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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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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5일 |
전임: 노태우(제13대)
후임: 김대중(제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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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
출생일 | 1927년 12월 20일(1927-12-20) (84세)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1371번지 |
정당 | 대통령이 되기 이전 자유당→민주당→민정당(60년대)→신민당→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 대통령이 된 이후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 |
별명 | 호는 거산(巨山), 약칭은 YS |
종교 | 개신교(장로교) |
배우자 | 손명순 |
자녀 | 아들 김은철, 아들 김현철, 딸 김혜영, 딸 김혜경, 딸 김혜숙 |
부모 | 부 김홍조, 모 박부련, 계모 박남순, 계모 이수남 |
거산 김영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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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2월 20일 - | |
별명 | 호 거산(巨山), 별칭 YS |
태어난 곳 |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1371번지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학도병 |
복무 기간 | 1951년 2월 ~ 1951년 10월 |
최종 계급 | 학도병 |
주요 참전 | 한국전쟁 |
기타 이력 | 국회의원, 신민당 총재, 통일민주당 총재, 대통령 |
김영삼(金泳三, 약칭 YS, 1927년 12월 20일(음력 12월 4일) ~ ,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 출생)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서예가·종교인으로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다. 1954년 26세에 3대 국회 민의원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당수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박정희정권 시절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 등의 탄압을 받았다. 1979년 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간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을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타협없는 투쟁으로 인망을 얻었으나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여 재야 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1993년, 대한민국의 문민정부 제14대 대통령(1993년 2월 ~ 1998년 2월)에 취임하여 32년만의 민간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 목사 김홍조의 아들,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전면 허용하였고,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수감된 박노해, 김남주 등의 시인들을 석방하였으며, 군부 정권에 의해 기소된 마광수 등의 예술인들을 석방하여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웅변과 단편 연설에 능하였으며,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차명 부정 계좌 단속 및 처벌,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등 비롯해 조선총독부 철거를 추진하였고, 신군부, 하나회와 관련단체 해체, 대한민국 국군 내 사조직을 해산하고 정치군인들을 처벌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임기말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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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산 김영삼은 1927년 음력 12월 4일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현 :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1371번지 큰달섬(大鷄島)에서 김녕 김씨 김홍조(金洪祚)와 박부련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호적상에는 1927년 12월 20일생으로 되어 있다. 그의 형제 둘은 어려서 요절하여 사실상 외아들이 되었고, 문중의 장손이었다. 후에 그에게 사촌 남동생이 한명 태어나는데 이 사촌동생과 그는 할아버지 김동옥의 유일한 손자들이었다.
김영삼의 가계는 사육신 사건때 살해된 백촌 김문기의 후손이었다. 김문기의 후손들 중 김영삼의 직계선조가 임진왜란 때 화를 피해 계림에서 이사하여 거제도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거제도에는 큰달섬과 작은달섬이라는 이름의 부속도서가 딸려 있는데, 그의 선조들은 임진왜란 때 병화를 피해 계림(경주)에서 내려와 거제도에 딸린 섬을 각각 나눠 차지하여 살았다하여 거제도에는 큰달섬(大鷄島)과 작은달 섬(小鷄島)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한다. 거제도 큰달 섬에 정착한 이는 김영삼의 11대조였다. 작은달 섬에 정착한 11대 방조의 후손들은 번창했지만, 11대조 이후 김영삼의 증조 할아버지 때까지 독자로 이어져 왔다.
큰달섬에 이주한 김영삼의 직계선조에게는 후손이 귀하여 번창하지 못했고, 할아버지 김동옥이 7남매를 두게 된다.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요절하고, 손아래에 여동생이 5명 있는 독자였다. 그의 가계는 거제도에서 멸치어장을 소유하던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할아버지 김동옥의 대에 어업으로 가계를 일으켰다.
어머니 박부련은 밀양박씨 박침배(朴琛培)의 2남 1녀 중 외동 딸로, 같은 마을에 살던 김홍조에게 시집와서 3남 5녀를 두었다. 그러나 어머니 박부련은 1960년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되었고, 아버지 김홍조는 최남순(崔南順)과 재혼하였으나 최남순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김홍조는 1985년 김영삼보다 2년 연상이었던 계모 이수남(李守南, 1925년생)과 재혼하였다. 그가 태어날 무렵 가세는 크고 어선 10여 척 이상 보유하였으며 멸치 어장을 꾸려가는 인근 마을에서는 꽤 알려진 알부자 집안이었다.
그는 유년시절 조부 김동옥(金東玉)의 영향을 받았다 한다.[1] 손이 귀한 집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조부 김동옥을 따라 망망대해를 누비며 포부를 키웠다 한다. 조부는 그에게 사나이다운 배포와 우직하리만큼 강직한 성품을 심어주었다 한다.[1] 늘 험한 바다와 싸우는 갯가에는 해신에게 무사를 기원하는 기도를 했지만 그의 조부는 일찍부터 기독교에 심취, 사랑방을 기도실로 꾸며 외지에서 전도사나 목사 등을 자주 초청하여 예배를 보았고 숱한 동네사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집 앞의 뽕밭을 기부하여 교회를 짓기도 하였다. 신문물에 일찍 눈을 뜬 할아버지 김동옥은 마을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였고, 조부의 노력에 힘입어 기독교 신자들이 거제도의 다른 마을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주하였지만 조부 김동옥의 노력으로 섬마을 사람들 거의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으며, 아버지 김홍조, 어머니 박부련과 김영삼도 세례교인이 되었다.8세에 면사무소 소재지에 있는 장목보통소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급에서 그는 가장 어린 소년이었다 한다. 학급번호는 키순서로 32번이었고, 편도 20리의 고된 통학을 염려하여 그의 부모는 근처에 하숙을 마련해 주어 하숙생활을 하였다. 일제감정기 시절(1940년) 창씨개명이 강요되었으며(당시 만 12세), 개명된 이름은 가네무라 코유(일본어: 金村康右)이다.
