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봉圭峰, 무등산 깊은 곳에 있는 높은 산봉우리 이름이다.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학자·문신 지월당(池月堂) 김극기(金克己 1379년 ~ 1463)는 규봉암에 들려 "바위 형상은 비단을 오려 만든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石形哉錦出 峯勢琢圭成 "고 표현했다.
그러나 무등산을 두고 지식인들은 각가지 표현으로 말하지만 일반인들은
김운덕(金雲悳:1857~1936)의 서석유람기(瑞石遊覽記)에서 말한 “서석은 이렇게 높아 산이 아니라 하늘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달감게
느껴진다. 더 간다하게는 '무등산은 그냥 무진장 좋더라'였다. 그래서 자연을 상대로 하는 유수문화는 아는 만큼 느끼는 것이다. 그 유수문화의
절정체인 무등을 타고 또 넘는다.
전라도 땅, 풍광의 절정체인 무등산(無等山)과 적벽강(赤壁江), 그 압도하는
절경을 조선후기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1807∼1863)은 생전에 3차례 방문하고 6년간 머물르면서 14자(字) 글로 간결한 시어로 정리한다.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아래에 있고 /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로 물이 흐르는도다.'無等山高松下在
赤壁江深沙上流'.....그랬다. 병풍처럼 웅장하게 서있는 규봉암도 소나무 아래에 있었다. 맞는 말이다.
동쪽 경사면에서 정상을
향하여 입석대(立石臺)· 서석대(瑞石臺)· 삼존석(三尊石)· 규봉암(圭峰庵) 등이 있고 정상 부근에는 수신대(隨身臺)가 있다. 그중 무등산 3대
석경(石景)가운데 해발 950미터에 위치한 규봉암(圭峰庵) 일대의 바위대를 제일 으뜸으로 치고 있다.
이곳은 별도의 조경이 필요
없는 곳이다. 자연불이 다 해주고 있다. 또한 별도의 여타 미사여구(美辭麗句)로 꾸밀 필요도 없다. 지나간 명사묵객들이 다 흘려 놓았다. 돈도
않받는다. 그냥 차려 놓은 밥상 성성한 두발로 와서 먹으면 된다.
규봉암(圭峰庵)의 절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바위들이 수없이 솟아
선경(仙景)이 사시사철 감탄사를 뿜어내게 하고 있다. 이곳 일대는 겹겹이 솟구친 봉 하늘을 받치는 기둥 삼아 전체가 천상 누각. 증심사와
입석대, 서석대를 보고 장불재에서 기암바위들을 실컷 구경하면 마지막 모든 풍치를 정리하는 곳이 규봉암이다. 그것은 이미 선대의 명사. 시인들이
이미 오래전에 증명하고 있다.
우선 이곳에 들린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선생은 430여년 전 1574년
음력 4월 20일부터 5일간 무등산에 노닐며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기행문에서 규봉암을 "금석사(錦石寺)를 지나서 산허리를 감돌아 동쪽으로
나오니 이곳이 규봉암으로 김극기의 시에 있는 소위"바윗돌은 비단을 오려서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白玉)을 다듬이 이루었네"한 것이 허언이
아님을 알겠네"라며 덧붙였다.
그리고 전남 담양 면앙정에 무등산을 바라보며 표현하기를 "붓끝처럼 뾰쪽뾰쪽하기도 하고/둥글둥글 뭉친
구슬 같기도 하다.矗矗飄香篆 叢叢揷玉笄"고 표현했다. 그리고 "지령도 역시 보배로 여기나 보네/낮에는 언제나 구름으로
가려주니地靈偏愛寶。雲氣晝常迷" 右瑞石晴嵐
또 제봉은 "암석(岩石)이
기묘(奇妙)하고도 오래된 품이 가히 입석과 견줄만 하나 그폭이 넓고 큰 것과 형상이 진기하고도 휼륭한점이 입석(立石)이 이에 따를 수가
없다......그런데 예로부터 전하기를 신라 성덕왕때의 명필 김생(金生)이 쓴 규봉암(圭峯庵)이라는 삼대문자(三大文字)의 액자가 있었으나 훗날
어떤자가 갈취해 갔다는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노봉(老峰) 김극기( 金克己 1150~ 1204)도 전라도에 유람하면서 무등산을
자주 들렸다. 규봉암에서 지은 시가 전하고 있다.
기이한 형상은 이름하기도
어려운데/ 올라와 보니 세상이 눈 아래 있네. 돌 모양은 비단을 잘라 만든 것 같고/ 산 형세(形勢)는 옥(玉)을 깎아 이룬 것 같네.
詭狀苦難名 登臨萬象平 石形裁錦出 峯勢琢圭成
좋은 곳에 오니 세속(世俗)의 더러움 끊었고/ 그윽이 사니 도정(道情)이 더하네.
어찌 세상 일 버리고, 여기 부좌(趺坐)하 무생불법(無生佛法)을 배우지 않으리오. 勝踐屛塵迹 幽서添道情 何當抛世綱
趺坐學無生
무생(無生), 인간은 그 원초를 살펴보면 원래 생명이라는게 없었다. 생명만 없었던게 아니라 형체가 없었고, 형체만
없었던게 아니라 작용하는 기(氣)도 원래는 없었으므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다시 그 원초 상태로 돌아가는 순환의 필수적 과정이라는 것이다.(莊子
至樂) 무등산을 오르면 누구나 서사시의 생각을 하게 민든다.
조선 후기 제천
출신의 문신으로 대제학을 지낸 명암(鳴巖) 이해조(李海朝 1660~1771)가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순치차 광주에 들리고 무등산
입석에 오르고 그도 일반적으로 쓰는 단어가 아닌 시어로 그윽한 감흥을 나타냈다.
바위 돌 울퉁불퉁 길가다가 / 산 정상 솟구친
절벽에 갑자기 놀랐네 옥루 지으려 천년의 기둥 다듬어 놓은 듯/옥루(玉樓) 만들려 열길 연꽃을 마른질하여 이룬 듯 巖麓盤陀大抵然
忽驚層壁湧山巓 玉樓鍊得千年柱 雲觀裁成十丈蓮
해무리 속 맑은 무지개 비스듬히 해 비치는데/하늘 뚫을 것 같은 시퍼런 창
같아라 멀리 동쪽 바다 건널 필요 없으리니/늘어선 바윗돌이 내 주변에 있으니 暈落晴虹斜照日 色偸霜戟欲摩天 不須遠涉東瀛去
叢石森羅杖屨邊
호조 좌랑, 형조 좌랑을 지내고 인조 반정 이후 형조참의·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문장에 뛰어나고 시에
능하였으며, 양경우(梁慶遇), 이안눌(李安訥), 권필(權韠,) 임숙영(任叔英) 등과 절친하였던 기효증의 사위요 1612년 영암 군수로 부임했던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 1572 선조 5~1631 인조 9) 같은 유식자들은 무려
50운의 긴 감흥을 나타냈다.(遊瑞石山五十韻/玄洲集卷之七) 그 일부의 감흥으로 목을
축인다.
