온다. 적당한 선에서 자제하는 중용의 균형을 유지하는 지혜가 있어야 교육받은 국민에 걸맞는 자세이다.
음양오행(陰陽五行)상으로 여름에 낮이 길고 밤이 짧으며 볕살이 따가운 것은 양(陽)의 기운이 넘쳐 나는 현상으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햇볕을 많이 쪼여서 양의 기운을 많이 받아야 하며, 겨울이 낮이 짧고 밤이 긴 것은 겨울은 음(陰)의 계절이므로 밤에 잠을 많이 자서 음기(陰氣)를 많이 축적하여 양(陽)을 뒷받침하는 음양(陰陽)의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에 좋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라고 볼 때 사계절의 영향을 받고 사는 지역의 생물체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위도 어느 정도라야지 요즘처럼 살인적(殺人的)인 폭서(暴暑)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자연 현상에 순응(順應)하다가는 건강에 큰 낭패를 볼수 있다. 섭씨 32도에 체온을 재어보니 37~38도 이고 1분에 맥박수가 80회를 넘는다. 대야에 찬물을 채워 발을 담그고 30분 지난 후 체온는 35도 맥박 수는 70미만으로 정상으로 돌아간다. 더위는 이처럼 무섭다.
위의 당시(唐詩)를 쓴 이태백은 약 2300년전 사람이다.
그때 여름도 많이 더웠는 모양이다.
부채질도 하고 윗도리를 벗고 숲속에 들어가 바람을 쏘이기도 하면서 더위를 피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이 같은 더위를 강쇠불볕이라고 했다.
강쇠(강철鋼鐵)는 강철같이 단단하다는 뜻으로 변강쇠가 옹녀를 껴안고 열 내는데 강하기 때문에 여름 폭염에 붙인 이름이다.
강쇠는 서해에 사는 전설적인 짐승으로 폭염은 강쇠가 출현한 탓으로 여겼다.
강쇠가 두려워하는 것은 물을 좋아하는 기러기이므로 발(렴簾)을 칠 때에 기러기 매듭을 만들거나 혹은 달고 발에 기러기 그림을 그려 상징적인 피서를 했다고 한다.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조추고열(早秋高熱)이라는 시에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라는 글귀가 있다. 찌는 듯 한 더위에 관복(官服)으로 점잖게 정장(正裝)을 갖추고 있으니 더위를 참다못해 미칠 것만 같아서 큰 소리로 부르짖고 싶다. 라는 말이다.
방송에도 직장인들의 노타이 차림이 권장된다고 한다.
날씨가 이러니 거리에 다니는 여성들이 그의 반나체처럼 노출을 하고 있다.
절대로 남성들이 눈요기로 봐서는 안 된다. 더위를 참지 못해 발광(發狂)상태에서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현상이다.
한의학에 동승정강(動升停降)의 이치가 있다. 움직이면 올라가고 정지하면 내려간다는 뜻이다. 뭐니 뭐니 해도 찬물에 발을 담그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최고다.
-농월-
더위를 꼭 없앨 수는 없지만
熱不必除(열부필제)-더위를 꼭 없앨 수는 없지만
而除此熱惱(이제차열뇌)-덥다고 짜증내는 마음을 없애면
身常在淸凉臺上(신상재청량대상)-몸은 항시 서늘한 마루에 있을 것이요, 窮不可遣(궁부가견)-가난은 마음대로 쫓아낼수는 없지만
而遣此窮愁(이견차궁수)-가난을 근심하는 생각을 없애면
心常居安樂窩中(심상거안락와중)-마음은 항상 안락한 집에 있으리라.
채근담(菜根譚)
푹푹 찌는 더위를 참기도 힘드는데 고물가시대의 예고로 수입은 줄어들고 물가는 올라서 가정경제가 새롭게 어려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5000불 시대에서 4000불로 후퇴할 경우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훈련이 되어서 큰 충격을 느끼지 않지만 지금은 생활수준이 2만불 환경으로 길들여져 19000불 이하로 후퇴하면 심리적 부담이 대단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냉정한 마음 가짐입니다.
장관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책임은 묻되 지혜를 모아야 할때입니다.
특히 이런 어려운때일수록 신앙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어려울 때 진실로 인내심을가지고 기도하면서 충고하는 모습을 보여야 세상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경쟁적으로 각종파의 신앙인들이 세상사람들과 합세하여 팔을 걷어부치고 데모하면서 힘자랑을 과시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사회나 환경을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서는 의견을 달리할수도 있기 때문에 이 글을 보고 사회의 모순에도 관대하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의욕에 역행하는 말이라고 비난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처럼 내마음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보는 눈에 따라서 각자의 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항상 불만이 많은 세상입니다. 더위를 짜증나게 생각하지않고 “원래 여름은 더운 것이 제격이다”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힘이 생깁니다.
가난도 근심만 하지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 집을 사야 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목표에 가까이 갈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형편으로 학교 공부를 못한 사람도 열심히 책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면 얼마든지 지식인이 될수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노력의 과정 속에서 생활이 검소하고 마음이 소박해져서 현실에 만족하는 즐거움을 찾아내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정도의 고통쯤은 불평없이 견딜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한시(漢詩)도 세상과 자기의 처한 환경을 긍정적으로 보는 마인드를 갖어 마음으로 밝게 살아가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월-
회향(回鄕) 늙어서 고향을 찾으니
少小離鄕老大回(소소이향노대회)-어려서 고향을 떠나 늙어서 돌아오니
鄕音無改빈毛衰(鄕音無改빈모쇠)-고향 사투리는 그대론데 머리만 희어졌네!
兒童相見不相識(아동상견부상식)-아이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지를 못하고
笑問客從何處來(소문객종하처래)-웃으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만 한다.
하지장(賀知章)
어제 저녁 식구들이 전부모여 올해 여름 휴가시에 부모님 산소에 벌초를 의논하였다. 큰놈이 30세가 되면서 부터 시작한 매년 하는 가정 행사다. 교통이 좋아졌다 하지만 고향 산소가는 길이 차가 들어가지 못해 3km이상을 등산을 해야 하고 또 서투른 낫질이나 제초(除草)일이 쉽지는 않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꼭 풀을 직접 베고 싶다는 뜻을 식구들이 받아주어 벌초를 한 것이 6년째다. 아이들이 직장에 매인 몸이라 추석 무렵에 맞추어 갈수가 없어 휴가시를 택한 것이다.
작년에도 벌초길에 잠간 시간을 내어 떠난 지 40년이 되는 고향을 찾았다. 20대에 고향을 떠날 때는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떠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떠난 것이다. 오래만의 귀향이라서인지 고향거리를 걸으니 마치 새 옷을 입은 것 같은 어색한 기분이 이었다.
큰 길은 그대로인데 옛날에 정들었던, 마치 뱀이 기어가듯 꼬불꼬불 돌담길이 있던 “안골목”과 “해치골목” 도깨비가 잘 나오던“세지모팅”은 흔적도 없고 바둑판같은 길로 변하여 있다. 어릴 때 오줌을 싸서 바가지를 쓰고 소금 얻으러 갔던 “욕쟁이 할매” 집은 없어지고 미장원이 들어 서 있다.
길을 한참 걸어도 한사람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상치 소쿠리를 들고 슬리퍼를 신은 아주머니가 나를 힐끔 쳐다보고 지나간다.
한 학생에게 “얘, 배 아무개 집이 어디고” 하고 물으니
“몰라예 그런 사람 이 동네 안삽미더” 하면서 나와 차를 번갈아 보고 “아저씨는 오디서 왔는데예?” 하고 되묻는다.
“서울 가서 고생을 하더라도 돈 벌어 나이 들면 고향에 돌아와 논밭좀 장만해서 노후를 보낼 끼다” 하면서 떠난 청년은 40년이 지나 하얀 머리가 되어 30이 넘은 아들 셋을 데리고 오후 햇살에 그림자를 드리운 고향 남산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다.
“아버지, 시간이 너무 지났어요, 고속도로 정체되면 시간 걸리니 출발 하세요”
응, 그래? 그만 가자 !
-농월-
희우정기(喜雨亭記) 소중한 비가 내렸다
五日不雨無麥(오일부우무맥)-닷새를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고
十日不雨卽無禾(십일부우즉무화)-열흘 비가 안 오면 벼가 없다,
無麥無禾卽(무맥무화즉)-보리와 벼가 없으면
歲且荐飢(세차천기)-세월 또한 거듭 굶주려서
獄訟繁興而(옥송번흥이)-감옥의 송사가 많이 일어나고
盜賊玆熾卽(도적자치즉)-이에 도적이 치열한즉,
吾與二三子(오여이삼자)-나와 우리들이
雖欲優游而樂於此亭(수욕우유이낙어차정)-정자에서 즐겁게 놀게 되는 것도
皆雨之賜也(개우지사야)-다 비가 내려준 덕택이니라.
소동파(蘇東坡)
비가 내렸다.
며칠간을 연일 35도의 폭염으로 사람이 더위로 죽고 신문 방송에서도 폭염주의보를 외쳤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인간이 과학의 힘으로 만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런데 온 세상이 숨 막혀 허덕이던 열기를 단 하루에 내린 비로 더위를 말끔히 정리하여 준다. 물론 비가 그치고 더위는 다시 오겠지만--
이처럼 자연의 조화는 오묘하고 경이(驚異)롭다. 그리고 무섭다.
인간이 아무리 과학문명을 발전시켜도 자연 앞에는 코끼리 발에 밟히는 성냥갑이다.
사천성의 지진 한방으로 수만의 사상자를 냈다.
그것은 위대한 자연 앞에 방종 하는 인간에게 보여주는 간단한 경고이다. 자연의 힘은 바로 공포다.
닷새를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고 열흘 비가 안 오면 벼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산모가 갓 난 신생아에게 젖을 물리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수억만톤 녹아내리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자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노여움의 채찍은 인류의 멸망까지 단죄할 줄 모른다.
오늘 자연이 하사(下賜)하는 카리스마의 단비를 계속 받으려면 인간은 자연과 화해를 해야 한다. 아니 화해가 아니라 순종(順從)해야 한다.
자연은 아버지처럼 준엄하면서도 어머니처럼 자애로워 우리에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는다.
물과 전기를 아껴쓰고, 합성세제를 삼가고, 오염물질을 무단 방류 말고, 휴지를 함부로 버리지 말며, 매연배출정도만 조심해도 자연은 우리에게 찬란한 햇빛과 맑은 공기 생명수의 단비를 값없이 보내 줄 것이다.