소년시절 부터 일본인들의 강제적 식민통치에 반발하였으며, 일본인들이 거제도를 거지도, 거지 섬이라고 발음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그는 일본인들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중학교 진학 이후 사춘기 무렵부터는 같은 학교, 같은 반에 있는 일본인 학생들과 수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통영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1학년 때엔 툭하면 시비를 거는 급장과 일본인 학생들과 마찰을 빚어 1,2주간 정학을 받기도 했다. 통영중학교의 기타시마(北島) 교장은 그를 혹독하게 대하였다. 김영삼이 중학교 2학년 무렵 가고시마 교장은 진해중학교로 전근갔는데, 이날 2학년생 전원이 선창가 배에까지 이삿짐을 나르는데 동원되었다. 당시 귀하던 설탕이 10여 부대나 쏟아져 나오자 그는 설탕을 나르면서 이빨로 부대종이를 뜯어 일부러 설탕을 흘리며 날랐다. 다음날 진해로부터 당장 범인을 조사해서 알려달라는 불호령이 통영중학교로 날아들었다. 일본인 교사 가운데서도 한국인 학생의 처지를 끔찍이 이해해주던 와타나베(渡邊) 교감은 누구의 소행인 줄 알면서도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점잖은 훈시만으로 감싸주어 설탕 사건의 위기는 모면했다 한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와타나베 선생과는 건국 후에도 서신왕래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83년에는 통영중학교 동창들이 와타나베 교감을 한국에 초청, 재회하기도 하였다. 중학교 3학년 때, 3학년생 전원이 사천의 비행장 공사장으로 끌려가 '노동보국'이라는 이름의 강제노동에 끌려갈때 함께 끌려갔다. 그러나 비행장에서 사소한 시비로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이 붙어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중학교 2학년 때부터 그는 대통령에 대한 장래희망을 품고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 글귀를 책상 앞에 붙여놨다고 한다.
청년기
이때부터 그는 대통령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장래 희망을 물으면 대통령이라 대답하였다 한다. 3학년 때는 자신에게 부여되는 한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새겨놓곤 했다.
경남고등학교에서 경성제대 철학과를 나와 윤리과목을 들고 직접 강단에 섰던 교장 안용백 선생의 감화를 받은 김영삼은 철학 전공을 결심하게 되었다. 모든 학문은 철학에서 시작된다는 안용백 교장의 훈시에 자극을 받아 1948년 9월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철학 보다는 정치쪽에 관심이 있던 그는 몽고메리 원수 등에 관련된 서적을 읽거나, 주로 신문의 정치 관련 기사들을 읽었다. 이승만, 김구등의 강연회를 찾아다니게 된다. 이때 우연히 이승만 박사를 멀리서 본적이 있었다 하며 김구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후일 회고담에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하면서 "나는 김구씨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 양반이 돌아간 다음에 서울대 학생들과 경교장에 가서 시신을 본 적이 있다. 그 양반을 만난 적은 없다"라고 했다. 또한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가 정치적인 감각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김구 씨는 이북에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왔다”며 “정치적 시각은 이 박사가 좀 더 높았다" 고 평가했다.
1학년 때 김영삼은 전공 외에 헌법, 정치학 개론, 국제 공법, 현대 정부 형태론, 서양정치사상사, 구주외교사, 국제 관계론, 구주 정치사 등 정치관련 분야 8개 과목을 수강했고, 2, 3학년 때에도 국가론, 비교 정부론, 정치학 강독, 의회제도론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성적은 B, C, D 였고 유식철학과 노장철학 2개 과목만은 A였다 한다. 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 김영삼은 서울특별시 명동 시공관에서 있은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2등을 차지, 외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은 장택상이었다. 김영삼에게는 장택상이 처음 직접 대하는 거물 정치인이었고 장택상은 곱상하고 총명한 청년을 마음에 두게 되었다. 2대 민의원 선거때에 장택상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제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한 장택상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정으로 지프차를 보내 김영삼 학생에게 선거 도움을 요청해 왔다. 김영삼은 서울대 동료 20여 명과 함께 경북 칠곡으로 내려가 이때부터 40여 일간을 장택상과 침식을 함께 하며 찬조연설을 하는 등 장택상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다.김영삼이 서울대학교 졸업 학력에 대해선 이견이 존재했다. 정식 입학생이 아니라 청강생이었다는 루머가 돌았지만 서울대학교에서는 정식으로 김영삼의 입학과 졸업을 인정했다. 김영삼의 생가에는 김영삼이 1948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1951년 9월에 졸업했음을 보여주는 성적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다.
1950년 6.25 이후 피난을 가지 못해 고생했던 그는 1.4후퇴 때 서둘러 남하, 1951년 2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동문인 손도심 등과 함께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군번은 E134였다. 이때 그의 신분은 학도병이었다.
의용군 안에서도 당장 전선에 달려가자는 주장과 후방에서 일손을 돕자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그는 웅변대회 때의 인연으로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주임교수에서 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있던 이선근(李宣根) 박사의 추천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으로 배치되었고, 직책은 정훈병이었다. 그는 매일 저녁 5~6시까지 1시간 동안 중앙방송을 통해 직접 원고를 쳐서 중간중간에 군가를 섞어서 생방송으로 진행하였다. 8개월간 정훈병으로 방송에 몰두하고 있을 때 국회 부의장 장택상으로부터 국회에서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군에서 대북방송의 중책을 맡고 있음을 들어 거절하였다. 그러나 장택상은 이선근 국장에게 전화로 부탁하였다.
국방부측에서는 국회 부의장 장택상에게 당초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나중에 김영삼에게 "어느곳에서 일하든 나라를 위한 일에는 장소가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장택상 부의장의 일을 도우라"고 하였다. 1951년 10월 장택상 국회부의장의 비서관이 되었다.
그해 여름 급전을 받고 조부의 위독 소식에 고향에 내려갔으나 조부는 정정하였고, 부친 김홍조의 친구이자 마산에서 한산의원을 하던 이 장로의 소개로 세명의 처녀와 맞선을 하게 되었다. 이 중 세 번째 처녀이자 경향 고무, 고무신을 경영하던 손상호의 딸 손명순을 선택하였다. 1951년 2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1년 3월 마산문창교회에서 손명순과 결혼식을 올렸다. 손명순에게서 딸 혜영, 혜경, 아들 은철, 현철, 막내딸 혜숙 등 2남 3녀가 태어났다. 둘째 아들 현철 역시 후에 정치인이 된다.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결심, 서울 청진동 자유당 본부에서 이기붕을 만났다. 이기붕은 예상대로 자유당에 입당해달라는 호소를 하였고, 지방 지구당의 선거참모들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았다. 당시 유력 정당은 자유당과 민국당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유당을 선택하였다.