일찍이 산수를 좋아하는 벽이 있어/그럭저럭 한평생을 보냈다네 맑은 인연 세속과 맞지안하/산수 구경은 삼신산에 이르러
막혔네 夙抱丘山癖 悠悠送此生 淨緣違俗累 仙賞阻蓬瀛
다행히 광주의 경치가 좋은 건/원래 서석의 이름 때문이니 오랜
옛적부터 푸르게 푸르게/삼정 얕보듯 우뚝 솟아 있다네 幸此光山勝 元因瑞石名 蒼然自萬古 峙立傲三精/玄洲集卷之七
이안눌(李安訥)도 무등산에 올랐다.遊無等山
昨日霜葉早 明日霜葉老
寺僧迎客拜 洞壑秋正好 / 東岳先生集卷之九 潭州錄
또
구름과 맞닿을 정도로 높은 산세를 말하면서 깎아 세운 듯한 바위벼랑은 조물주의 솜씨임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감흥은 멈추지 못하고 또다시
붓초리로 흘러 내렸다.
신령스런 산 실상이 이름과 어울리니 / 절정(絶頂)은 구름과 함께 평평하네. 어지럽게 솟은 돌은 누가
채찍질해 갈꼬 / 기이한 언덕 절로 깎여 이루어졌네. 靈山實稱名 絶頂與雲平 亂石誰鞭去 奇崖自削成
백암서 처음으로 도를
물은 뒤 /절집에 마음 기운 지 오래라오 한 그루 용화수 아래에서/ 다음 생에 만나자 약속하세 栢菴初問道 蓮社久傾情 一樹龍華下
相逢約後生
김극기를 보고 가히 조선의 대 정자시인이라는데 이의 없는 '무등산의 흩어져 있는 솟은 바위들을 체찍으로 다스릴
수 있는 위인이었다. 무식하면 표현도 못해 한이 맺히는 것 아닌가.
규봉암의 괴기한 암벽들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스승이
장인이 된 임억령을 위해 식영정(息影亭)을 지어 드린 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 1525 중종 20∼1597 선조 30)의 눈을 젊게 만드는
비법도 있었다. 그 이유를 들어 보면
골짜기의 시냇물 소리 비파(琵琶) 소리보다 좋고/가을의 산색(山色)은 그림
병풍이라. 술동 앞에서 십 년된 길손은 /늙어도 보는 재미는 시종 즐거웠지 石澗勝鳴筑 秋山當畵屛 罇前十載客
白首眼終靑
그는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역임하면서 1596년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巫誥)로 옥사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면서 정철(鄭澈)를 키웠던 식영정 4선중에 한 사람이다. 맞다 그들이 떡을 먹으며 기괴한 암벽들을 구경했을 리 만무했다. 산수를 비롯한
자연경물과 시주(詩酒)는 기본세트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이 길은 유람이 아닌 노동일 것이다. 그와 같은 일행으로 고경명(高敬命
: 1533~1592) 등과 산을 올랐던 기대승이 산행을 마치고 식영정에서 읊은 시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때가 1557년 봄(음3월),
기대승의 나이 31세 때 였다.
무등산을 다 돌아보고 / 오는 길에 식영정(息影亭)을 찾았노라 자리 사이에는 촛불을 배치했고 / 소나무 속에 성근 별빛
보이네 歷盡山無等 來尋息影亭 坐間排玉燭 松裏見疎星
취한 흥취 모두 술잔 버리고 / 분방한 심회 뜨락에 눕고
싶어라. 내일 아침에 무슨 일 있는가 /그윽한 돌길엔 빗장도 필요 없네 醉興渾抛盞 狂懷欲臥庭 明朝有何事 幽磴不須扄/고봉속집
제1권
1571(선조4) 선생 45세 때에도 올랐지만 다음 해 기효맹(奇孝孟)이 성균관 대사성 공조 참의 지제교를 지내다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낙향하다 태인(泰仁)에서 죽고만다.
16세기 호남지역 한시에서는 도학적 가치와는 변별된 세속적 가치의 초탈과
경물 자체의 감각적 형상화가 두드러져서 외부의 사물과 자연 경물에 대한 심미적 정서로 나타난다. 그 자연경물에는 무등산이나 월출산 그리고 적벽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시대의 인물들이 심미의식으로 정감이 형상 속에 완전히 융합되는 그 결과물을 맛있게 느껴 보자.
토를
다는 공간이 비좁다. 나주시 다시면 출신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31년(1598) 11월 노량해전(露粱海戰)에 흥양 현감으로
참가(參加) 혁혁한 공을 세우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서된 무장이었던 일옹(逸翁) 최희량(崔希亮 1560 명종15~1651 효종2)이 어느
가을에 무등산을 오르는 길에 읊은 시다.
낙엽이 산허리에 떨어져 옛길을 덮으니 / 옛 암자나 새로선 절도 중에게 물어야만 알 수
있네. 가을 바람이 강남의 흥취를 불러 일으키니/물이며 봉우리면 봉우리마다 시심을 불러 일으키네. 葉落山腰舊路疑 古菴新寺問僧知
秋風吹起江南興 水水峯峯强作詩
'어찌하면 불사약을
구해서 (무등산이) 모두 소멸될 때까지 볼 수 있을까把酒臨長風 揮筆題新詩 安求不死藥 看盡消磨時'
기대승
규암암을 가는 길에는 450여년 전 그가 지나가는 모습이 오늘도 펼쳐지고 있었다. 조선 중기
문신. 구파의 사림으로 이황 등 신진 사류와 대립했으며,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치사했다. 강호가도의 선구자였던
담양 출신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 성종 24∼1582 선조 15)이 1520년(중종15) 28세 때 성균관(藝文館)에 들어간 후
귀향하여 광주 무등산을 유람했다. 가죽신 신고 들렸을까? 모른다. 다만 가을이였다.