감우무사(甘雨無私)라 하여 꼭 필요할 때 내리는 단비는 사사로움이 없이 우리 강산에 공평하게 구석구석 목마름을 해결하여 준다.
-농월-
규정(閨情) 물총새 부부
未授三冬服(미수삼동복)-아직 남편에게 보내지 못한 겨울옷
空催半夜砧(공최반야침)-밤늦도록 다듬이질만 재촉했네!
銀釭還似妾(은강환사첩)-저 등불 내 마음과 같아
漏盡却燒心(누진각소심)-눈물 다 마르고 마음마저 태우는구나.
김극검(金克儉)
아내는 등이 굽었습니다 !
일본 에도(江戸 えど) 시대 어느 여인숙 집 한 데릴사위는 가업은 뒷전이고 매일 책만 읽어 처가 식구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습니다. “당신은 여인숙 주인에 그칠 분이 아닙니다. 집을 떠나 학문에 정진하십시오. 당신이 뜻을 이룰 때 까지 몇 년이고 아이들을 기르며 기다리겠습니다.” 하면서 남편에게 용기를 줍니다.
상경한 남편은 뒤늦은 공부 끝에 “만엽집(萬葉集)”을 대성(大成)시킵습니다. 이 사람이 일본국학(日本國學)의 대가 가모 마부치(賀茂眞淵)입니다. 만엽집(萬葉集)이란 8세기에 편찬한 일본 최고(最古)의 노래집(가집歌集)으로 신라의 향가(鄕歌)와 비슷합니다.
팔만대장경중의 “옥야경”에서 부처님은 “남편에 대하여 아내는 누님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모습을 프랑스 소설가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실연(失戀)으로 방황하던 남자 주인공에게 장인 될 사람이 “물총새의 전설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물총새 암놈은 바다 위를 날다 지친 수놈 밑으로 들어가 등에 업고 난다네”라고 아내의 헌신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어 용기를 내게 합니다.
2006년 4월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가 너무 감동적이 어서 메모를 해 놓은 것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4.5톤 트럭을 부부가 교대로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운전사 이야기는 땅으로 올라온 현대판“물총새” 전설같습니다. 부부는 업고 업히며 거친 고속도로를 끝도 없이 달립니다.
화물트럭을 몰던 남편이 덜컥 병이 났습니다. 아내는 53세에 운전을 배웠습니다. 서울 부산을 일주일에 세 번씩 함께 밤낮으로 왕복한 지 3년째입니다.
복잡한 시내 길은 남편이 운전하고 덜 까다로운 고속도로는 아내가 맡습니다. 남편은 신부전증으로 신장 투석을 받습니다. 신장투석을 받는날은 남편은 아내의 운전석 뒤에 누워 곯아떨어집니다. 아내는 남편 코고는 소리가 생명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가끔 소리가 끊기면 손을 뒤로 뻗어 남편 손을 만져 봅니다. 곤이 자는 남편이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남편이 운전대를 잡을 때도 아내는 쉬지 않습니다. 지친 남편에게 말도 걸어주고 팔도 주물러 줍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을까요?
자식들에겐 더 이상 손 벌리기 싫어 연락도 안한답니다. 저희들끼리 잘 살길 바랄뿐입니다. 속담에 효자(孝子)가 악처만 못하다(불여악처不如惡妻)고 했습니다. 소문난 효자 자식보다 아내가 났습니다.
땅위를 달리는 “물총새” 부부가 날개를 접고 쉴 여로(旅路)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트럭운전이 이들 부부의 생명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내는 “함께 다닐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물총새 부부는 지금도 호남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겠지요. 어떤 사부곡(思夫曲)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까요!
또 위의 이야기 말고도 헌신적인 아내의 이야기는 너무 많습니다.
우리들의 아내는 사는 것이 힘들때 더욱 빛을 냅니다.
지난 어려웠던 세월무사히 보내고 이 시간까지 이정도 사는 것도 “물총새 아내”의 덕분입니다.
못난 남편들을 업고 사느라 뼈는 골다공증에 상하고 발바닥은 소나무 껍질 같은 구덕살이 박혔습니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여성의 사회진출로 돈을 벌어 위상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세일하는 마트에 줄을 서고 5000원짜리 인조진주 목걸이에 감격하는 아내입니다.
아직도 맛있는 음식 생기면 그 잘난 남편 먹일려고 챙겨 놓는게 우리들의 아내 입니다.
이제는 수놈 물총새가 업을 차례입니다.
-농월-
과욕(過慾) 부질없는 욕심
農夫發汗田耕努(농부어행전경우)-농부는 땀 흘려 밭을 열심히 가는데
夏峰白雲何處行(산요백운하처행)-여름 산봉우리 흰 구름은 어디로 가는가?
豆播得豆世上理(인생사종두이행)-콩심은데 콩나는 것은 세상이치인데
何待慾心心唯豊(하대욕심심유풍)-무슨 욕심을 기다리는가, 마음이 풍요한데
농월(弄月)
어제 수박을 사고자 집 앞 시장을 갔는데 요즘 무더위로 가격이 올라 한통에 보통 13000원 15000원을 호가하여 좀 더 싼곳을 찾아 자전거로 30분 거리 딴 시장으로 갔습니다.
그 시장도 역시 가격이 비슷한데 한 상점에 꼭지가 약간 시들은 것이 1만원하기에 값을 치룬후 또 다른 상점에서 상추를 사는데 바지 호주머니에 넣어둔 돈이 없어졌어요. 호주머니에 땀이난 손을 빼다가 잘못되어 3만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3천원 싼곳 찾다가 3만원을 잃은 것입니다. 싼곳을 찾아다니것이 반드시 욕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적은 것 때문에 큰 것을 잃은 것입니다.
북제 유주(北齊 劉晝) 신론(新論)에 나오는 고사 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의 혜왕(惠王)이 이웃 촉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한 가지 꾀를 생각했습니다. 혜왕은 욕심이 많은 촉(蜀)의 왕비를 이용했습니다. 혜왕은 소(우牛)의 형상을 만들어 그 속에 황금을 가득 채워넣고 소가 똥을 누면 금이 나온다며 황금소의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소문을 들은 촉나라 왕비는 그 소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진나라에서 황금의 소를 촉나라에게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낸다는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촉나라 왕비는 선물에 눈이 어두워 백성들을 동원하여 황금소를 성대히 맞으라고 하였습니다. 촉의 신하들은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며 만류하였으나 황금에 눈이 먼 왕비는 왕을 졸라 진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였습니다.
혜왕은 황금 소와 함께 장병 수만 명을 몰래 딸려 보냈습니다. 촉나라 왕비는 문무백관과 도성에서 이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진나라 병사들이 무기를 꺼내 촉을 공격하였고 촉나라 왕비는 창졸간에 사로잡히고 촉나라는 망했습니다.
그 후 황금소는 촉나라 치욕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왕비가 보석에 눈이 멀어 나라를 잃는 것을 작은 것에 눈이 어두워져 큰 것을 잃는다는 뜻으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맹자 진심장구(盡心章句) 하편(下篇)에도 아래와 같이 과도한 욕심을 경계하는 말이 있습니다.
孟子曰養心(맹자왈양심)-맹자가 말하기를 마음을 수양하는데 는
莫善於寡欲(막선어과욕)-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其爲人也多欲(기위인야다욕)-사람됨이 욕망이 많으면
雖有存寡矣(수유존과의)-본심을 보존하는 정도가 적다.
취삼천 실삼만(取三千 失三萬) ! 삼천을 취하고 삼만을 잃었다 !
잃어버린 것이 서운하지만 그로인해 새로운 얻음을 알게 됩니다.
여름철 무더위를 지혜롭게 넘기는 방법 중 하나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운동도 과욕을 부리지 말고
과식(過食) 과음(過飮) 하지 말고
많이 생각하지 말며
과음(過淫)하지 마시기를---
-농월-
老吟(노음) 늙은 푸념
五福誰云一曰壽(오복수운일왈수)
오복 가운데 수(壽)가 으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堯言多辱知如神(요언다욕지여신)
오래 사는 것도 욕이라고 말한 요임금 귀신같네.
舊交皆是歸山客(구교개시귀산객)
옛 친구들은 모두 다 황천으로 먼저 가고
新少無端隔世人(신소무단격세인)
젊은이들과는 낯설어 세상과 멀어졌네.
筋力衰耗聲似痛(근력쇠모성사통)
근력이 다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고
胃腸虛乏味思珍(위장허핍미사진)
위장이 허해져 맛있는 것만 생각나네.
內情不識看兒苦(내정부식간아고)
애 보기가 얼마나 괴로운 줄도 모르고
謂我浪遊抱送頻(위아랑유포송빈)
내가 그냥 논다고 아이를 자주 맡기네.
김병연(金炳淵)
얼마전 친지 결혼식이 있어 참 오래 만에 어릴 때 고향친구들을 만났다. 40년 50년 만에 만나는 친구는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옛날 얼굴이 떠 오를 정도로 서로가 변해 있었다. 우리나이에 벌써 저세상으로 간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흐르는 세월은 이처럼 사람을 변하게 만든 것이다.
10년 20년 전만 해도 오랜만에 만나는 인사가 대부분 “돈 많이 벌었나?” “사업은 잘돼?” “애들 잘 크나”하는 식의 사회 출세의 안부였는데 지금은 “그래 요즘 건강은 어때” “체중 많이 줄었구나”로 변해 졌다.
변한 것이 인사뿐만 아니다.
그전에는 나이깨나 든 사람들은 자기주변 자랑을 많이 했다.
자식자랑, 자기주변의 배경자랑, 재산자랑. 가문자랑 출신학교자랑 등등--- 그러나 지금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런 자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본인이 무슨 일을 어떻게 생활한다는 자기이야기를 많이 한다. 좋은 현상이라 생각된다.
변한 것이 또 있다.
죽기 전에 자식에게 재산 등기이전 안하는 일이다. 반면에 노후준비를 눈에 뜨이게 신경 쓴다. 할 수만 있으면 자식에게 의지 안하겠다는 생각들이다. 자식결혼에 대하여도 옛날처럼 부모가 손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는다. 결혼당사자인 자녀들의 생각대로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은 “결혼적령”이 없다.