1954년 5월 20일에 있은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회의원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거제군 지역구에서 출마하였고 고무신 공장을 운영하던 장인은 사위의 선거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고, 결과는 20,800여 표로 경쟁자인 민주국민당의 서순영을 14,110표로 누르고 3대 국회의원에 당선, 26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3선 개헌소식이 보도될 때 다시 경무대를 방문한 김영삼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國父)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 당시 이승만은 80대였는데 김영삼의 직설적인 발언을 듣고 불쾌해한 나머지 손을 떨었다 한다. 그러더니 별 말없이 뒷 문으로 나가버렸다. 뒤에 이기붕이 김영삼을 찾아와 화를 내며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노인을 화나게 하느냐"고 나무랬다. 그 뒤로도 김영삼은 자유당을 탈당하지 않았다. 3선 개헌안이 토요일에 부결처리 됐는데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에 최순주 민의원 부의장이 '사사오입' 원칙을 내세워 개헌안을 다시 가결된 것으로 통과시켰다.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은 '이 당은 안 되겠다' 결심하고 동지들을 모아 10명과 함께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현석호, 한동석 등과 만나 개헌저지를 위한 동지 규합에 나섰다. 비밀 유지를 위해 장소를 수시로 옮겼고 한동석 의원이 입원중일 때는 문병을 가장하여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여 20여 명을 규합하는데 성공하였다. 1954년 11월 27일,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숱한 저지 여론에도 불구하고 무기명투표로 붙여졌다. 이때 그는 자유당 소속의 다른 의원인 현석호, 민관식, 이태용, 황남팔, 김두한, 김흥식 등과 함께 부표를 던졌다. 이후 여당의 독재에 반발하여 그해 12월 3선개헌에 반기를 들고 탈당한다. 자유당을 탈당한 뒤 1955년 4월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 민주당이 결성되자 민주당에 입당했고, 민주당 중앙당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민주당 창당 초, 김영삼은 민주당 신파의 장면(張勉)을 찾아갔다. 그러나 장면이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권모술수를 쓰는 것에 반대하자, 이를 답답하게 여긴 김영삼은 장면의 곁을 떠나 민주당 구파의 조병옥, 유진산 등을 찾아갔다. 이후로 김영삼은 민주당 구파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장택상이 정계로 발탁한 인물이며 수제자 중의 한사람인 것이 알려지자 조병옥은 전폭적으로 그를 후원하였다.
1958년 5월의 제4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중앙당의 권유로 고향인 경남 거제군을 떠나 선거구를 옮겨 부산 서구에서 출마해 낙선하였다. 자유당은 당시 경남도지사, 내무부차관을 지낸 이상용을 후보로 내세웠다. 23개 투표함 중 16개 함에서는 김영삼이 7:3의 비율로 우세하였으나 나머지 한 표에서는 그의 표가 많은 것이 7표만 나오고 자유당표 일색이라 막판에서 선거에 패하게 되었다. 낙선 직후 선거 결과에 승복 못한 그는 그해 5월 개표 조작이 의심된다 하여 법원에 제소하였으나 무효였다.
낙선한 뒤에도 원내에서 정치활동을 하며 1959년 조병옥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 위해 당내의 인사들로서 '유석 청년 동지회'란 모임을 조직, 조병옥의 후보 추대운동을 벌여 성공하기도 했다. 4.19 혁명 이후에 치러진 5월 대한민국 제5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재기한다. 이후 민주당 구파 정치인으로 활동한다.
1960년 9월 25일 거제군 외포리 김영삼의 집에 총을 든 무장간첩에 의해 김영삼의 어머니 박부련이 살해당한다. 무장공비가 쏜 총알 중 복부에 세 발의 총을 쏜 것이다.
1961년 2월 중석불 사건 관련 10명의 의원들과 결의안을 제출했다. 김영삼 등 10명의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3월 김영삼은 민족일보 인쇄중지를 명한 장면 정부를 비판했다.
그 신문이 장 총리의 마음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탄압했다면 장 총리는 과거 이 정권에 의해서 경향신문이 폐간당하던 때를 상기하라
민족일보 폐간령을 내린 장면의 태도를 비판했다.[28] 이에 대해 국무총리 장면은 ‘언론탄압을 한 적은 없으며 민족일보는 정부관리기업체인 서울신문 외의 곳에서 인쇄하면 된다’고 응수했다. 민주당 구파의 주요 인사로서 신파 인사들의 정국 주도권 장악 시도에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구파인 대통령 윤보선과 친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윤보선 대통령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고, 그의 비판에 민주당 신파에서도 쉽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인들의 5.16 군사정변 소식을 거제에서 접하였다. 그는 집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당시 그는 신민당의 원내부총무였고 다른 정치인들은 국회가 해산되고 탱크가 밀려왔다는 소식에 오히려 은신처를 찾았지만 그는 서울로 향했다. 혁명세력이 민주공화당을 창당할 무렵 야당은 분열되어 김병로,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민정당, 박순천과 장면의 민주당, 김준연의 자민당이 난립하였고, 그는 민정당을 선택, 민정당 초대 대변인으로 선임되어 야당의 입으로 활약했다.
1961년 5.16 직후 정치정화법으로 묶여있던 중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위원장 조시형(趙始衡)이 그를 찾아와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해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5.16은 장면 정권이 수립 8개월 만에 기도됐다는 것과 군은 약속대로 원대복귀하라며 군의 정치참여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 참여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그 뒤 민주공화당에서 부산시지구당 위원장직을 제안하자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고, 정치를 하지 않겠다면 서울신문사 사장직을 제의하였지만 역시 거절하였다.
군정에서는 계속 군정참여를 요청하였으나 김영삼은 이를 거절했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윤보선, 허정 등과 함께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하였다.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5대 국회에서는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고, 1964년 6월 15일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출국, 이후 미국과 유럽 10여개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 그는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를 출간하였다.