넓직한 가을 산길에 / 가슴열고 마음대로 달렸네
골짜기 비어 바람소리 멀리 들리고 / 하늘 아득하여 구름 더디 가네 放闊秋山路 披懷任四馳 谷虛傳籟遠 天曠送雲遲
학을
타고 복희씨를 묻고 싶다네 /밝은 달그림자 멈추게 하고 서쪽으로 옮기니 다시 생각나네 /가을바람에 날개 빌린다면 跨鶴問黃羲
明月堪留影 西方轉起思 商飆如借翼
"십 년을 살면서 초가삼간 지어 냈으니/(그 초가삼간에) 나 한 간, 달 한 간, 맑은 바람 한
간을 맡겨 두고/강산은 들일 곳이 없으니 이대로 둘러 두고 보리라."하며 90세를 살았던 송순에 무등산 까지 올라 시 한 수로 끝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野曠知天遠 林疏會氣寒 保靑憐檜柏 柀折惜芝蘭 自酌杯雖滿 仍愁意不寬。一秋於四序 胡獨奪人歡
1520년 가을
28세 때 젊은 나이였다. 눌재 박상의 동생 육봉(六峯) 박우(朴祐))와 같이 무등을 탔다. 이어진다.
들이 넓으니 하늘 먼 것 알겠고 /숲이 성그니 날씨 추워짐을 알겠네 어여뻐라 잣나무 푸름
간직하는데 /아깝도다 지초와 난초 꺾여있네 野曠知天遠 林疏會氣寒 保靑憐檜柏 柀折惜芝蘭
홀로 든 술잔 비록 가득 찼으나
/쌓인 시름 없어지지 않네 사계절의 하나인 가을은 /너만 어이 홀로 기쁨을 가져가느냐 自酌杯雖滿 仍愁意不寬 一秋於四序
胡獨奪人歡
조선 중엽 호남 북쪽에는 이항, 영남에는 이황(退溪 李滉),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남쪽에는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 - 1560)가 버티고 있었다는 그는 다방면에 통달한
철학자요 1,600여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며 고려.조선시대를 통털어 18현 중 전라도에서 유일한 인물이다.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 산 절로 물 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라는 <자연가>에 그의 내면의 기본적인 사상은 유수의 자연주의 사상의 극치를 나타냈던 그도
이렇게 눈내린 무등산을 바라보며 추억을 기억하며 양계명에게 시를 지어 준다.(贈梁生季明)
저무는 한 해에 쌓인 눈 아득한데/술
잔 옆 긴 소나무 바람에 꺾었구려 저 서석산 정상 아득한 길 위에서/이 다음 서로 만남은 우연이 아니겠지 積雪蒼茫歲暮天 長松風落酒杯邊
悠悠瑞石山頭路 此後相逢未偶然/ 河西全集
다른 말을 섞이는 것이 구차하다. 아니 욕먹는다. 그리고 그럴 공간도 없다. 그저
호기심을 뇌리에 담고 또 다른 선비들이 흘린 시 조각을 줍는다.
보석(깔아논 돌)을 걷노라니, 지팡이 소리 시들해지고/허공을
처다보니 시력이 높은 데까지 이르네. 가을 산은 누구와 더불어 이별하였기에/피눈물을 단풍나무 숲에 뿌리는가?
또 문무를 갖춰 성산 사선(星山 四仙)으로 칭하고 60의 나이에 임난의 의병을 일으켜 가장 먼저 적군을
막았던 의리의 사나이요 조선에 가족일원이 충과 절개의 피를 바쳤던 충절의 일가로 표상이 되고 있는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규봉암의 낙조(圭峰落照)가 이 시각에 또 펼쳐지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인연의 찰라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우뚝 솟은 바위 산간에 서있는데 / 금빛 내뿜는 낙조 잔안(孱顔)을 비추는구나. 저 멀리 높은
봉우리 밖에 옛절이 있는데 /오솔길에 석장 맨 스님이 종소리 듣고 찾아가네 石骨高撑紫翠間 湧金西日 孱顔 遙知古寺千峰外
蘿逕淸鐘一錫還 <圭峯落照>霽峯集, 卷三, 詩, 滄浪六詠
딱딱한 규봉의 석골 사이로 자줏빛과 푸른빛 경물의 화려함과
웅장한 규봉 위에 오래된 규봉암의 절이 서 있고 종소리 속에 유유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중을 묘사하고 있는데, 긴 여운과 울림을 안겨주는 대조적
표현이 기차다.
짚신 신고, 가죽신 신고, 의관을 갖추고 오르기에 그리 쉬운 곳은 아니기에 더욱 그들의 행적이 신기한 것이다.
현대인들의 등산장비 스틱 대신해 지팡이를 짚었다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중에 전라도 화순 능주 사람 조봉묵(曺鳳黙, 1805~1883)은 나이 20세에 무등산에 올라
유무등산기(遊無等山記)에 남긴 시에서 명아주 지팡이에 짚신 신었다고 실토했다.
명아주 지팡이에 짚신 신고/무등산에 올라 맑은 곳에
앉았네 깨끗한 하늘 아래 노니 기운이 화창하고/신선의 경치 즐기니 세상 근심 잊겠구나
고경명은 중종
23년(1533) 11월 광주의 압촌에서 출생, 선조 25년(1592) 임진 왜란이 일자 의병으로 출군하여 왜병과 싸우다가 금산에서 순절하였다.
그는 정암 조광조, 눌재 박상 등과 도의지교를 맺고 지내던 하천 고운의 손자로 의리의 사나이라는 인물로 통한다.
그러한 겁을
모르는 용맹과 달이 그의 추심(秋心)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가 구가하는 자유로움과 탈속적 세계, 자연과 하나 되는 일체감에 그의 가슴속에도
단풍으로 투영되고 있었다.
해를 등진 단풍나무 온 숲을 물들이고/ 산안개 걷히니 천길 벼랑이 소슬하네. 강물에 잠긴 산
그림자는 칼날 같은데/찬 소리 내던 큰 비 그치니 물은 못에 가득하네. 背日丹楓萬木酣 千崖蕭瑟霽煙嵐 江涵瘦影山橫劍 潦盡寒聲水滿潭
용과 뱀은 벌써 깊은 굴로 숨어버렸고/기러기도 울며 강남을
지나가네. 규봉과 서석대엔 서늘함 내렸으리니/하늘 밖에서 푸른 난새 참마 삼으리라. 已蟄龍蛇盤海窟 稍驚鴻雁過江南 圭峯瑞石應涼落
天外靑鸞倘可驂
고경명은 호방의 풍격은 호남사림의 대표적인 기질의 하나이며 이것은 불기의 자유정신과 연계되어 굳건하고 웅혼한
기상으로 표현했다. 그의 이러한 자유분방한 호방의 품격은 작품 속에서 구현되어 호남시의 미적 특질을 형성했다.