결혼 안하고 못한 나이 많은 아들 딸 갖인 사람이 상당히 많다.
취직시나 사회 진출 시에 신원 재산보증, 어음활인, 사채이자, 계돈모임, 등도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그만큼 남을 염려하는 인정이 메마르고 자기본위로 흐르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은 자기 건강관리에 무서울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쓴다.
공원이나 한강변 가까운 산등 곳곳에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생활건강체육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기 계발(啓發)에 적극적인 것이다.
위의 한시에서 오래 사는 것이 욕(辱)이 된다고 요임금이 말했다지만 죽는 것을 사람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의 신비 아닌가. 여자는 혼자되면 딸집이나 며느리 집에서 같이 살면서 자연적으로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수 있다. 그것은 여자라는 품성(稟性)이 갖이고 있는 섬세하고 자상하고 관리적 보존적이며 모성애와 환경에 잘 순응하는 천성(天性)의 유리한 조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자는 혼자되면 매우 불리하고 더 외롭게 보인다. 딸이나 며느리에게 편안하게 느껴지는 존재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은 노력과 취미 자기생활의 개척이 있어야 혼자된 빈 공간의 쓸쓸함을 메워 나라수 있다. 필자 개인생각으로는 가능하면 남자가 먼저 죽어야 외로움을 줄이는 것이다.
자식도 그렇다.
어느 부모 막론하고 자식이 좋은 대학을 나와서 사회에 크게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을 바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출세한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이다.
자기 출세의 날개를 펴기 위해서 서울이고 미국이고 더 넓은 창공으로 부모의 곁을 떠난다.
1년은 고사하고 3년 5년 10년 만에 얼굴 한번 보는 자식도 허다하다. 명목만의 자식이고 출세한 자식에 대한 정신적인 만족에 불과 한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쉽게 볼수 없는 자식은 있으나 마나다. 부모가 아파서 잠을 못자는지 식사를 못하는지 얼마나 마음을 상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우리말 속담에 “못 배운 무지렁뱅이 자식이 효자노릇 한다”는 말이 있다. 모자라기 때문에 출세를 못하여 항상 부모 가까이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못난 자식은 가까이 있으니까 부모가 아프면 약도 지어주고 밥도 챙겨 준다.
오십견이 오면 어깨도 만져주고 슬플 때는 같이 울어도 준다.
그래서 멀리 있는 잘난 자식보다 가까이 있는 못난 자식이 효자라는 것이다.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라는 말이 있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기를 “내게 가죽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나무 생김이 울퉁불퉁하여 목수가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가 없어 건축 자재로 쓸 수가 없습니다. 길가에 서 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장자가 대답하기를 “지금 선생의 큰 나무가 못생겨서 쓸모가 없다고 하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들판에 심어놓고 그 아래서 햇볕을 피하며 한가로이 쉬고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자 보지는 못합니까? 이 나무는 못생겼기 때문에 목수로부터 도끼에 찍히는 일도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는 유리한 조건인데 왜 쓸모가 없다고 괴로워하십니까?”
필자의 여자 친구 한사람이 “매일 손자 돌보는 일로 틈이 없고 힘이 든다” 는 말을 듣고 내가 야단치기를 “그 손자 보지 말고 내하고 인라인이나 타자 손자 보다가 허리다 치면 너만 손해다” 하고 호통(?)을 치지만 손자를 본다는 것은 자식이 가까이 있다는 증거다. 자식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 같이 있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못난 것이 내 자식이다.
-농월-
법률제도(法律制度) 제헌절
子曰(자왈)-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道之以政(도지이정)-법률제도로서 백성을 지도하고
齊之以刑(제지이형)-형벌로서 질서를 유지 시키면
民免而無恥(민면이무치)-백성들은 법망을 빠져 나가며 형벌을 피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道之以德(도지이덕)-도덕으로서 이끌고
齊之以禮(제지이례)-예로서 질서를 유지시키면
有恥且格(유치차격)-백성들은 부정을 수치로 알고 착하게 된다.
논어 위정편(論語 爲政篇)
오늘은 대한민국 헌법(憲法)을 제정 공포한지 꼭 60년이 되는 날이다. 유진오(兪鎭午) 등 전문위원들이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만든 제헌헌법이 오늘날 헌법의 모태인 것이다. 그리고 제헌헌법은 구(舊)일본제국헌법과 대부분 신생국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을 모방한 것으로 권력구조가 3권분립을 규정하고 출발한 이래 1987년 6 ·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까지 9차례의 헌법 개정을 하였다.
그리고 김형오 18대 국회의장이 개헌의사를 밝히므로 서 헌법의 변화는 지속되고 있다. 헌법도 고정불변일수는 없기 때문에 국가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필요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헌법이란 국가의 통치조직과 통치 작용의 기본원리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형식적 근본 규범으로 성문법(成文法)을 말하며 실질적 의미의 헌법인 영국의 불문헌법(不文憲法) 관습법(慣習法)등과 비교 구분이 되고 있다.
법이란 국가권력에 의하여 강제되는 사회규범이다.
그리스도교의 교리,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 마르크스주의, 등은 법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생존경쟁의 투쟁에서 오는 사회의 혼란을 해결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든 법은 필요하다. 다만 사람이 만든 법을 어떻게 잘 운영하고 또 잘 따르냐에 따라 법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서 위에 공자가 말한 논어의 내용은 오늘날 법치시대하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시사가 된다. 아무리 좋은 법을 만들어도 좋게 이용안하고 바르게 지키겠다는 도덕 정신과 법을 지키지 않음을 수치로 생각하는 국민의식이 확립되지 않으면 법전(法典)을 산더미같이 쌓아도 소용이 없다.
또한 권력은 법을 편의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의 비상조치권은 공공의 질서에 중대한 장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을 때 대통령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조항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 수립으로 소멸될 때까지 불과 15년 의 짧은 기간에 많은 사회 불안이 야기 되었지만 한번도 비상조치권을 발동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법의 적용에 신중함을 보이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유신헌법 하에서는 비상조치권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 처럼 사용하였다.
꼭 글자로 명시하지 않아도 바른 사회질서를 지키겠다는 도덕이 확립되면 “좋은 법”인 것이다. 불문법(不文法)아래의 영국이 제국으로서 세계를 침략하고도 신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것도 법과 질서를 바르게 지킨 것이 침략의 오명을 덮게된 이유 이다.
이 시대는 너무 다양하고 복잡하여 삶에 대한 가치관과 정체성에 대한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복잡한 시대에 도덕으로 질서가 유지 안되면 법이라도 명료해야 한다.
우리나라 법은 왜 그리 애매모호한 단서(但書) 조항과 예외(例外) 조항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 예외 조항을 이용하여 법망을 피해나가는 불합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위정자들 스스로가 이런 법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가 “그놈의 법”이라고 폄하(貶下)하고 있는 실정이다.
크고 작은 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을 가늠한다고 볼수 있다.
-농월-
취조(翠鳥) 기다는 마음
紅襟翠翰兩參差(홍금취한양참차)붉은 옷깃 푸른 깃 알록달록 고운데
徑拂煙花上細枝(경불연화상세지)안개 꽃길 떨쳐와 가는 가지 올랐네.
春水漸生魚易得(춘수점생어이득)봄물이 불어나 고기 잡기 쉬우니
不辭風雨多坐時(부사풍우다좌시)비바람도 마다 않고 앉았을 때 많구나.
육구몽(陸龜蒙)
취조(翠鳥)란 물총새의 한자(漢子) 이름이다.
물총새는 연못이나 물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새이다. 또 이 새가 여름 철새인지라, 이 새를 그릴 때는 언제나 연꽃과 함께 등장한다. 그 깃털이 너무도 아름답고 울음소리 또한 맑고 사랑스러워 시인 화가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물총새는 고독을 즐기는 새다. 물가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 수면 가까이로 올라오는 작은 물고기를 노리며 몇 시간이고 같은 곳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며칠 전 신문에 폐암 말기로 투병중인 전남 장흥 출신이며 서편제의 작가 이청준의 소설 가운데 “빗새”란 단편이 있다. 고향을 떠나 소식도 끊긴 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린 작품인데, 비속에서 그 비를 다 맞으며 울고 있는 빗새를 타관살이에 지쳐 떠돌아다니는 아들의 모습에 겹쳐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 속의 빗새도 바로 물총새다.
우리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물총새의 기다림과 같은 삶이다.
갓난아기가 돌을 기다리고
학생이 졸업을 기다리고
군인이 제대날을 기다리고
정기 적금 만기날을 기다리고
날이 더워 가을을 기다리고
친구끼리 친목 모임날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세월의 흐름을 재촉하는 것이며
세월의 흐름을 재촉하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좀 나아질 것 같은 바램일까---
-농월
복(伏) 초복 더위
祝融揭赤幢(축융게적당)-불의 신(神) 축융(祝融)이 붉은 기를 높이 드니
庚熱孰非降(경열숙비항)-복더위에 누가 굴복하지 않으리.
簷下閒飛燕(첨하한비연)-처마 밑에 한가로이 나는 것은 제비뿐이요
籬邊喘臥尨(리변천와방)-울타리 가에는 삽살개가 헐떡이며 누워있구나.
淸陰談笑客(청음담소객)-시원한 그늘에서 나그네는 웃으며 이야기하고
綠水去來艭(녹수거래쌍)-푸른 강물에는 배가 한가롭게 오가는 구나
解渴西瓜適(해갈서과적)-갈증을 해소함에는 수박이 적합한데,
伴朋倒酒缸(반붕도주항)-벗을 동반하여 술두루미를 기울이고 있네!
권재흥
달력에서 삼복(三伏) 날짜를 정하는 기준은 일 년 중에서 가장 낮이 긴 절기인 하지(夏至)가 지난 다음에 3번째 경(庚)자가 드는 날의 일진(日辰)이 바로 초복에 해당한다. 2008년 6월 21일이 하지이므로 7월 19일 일진이 경신(庚申)이므로 오늘이 초복(初伏)이다. 그래서 삼복더위를 삼경(三更) 더위라고도 한다.
그런데 왜 경(庚)자 일을 삼복(三伏)의 이름으로 삼았을가?
육십갑자(六十甲子) 중에서 경자(庚子), 경인(庚寅), 경진(庚辰), 경오(庚午), 경신(庚申), 경술(庚戌)이 바로 경(庚)자 들어가는 날이다. 이 경(庚)라는 글자의 의미는 가을에 내리는 서리(상霜), 숙살(肅殺), 또는 살기(殺氣), 결단력(決斷力)력과 강직함 등을 상징한다. 동물로 치면 백호(白虎)의 기운을 갖인 천간(天干)이다.