1964년 한일굴욕외교 반대 때 민정당, 민주당 양당이 민중당으로 통합된 뒤 그는 민중당 원내총무직을 놓고 김상돈과 경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상돈과의 경합에서 이기고 민중당 원내총무에 피선되었다. 1967년 신민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였다. 1967년 7월 20일,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한 이승만의 시신이 김포공항으로 운구되자 애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듬해인 1968년 6월 17일, 박정희가 향토 예비군을 설치하자 그는 예비군 폐지안을 대표발의하였다. 6월 17일에 김영삼을 포함한 의원 41명은 향토예비군법 폐지안을 발표하였다.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말하며 3선 개헌을 강도높게 비판하자, 공화당과 우익 인사들은 그를 좌파라며 공격했다. 그러자 김영삼 측에서는 1960년 당시 어머니가 무장공비에게 살해된 것을 들어, 만약 김영삼이 좌익이라면 무장공비들이 그의 어머니를 살해했겠느냐며 맞대응하였다. 같은 해에는 정치학도 서석재를 발탁하여 자신의 비서관으로 채용한다. 이후 서석재는 김영삼을 따랐고, 후일 1994년에는 김영삼의 리더십에 반발하는 군사 정권세력에 맞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여 군사 정권 세력을 몰락시키고, 신한국당에서 군사정권 세력을 축출, 타도하는데 기여한다.
제3공화국 기간 동안 제1야당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거쳤다. 유진산 당수가 갑자기 쓰러져 야당이 야당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당을 상징할 인물이 없자 1969년 11월 8일 그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신민당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당 원로들은 구상유취론으로 맞섰지만 이어 김대중,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에 동참하여 경쟁에 뛰어들었다. 당 원로들의 젖비린내난다는 혹평을 무릅쓰고 그는 '40대 기수론'을 고수하여,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공식선언하여 주목받게 되었다.
1969년 11월 8일에는 신민당 원내총무직을 사퇴하였다. 1970년에는 서울대학교 학생운동권 출신이며 6·3 항쟁을 주도한 김덕룡(약칭 DR)을 발탁했다. 김덕룡 역시 김영삼의 정치활동과 야당활동을 지원하였다.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중, 1969년 6월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은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습격당하였다. 매복하고 있던 괴한들은 김영삼 원내총무의 차를 둘러싸고 승용차 창문에 초산을 뿌렸다. 다행히 미수에 그쳤지만 김 전 대통령 측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정권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수류탄으로 생각했던 김영삼과 비서는 고개를 숙였으나 차량 일부와 아스팔트 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한다.
김영삼 측은 이 사건이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정권적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했고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의 주요 정적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김영삼 역시 이후 박정희 정권과 가열찬 투쟁을 벌이게 된다.
1971년에 있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웠고, 1월 당수인 유진산을 대신하여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하였다.
1970년의 신민당 대선 예비후보 경선에서 유진산의 선출이 유력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 정권의 공작으로, 국민들이 유진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유진산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에게 후보자 지명권을 달라고 당내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기가 지명될리 없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했지만, 유진산은 후보자 지명을 강행하여 자신의 계보의 정치적 적자인 김영삼을 대선 후보자로 추대했다. 후보자 지명을 받은 그날 밤 김영삼은 자택에서 후보자 수락 연설문 초안을 작성, 최종 검토하고 리허설까지 했다. 그러나 열세에 몰린 김대중은 바로 그 시간에 신민당 대의원들의 숙소를 돌며 무차별 유세를 벌이고 있었고 김영삼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같은해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최고 득표를 얻었으나 과반수 미달로 경선 2차 득표에 들어갔다. 2차 득표에서 김대중에게 역전패 당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패배를 승복하고 김대중의 지지 유세를 다녔다. 그러나 김대중이 당권 장악 의사를 보이자, 김영삼은 김대중의 당권 장악을 반대하였다.
1970년대의 김영삼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야당 밀어주어 일당독재 막아내자" 라는 공약을 걸기도 했다. 1971년 5월 6일, 신민당 당수 유진산이 5·25 국회의원 총선 후보등록 마감일인 갑자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를 등록하면서 진산파동이 발생했다. 5월 7일 신민당 비주류인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 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해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다. 유진산과 같은 민주당 구파 출신이었던 김영삼은 김대중의 당권 장악기도를 막기 위해 신민당 내 인사들을 규합하여 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김영삼은 운영위원회 소집에 앞서 이철승(李哲承), 이중재, 김재광, 김형일 등은 비공식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직 장악을 저지키로 하고 당헌에 따라 운영위원회 부의장에게 당수 권한대행을 맡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사태는 유진산과 김대중의 공방전으로 발전했고, 사태는 제3자에 의한 중재를 통한 수습을 하게 되었다. 이에 김영삼은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 당 중진들과 함께 '유진산의 당수직 사퇴, 당수직에 대한 다음 승계권자인 운영위원회 부의장 양일동 고흥문 홍익표의 사퇴, 총선기간 중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을 당수권한대행으로 한다고 하여 김대중의 신민당 당권장악을 저지했다. 김대중은 이 중재안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의사를 나타냈으나, 더 이상의 별다른 수습안이 없는 상태에서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40]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웠고, 1월에는 당수인 유진산을 대신하여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하였다. 김영삼과 이철승이 당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 나오자 김상현 등은 유진산이 지지하는 사람(김영삼을 가리킴)에게 당수직을 주었으니 대권은 줄 수 없다며 반발하였고 경선 초기에 잡음이 있었다.
1차 투표 결과는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로 김영삼은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무효표는 이철승의 표였는데, 이철승이 유진산의 지명에 따른다는 약속을 파기한 것이다. 2차 투표에서 김영삼 410표에 김대중 485표가 나왔는데, 이는 이철승이 김대중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김영삼은 흔쾌히 결과에 승복하였다.