고경명은 이수광(李係光,
1563~1628)은 "근년의 시인은 호남에서 많이
배출하였다.頃歲詩人多出於湖南.하여 당대의 명류시인 10걸 중에 한 사람으로 지목했다. 또 김인후․
박순․ 백광훈․ 양응정․
임억령․ 임제 등 7인으로 이들은 모두 당대에 우리 시문학을 크게 꽃피운 주역들인데, 무등산권의 누정시인임은 크게 괄목할 일이다.
또 이곳에서는 빠져서는 서운한 인물로 대 철학자요 시인이었던
지식인 고봉
기대승은 1571년 늦봄 무등산 규봉에 올랐다. 그가 이곳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하다.
입가심으로 ‘하음에는 동운이 빼어나고/사상엔 일관이 우뚝했네. 드높이 하늘에 솟아 있고/ 뛰어올라 은하수 닿았네’라고 우주까지
닿을 것 같은 규봉의 방대함으로 즐기기 시작한다.
드높은 무등산에 / 빼어난 곳으로 규봉(圭峰)을 거론하네. 나는 봄빛을
따라왔는데 / 요망한 기운 어찌 솟아오르는가 巍然無等山 勝處說圭峯 我隨春光來 氛祲何浩洶
숲 속의 꽃 차츰 절로 피어나니 /
고운 자태 송백(柏松)을 능가하네 며칠을 머무는 아침저녁에 / 자못 그윽한 뜻 짙음을 깨닫는데 林花稍自開 艶姿凌柏松 留連數晨夕
頗覺幽意濃
이제 홀연 가고자 하니 / 바람과 비 게으름에 침노하네 술을 권하며 제군을 위로하니 / 나의 행색 조용할 수
있다네 今玆忽欲去 風雨侵疎慵 酌酒慰諸君 吾行可從容
“세속 떠난 정을 다하지 어려워서 세상사 간혹 어긋났다오. 손님과 주인이
함께 한 술상에서, 고금을 담소하며 어울렸구려. 술맛은 기울일수록 더욱 기쁘고, 노랫소리 들으매 문득 좋아라. 오늘밤 별뫼의 모임, 백년 회포를
풀리라.”며 무진장 술을 퍼 올렸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 절경에서 시 한 수로 끝낼 위인은 아니다. 또 그의 시상을 쉼 없이
풀어낸다.
서석의 명산 바닷가에 솟았으니 / 봉영의 바람과 햇볕 참으로 비슷하여라 신선들아! 맑고 깊음 아끼지 마라 / 나도 이제 가장 높은 곳에
왔노라 瑞石名山峙海堧 蓬瀛風日正依然 羣仙更莫慳淸邃 我亦今來最上巓
그가
'가장 높은 곳으로 왔노라'고 표현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힘들었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무진악(武珍岳) 무악(武岳) 서석산(瑞石山)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無情山) 무등산(無等山)....그중에 무정산(無情山)이라고 부렸던 연유는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왕명에 불복한 무정한 산이라 지칭한데서 연유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여러 명산대천에 왕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무등산 산신만은 그 소원을 거절하였다는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부르는 다양한 이름 만큼이나 사연도 많은 무등산, 다른
이야기를 더 거들 기 공간이 부족하다. 명인들의 발길은 계속된다.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적 영수요 사림의 거두이자 형조판서를 지낸
문충공(文忠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 함께 호남(湖南)의 유학(儒學)을 발전시켰던 전남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죽림정사를 건립하고 사숙(私塾)하며 후진교육으로 여생을 보냈던 지식인 조선 전기 유학자요 죽림 조수문(竹林 曺秀文·세종 8년.1426~?)이
광주 무등산 규봉암에 들려 시를 읊는다.
저 기괴한 돌들 무어라 이름하리/높이 올라 바라보니 만상(萬象)이
평화롭구나. 바윗돌의 모습은 비단을 잘라 세운 듯/봉우리는 쪼아 세운 옥(玉)돌일레라.
명승을 밟는 순간 속진(俗塵)이
사라지고/그윽한 이곳에 도(道)의 참뜻 더하여라 시비많은 속세(俗世)인연 모두 털어버리고/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로 성불(成佛)의 길
찾아보리라.
규봉암은 화순에 속하며 이쪽으로 오르는 코스들은 광주시내 쪽에 비해 훨씬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매력이 있으나,
접근 교통편이 불편해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규봉암에서 위로 더 오르면 장불재가 나온다. 해발 900m 대의 고원 능선으로
여름에는 초원으로, 가을에는 억새로, 겨울에는 설화나 빙화로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자연만이 만들기 가능한 천상의 황홀경을 해마다 연출하고 있다.
장불재에서 눈앞에 보이는 입석대(1017m)를 거쳐 서석대까지 오르는 데는 30분 정도 걸린다.
요즘처럼 각종 기능 장비를 작용하지
않고 무수한 사람이 올랐던 무등산, 우리 일반인들은 ‘그냥 아름답다.’ 라는 말로 끝내지만 명인들은 도(道)에서 성불(成佛), 즉 유교에서
불교에 이르기가지 넘나드는 표현이으로 남 달랐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몸짱이 아닌 마음짱 시대였기에 가능했다.
중용에 '一陰
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라 했다. 즉 음(陰)과 양(陽)이 끊임없이 교섭하는 것이 도(道)이고 그것이 계속되도록 계승하는 것이 인간의
선(善)이라는 것이다. 이 길에서는 누구나 선(善)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전남 나주 거평현(居平縣. 지금의 문평면) 출신으로 시문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국자시(國子試)에 옥모편(玉貌篇)을 올려서 장원(壯元)에 뽑혀 그 당시 ‘정옥모(鄭玉貌)’라 불리며 세상에 알려졌으며
벼슬은 하지 않고 유학을 강론하여 후학을 많이 양성하였던 총산(蔥山) 정언눌(鄭彥訥 1545~1612 정언옹)이 나주출신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시의
일련을 차운한 시의 "괴석은 밤이면 호랑이가 되고 / 왜송은 가을이면 거문고가 되려 하네 怪石夜能虎 矮松秋欲絃"라고 표현했다.
또
조선후기 실학파의 시조라고 칭하는 유형원(柳馨遠 1622 광해군 14 ~ 1673 현종 14), 학문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으며,
이익·안정복(安鼎福) 등으로 이어져 뒤에 후기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등에게 까지 미쳐 실학을 집대성하게
하였던 그가 젊은 날 전국 유람을 하다 동복가는 길(同福途中)에 무등산 서석대(瑞石臺)를 기억하고 이렇게 시를 남긴다.