백호(白虎)는 백수(百獸)의 왕이면서 상서로운 동물로 여기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풍수지리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그것이다.
백호(白虎)는 창을 든 무사(武士)들이 숭배하던 동물이고, 호랑이 뼈는 사악함과 귀신을 쫓는 부적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경(庚)자 에는 이처럼 강력하고 살벌한 의미가 들어 있는 글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역사에서 경(庚)자 들어가던 해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발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지금 전산만세력(電算萬歲曆)과 조선왕조실록 근현대의 역사서를 찾아서 해수를 따지면서 경(庚)자가 들어간 해의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하여 보았다.
1680년 숙종 6년 경신(庚申)년에 남인(南人)이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나고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은 사건을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하고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1860년 철종 11년 경신년(庚申年)에 천주교도 박해사건.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한일합방인 경술국치일이 경술년(庚戌年)
1920년 10.26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의한 경신대학살사건(庚申大虐殺事件)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해가 경인(庚寅)년이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해가 경자(庚子)년이다.
1980년 광주사태가 경신(庚申)에 일어났다.
이 외도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겠지만 이처럼 복(伏)날과 관련된 역사속 사건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복(伏)은 엎드린다는 뜻이다. 즉 복(伏)날에는 경(庚)과 같은 강력한 기운도 더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동물의 왕인 사나운 백호(白虎)도 복(伏)날에는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한다는 것이다. 더위가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이 복(伏)자의 글자 구성이 재미있다. 사람 인(人)변에 개견(犬)자가 붙어 있는 것이다. “복날에 개 패듯이 팬다”는 속담도 사람과 개에 관련하여 만들어진 속담이다.
복날 개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의하면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기록하기를 진덕공(秦德公) 2년에 처음으로 삼복(三伏) 제사를 지냈는데, 4대문 안에서는 개를 잡아 충재(蟲災벌레로 인한 농사피해)를 방지했다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복날에 개를 먹는 유래를 짐작 하건데 소나 돼지는 중요한 재산목록이므로 쉽게 잡아먹을 수 없었지만 개의 새끼는 옆집에 한 마리씩 선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부담이 적은 동물이고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시대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개는 중요한 동물성 단백질 섭취 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먹는 개는
애완견(愛玩犬)이 아니라 식용구(食用狗)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한국식품영양학회지가 조사한 논문에서 세계적으로 개고기 식용의 역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중국은 한(漢)나라대 까지 개고기를 널리 사용했으나 한나라 말기에 의견(義犬)에 대한 기록이 많아지면서 식용이 많이 줄어들었고, 청(靑)나라 대에는 식용기록이 없다. 기록이 없다고 하여 먹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심양에서는 조선 교포들이 연간 30만 마리를 도축하는 회사가 있다고 한다.
일본도 1900년 이전까지는 중국보다 많이 먹었다고 한다.(오쿠무라시게로 자료)
고대 로마 고대 인디아 페루 사람들은 개를 잡아 제사에 쓰고 난 뒤 먹었다고 한다.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뉴질랜드는 검은 개를 식용으로 좋아했다.
프랑스도 개고기를 먹었다. 샤롤르 로랑은(1970)은 “개 전서”라는 책에서 개정육점, 고양이 정육점, 큰쥐 정육점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프랑스 본토에서는 개고기를 식용하지 않지만 프랑스영토인 폴리네시아에서는 개고기를 식용하기 때문에 국경일인 7월14일에는 토종 누렁이 절반이 개고치구이로 사라진다고 한다.
벨기에와 독일 뮌헨에서도 개고기 식용선풍이 일어나 시당국이 규정을 정하여 관리한다고 한다.
옷깃에 칼라세우고 선진 문화인인체 하는 나라들이 우리나라가 개고기 먹는 것을 마치 미개인 같은 인상을 주었지만 인류사 속의 인간들은 어느 종족을 막론하고 개를 먹었다.
말고기 원숭이 고기도 먹는 주제에 개고기 먹는다고 입을 삐쭉일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개고기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마다 고유한 역사속의 먹거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중복(中伏) 말복(末伏)도 남아 있기 때문에 초복(初伏)에 대한 개 이야기는 여기서 접는다.
-농월-
새는 죽을 때 울음소리가 슬프다.
曾子有疾(증자유질)-증자가 병에 걸려 앓고 있을 때에
孟敬子問之(맹경자문지)-맹경자가 병문안을 오니까
曾子言曰(증자언왈)-증자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鳥之將死(조지장사)-새들이 죽을 때에는
其鳴也哀(기명야애)-그 울음소리가 슬프지만,
人之將死(인지장사)-사람이 죽을 때는,
其言也善(기언야선)-그 소리가 더없이 훌륭합니다,
논어 태백편(論語 泰伯篇)
내가 죽음에 이르러 이 세상을 끝낼 때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죽음에 이르는 상태가 맑은 정신일까 아니면 혼미(昏迷)한 상태일까?
유언(遺言)이나 임종언(臨終言)을 말할 정도면 아마도 정신적인 여유가 있을 때라 야지 운명 직전에는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에 마지막 말과 함께 고개를 떨구는 드라마틱한 장면도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살아온 모양새가 천차만별이므로 남기고 싶은 말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참 어려운 상상이다.
위의 글에서 증자(曾子)는 새가 죽을 때 울음소리가 슬프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미련이 크다는 뜻일까?
사람이 죽을 때 훌륭한 말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었던 동안 훌륭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한다는 말일까?
예술가들의 세계에서는 죽음이나 은퇴시 최후의 작품이나 마지막 무대를 백조의 노래(swan song)라고 한다. 백조는 평생 울지않다가 죽기 전 딱 한번만 아름다운 소리로 울고 죽는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의 마지막 말씀을 경전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부처님은 최선을 다하였지만 중생들을 구제 하지 모함을 술회하고 제자들에게 열심히 수행하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공자님도 평생의 큰 포부를 성공시키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세분 성인들의 임종 말씀도 평범한 사람들과 별로 다름이 없다.
단지 신앙적으로 해석하므로서 다르게 느끼게 할뿐이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부처님은 마지막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열반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병든 몸을 구시나가라의 발데 강 언덕 사라나무 그늘아래서 고향 카필라성를 향하여 자리를 깔고 누운 후 열반에 드시는 부처님을 애통하는 제자들을 보고 나직이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사람과는 언젠가는 이별해야 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하시면서 마지막 말씀(법어)을 이렇게 전하였다.
『모든 것은 변한다. 열심히 수행전진하라(諸行無常 不放逸精進)』
그리고 금강경 17분에는
『나는 일체 중생을 멸도 하였다하였으나 일체중생을 다 멸도하 고 보니 실로 멸도를 한 중생이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법어를 마친 부처님은 흐느끼는 제자들을 잔잔한 미소 속에 말없이 둘러본 다음 조용히 눈을 감고 우주의 대적멸(죽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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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마지막 말씀
마태복은 26장 36~445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었다.
마태복음 27장 46절
제 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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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마지막 말씀
애공 15년에는 우직한 제자 자로가 변란으로 죽자 공자는 큰 시름에 빠져 병이 들었다. 애공 16년에 공자는 임종을 맞이했는데, 예기(禮記)에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공자의 나이 73세 때 병석에 눕게 된 공자를 자공이 문병 왔다.
사(賜)야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그리고 탄식을 한번 하더니 노래를 불렀다
『泰山壞乎(태산괴호)-태산은 이렇게 무너지는가?
梁柱摧乎(양주최호)-대들보는 허물어지는가?
哲人萎乎(철인위호)-철인은 병들었는가?』
하고 노래 부른 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울기를 멈춘 공자는 자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지가 오래 되었다 나의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신 후 공자는 7일 만에 타계했다,
-농월-
회단종이작시조(懷端宗而作詩調) 멘토가 있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千里遠遠道(천리원원도)-천리(千里) 머나먼 길에
美人離別秋(미인이별추)-고은 님 이별하고
此心無所着(차심무소착)-이 마음 둘 데 없어
下馬臨川流(하마임천류)-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천류역여아)-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鳴咽去不沐(오열거불휴)-울며 밤길 예노라
왕방연(王邦衍)
위의 시조는 조선조 세조때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이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을 유배지인 영월까지 호송하고 돌아오면서 곡탄 언덕에 앉아 어린 임금과 헤어지는 슬픔에 겨워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시조를 지은 후 평생을 죄의식을 마음속에 담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원래 시조(時調)인 것을 한시(漢詩)로 재구성하여 본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중 기원전 1200년 고대 그리스의 이타이카왕국의 왕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텔레마쿠스를 가장 믿을 만한 친구이자 아들의 가정교사인 멘토(mentor)에게 매끼고 트로이 전쟁터로 떠난다.
가정교사 멘토는 오딧세이가 전쟁으로 10년을 넘는 세월을 집을 비운 사이에 그 아들을 아버지 못지 않은 훌륭한 인물로
키워놓았다.
이후로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 조언자 상담자 등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또는 마음이 괴로울 때, 슬플 때, 외로울 때가 있다.
이때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마음껏 이야기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대가 매우 귀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 부부 친구 등 여러 대상이 있지만 이들에게 할 이야기 못할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설사 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드라도 나를 이해하면서 마음을 위로받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는 무쇠덩이같은 무게에 짓눌려 숨을 쉴수가 없을정도로 답답할때
반야심경을 외우고 주기도문을 울부짖어도 해결이 안될때가 있다
이때 조용히 손을 잡고 어깨를 쓰다듬는 멘토에게 막혔던 봇물을 쏟아 놓으면
앞에서 들어 주는 사람이 있기때문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 진다.
멘토는 어떤 내용이든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을 언제든지 새벽이든 밤중이든 내이야기를 들어 주는 상대이다. 부모 형제 부부 친구에게 못하는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는 상대이다.
이런 멘토를 만나는 것은 만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연한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멘토의 대상은 부모 형제 부부 친구든 누구나 될 수 있다. 내가 남의 멘토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얼마만큼 서로 간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또 들어 줄수 있는가가 문제다.
멘토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서로의 신뢰(信賴)가 우선되어야 한다.