김대중 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이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김대중 씨를 앞세우고 전국을 누빌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자로 김대중이 지명된 것에 반발한 구(舊) 민주당 구파 출신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은 1971년 1월 6일부로 신민당을 탈당, 선명야당의 기치를 걸고 국민당을 창당해 나갔으나 같은 구파였던 김영삼은 경선 결과를 승복하고 신민당에 남아 있을 것을 천명했다. 김영삼은 탈당을 거부하고 신민당에 남아 있었으며, 이후 김대중의 유세를 다니며 "김대중의 승리는 곧 자신의 승리"라고 역설하였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지원유세를 다녔으나 한 호텔에서 남몰래 통곡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유진산은 박정희와 여당과 일종의 정치적인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고, 그는 이 타협에 불평불만이었으나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이철승이 여당과 타협을 시도하자 그는 이를 부정적으로 대한다.
1972년 1월 전국학생 신앙 운동 동계 수양대회에 참가하여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뒤 이철승, 유진산 등과 번갈아가며 신민당 당수를 역임하던 중 미국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의 초청으로 방미 도중 박정희의 유신선포 소식을 듣고 부인의 만류와 미국인 라이샤워, 코헨 교수 등의 만류도 뿌리치고 귀국했다. 1972년 10월 김영삼은 비행기편으로 입국하였으나, 김포공항에는 대기하던 청년들이 있었고 한동안 연금상태에 있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하루 6갑 정도 피우던 담배와 밤새 마시던 술을 이 무렵 끊었다. 연금이 풀리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마스크를 착용하였다. 왜 마스크를 하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정치는 갔다. 이런 판에 어떻게 국민들 앞에 얼굴을 들고 다니냐며 대여투쟁을 하였다.1972년 10월 유신 선포이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정권의 테러 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한다며 항의하였다. 1974년 김영삼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총재 경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74년 5월에 미국을 방문하였다. 한편 신민당 총재에 취임한 그는 선명야당론을 주장하며 유신 체제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비판을 역설하였다.
1975년 3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그를 금주의 인물로 선정 보도했다. 이어 개헌 주장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되기도 했다. 한편 1976년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땅굴구축,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공산화 충격, 1976년 8월 13일에 발생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등 한반도에 긴장상태가 발생하면서 유신체제의 정당화에 일조하였고, 그의 선명야당론은 어려움에 부딛쳤다. 신민당 등 야당진영은 강경투쟁론을 주장하는 김영삼 노선과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면서 온건한 투쟁을 주장하는 이철승 노선으로 분열되었다.
1975년 5월 21일에는 청와대를 찾아 대통령 박정희와 청와대 회동을 한 뒤 온건한 입장으로 변해 1976년 당총재 경선에 출마했다가 이철승에게 패하여 고배를 마셨다.
같은해 8월 동남아시아를 순방하고 귀국하였다. 돈이 없었던 김영삼은 경남고등학교 1년 선배인 김택수(金澤洙)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강성재에 의하면 자존심이 강한 김영삼으로서는 어려운 선택이었다고 한다. 당시 야당 정치인인 그에게 쉽게 자금을 대주려는 기업인이나 재력가도 없었고 그는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10월 8일, 신민당의 여성 국회의원 김옥선이 정기국회의 대정부질의 중 안보궐기대회를 공안정국으로 몰고가려는 것이라 비판하고, 직설적으로 박정희를 독재자로 규명하여 논란이 되었다.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맹비난과 김옥선에 대한 의원직 제명이 추진되자 신민당은 당론으로 김옥선 의원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날치기로 김옥선 의원 제명안을 통과시켰으나, 당초 김옥선 의원을 사수하기로 했던 신민당 의원들은 아무로 김옥선을 도와주지 않았다. 김영삼은 김옥선 의원을 찾아가 자진 사퇴를 권고했고, 김옥선 의원은 자진사퇴를 함으로써 논란이 종식되었다.
1978년 둘째 아들 김현철은 정치학과 진학을 희망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아들을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강성재에게는 김영삼은 자신이 겪은 괴로움을 물려주기 싫어 2년 동안의 설득 끝에 아들을 다른 공부를 하도록 돌려놓았는데, 아직 정치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눈치라고 밝혔다.
1978년 7월 23일 총선 2개월후 김영삼은 임시국회에서 민주공화당 박준규 의장서리와 대결하게 되었다. '내말은 참으로 무서운 민중의 소리 가운데 가장 순한 말'이라고 전제한 김영삼은 78년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이 득표율에서 1.1% (야당에게) 진 것은 무엇보다도 19년째 접어드는 박대통령의 장기집권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나는 올해 대학교 1학년에 다니는 친구의 아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총재님,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 대통령은 한 분 밖에 보지 못했는데, 언제쯤 다른 대통령을 보게 될까요?
그러고 보니 과연 실감나는 이야기였습니다. 올해 스무살 밖에 안 되는 대학생이고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소박한 대학생의 마음이 바로 국민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기집권을 싫어하는 국민의 마음이 선거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선거에 이기고도 원내 의석은 3분의 1도 못 되는 유신체제의 모순과 인권 탄압, 언론 탄압 등을 열거한 김영삼은 박대통령은 진실로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그리고 박대통령 스스로를 위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준비를 갖추기 바란다 고 예의 정권이양 준비 발언을 되풀이했다.
역사의 진로를 민주회복으로 바꾸어야 할 시점이 지금이라고 확신하며, 정부는 이제 안보를 빙자해서 억압정치를 할 명분이 없으며, 오히려 안보를 위해서 민주회복을 해야 할 시점에 섰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약 30분간의 연설을 마치면서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 이철승을 누르고 당선되어 당총재직에 복귀했다. 1차 투표에서 이철승 292표, 김영삼은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를 받았다.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은 이기택에게 김영삼 지지를 호소하였고 이기택은 이를 받아들인다. 2차 투표에서 김영삼 378표, 이철승 367표로 근소한 차로 역전승을 하여 신민당 총재에 선출되었다.
6월 11일 외신기자클럽에서 "야당 총재로 통일을 위해서는 장소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책임있는 사람(김일성 포함)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김일성 면담용의 발언이 정치적 파문을 몰고 왔다. 보도진이 '책임있는 사람에 김일성도 포함되는가'하고 묻자 김영삼은 그렇다고 답변했다. 이 발언은 처음에는 문제가 되지 않다가 6월 18일에 이르러 북한이 김일(金日)의 이름으로 환영 담화를 발표하고, 신민당과 노동당 대표자 간의 예비접촉을 제의하는 등 반응을 보이자 당시의 정부 여당은 문제를 삼기 시작했다.