구름과 물
천년의 땅에/가도 가도 산, 사방이 똑 같네 하늘에 무악(毋岳)이 솟아있고/해는 서석대(瑞石臺)에 비추는구나
모든 학문을
통달하고 시간이 남아 이곳까지 들린 조선의 천재 지식인이요 할 말이 많은 다산 정약용(1762~1836)도 그의 나이 17살 1778년(정조
2)에 아버지사 화순현감으로 부임하자 형 손암 정약전과 같이 화순 동림사(東林寺)에서 지금으로 고시공부를 열중했다. 어느날 화순에서 사귄
친구들이랑 화순 적벽 물염정(勿染亭) 등에 올라 서석산 일대를 유람하고 긴 감흥을 드러낸다. 그는 "규봉이라는 산은 두 봉우리의 깎아지른 모습이
마치 홀[圭]과 같은데, 그 모서리는 방형(方形)의 법칙에 꼭 알맞았다. 그리고 누운 것, 꺾인 것 등이 그 아래에 또 몇십 개가 더 있었다"고
말하고 시를 읊었다.
|
| 서석산은 뭇사람이 우러르는 바 / 높이 솟아 해묵은 눈이 있는데
태곳적의 모습을 고치지 않고 / 알차게 쌓고 쌓아 우뚝하여라 瑞石衆所仰 厜㕒有古雪 不改渾沌形 眞積致峻巀
주위에 뻗은
산들 정교한 모양 / 깎고 새겨 뼈마디
드러났다네 올라오려 할 때는 까마득터니 / 멀리 오자 산하가 낮게 깔렸네 諸山騁纖巧 刻削露骨節 將登邈無階
及遠知卑列
모난 행실 간단히 노출되지만 / 지극한 덕 덮이어 분별 어려워 사랑홉네 이 산의 충만한 본질 / 고스란히 함축해
빈틈 없어라. 僻行皭易顯 至德闇難別 愛茲磅礴質 涵蓄靳一洩
천둥과 폭우에도 아니 깎이어 / 조물주 만든 대로 보전을
하니 자연히 구름 안개 피어 있다가 / 이따금 대지 열기 식혀준다네 雷雨不受鏟 謹保天所設 自然有雲霧 時滄下土熱/다산시문집
제1권
다산은 조선후기의 세상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一毛一髮無非病耳)”고 개탄하며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 : 백성 다스리는 것)이라고 충고한 대학자도 무등산을 '지극한 덕 덮이어 분별 어렵고,
함축해 빈틈 없다"고 극찬했던 점에 주목된다. 그래서였을까? 서석대가 칭찬에 부끄러워 붉어졌다.
누군가 그랬다. ."푸른 산은
말이 없으나 만고(萬古)에 전해진 책(冊)이요,흐르는 물은 줄이 없으나 천년(千年)을 이어온 거문고(玄琴)라."고, 무등산도 그런
곳이었다.
그중에 장불재~규봉 구간은 흙길과 너덜지대가 완만하게 형성된 탐방로다. 규봉방향으로 비교적 완만한 구간으로 1.6km에
약30분~40분 정도 이동하면 석불암(石佛庵 舊 小林精舍) 이라는 작은 암자가 나오고 석불암에서 15분 정도만 더 가면 좌측 오르막에 규봉암
종루인 누각이 자리한다. 이 누각하나를 핑게로 이 많은 위인들을 만나고 있다. 정자는 그래서 단순한 건물이 아닌 유수문화의 아이콘이라고
한다.
그들의 유정천리의 맥은 계속된다.
설월당 김부륜도 무등산에 올라 규봉암에
들렸다. 登瑞石山 朝夕遙看第一巒 杖藜今日扣雲關 眼通天地溟濛外 身出風塵澒洞間 浮世功名渾擾擾 上方蹤跡獨閑閑 坐來急雨迷蹊徑
强被山靈不許還
遊圭庵 百日長夜客 三日半空仙 廣石平臨野 圭峯聳柱天 煙霞生足底 象魏襯頭邊 經濟吾家事
回笻却悵然 雪月堂先生文集卷之二
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유랑생활을 하다 정묘호란 때는 강원도사로
종군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의병장을 지냈던 신즙(申楫 1580 선조 13∼1639 인조 17)도 수만년 풍화가 빚은 돌기둥 병풍
서서대(1,187m)에 이르렀다. 瑞石山 次鄭綾州夢賚 良弼
韻
숲 뚫고 골짝이 돌아 길만 천 구비로 / 서석봉(瑞石峯) 앞까지 걸어걸어 왔다네 경치를 그릴 대는 시가 마치 비단
같고/허공(虛空)에 기대니 천둥같은 기상이네 穿林轉壑路千回 瑞石峯前步步來 寫景方看詩似錦 憑虛旋覺氣如雷
용산(龍山)의 흥취인지
모자에 바람 불고 / 등각(藤閣)의 잔치 마냥 술잔 가득 채웠지 그저 내일이면 속세로 나가고 말지만 /백운대(서석대)의 맑은 꿈을 얼마나
애태워 할까? 龍山興味風吹帽 滕閣逢迎酒滿盃 只爲明朝塵事出 幾勞淸夢碧雲臺 /河陰先生文集卷之三 지금도 각종 기능성
등산장비를 착용하고도 힘든 길을 그들은 어떻게 이 높은 곳을 들렸을까? 당시에는 호랑이를 비롯 맹수들도 있었다는데.... 사뭇 쓸데 없는 걱정이
앞선다. 아뭏튼 당일 코스를 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야인으로 남도의 선비정신을 간직하면서 붓끝에 일생을 바친 “설주(雪舟)의
먹물에 보성강이 검게 물들었다”는 전설을 남긴 보성의 인물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 1874 ~ 1965)는 규봉암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읊기를
서석산의 동쪽은 홀(圭笏)이 총총하고 / 외로운 암자는 저절로 백운(白雲)이 가운데 있네. 지극히 높은 해는 새벽에
먼저 밝아오고/심히 찬 뫼 뿌리 여름에야 꽃이 피어 붉네.