평생에 이런 멘토를 한사람쯤 갖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농월-
대서(大暑) 염소뿔도 녹는 대서(大暑)
積雨逢晴景(적우봉청경)-장마도 맑게 갠 날씨를 만나
高樓得月光(고루득월광)-높은 누각에서 달빛을 얻었고
天時方大暑(천시방대서)-때는 바야흐로 대서인데
夜氣忽微凉(야기홀미량)-밤기운에 홀연히 서늘함이 살짝 돈다.
與客評詩細(여객평시세)-손님과 조곤조곤 시를 평 하고
留僧打語長(유승타어장)-스님을 붙잡고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
明朝還擾擾(명조환요요)-내일 아침 다시금 어지러워지리니
簿牒更堆床(부첩경퇴상)-문서는 여전히 상에 쌓여 있다오
조태억(趙泰億)
대서(大暑) !
소서(小暑)가 어제 같은데 벌써 큰 더위가 왔다. 참 빠른 세월이다. 대서(大暑)는 염소 뿔도 더위에 녹는다는 큰 더위다.
그런데 대서 액땜을 해서인지 전국이 이틀간 큰비로 인명피해까지 났다. 요즘 일기예보는 안믿는것이 오히려 맞는것같다. 지구 온논화 탓인지 요즘은 일이 생기면 큰대(大) 자가 붙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파트고 자동차고 전부 큰것을 좋아 하는데 대한 욕구 상징인것 같다.
덥다 덥다 해도 8월 7일이 입추(立秋)다. 가을이란 뜻이다.
더위를 귀찮아 여김은 세월의 흐름을 자초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백마가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내다보는 것처럼 빨리 지나간다(인생여백구과극人生如白駒過隙)” 이말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병권을 물려받은 강유가 전쟁터에서 평생을 보내다가 잠시 휴식도중에 백발이 성성한 자신의 그림자가 강물에 비친 것을 보고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탄식한 말이다. 바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한여름은 역시 더워야 제 맛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눈을 흘길지 모르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절기가 제 구실을 못하는 걸 보면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요즘에는 “제철 과일”이라는 말이 의미가 없다. 예전에는 봄에는 복숭아와 살구요 여름에는 수박과 참외 가을에는 밤과 대추 감을 제철 과일로 꼽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도 때도 없이 이런 과일을 사 먹을 수 있으니 어린아이들은 제철과일을 모른다. 과일뿐만 아니다. 한여름 이글거리는 태양이 지구를 달구는 더위에도 집안, 버스, 전철, 공공장소에는 냉방기가 설치되어 여름더위를 느끼지 못한다. 아무리 강추위에도 어디를 가도 난방기가 가동되어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 몸은 몇 천 년을 절기에 순응하고 적응되어 왔는데 생활의 변화는 곧 우리건강의 변화와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니 몸은 갈수록 살만 쩌서 약해지고 이름을 알수 없는 병들이 횡행한다.
여름더위고 겨울 추위를 너무 엄살떨며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조금덥고 조금 추우면 매사에 호들갑을 떠는 매스컴이 문제다.
독도문제와 금강산 사고 문제도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처럼 며칠간 냄비에 깨볶듯하다가 넘어 갈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매스컴 체질이다.
여름은 역시 무더위와 이글거리는 태양아래서 구리쇠 같은 근육에 힘을 주며 땀을 흘려야 제 맛이다. 그리고 비싼 전기료 드는 에어컨 선풍기 바람보다 대야에 찬물을 채우고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도 좋은 피서(避暑)다.
탁족(濯足)이란 시원한 개울이나 대야에 발을 담가 더위를 씻는 표면적 의미도 있지만 혼탁한 세상을 잠시 벗어나 자신의 정신을 서늘하게 돌아보는 계기도 된다.
이소(離騷)로 유명한 굴원(屈原)은 무더위에 개울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창랑가 어부사” 중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창랑(푸른 물결)의 물이 맑으면
可以濁吾纓(가이탁오영)-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창랑의 물이 흐리면
可以濁吾足(가이탁오족)-내 발을 씻으려네.
얼마나 멋있는 더위의 탁족(濯足)인가!
얼마나 도도한 혼탁한 세상의 씻음인가 !
다산 정약용도 더위를 이기는 소서팔사(消暑八事)에서
여름 달빛이 아롱지는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시를 읽으라 하였다.
대서(大暑)는 더위만 오는 것이 아니라 찬 물에 발과 마음을 씻는 법도 가르쳐 준다.
-농월- |
생각없이 하는 말이 상처가 될 수도
利人至言(이인지언)-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煖如綿絮(난여면서)-따뜻하기 솜과 같고,
傷人之語(상인지어)-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利如荊棘(이여형극)-날카롭기가 가시 같아서,
一言利人(일언이인)-한 마디 말이 사람을 이롭게 함은
重値千金(중치천금)-소중한 것이 천금같이 값나가고,
一語傷人(일어상인)-한 마디 말이 사람을 속상하게 함은
痛如刀割(통여도할)-아프기가 칼로 베는 것과 같다.
黃金千兩未爲貴(황금천량미위귀)-황금 천 냥이 귀한 것이 아니요,
得人一語勝千金(득인일어승천금)-좋은말 한마디가 천금보다 낫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중학교 교실에서 자율학습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 담임선생님도 교실에서 학생들과 모여 앉아 이런 저런 부담 없이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농담도 하는 중에 선생님이 그반 반장 학생을 보고 “얘 반장, 너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그것이 문제야” 하고 반장 학생에게 농담을 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반장 학생이 집에 돌아가 방에서 혼자 곰곰이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문제다” !
그 이후로 학생의 머릿속에는 “나는 그것이 문제다” 가 머리에 꽉 차있는 것이다. 밥도 잘 먹지 않고 잠도 잘 자지 못한다. 말도 잘하지 않고 친구와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책도 멀리하게 되고 성적도 점점 떨어졌다.
결국은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선생님의 농담 정도에 상처를 받은 학생의 심리상태도 문제가 있지만 아무튼 선생님의 농담 한마디가 한 학생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이다.
한 4년 전 일이다. 지금도 4호선 동작역을 지나면 생각이 떠오른다. 전철을 타니까 6~7명의 40대쯤 돼 보이는 부인들이 타서 필자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아마 친목 모임에 가는 차림새였다. 마치 학생들 소풍가는 기분으로 웃고 떠들고 야단인데 한사람이 옆에 있는 친구를 보고 “얘, 네 블라우스 색이 얼굴하고 안맞어” 하고 이어서 무슨 말을 했는데 기억에 안나지만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졌다.
필자가 듣기도 약간 면구스러웠다. 모처럼 나오는 외출에 나름대로 좋게 보이려고 거울도 몇 번보고 신경 썼을 친구에게 오히려 듣기 좋게 “블라우스 멋있어”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처는 어린 학생들만 받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도 받는다.
다만 어른들은 쉽게 내색을 안 할 다름이다.
위의 명심보감은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지만 평범하면서 매우 중요한 뜻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가까운 사람들, 부부 자녀 형제 친구들에게 일상에서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 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한다.
또 상대방의 취약점(脆弱點)이나 아픈곳을 아무 생각 없이 예사롭게 말한다.
친목 모임이나 모처럼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가 “자네 얼굴색이 왜 그래” 특히 여자 친구에게 “안본 동안 많이 늙었어” 등 가볍게 하는 말이지만 듣는 상대방 기분은 개운하지 못하다.
반대로 “야 당신 요즘 얼굴이 맑고 좋게 보이네 좋은 일 있어?”
“참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듣기 좋을까!
이렇게 상대방을 칭찬하는 사람을 보면 참 존경스럽다.
상대방의 아픈 곳을 따뜻한 물로 부드러운 솜으로 덮어주어도 예리하게 아픈데 그곳을 바늘로 찌르면 얼마나 충격이 크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친한 사이일수록 말을 함부로 하고 욕으로 친밀감을 표시한다. 흔히 욕친구라 하여 주위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다.
본인은 예사이겠지만 주위에서 듣는 사람은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말도 다분히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꼭 품위 있는 말이 아니라도 항상 긍정적이고 상대방에게 호감 주는 말을 많이 하면 오히려 내 마음이 행복해 질 것이다.
-농월-
와명(蛙鳴) 개구리 울음소리
泳逐浮萍或躍地(영축부평혹약지)-부평초를 밀고 헤엄치고 땅 위에서 뛰기도
乍驚人跡上靑枝(사경인적상청지)-사람에게 놀라서 푸른 가지로 오르기도
花甎苔壁藏身在(화전태벽장신재)-꽃기와 이끼 벽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亂聒夏宵欲雨時(난괄하소욕우시)-비 올 듯한 여름밤이면 시끄럽게 울어댄다.
김좌근(金左根)
여름철 농촌 정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개구리다.
개울이나 논 웅덩이속의 참개구리, 비올 때 호박잎에 뛰어오르는 청개구리, 산골계곡 돌밑에사는 빨간 개구리---
사실 개구리는 생김새나 피부의 감촉이 뱀 못지않게 징그러운 파충류다. 그러나 눈만 뜨면 논 웅덩이, 풀밭, 개울, 장독대 등 우리의 일상의 자연 속에서 언제나 공존하여온 친근한 농촌 구성원이다. 또 만만한 것이 개구리다. 개구쟁이들의 발길질이나 회초리에 목숨을 바치고, 때로는 닭의 먹잇감으로, 하늘을 나는 새와 땅위 뱀의 배를 채워준다. 들길을 걸으면 발에 채이는 것이 개구리다.
이렇게 흔한 개구리지만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은 친환경 동물이다.
지금쯤 한여름 낮에 반디를 들고 냇가를 가는 논두룸 옆 웅덩이에 부평초 잎을 떠받고 개구리가 팔자 다리를 하고 한가롭게 떠 있다.
어떤 놈은 날파리를 잡으려고 잔뜩 벼르고 있기도 하다.
이때 우리는 벼속의 피(제패稊稗)를 뽑아 개구리 앞을 낚시질 하듯 유혹하면 이놈이 물면 냅다 패대기를 친다.
아련한 추억속의 여름날 수채화다.
개구리를 자세히 보면 한군데도 모난곳이 없는 매우 순박하게 생긴 모습이다.
개구리가 원체 많으니까 귀한줄 모르지만 개구리 울음소리가 없는 농촌을 상상하여하여 보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그런데 농약이나 환경오염으로 이 착하디 착한 개구리의 개체수가 줄어든다고 한다. 생각하면 무서운 현상이다. 이는 생태계의 변화며 인류의 생존에 큰 위협이다.