여당인 공화당은 김영삼 총재의 발언이 "우리 정부가 주장하고 남북 당국자간의 대화를 근본적으로 해치는 행위이고 반국가적 행위"라고 단정하였고, 검찰총장 오탁근은 "국론분열이나 민심을 현혹하는 언동은 엄벌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김영삼의 발언과 관련해 상이군경과,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120여 명의 반공우익 인사들이 서울 신민당 중앙당 당사에 집단으로 난입, 김영삼의 발언 취소를 요구하며 당원들에게 구타와 폭행을 가하고, 기물을 파괴한 뒤 당기를 찢어버리기도. 일부 상이군경들과 반공주의청년들은 서울 상도동의 김영삼의 자택으로 몰려가 협박을 하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은 국내 여론의 지탄을 받으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부는 그의 정계축출을 기도하였다.
1979년 8월 9일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서울 마포구 신민당 당사에 찾아와 농성에 돌입했으며 이들을 만났다. 20대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 진입하자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이들을 위로하며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신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며 노동자들을 안심시켰다.[55] 이후 YH무역 여공과 노동자 시위를 주관하던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신민당사와 신민당 지구당으로 숨어들었고, 경찰서와 검찰은 신민당사와 지구당 주변을 수색, 감시하게 된다.
8월 9일부터 8월 10일까지 김영삼과 신민당 의원들은 신민당 당사 주변을 순찰하며 경찰청 정보과, 보안과에서 나온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치며 경고를 하였다. 8월 11일 새벽, 경찰이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순구 서울시 경무국장이 당사에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장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며 뺨을 올려붙였다. 곧이어 2000여 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투입되고 신민당 의원, 당직자 등과 몸싸움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23분 만에 진압작전은 완료돼 YH무역 노동자들은 모두 강제연행되었다. 경찰의 연행과정에서 건물옥상에 올라간 노동자들 중 김경숙이 추락하여 사망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경찰에 의해 상도동 집으로 강제로 끌려나갔다. YH무역 여공 김경숙(당시 21세)이 시위 도중 신민당사 4층에서 추락 사망했다. 김경숙이 사망하자 김영삼은 3일간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였다. 이후 그는 YH무역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백서를 발표하였다.
...(이상 중략)...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예언해 주는 것입니다...(이하 생략)...
1978년부터 김대중을 가택연금했던 박정희 정권은 YH 사건을 기회로 김영삼 마저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79년 9월 8일, 법원은 김영삼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1979년 10월, 신민당 총재직에 있었으나 뉴욕타임스지를 통해 미국에 대하여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다가 1979년 9월 공화당과 유정회는 9월 16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김영삼 총재의 회견기사가 ‘헌정을 부정하고 사대주의 발언을 했다’고 비판했다. 김영삼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 원조제공을 중단하고 정부에 대해 민주화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하고 사대주의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여론에 ‘미국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라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10월 4일에는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주도로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제명을 요구했고,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했다. 제명을 당하게 되자 김영삼은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공화당에서는 그의 이 발언을 외세를 등에 업고 사회분란과 내란을 조장하려는 음모라며 공격을 가하였다.
신민당 총재직과 국회의원직에서 강제로 제명되고 이어 가택 연금되는 탄압을 받았다. 김영삼이 의원직에서 제명되고 9일 뒤인 10월 13일에는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에 반발한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소속 의원들은 집단사퇴를 제출하며 반발했다.더욱이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게된다. 이어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다음 날인 10월 16일에는 다른 대학교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가담하여 대규모 독재타도,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10월 16일과 10월 17일 부산에서는 김영삼에 대한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쳤고 10월 18일과 10월 19일에는 경상남도 마산시 및 창원시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후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에서 부산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부마 사태 소식을 접하였다.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 항쟁을 촉발했고, 이는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그의 빈소가 마련되자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에 설치된 박정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다.
10월 28일 측근들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가서 박정희의 빈소에 조의를 표하고 나왔다. 야당 동료들의 강한 반대에도 그는 박정희 빈소 참배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를 용서하지는 않았고,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 탄압, 장기 집권에 늘 부정적, 비판적인 시각을 고수하였다.
그 뒤, 가택연금이 풀린 김대중 의장 등 재야인사들이 신민당에 입당할 의사를 밝혔으나, 그는 입당 때 심사하겠다며 사실상 받아들이지 않았고, 재야인사들은 신민당 입당을 포기했다.
12월 12일 12·12 사태가 발생하자 강원용의 연락을 받고 다음날 12월 13일 아침 남산에 있는 식당에서 면담하였다. 김대중, 김종필과 힘을 합쳐 계엄부터 해제시키고, 그때 김종필은 김종필대로 가게 하고, 김대중과 손을 잡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강원용은 조건을 제시, 김대중과 손을 잡는 조건으로 대통령은 김영삼이 먼저 하고 그 대신 당 총재는 김대중에게 주며, 4년 후에 가서 경선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우리는 민주주의 신봉자니까 대통령 후보든 당 총재든 전당대회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해야지, 우리끼리 약속을 하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며 강원용의 타협안을 거절하였다. 강원용은 "당에서는 절대 다수가 김영삼 세력이었으니까 조건을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아니냐"며 비난하였다.
윤보선 역시 그와 김대중을 불러 빨리 화합하고 단일화할 것을 주문하였으나 둘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새로운 군부 세력이 집권이 예상되자 윤보선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윤보선의 정계 은퇴로 그는 민주당 구파 계열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다.
1980년 봄, 그는 김대중, 김종필 등과 대권을 놓고 경쟁하였다. 그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쿠데타를 그리 걱정하지 않았고, 결국 5·17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1980년 5월 17일 오전 10시, 김영삼은 신군부 군인들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김영삼은 5월 20일 상도동 자택에서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내린 신군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오늘 계엄통치를 확대 강화한 5 ·17 사태를, 민주회복이라는 국민적 목표를 배신한 폭거로 규정한다. 계엄당국의 강압통치로 빚어진 유혈사태는 이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가고있다."면서 '국민적 목표를 배신한 5·17 폭거'라는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김영삼은 신군부에 의해 5월 20일부터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가택연금 상태에서 장남 김은철의 약혼 소식을 접하였으나 참석하지 못하였다. 목사 강원룡은 김영삼의 집을 찾아가 약혼식을 주례하였다.