사람 경계는 고요하여 갈만한 곳은 없고/절은 우뚝하여 하늘과
통(通)하네. 졸림 돌리니 깬 것 같으나 전생(前生)의 꿈이요/한번 종소리 떨어지니 온갖 생각이 비었네 설주유고집
딱 시 한 수를 지었다고 믿기는 어렵다. 또 시대를 넘어 죽촌 고성후의
아들이요 임난 때 권율의 막하로 가서 행주싸움에 참여했던 인조5년(1672),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제인 고부필과 삼종 고부립과 함께 의병에
참여한 탄음(灘陰) 고부민(高傅敏, 1577-1642)도 어느날 규봉암에 오른다.
넓고 꾸불꾸불한 산자락은 백리(百里)에
뼏혀있고/산봉우리는 하늘까지 우뚝 솟아 모든 산을 위압(威壓)하네. 행랑채 창문에는 아침저녁으로 공연히 바라보면/티끌처럼 한순간도 못되는
우리네 삶이 나를 비웃는 듯 하여라. 磅礡根百里問 穹?屹立壓群山 軒窓朝暮空回望 笑我塵埃未暫問
반평생을 돌아와 이 산에
의지하며/깊은 숲에 머물러 나가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던가. 그대(서석산) 흠모하여 행랑채 창문아래 마주해 서서/멀리 규봉(圭峰)의
아름다운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네. 半生歸計負玆山 幾歎雲林斷往還 羨君長對軒窓下 謠望圭峰錦石間
또 강항이 어떤이가 무등산노래로
회답시를 구한다(有人示無等山歌求和)기에 다른 명산이 쓸모가 없더라며 여타의 말을 정리해 버린다.
그 옛날 층층 봉우리 힘겹게
올랐더니/서석에 두른 절벽 꿈처럼 아득하더라 이로부터 좋은 경치 없어도 꺼리질 않으니/명산은 갑자기 쓸모없가 되었구나 層峯昔日強攀躋
瑞石回岩夢已迷 從此不憚無濟勝 名山遽作一筌蹄 聊以短章報之/睡隱集卷一
영광출신으로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의병을 모집하고 노량해전(露梁海戰) 에서 이순신을
도와 싸웠던 고주(孤舟) 정운희(丁運熙 1566 명종 21~1635 인조 13)가 무등산을 오르고 신선이 피리를 부는 봉우리를 찾고
있었다.
하늘 연못에 옥부용을 꺾어 놓은 듯/신선의 피리 소리는 어떤 봉우리일까? 누굴 기다리듯 가만가만
돌계단 쓰는 건/두세 그루 소나무에 두세 사람 기대서라네 天地折得玉芙蓉 鶴上笙歌第幾峰 靜掃石壇如有待 兩三人倚兩三松
/孤舟集
이곳에는 광주시 북구 충효리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시문을 즐겼던 처사 동은(東隱) 김희수(金熙琇 1883~1955) 도 이곳에서 극찬하며 쓸 수 있는 단어를 다 풀었다. 그도
그럴것이 일대의 풍치로도 다 느끼기 어려운 마당에 달까지 드니 그 감흥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극치의 아는 단를 모두 쏟아내고
만다.
맨 꼭대기에 외로운 암자 정동(正東)을 향했는데/쳐다보면 만물상(萬物像)이 눈 안에 든다. 처마가에 선돌은
규(圭)같기도 하고 홀(笏)같기도 하고/봉우리 흐르는 구름은 희고 또 붉도다. 絶頂孤庵向正東 却敎萬象入瞳中 檐邊立石圭兼笏
峰上流雲白又紅
백리를 바라봐도 막힘이 없으니/찬서리의 뜻이라도 녹아 통(通)하네. 요 깔고도 전전반측(輾轉反側) 꿈꾸기도
어려운데/좋은 달 밤새도록 벽공(碧空)에 걸려 있네. 百里眺望無阻隔 千般意思卽融通 蒲團輾轉難成夢
好月終宵掛碧空
우국지사였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도
무등산을 오르고 서석산기(瑞石山記)에서
서석대를 두고 "서로 포개져서 우뚝하게 마치 사람이 서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병풍을 펼친 듯하고,
연꽃이 피어난 듯도 하며,
천상의 궁궐이 마주보고 서 있는듯하기도 한데..."하며
말하고 이어 시로 감흥을 이었다.
이 산의 형승 남도의 으뜸이니/십년 동안 마음에 두다가 오늘에야 올랐다네 만 길의
풀혈대(風穴臺)는 사람의 등을 씻어주고/천 떨기의 서석은 칼끝처럼
뾰족하네 玆山形勝冠南州 十載有心今始酬 萬仞穴臺人盪背
千叢瑞石劒尖頭
땅에
서린 뭇 산들 높이를 대적할 수 없고 /하늘 이은 큰 바다는 푸른빛 흐르지 않네 비로봉에 날아 내려와 고개 돌려 바라보니 /표연히 문득
상청에서 노니는 듯하여라 羣山蟠地高無對 大海連天碧不流 飛下毗盧回首望
飄然卻似上淸遊 宋秉璿,
淵齋集
卷1,
瑞石山
敬次伯父韻
1907년에 의병을 일으키려다 옥고를 치른 김운덕(金雲悳 1857~1936)도
서석유람기(瑞石遊覽記)에 "박달나무 아래 철쭉 사이에 싸리를 깔고 앉아 쉬면서 물을 마신 후 서쪽으로 십여 리를 올라가니 곧
서석대(瑞石臺)이다. 깎아지른 절벽에 초엽을 받친 반석의 터 자리에 연꽃 같은 돌을 늘어놓았고, 대를 받친 돌기둥은 몇 만 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절벽의 면이 넓게 열려 있어 우러러 보면 여섯 모가 난 옥골(玉骨) 같은 바위가 우뚝 서쪽에 서 있다." 표현했다. 물론 떡을
먹을며 그랬을 것인가, 기운 술로 얼클해지니 더 기차게 보였을 리 당연하다.
입석대를 두고 신선이 운학(雲鶴)을
타고 내려앉는다고 하여 일명 강선대(降仙臺)라고도 했듯이 무등산의 각 봉우리는 커다란 대(臺), 즉 정자인 것이다. 혹여 누가 토를 달라치면 그냥 정자(停子)로 해둔다. 아뭏튼 이곳에서의 상상은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를 누이며 놀자는 것이다.
신선과 용은 기본인데 조선 중기의 학자로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이 명량(鳴梁)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싸울 때 백진남(白振南) 등과 함께 군량미 지원에 힘쓰는 한편 의병을 모집, 이순신과 협력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던
고주(孤舟) 정운희(丁運熙 1566 명종 21 ~ 1635 인조 13)은 황제를 들먹거린 것으로 봐서는 당시에 관직에 머물렀던 사람으로는
최고봉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게다.