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돌담장위의 호박꽃도 이빨 빠진 할머니 볼처럼 오므라들고 지붕위의 하얀 박꽃도 고개를 숙인 여름날 오후, 담장밑 호박잎으로 그늘진 축축한 곳에서는 목을 헐떡거리는 개구리와 온몸에 흙투성이가 된 지렁이 한 마리와 목숨을건 사투(死鬪)가 벌어지고 있다. 여름날에만 볼수 있는 풍경이다.
여름날 어두워오는 고향 들 논두렁 가에서 석양의 노을을 보면서 누구를 기다린다. 깡마른 종아리에 모기떼는 달려들고 연초록의 여린 벼이삭 틈새에서 무리지어 소리치는 개구리들의 울음이 앵앵거리는 모기소리와 하모니를 이룬다.
품일 간 어머님을 해거름 녘에 마중을 나간 것이다.
조금 후에 희뭇한 어둠 저만치 어머님의 모습이 보인다.
어린 마음에 까닭 모를 무섬증과 반가움으로 와락 어머님께 달려갔다. 어머님은 아무 말 없이 내게 등을 내민후 후유- 하고 한숨 한번 내쉬시고는 나를 업고 집을 향하셨다. 그럴 때면 개구리 소리가 갑자기 더 요란하게 등 뒤로 들리지만 삼베적삼에 땀내 나는 어머니등에 업힌 나는 얼마나 마음 든든했는지 모른다.
어머니께서는 논옆 둠벙을 지나시면서 혼잣말로 “개구리가 우니 비가 올 모양이네”
아! 개구리 우는 논두름에서 어머니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은
그리운 어머니-----
-농월
형화(螢火) 반딧불
凉飇撲螢起(양표박형기)-서늘한 회오리바람이 반딧불을 덮쳐와
巧入書窓飛(교입서창비)-교묘히 서재의 창문으로 들어와 날아다닌다.
帶雨形沽小(대우형고소)-비 맞아 몸이 작아 보이고
飜風影度稀(번풍영도희)-바람이 나부껴 그림자 흩어진다.
疎星先借色(소성선차색)-성긴 별이 먼저 반딧불을 빌리고
殘燭晩生輝(잔촉만생휘)-쇠잔한 등불 밤늦도록 타는구나.
憐客多幽趣(연객다유취)-가련한 나그네는 그윽한 흥이 많아
盤旋未卽歸(반선미즉귀)-주위를 배회하며 아직 돌아가지 못한다.
서영수각(徐令壽閣)
여름날의 낭만이 어디 개구리 뿐인가 !
여름은 개구리 울음속에 호박꽃이 피고, 두꺼비가 마당을 어정어정 기고, 거름두엄 밑에는 지렁이가 기어 나오고, 외양간에서는 졸음에 눈꺼풀이 내려온 암소가 달려드는 파리떼에 꼬리로 회초리질 하고, 이웃집 아지매는 삼베적삼 단추를 아예 풀고 구리빛 가슴에 연신 부채질을 한다. “와이리 덥노 쏘내기라도 한줄기 하지” 그리고 밤에는 모깃불 향연 속에 반딧불이 난다.
반딧불이 없는 곳은 생명을 잃은 여름이다. 상하(常夏)는 여름이 아니다.
사전(辭典)상의 반딧불은 반딧불이의 꽁무니에서 나오는 빛으로 소화(宵火) 인화(燐火) 형광(螢光) 형화(螢火) 형작(螢爝) 단조(丹鳥)등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나이든 사람들은 반딧불하면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릴 것이다. 후진(後晉)의 손강(孫康)이라는 사람이 집이 가난하여 기름을 살 돈이 없어 겨울에는 눈빛에 책을 비추어 글을 읽었고, 또 진(晉)나라의 차윤(車胤)은 여름이면 수십 마리의 반딧불을 주머니에 담아 그 빛으로 책을 읽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는 고사이다.
필자는 개인 생각으로 형광램프에 반딧불 이름을 붙인 “형광등(螢光燈)”은 반딧불을 크게 모욕한 것이다. 어찌 그 멍청이의 대명사인 희끄무레한 생명 잃은 불빛에 지혜를 발광하는 형광(螢光)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반딧불은 여름밤에 왈쓰를 추는 별이며, 땅위의 은하수요, 여름밤의 가로등이다. 농촌의 여름밤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여름날밤 모깃불 화염의 전선을 뚫고 호박꽃이 핀 담장위로, 박꽃이 핀 초가지붕위로, 반딧불은 밤의 요정처럼 태극의 꼬리를 긋고 날아다닌다.
조금 멀리는 논두름위로 마치 작은 도깨비불처럼 명멸(明滅켜졌다 꺼졌다)하고 있다.
박꽃 속에 반딧불을 넣은 초롱을 들고 여름날 동네 마당을 돌던 어린 시절은 우리도 한 마리의 반딧불이 였다. 반딧불 빛은 보통 노란색 또는 황록색이다. 반딧불만 똑 따서 손가락으로 비비면 손가락 전체가 불빛을 발하여 마치 마술사가 재주 부리는 것 같이 보인다.
반딧불 암컷은 알을 낳으면 날개가 떨어져 날지 못하고 알이 부화할 때까지 알 옆에서 지켜 자기를 희생한다. 불과 10일 밖에 안되는 짧은 일생을 종족의 번식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는 성스러운 모습이다.
신문에는 무주나 강원도에서 반딧불 축제를 열고 불꽃놀이 행사를 연다고 한다. 한마디로 나는 반대다. 반딧불 감상은 꽹과리를 치고 우악스럽게 함성을 지르는 페스티발(Festival)이 아니다. 반딧불은 쥐죽은 듯 고요한 여름밤에 멍석위에서 평상위에서 개울물이 은은히 흐르는 방뚝위에서 옆에 앉은 연인이나 친구의 손을 꼭 잡고 흐르는 듯 휘감는 듯 숨죽이며 감상하는 영혼의 빛이다.
반딧불을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가련한 느낌과 어려웠던 시절이 결부가 된다.
이글을 쓰면서 아련하게 지난날 6.25 전쟁이후 어린 시절에 반딧불 쫓아다니던 철없던 그 시절의 영상이 파노라마처 지나간다.
촌로(村路)의 밤길을 수놓는 아름다움의 요정 반딧불!
아파트 숲과 철근 콩크리트의 우리속에 정서라고는 참나무 장작처럼 딱딱한 이 시대에 지난날 아름다웠던 추억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는 너의 빛 반딧불아 !
너를 생각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더 밝은 빛이 무슨 소용이랴 !
-농월
제물시(齊物詩) 내 마음의 등불
休將憔悴感生平(휴장초췌감생평)-초췌한 모습으로 평생을 살지 말자
眼底榮枯頗不驚(안저영고파불경)-눈앞의 흥하고 망하는 것 그게 뭐 대수랴
萬蠟高燒終是夜(만랍고소종시야)-만 개 촛불 대낮같이 밝혀도 밤은 밤이고
一燈孤對也能明(일등고대야능명)-촛불 하나로도 밝기만 한 것을
유월(兪樾)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살고 죽는 것은 누구나 같다.
다만 살아가는 동안 각자가 겪는 일이나 생활 형편이 다를 뿐이다.
이제 우리같이 인생을 정리할 즈음의 나이가 들어가면 지난날이 후회 스럽기도하고 때로는 지금의 삶이 허무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특히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두려운 생각이 왈칵 들고 “이러다가 어떻게 잘못되는 아닌가” 하는 약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특히 아들딸을 제때에 결혼시키지 못하여 과년한 자식을 둔 부모들은 어떤 일을 당하면 겹쳐서 고민을 하게 된다.
특히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이 제때에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본인의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찌 보면 대상행동(代償行動 substitute behavior)이라 볼수 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을 통해서 대리보상을 받으려는 심리적 욕구를 충족 이라 볼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너무 변하고 따라서 행복의 가치관도 많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도 따라 변하기를 요구 받고 있는 현실이다.
너무 고정관념에 묶여 스스로를 속박하는 소심증(小心症)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현실에 감사하고 명랑하게 살아야 한다.
내 행복은 내가 만들고 살아야 한다.
자식과 아내 주위로 인하여 내가 행복이 만들어지는 소극적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 개의 촛불을 밝혀도 천지 사방을 다 밝힐 수 없다.
내 마음의 촛불을 밝히는 지혜가 요구 되는 때이다.
-농월-
피서(避暑)
避暑長途季夏炎(피서장도계하염)-피서 가는 먼 길에 여름은 불타는데
山房僅到掛褰簾(산방근도괘건염)-산방에 이르러 주렴을 걷으니
蚱蟬樹上時鳴止(책선수상시명지)-매미는 나무 위에서 울고 다시 울고
魚虎池中乍頡潛(어호지중사힐잠)-물새는 못 가운데 잠겼다 나는구나.
流汗難堪雖己苦(류한난감수기고)-흘러내린 땀이 난감하여 몸은 괴롭지만
濃陰逸就亦心恬(농음일취역심염)-짙은 녹음에 드니 역시 마음 편하여라
淸谿漬足愁懷減(청계지족수회감)-맑은 계곡에 발 담그고 시름을 덜며
觴詠逍遙喜樂添(상영소요희락첨)-잔 들고 노래하니 즐거움이 더하네.
작자미상(作者未詳)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휴가 피서기에 접어들고 있다.
기름 값이 오르고 높은 물가로 서민들의 마음이 위축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지친 심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휴가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어그제는 친구들과 비오는 과천대공원의 숲길을 걸었다. 반복되는 일상(日常)에서 하루정도 다른 분위기를 맛보는 시간이다. 좋은 모임이기 때문에 만나면 반갑고 농담하고 웃고 즐긴다. 이슬비 내리는 숲길을 걷기도 하고 한적한 정자마루에서 운해(雲海)로 쌓인 먼 산을 바라보면서 커피 잔을 나누면서 정담을 나누는 것도 별미(別味)가 있는 정취(情趣)다.
그리고 점심때는 보쌈 족발에 하삭음(河朔飮)으로 황금색 울금주(鬱金酒) 잔(盞)으로 건배를 하였다. 이것도 미니 피서(避暑)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돼지 족발은 여름철에 먹는 육식(肉食)이다. 돼지고기는 찬 성분이기 때문이다.