1980년 9월 출범한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에서도 계속된 가택 연금과 정치적 탄압에 항의하며 장기간의 단식 투쟁을 단행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해 10월 김영삼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의 강요로 정계 은퇴 선언을 발표하였다. 1981년 5월 연금에서 해제된 김영삼은 이민우(李敏雨)·김동영(金東英)·최형우(崔炯佑)·김덕룡(金德龍) 등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있는 재야 인사들과 함께 등산모임을 조직하고 민주산악회를 출범시켰다. 민주산악회의 참가자가 증가하면서 김영삼은 1981년 6월 9일 공식기구로서 출범하는데 동참하였다. 공식 기구로 출범한 민주산악회는 이민우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김영삼을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그뒤 민주산악회는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방조직을 확대하는 등의 사실상의 정치적 활동을 하였으며 한편 김대중 계열 정치인들도 민주산악회의 활동에 가담하여 적극 협력하며 야권통합과 범국민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김영삼 계열 정치인들은 김대중 계열까지 흡수하여 재야정치인들의 통합조직을 준비, 민주산악회를 모체로 하는 통합협의체의 구성에 합의하였다.
1983년에는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였고, 같은해 5월 18일에는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 투쟁을 하였다. 같은 날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김영삼은 5월 18일 민주화 5개항 수용과 야당인사 석방을 주장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그가 자택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자 함석헌, 문익환 등이 그의 상도동 자택을 찾아 위로하였다.
5월 25일 단식으로 심신이 쇠약해지자 그는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되었다. 5월 27일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이 전두환을 대신해서 김영삼의 병상을 찾아와 단식을 중단해줄 것을 촉구하는 전두환의 의사를 전달였으나 김영삼은 이를 거절하였다. 5월 28일에 권익현이 다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 중인 김영삼의 병상을 찾아왔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5월 29일 권익현은 다시 서울대 병원으로 찾아가 김영삼을 찾았으나, 김영삼은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하여 무안을 주어 되돌려보냈다.
6월 10일에는 23일간의 단식농성을 마쳤고, 이후 억압체제는 완화되었다. 이듬해인 1984년 5월 18일에는 5.18 민주화 운동 4주년에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다.[66] 1984년에는 이민우, 김대중 등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85년에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으로 올라서자,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였으며, 김대중 등 재야인사 150여명과 함께 고문저지 보고대회후 민추협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에 가담하였다.
1987년 6월 대통령 전두환이 호헌을 선언하자 그는 이를 정권연장의 수단이라며 반대했다. 대학생들의 호헌철폐 시위가 있자 그는 학생들의 집회에 동조하였다. 이때 신한민주당 일각에서는 내각제 개헌안을 추진할 생각을 보였고, 그는 신민당에 내각제 개헌을 하게 된다면 탈당하겠다고 선언했다. 1987년 7월 6일 서울 신민당사에서 대한민국을 방문한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 Dietrich Genscher)외 서독 외신과 면담하였다.
1987년 다시 김대중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어 신민당을 탈당한 66명의 국회의원이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5월 27일에 서울 향린교회에서 열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에 참여하고 고문에 선출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 유세를 다니며 6·10 항쟁과 6·29 선언,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군정종식'과 '문민통치' 확립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8월 6일에는 김대중을 만나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입당 문제를 합의한 후 8월 8일 김대중의 재입당을 이끌어낸다.
8월 11일에는 김대중과 회동을 갖고 대통령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김영삼의 조기 후보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 후 조정 주장이 맞서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9월 14일에는 김대중과 만났고,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한다. 그러나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의 조직책 선정이나 다름없는 36개 지구당을 창당하는 것은 적전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경선을 하지 않을 바에는 굳이 잡음의 소지가 있는 36개 지구당 창당은 필요없는 것이다"[73]라고 주장하며 김대중의 주장을 일축한다. 계속된 토론에도 김대중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 9월 29일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간 후보단일화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다음날인 9월 30일 김영삼은 김대중과 야당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양자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야당 후보자들의 단일화를 촉구하던 재야인사들은 이를 '적전분열'이라며 강도높게 질타하였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김대중과의 대선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결과 1987년 11월에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28%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 1987년 당시 노태우, 김영삼 대선 후보는 각각 광주 유세에 나섰다가 성난 시민들이 던진 돌과 화염병에 곤욕을 치렀다.
당시 김대중이 평민당을 창당하면서 젊은피 수혈이라는 정책을 펴서 학생운동권 중 민족 해방 계열 출신 청년 정치지망생들을 대량으로 영입하면서 언론 매체 등에서조차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그 역시 다른 재야 인사 및 운동권 계열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1989년 4월 27일 《이경현 살인폭력사태 국민대책위》 결성에 참여하여 폭력사태 진상규명, 평화시위 보장과 공권력에 의한 폭력중지, 공안합수부와 백골단해체 요구에 동참하였다. 87년 대통령선거 직전 김대중의 탈당에 대해 김영삼은 이를 '천추의 한'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위기감을 느끼던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제2야당의 지위에 불만족을 느끼던 중 측근인 서석재의 구속으로 마음을 굳힌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내각제 개헌을 노리고 있던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물밑 협상하였다. 3당합당에 참여하게 된 원인으로는 '분열된 야당으로는 집권의 소망이 보이지 않았고 3당 통합을 계기로 기득권세력이 누리는 기본적인 고정 지지표와 충분한 정치자금을 확보하게 된다면 차기집권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협상 끝에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고, 김영삼은 민주자유당의 대표로 취임하였다. 한편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그는 구국적 결단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집권여당의 관리자가 됨과 동시에 노태우 대통령 다음가는 당내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나 구 군사정권 출신자들은 반발하였다.
1990년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군사정권 관계자들은 그의 민자당 대표 취임식장까지 찾아와서 취임을 반대했지만 입구에서 저지당했고, 그의 민자당 대표 취임식은 강행되었다.