황제와 같이 높은 무등산/뭇 산봉우리 둘러 맞잡고 다 뒤따르네 모나고 둥근 것은 개벽일에
처음으로 자리 잡고 /차고 기움은 해 나눌 때 비로소 시작되었네 無等山如帝者尊 衆峰環拱盡趨奔
方圓闢日初鼎位 盈昃分年始建元
치란과 흥망 모두
관계하지 않고 / 덥고 서늘하며 근심과 즐거움도 말하지
않네 모름지기 동해가 뽕나무 밭이 된 후에도/성대하게 남은 터를 후손에
전하리라 治亂興亡都不管 炎凉憂樂自無言會須東海桑田後
磅礴餘基付幾孫 孤舟集 卷2, 遊瑞石山 一名無等山 在光州
좌수영에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기도 했다. 그가 무등산에서 긴 여운을 남겼다는 것은 좋았다는 근거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속 흘린 감정을
추수린다.
산 위의 뭇 신선의 자취 /몇 곳의 암자에 향기 머물러 있는가 공연히 보결(寶訣) 전할 생각을 하고/동참(同參)에 합한 것을 묻고자 하네 山上羣仙跡 留香幾處庵 空思傳寶訣 欲問契同參
고요한 단엔 화롯불 젖어있고 /찬 소나무엔 학의 꿈 한창이라네 丹丘를 만일에 얻어 본다면 /하느님 말씀을 들어나 볼까
하네
壇靜鑪煙濕 松寒鶴夢酣 丹丘如得見 準擬聽天談/孤舟集 卷1, 遊瑞石山
그것은
고경명이 나이 41세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당시 광주목사인 임훈과 함께 무등산을 등반하고 규봉사(圭峯寺)에서 읊은 시에서 그러하다.
해 저물어 이른 규봉사(圭峯寺)/머무는 스님은 예의 신선인가 하네 맑은 풍경 소리 상쾌하게
들리고/자줏빛 향 연기 차갑게 우거졌네 暝到圭峯寺 居僧禮覺仙 爽聞淸磬響 寒矗紫檀煙
운물은 뒤섞임을
으뜸으로 여기고/모기와 등에는 잡는 인연 덜었네 등나무 바퀴 아래에서 삽시간 잠을 자다가/새벽 종소리 전해짐을 깨닫지
못하네 雲物首參錯 蚊虻省撲緣 藤輪睡一霎 不覺曉鐘傳 敬命, 霽峯集 卷3,
次支巖韻
백일동안 긴 밤의 손이/삼일 간 방공(半空)의 신선되었네 광석(廣石)은 평평히 들에 닿아있고/규봉(圭峯) 용솟음쳐 하늘 기둥 되었네 百日長夜客 三日半空仙 廣石平臨野 圭峯聳柱天
안개와 놀 발밑에서
생기고/敎令은 머리끝에 가까웁네 경국제세는 우리네의 일/지팡이
돌려 돌아오니 문득 슬퍼지네 煙霞生足底 象魏襯頭邊 經濟吾家事 回笻却悵然 金富倫, 雪月堂文集 卷2,
遊圭庵
담양 소쇄원 주인 소쇄옹(瀟洒翁) 양산보(梁山甫 1503 연산군
9∼1557 명종 12)의 정자를 방암(方菴) 양경지(梁敬之 1662~1734)가 5대를 이어 소쇄원의 주인장 자리를 지키며 지내다 무등산을
오르고 읊은시에서
마음 때끗하게 모으고 용궁에 앉아/제 올리며 영령과 바로 감통(感通)하는데 장맛비 어둑어둑 산허리를
감추니/풍잭이 하늘 씻어주길 바랄 뿐이네 齊心疑魄坐龍宮 昭假英靈正感通 陰雨晦冥藏半復
願敎風伯洗長空/無等山漢詩選
시에서 감통(感通)은 허령(虛靈)한 자신의 마음으로 느껴 천하 만물의 이치를 통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경지에서 느껴 마침내 천하의 사리를 통달한다.[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라고 하였듯이 이곳에서는 그 단어가 어울리다.
그리고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선생도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고 하겠고 진실하고 거짓 없이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 왔다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서석’이다”라고
표현했고, 이은상(李殷相:1903~1982)도 「무등산 기행」에서 무등산을 ‘금강산의 해금강을 바다의
서석산,
서석산을 육지의 해금강’,
서석대를
‘수정병풍’으로 묘사하는 등 수 많은 당대 문인
묵객, 가인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순출신의 문장가 배현규(裵鉉奎, 1841∼1887)도 자신에게 무등산을
오르는 기회를 준것을 감사해 하는 감성을 보듬고 싶을 만큼 아름웠다고 극찬한다.
신선(神仙) 사는 곳을 어찌 다른 데서
찾으리/하늘은 시인(詩人 자신)에게 즐거운 하루를 주셨으니 아래로는 가릴 것이 없는 넓은 삼천계(三千界)이고/위로는 산이 높아 오십
주(五十州)의 으뜸이로세. 仙鄕在此豈他求 天借 詩人一日遊 下臨地控三千界 高出山宗五十州
구름 뚫은 돌들은 층층(層層)이 몽우리로 서 있고/비 없는 우레려니 깊은 골 물 흐르는 소리더라. 못다 한 흥취(興趣)야
바다 구경 기약하고/짚신에 죽장 짚고 길 떠나 백구(白鷗)를 벗하리라 磨雲石勢層峯立 不雨雷聲絶潤流 餘興更期觀海日 笻鞋前路伴沙鷗
또 무등산을 주고 '저
산에 서있는 돌이 서석(瑞石)인가 입석(立石)인가'라고 노래했던 구한말.일제강점기 격동기를 살아야 했던 석촌(石村) 정해정(鄭海鼎,
1850~1923)이 지은 석촌별곡(石村別曲)으로 호사를 누려라고 종용해도 누리는 자 그리 많지
않다.