울금주(鬱金酒)도 맛이 약간 쓰고 열을 삭히는 약재이기 때문에 역시 더위에 적당한 술이다.
하삭음(河朔飮)이란 뜻은 더위를 씻기 위해서 마시는 술이다.
하삭(河朔)은 중국 황하(黃河)의 북쪽에 있는 옛지명(하북)으로 삼국지에서 한나라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군대와 협상하는 자리에서 밤낮 주연을 베풀어 더위를 이긴데서 나온 말이다. 사실 술은 열이 많기 때문에 술로 더위를 이긴다는 것은 이치에 안 맞지만 그래도 그늘아래서 만만한 게 술이므로 한잔하면 기분상으로 시원하다.
옛 사람들은 무더위를 고열(苦熱)이라 표현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매우 심한 더위라는 뜻이다. 지금은 피서라 하면 에어컨 냉방, 동해안 등으로 여행과 해수욕장을 찾지만 피서 도구라야 겨우 부채, 대자리, 발(簾) 등이 전부였든 시절에는 피서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죽해야 『바람을 타고 눈 쌓인 산으로 훨훨 날아가 맨다리로 얼음장을 밟고 싶다』는 상상의 글을 썼을까. (이덕무의 고열행)란 글에서--
또한 가난한 시절의 더위가 얼마나 무서웠기에 “더위를 보낸다” 라는 민제인의 (송서문送暑文)의 글에서 더위귀신(서신暑神)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을까--
조선 선비들은 피서(避暑)를 피서(披書-책읽기)로 넘겼다.
1만여 권의 책이 많기로 유명한 홍길동의 작가 허균은 “독서로 피서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이라 했고
조선조 최고의 명군(名君) 정조대왕은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독서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한권 읽고 나면 어느덧 가을이 곁에 와 있을 것이다” 라고 일득록(日得錄)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의 건강을 염려한 규장각의 신하가 서늘한 별전(別殿)으로 옮기자고 주청했으나 정조대왕은 “지금 이곳이 좁고 덥다고 서늘한 곳으로 옮기면 거기에서도 참고 견디지 못하고 더 서늘한 곳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거절하면서 “이를 참고 견디면 바로 이곳이 서늘한 곳이 된다”라고 말씀 하셨다.
덥다 덥다 해도 곧 중복(中伏)이고 팔월초 더위 며칠만 지나고 나면 가을이 찾아와 지난여름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농월-
감사(感事) 감사합니다
花開蝶滿枝(화개접만지)-꽃이 필 때 나비는 가지에 모여 들지만
花謝蝶還稀(화사접환희)-꽃이 지면 나비는 돌아오지 아니하게 된다
惟有舊巢燕(유유구소연)-다만 제비만은 지난해의 옛집을 잊지 않고
主人貧亦歸(주인빈역귀)-주인이 가난 할 지라도 금년에도 돌라오네
우분(于賁)
오래전에 눈에 잘 뜨이지도 않게 작은 신문기사가 필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경기도 하남시의 어느 도시락가게에 갓 스물 정도의 젊은이가 찾아와 흰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는 이야기다. “감사합니다”라고 쓰인 봉투엔 12만원이 들어 있었다.
이 청년이 학생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내지 못했던 점심 도시락 값을 졸업 후 취직을 해 4년 만에 갚은 사실의 기사를 보고 필자는 잔잔한 감동을 받아서 스크랩을 해 둔 것이다.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의 한 도시락 가게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찾아와 겸연쩍은 표정으로 도시락 주인아주머니에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마침 가게를 보고 있던 주인 유금자씨는 “어떻게 왔느냐”고 묻자 청년은 “예전에 남한중학교에 다닐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침을 못 먹고 도시락을 사 먹었는데 돈이 없어 도시락 값을 갚지 못했는데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해 첫 월급을 받았기에 이제는 갚아야 할 것 같다”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청년은 도시락 주인이 갚을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청년은“나의 마음을 받아 달라” 며 기어코 석 달 치 도시락값 12만원이 든 봉투를 내어 놓고 돌아갔다.
주인 유씨는 “4~5년 전에는 학교에 급식소가 없어 2천원하는 도시락을 배달시켜 먹던 학생들이 많았다”며 “대부분 가난한 학생이다 보니 도시락 값을 내지 못해 한해 500만 원 이상 받지 못했다”고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유씨는 “이제 갓 취직해 월급을 받았으면 얼마나 받았겠느냐”며 잊고 있던 도시락 값을 놓고 간 청년의 마음이 너무나 아름다워 코끝이 찡해졌다고 말한다.
도시락가게 주인은 “한편으로는 그 청년이 지난 4년 동안 도시락 값을 갚지 못한 것을 가슴 한쪽에 묻어두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면서 이런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했다.
청년이 된 학생도 훌륭하지만 도시락가게 주인 아주머니도 아름답다.
-농월-
중伏(中伏)에
一椀香茶小點氷(일완향다소점빙)-한 그릇 향그런 차에 조그마한 얼음 띄워,
啜來端可洗煩蒸(철래단가세번증)-마셔보니 참으로 무더위를 씻겠네.
閑憑竹枕眠初穩(한빙죽침면초온)-한가하게 대침 베고 단잠이 막 드는 차에,
客至敲門百不應(객지고문백불응)-손님 와서 문 두드리니 백번인들 대답 않네.
서거정(徐居正)
소고기 난리가 부족해서인가 이제는 독도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오늘이 중복(中伏)인데도 새벽하늘은 시커먼 구름에 덮혀 있다.
중복(中伏)은 삼복(三伏)중에서 글자대로 가운데 있는 더위다.
초복(初伏)은 중복(中伏)을 향해 기세(氣勢)를 올리는 더위고 중복(中伏)에서 말복(末伏)으로 가는 더위는 기세가 꺾기는 추세의 이다.
위의 한시는 중복더위를 맞아 시원하게 얼음 띄운 차를 마시면서 한가하게 더위를 쫓는 내용이다. 옛날에 무슨 얼음이 있었을까 싶지만, 겨울에 한강에서 두꺼운 얼음을 떼어 내 얼음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여름철에 궁중에서도 사용하고 높은 관리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서빙고(西氷庫) 동빙고(東氷庫)가 얼음 창고이다.
대나무 베개를 베고 막 곤한 잠이 드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와 부른다. 우리 속담에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데 참 눈치 없는 손님이다. 작자는 짐짓 못들은 척 여러 차례 불러도 대답을 안 하고 있다. 원래 손님을 깍듯이 대접하던 풍습에 비추어보면 예의가 아니 지만 이 시의 분위기에서는 조금은 이해해 주고 싶은 장면이다.
오늘이 바로 더위의 한가운데에 와 있는 날이다. 그런데 한더위를 나타내는 복(伏)자가 참 히한 하게 생겼다. 사람 앞에 개가 엎드리고 있다는 뜻이다. 복날이면 으레 개고기로 몸보신하기 좋아하는 보신탕 애호가들은 글자 생긴 것을 보고 애초부터 사람이 개를 잡아먹는 날이라고 구실을 삼을 만한 글자이다.
한자(漢字)는 참 재미 있는 문자이다. 한자는 본래 사물의 모형을 본뜬 상형문자(象形文字)에서 출발하였지만 한자의 대부분은 상형문자가 아니다. 한자의 발전은 상형문자(象形文字)→회의문자(會意文字)→형성문자(形聲文字)의 순서로 발전하였으며 학교에서나 일반 사회에서 한자는 상형문자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한자의 90%가 형성문자(形聲文字)이다.
형성문자란 한쪽이 음(音)을 나타내고 다른 한쪽이 뜻(意)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한자 문자에 관한 내용이 아니므로 길게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게 회의문자로 해석하고 형성문자로 해석하기 때문에 복(伏)자를 두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복(伏)더위와 개는 글자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엎드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를 사용할 뿐이다. 여기서 “엎드리는 것”은 바로 “가을 기운”을 의미한다.
계절의 순환 원리에 의하면 한여름에 이미 가을의 기운이 싹튼다. 올해 8월 7일이 입추(立秋)인데 가을이 시작된다는 절기이지만 더위는 한더위 이다.
그 시작되는 가을 기운이 여름 기운을 밀어내려다가 아직은 워낙 여름 기운이 강하여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엎드린 것이 초복(初伏)이다 처음 엎드린 것이다.
그러다 다시 기회를 보아 여름 기운에 달려들어 보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엎드리기를 세 차례나 하는 것이 중복(中伏) 말복(末伏)이다.
복날은 날짜의 간지(干支)로 경일(庚日)에 드는데, 경(庚)이 바로 방위로는 서쪽이고 계절로는 가을에 해당한다. 가을에 해당하는 날이니까 여름에 대항해서 한번 힘을 써보려다 굴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개고기 먹는 것을 반대하는 애견가(愛犬家) 동물애호가 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랑함이 지나쳐 스스로 개의 “아빠” 개의 “엄마”가 되고 있다. 개뿐만 아니라 가축을 가족같이 사랑하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넓은 아량이다. 그러나 인간의 윤리와 동물의 성(性)은 분별이 되어야 한다. 개의 아빠 엄마가 될 정도로 개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할 일이다.
불량 보신탕에 대해서 인터넷을 통하여 잘 알고 있겠지만 더위를 넘기는 먹거리 풍속으로 고유(固有)한 풍속인 개고기 보신탕(補身湯)을 돈벌이에 눈이 어두운 장사꾼 속물들이 “동물병원”에서 모진 병으로 죽은 "개 시체" 들을 마구 사다가 끓여준다는 어느 수의사의 양심고백을 읽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보신탕집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 어디 보신탕 먹겠나.
이제는 개 말고도 보신할 단백질 음식이 넘쳐나고 있다. 개를 비롯해 몸에 좋다는 징그러운 “혐오식품”은 이제 먹지 말자.
필자의 친구 한사람은 정력에 좋다고 오만 잡동사니를 다 먹고도 의무방어전(義務防禦戰)도 제대로 못치루고 제집 대문여는것이 무엇이 부끄러운지 맨날 방문앞에만 서면 고사리처럼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다고 한다.
먹어서 효과를 못볼때는 “온살도리”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불끈” 하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농월-
어머니!
詩曰(시왈)-시경에 말하기를
父兮生我(부혜생아)-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母兮鞠我(모혜국아)-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哀哀父母(애애부모)-아아 애달프다 부모님이시어
生我劬勞(생아구로)-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애쓰고 수고하셨도다.