1990년 10월 8일부터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내각제 폐기, 지방자치제 실시'등을 내걸고 단식 투쟁을 시작하자, 10월 29일 김대중 총재를 찾아 내각제를 폐기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도록 힘써줄 것을 약속하였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인이 서명한 소위 "내각제 합의문"(內閣制 合意文)은 같은해 5월 9일 민자당 제1차 전당대회가 개최되기 직전인 5월 6일에 작성된 것으로 그 내용은 1.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게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의 구현, 2. 1년 이내에 의원 내각제로 개헌, 3. 이를 위해 금년 중에 개헌작업에 착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민정당계 중진들은 내각제 합의는 사실이라고 거듭 확인했으나 당대표인 김영삼은 이것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음해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당무를 거부하고, 내각제의 완전 포기와 당 대표의 실질적 권한보장이라는 조건을 내걸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단독면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반응이 없고, 사태 해결이 그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자 마산으로 낙향해 버렸고, 김종필 최고위원은 김영삼 대표의 이러한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80] 그러나 여권 내의 분열과 정국의 파행을 우려한 나머지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대표가 요구한 내각제 포기와, 대표최고위원을 중심으로 대북한정책에 당의 결속 등을 약속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김영삼 대표최고의원의 의도대로 수습되었다.
당시 민정계가 이 합의각서를 폭로하게 된 배경에는 김영삼 대표를 정치적으로 궁지로 내몰고, 그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구 민정당 내의 반 김영삼 세력의 정치적 계산이 그 저변에 깔려 있었으며[80], 이러한 일부 민자당내 민정계 의원들의 집요한 공작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특유한 배짱과 저잋적 승부수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당 대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80] 1991년 1월 26일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방문, 여성단체협의회는 그에게 지자제 선거법 개정 건의문을 전달하였다.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쯤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 것이 밝혀졌다. 윤석양은 탈영 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다.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민자당사에서 이상훈 국방부장관을 면담, 항의하기도 했다. 사찰 파장으로 국방부장관은 경질되었다. 10월 11일에 평민당사를 방문해 단식 중인 김대중 총재를 면회하였다.
대선 후보로 활동하던 중 그는 1992년 10월 13일부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출현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반공주의 세력과 군사 정권 세력은 야당 출신 인사들이 북한과 거래한다는 투의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자 김영삼은 1960년 자신의 어머니 박부련이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점을 들어 위기를 모면하였다. 한편 민자당내 군사정권 출신 세력은 김영삼의 지도권에 반발하였으나, 대구 경북출신의 군사정권 인사 정호용이 그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여 일시적으로 봉합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정호용의 ‘우리는 남이가, 같은 경상도이니 지지하자’ 는 만류에 의해 군사 정권 세력과 반공주의 세력은 김영삼 지지층과 김종필 지지로 나뉘었고, 그는 구 민주당계 인사와 경상남도, 부산 지역의 표심을 장악하여 대통령에 무난히 당선될 수 있었다.
1992년 14대 대선 당시 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으로 격돌하였다. 김영삼측 선거대책회의 참석자들은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라는 등 지역 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해 크게 문제가 됐으며, 이런 사실을 폭로한 정주영 후보측은 불법 도청으로 인해 공격을 받았다. 이후 "초원복집 사건"으로 불린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초원복집 사건에 대한 폭로가 오히려 영남표를 집결시키는 역풍을 일으켰다. 이때 김영삼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대구, 경북 출신 군부인사인 정호용 등이 같은 경상도 임을 내세워 지지를 호소하였고, 일부 군사정권 인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군정 출신 인사들의 표를 분산시켰다. 선거 유세과정에서 나온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유행했으며, 12월 18일, 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193만표차로 꺾고 대통령이 된다.
12월 22일 그의 고향 마을에서는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그는 당일 당선 통지서를 들고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 김홍조 장로에게 알리고, 어머니 박부련의 묘소에도 통지서를 들고 가 참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군사정권 출신과 일부 보수 세력에서는 그의 등장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김영삼의 사생활이 본격적으로 도마에 오른 것은 1992년 민자당 대선후보 때였다. 그 해 2월 20일자 LA매일신문에 '김영삼 씨의, 숨겨둔 딸 가오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시작으로 국내외 언론에서 동시다발적인 보도가 나왔다. 이 과정에서 LA매이린문 발행인 손충무가 긴급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ys의 숨겨둔 딸 가오리 양'의 이야기가 널리 회자화됐다. 나중에는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져 "숨겨진 딸뿐만 아니라 아들도 있다더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은 이를 호재삼아 김영삼을 비난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김영삼이 대통령 집권 후 역사바로세우기와 과거사 청산을 발표,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고 금융실명제로 군사정권 인사들의 차명계좌를 동결시켰으며, 신군부와 하나회를 숙청하고, 광주민주화 운동을 격상, 전두환, 노태우의 비자금 수수를 폭로하게 한 뒤, 광주학살과 12.12의 책임을 물어 사법처리시키는 등의 일련의 행위들을 보이자 보수 세력은 그의 사생활을 들먹이며 집권기간 중 공격을 가하였다. 또한 보도된 LA매일신문의 편집책임자인 극우 언론인 손충무 기자의 구속과, 석방후 미국으로의 정치망명 역시 극우세력의 김영삼에 대한 악감정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극우세력은 그의 사생활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손충무의 구속과 망명을 언론탄압으로 규정하여 공세를 가하였다.
아들은 모르지만 딸 소문이 '객관적 사실'로 굳어진 것은 김영삼이 임기를 끝마친 지 2년 가량이 지난 2000년 1월이다. 당시 자신을 '가네코 가오리(한국명 주현희, 일명 김현희)'라고 밝힌 여성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낸 것이다. 특히 가오리 양의 생모인 이경선 씨는 그해 미국 LA에서 '로스엔젤레스 선데이저널'과 인터뷰를 갖고 1960년대 초반 김영삼과의 만남, 가오리 양의 출산 이후, 일본인에게 양녀로 입양시킨 사연 등을 적나라하게 공개하기도 했다.
또한 이경선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93년 가을부터 1998년 퇴임 직후까지 김기섭 안기부 기조실장으로부터 모두 23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해 충격을 줬다. 뒤에 김대중의 숨겨둔 딸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당시, 국회 정보위에 출석한 고영구 국정원장은 'DJ 딸의 존재가 사실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처음에 "누구? YS의 딸"이라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