바쁘게도 호고(好古)할 제 이내 심사 어이 할꼬/저 종악(鐘岳) 맨 위층에 날랜 발걸음 언뜻
올라 한정 없이 바라보니 아득하다 저 강산이/여기 오니 다 보인다 다 말하여 무엇 할까
천손이 짜낸 비단 누가 나서
가져다가/굽이굽이 베어내어 팔첩 병풍 만드는가 눈앞에 펼친 경치 역력히 헤아리고자/어떤고 다시 보니 조물주의 호사로다
어디서 부는
광풍 서석에 뜨는 구름/일시에 거둬가니 태고 모습 그 아닌가 분명하다 저 서석아 그 아니 부러운가/말도 없고 시비 없이 예부터 농아
됐네
그것은 멀리가서 외국물을 먹어야 자신의 생애 이력을 남긴다는 졸한 생각 때문이다. 송나라 때 대익(戴益)이
지었다고 하는 탐춘(探春)이라는 시에는
온종일 봄을 찾았으나 찾지 못한 채/지팡이 짚고 몇 번이나 구름까지 갔었던가 집에
돌아와 시험삼아 매화가지 끝을 보니/봄은 가지 끝에 벌써 무르녹아 있는 것을 終日心春不見春 杖藜踏破幾重雲 歸來試把梅稍看
春在枝頭已十分
춘재지두이십분 (春在枝頭已十分) 즉 봄이 이미 자기 주변에서 한창 무르익고 있건만 다른 곳에서 봄의 정취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의미로 진정 우리의 주변의 좋은 경관이나 의미있는 것을 놓치고 다른 곳만 방황하고 있는 않은 지 생각해 볼 때이다.
|
| 이색(李穡)은 세월의 바름을 술한잔 거하게 취하며 이렇게 넋두리를 같이하며
진정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소중함이 무엇가를 돌아볼 때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높은 산
우러름을 더 말할 것 있나 / 선생은 취중 노래만 자꾸 부르네 천지가 호탕하여 편파 없는데 / 머리 위 저 해와 달은 나는
북처럼 오가는구나 高山仰止奚云云 先生且歌醉中歌 天地浩蕩無偏頗 頭上日月如飛梭
송순은 과거에 급제한 이듬해인 1520년 가을날
무등산에 오르고 있었다. 거의 500여년 전이었다. 가을에게 불만을 토로했던 때가....
들판 넓어 하늘이 멀고 /숲이 성그니 날씨
차갑네 어여뻐라 잣나무 푸름 간직하는데 /아깝도다 지초와 난초 꺾여있네 野曠知天遠 林疏會氣寒 保靑憐檜柏 柀折惜芝蘭
홀로 든 술잔 비록 가득 찼으나 /쌓인 시름 없어지지 않네 사계절의 하나인 가을은 /너만 어이 홀로 기쁨을
가져가느냐 自酌杯雖滿 仍愁意不寬 一秋於四序 胡獨奪人歡
그들이 배워 아는 단어를 썯아 붓고 부족하다고 토로하는 곳, 그러나 무등산을
누구나 가고 싶다고 유람을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 선조 20∼1638 인조 16)는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 : 억울하다고 여긴 죄를 바로잡아 구제함)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어 재임시 일찍이 소쇄원 옆
담양 남면 지실마을에 살고 있었던 정철의 아들 기옹 정홍명(鄭弘溟)과 서석(무등산)에서 한
번 노닐어 보기로 기약속했었는데, 때마침 서쪽 변방에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선박 조달과 군량 수송 등에 관한 공문이 빗발치듯 하는 상황이라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므로, 시를 지어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
약속 날짜 가까워 와 은근히 뻐겼는데 / 이렇듯 조물주가
인색하게 굴 줄이야 바다 건너 병선(兵船)을 급히 보내랴 / 산에 유람할 약속 저버리게 됐소그려 暗詫幽期近 翻成造物慳 戈船促橫海
蠟屐負尋山
멀리 손에 잡힐 듯한 수려한 산색(山色) / 부여잡을 수 없는 멈춰 선 구름 한가하나 바쁘나 부림 받는 몸 /
어떡해야 시름을 풀 수 있을꼬 秀色遙堪挹 停雲不可攀 閑忙各形役 何地破愁顔 -계곡선생집 제28권
조선말기 문인으로
1876년(고종 13) 황해도 암행어사 문학.시강원 겸 사서.부응교.부교리.승지 등을 역임하고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된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1 순조 31~1922)이 어느날 그도 무등산 입석대에 오르고 읊으며 자유를 만끽했다.
서있는 돌이여 어쩌면
그리 기이한가 / 정영(精英)이 빽빽이 쌓여 있구나 공공(天神)이 지유(밧줄)를 끊어버려서 / 하늘 향해 뻗은 천주(天柱)만 남아있네 立石何奇哉 精英鬱積聚
共工絶地維 惟有向天柱
유식자들이 무등산에 올라 시 한 수만 읊었다면 유식자가 아니다. 그것은 무등산에서는 그들이 시를
쓸만할 소재가 많기 때문이다.
김윤식도 "신선은 높고 넓은 것 좋아해서, 천연으로 자연스러운 대를 쌓아 놓았네 神仙好高曠,
天築自然臺"라며 감흥을 계속 잇고 있다.
윤증
백 척 높은 삼봉(三峯)을 누가 깎아 세웠을까/무너질 듯한 바위 천 년을 서 있다네. 적벽강에 노는 학을 만났는가 의심되 고/ 숭양의 금리선인(錦里仙人) 본 듯한
기분이네. 誰削三峯抽百尺,
將崩一石立千年. 疑逢赤壁玄裳鶴,
想見嵩陽錦里仙
금강경(金剛經) 송(頌)에 이르기를, "부자는 천 명 먹을 재산도 적다고 투덜대고 / 가난한 사람은 한 몸도 많다고
한탄하네 / 富嫌千口少 貧恨一身多 (金剛隨機無盡頌)"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문는 동안은 차별이
없는 무등(無等)이다.
조선시대의 가장 험난한 격동기의 삶을 살면서도 한국사에서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의 인물로 자리하고 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 선조 3∼1652 효종 3)이 "동정호의 경치 어찌 영산강(濚山江)만 할 것이며 / 천주 어찌 서석봉(무등산)의 기이함만 하겠는가 靑草白沙江似練 碧雲朱閣柳如絲 洞庭孰與濚山勝
天柱何如瑞石奇....."라고 했던 무등산,
서형수(徐瀅修 1749
영조 25~1824 순조 24)는 1796년(정조 20)
7월에 광주 목사에 부임하여 1799년(정조 23)
6월까지 재임하다 무등산에 오르고 무등산불명암중수모연문(無等山佛明庵重修募緣文)을 남겼다. 그래서 다음 3편을
준비한다.
참고문헌=박준규, 호남시단의 연구, 전남대출판부, 2007, 동은유고 무등산 한시선 전남대출판부 2016. 눌재집,
화순누정집/화순문화원, 국역 제봉전서 상중하, 동국여지승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한국고전종합BD, 고봉집, 석천집, 시서선생 광산김공
유고집, 설주유고 제봉집 등
문화.오인교 | | | |