欲報深恩(욕보심은)-그 은혜를 갚고자 하나
昊天罔極(호천망극)-넓은 하늘처럼 끝이 없어라
명심보감(明心寶鑑)
어머니 !
한 가정의 가장이 된 후에도 어머님이 그리운 것은 어쩐 일인지요?
이 자식은 이제 머리가 하얗고 눈은 침침하며 죽은 후 묻힐 묏자리 보러 다니는 나이가 되어서도 어머님이 그리운 것은 어쩐 일인지요?
어머니 하고 불러 보아도 “아가” 하는 다정한 목소리는 꿈속의 환상뿐입니다.
밥상 챙겨주고 당신은 부엌에 쪼그리고 닳아빠진 바가지에 숭늉으로 배 채우는 것을 어린 저는 몰랐습니다.
어떤 때는 깊은 밤 종짓불 심지를 돋우시면서 깊은 한숨 쉬는 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애비 되고 할애비된 지금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머니 !
저는 망내라서 그런지 아직도 철이 안 들어서인지 지금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어머님이 그립습니다. 어머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풀을 빳빳하게 먹인 삼베적삼에서 풍기는 어머님의 젖가슴 냄새를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제 코 끝에 느껴옵니다.
어머니 !
당신이 생전에 주신 가없는 사랑과 끝없는 축원의 눈물이 이시간도 소멸되지 않고 저의 가슴속에,
영혼의 깊은 우물에 그대로 남아서 힘들고 조용할 때마다 메아리로 들리어 눈물을 쏟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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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이야기는 5년 전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TV설교중의 실제 이야기인데 내용이 어찌나 감동적이어서 연필로 받아 적은 것이다. 당시 조목사가 미국에 체류 중에 아침 조간신문에 한국 6.25전쟁에 관한 조그마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미국신문은 매우 특별한 것을 제외하고는 동양의 작은 나라들의 사회면 기사는 흔치 않다고 하였다. Korea 라는 글자에 관심이 있어 읽은 내용이 아래와 같다.
1.4후퇴시 미국의 한 선교사가 강원도 어느 산길을 중공군에 쫓기어 남쪽으로 급하게 자동차로 내려오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어느 작은 강이 흐르는 다리를 지는데 옆에 있던 부인이 무슨 일인지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한다. 중공군에 쫓기는 급한 상황에서차를 세우라고 한 것이다.
『왜 차를 세우라고 하시오?』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요』
차를 세우고 둘러보았는데 보이는 것은 추운 겨울 풍경이다.
그런데 옆에 있는 조그마한 다리 밑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내려가 보니 어떤 빨가벗은 여자가 누워 있고 그 품에는 갓 태어난 애기가 옷에 싸여 있고 어머니는 겨울 혹한(酷寒)에 얼어 죽어 있었다. 피난길에 해산(解産)을 하게 되어 추운 날에 애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 옷을 벗어 애기를 싸고 자기는 얼어 죽은 것이다.
선교사는 급하게 애기를 차에 싣고 시체는 적당이 묻어두고 그 자리를 떠났고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 애기를 양자로 삼아 키웠다. 아이는 커면서 처음에는 몰랐는데 크고 나니 자기의 외모가 미국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양부모에게 사연을 물었다. 양부모는 지나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겨울날 1월 아들은 간청하기를 한국에 나가서 무덤이라도 찾기를 원했다. 그것도 가장 추운날을 요청했다. 겨울에 한국의 강원도에 나와 보니 옛날의 위치는 개발로 인하여 환경이 변했고 고속도로가 나서 어디인지 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대충 어림잡아 다리가 있었던 위치라고 짐작하고 차를 세우니 아들은 다리 밑에 내려가 그 추운 날에 옷을 전부 벗었다.
양부모는 깜짝 놀랐다. 아들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면서
『어머니가 나를 버렸으면 어머니는 살았을 것인데 나를 살리려고 어머니는 돌아 가셨습니다.』하며 통곡하였다.
-농월-
종사천승군(縱使千乘君) 끝이 좋은 삶이라야 행복하다
縱使千乘君(종사천승군)-제아무리 높은 황제 자리의 사람도
終齊一個死(종제일개사)-마지막 단계는 모두 하나의 죽음이오
縱令萬品食(종령만품식)-제아무리 산해진미를 차려 먹어도
終同一種屎(종동일종시)-결국은 다 같은 똥에 불과 하다.
釋迦窮八字(석가궁팔자)-석가도 생멸이 끝나면 적멸이 즐거움이라
老君守一理(노군수일리)-노자는 하나의 이치를 지켰더라네
若欲離生死(약욕리생사)-삶과 죽음의 미혹에서 벗어나려면
當須急思此(당수급사차)-서둘러 끝맺음을 깊이 생각하여야 하리
왕범지(王梵志)
예전에 어렵게 살 때는 만나면 인사가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나” 였다. 그리고 “많이 먹어라”가 가장 후하고 정(情)이 담은 말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는 “안녕(安寧)” 이 대표적인 인사말이 되고 있다. 전자의 인사는 배고픈 문제가 해결되었는지를 묻는 걱정이고, 아랫말은 사는 게 별 문제없이 편안히 잘 지내느냐의 안부 말이다.
인간의 삶이 복잡한 것 같아도 요약하면 들어오는 것(입入)과 나가는(출出) 행위다.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은 전부 들어오는 입(入)이며 이것들을 즐기며 소비하는 것은 나가는 출(出)인 것이다. 마치 재무제표상 상품수불장의 양식처럼 되어 있다.
이것을 좀 더 압축하면 입출행위(入出行爲)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다. 이 생명 보존의 적극적 활동은 “먹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입구멍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인 식(食)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하게 되고 예절인 식(式)과 마음인 식(識), 즐기는 식(息)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입출행위(入出行爲)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동안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먹는데 만 신경을 써 왔다. 잘 먹기 위해서 좋은 음식을 개발하고 잘 씹기 위해서 이빨을 보완하는 등 들어가는 입구멍에는 신경을 쓰면서 좋은 똥을 만들겠다는 생각과 소중한 똥을 관리하는 똥구멍(항문肛門)에 대한 관심은 아주 없는 상태였다.
매끼마다 입구멍의 즐거움만 사랑하여 맛있는 음식만 챙긴 나머지 항문은 아예 버린 자식 취급을 하여 왔다. 이렇게 소외당하고 왕따 당한 항문이 기분 좋을 리 없어 몽니를 부리는 것이 치질, 항문소양증 스트레스 대장병등 항문 질환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똥”도 항상 같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절에서 “거룩한 음식공양”은 빌고, 교회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들이 전부 먹는 축복은 빌면서 “싸는 축복”은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좋은 똥을 누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한적 있는가. 먹기만 하는 기도만으로는 절대로 행복을 가져 올수 없고 건강을 보장 받을 수 없다.
이것은 정치적인 외교도 마찬가지다. 내 입장(立場→入場)만 생각하고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남의 출장(出場)을 살피지 않는 결과가 미국이나 일본이 독도(獨島)집적거려 흠집내는 문제를 야기 시킨 것이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사원 한사람의 문제제기로 세인의 주목을 받은 것은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은 입(入)에 비하여 베푸는 출(出)의 정신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부족한 원인도 크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배출되는 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고시에 합격하고 돈을 많이 벌고 미인을 취하는 것은 인력으로 가능하지만 좋은 똥을 누는 것은 마음대로 안 된다.
지금은 먹는 것에 비하여 싸는 인식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비만 고혈압 당뇨 신부전증등 전형적인 태음인(太陰人) 병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태음인(太陰人)병은 입(入)이 많고 출(出)이 적어서 몸에서 노폐물이 쌓여서 썩는 병이다.
태음인(太陰人)은 간 기능이 크고 폐기능이 작아서 나타나는 간수열이열병(肝受熱裏熱病)증상으로 받아들이는 기가 왕성하여 안으로 모이는 량은 많은데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여 울체(鬱滯)되어 생기는 열증(熱症)병이다. 태음인은 대변 소변 땀을 많이 배출해야 하고 많이 베푸는 정신을 가져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사실은 먹는 것 보다 싸는 것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먹는 단계는 음식물 선택→씹어 멋보고→넘기는 단계이지만 그 이후로 똥이 되기까지는 10번의 큰 단계와 여러 가지 작은 단계를 거치고 있다.
항문만 해도 소장 대장 직장 항문으로 연결된 민감한 사고체계를 갖춘 신경 벨트다. 똥은 먹는 양에 비하여 많이 싸는 것이 좋다. 되도록 내장에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똥이 제대로 배출이 안 되면 얼굴에 기미가 끼고 피부가 나빠지고 항상 머리가 띵하다.
똥은 노폐물이 축적되어서 이 노폐물에서 발생하는 허열(虛熱)이 생기기 때문이다.
노자의 중요한 교훈이 있다.
허기복실기심(虛其腹實其心) 배가 비면 마음이 건강하여 진다.
사실은 “애 낳는 것보다 좋은 똥 누기가 더 힘들다”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는 먹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지만 지금부터는 싸는 기준으로 먹어야 한다. 이제는 자녀들에게 잘 먹이는 것보다 잘 싸게 하는데 힘써야 한다. TV에서도 온통 먹는 선전만 하지 싸는 선전은 안한다.
그리고 정력에 좋다고 닥치는 대로 마구 먹고 똥배 불러서는 안 된다. “똥배 부른 사람 치고 정력쎈자 없다”
대장이 대속(죽竹)처럼 비어 있어야 탄력 있는 힘을 쓸 수 있다.
또한 “똥구멍”이라 하면 천박한 말같이 생각하고 항문(肛門)이라면 고상한 말같이 여기지만 항(肛)이나 똥구멍이나 똑 같은 말이다.
이제는 상대방에게 진심어린 인사를 하려면 말을 바꾸어야 한다.
똥도 제대로 못 누는 상대방에게 “안녕(安寧)”이란 말은 인사가 아니다.
제대로 된 인사는
“요즘 똥님은 잘 나오십니까”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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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혈압에 좋다는 죽엽차를 좀 마셔봐야 겠네요.
어떤 종교도 갖지 않으셨어도 어떤 종교인 못지않은 정말 속시원한 말씀을 신랄하게 비판해주셔서 감사하네요, 저도 종교인이지만 종교인들이 먼저 반성해야 할것같네요, 항상 나라를 위해서 좋은 조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